규제 완화로 만든 '99조' … 실체 없는 장부상 여력은행 74.5조·보험 24.2조 … 실제 흐름 없는 '착시 숫자'추경 이어 '보이지 않는 유동성' … 공급 신호만 커졌다체감 유동성은 오히려 위축 … 돈이 돌지 않는다
-
- ▲ ⓒ챗GPT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는 정부가 시장을 설계할 수 있다는 믿음을 '치명적 오만(fatal conceit)'이라 규정했다. 복잡한 시장의 자생적 질서를 단순한 정책 도구로 통제할 수 있다는 착각이 오히려 더 큰 왜곡을 낳는다는 의미다. 최근 금융당국이 꺼내든 '99조원 공급' 구상은 이 경고를 다시 떠올리게 한다.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은 최근 '생산적 금융 대전환 회의'를 통해 은행·보험업권 자본규제 완화 방안을 내놓으며 최대 98조 7000억원의 추가 자금 여력을 확보할 수 있다고 밝혔다. 중동발 지정학 리스크로 유동성 압박을 받는 기업을 지원하고, 자금을 전략·생산 분야로 유도하겠다는 취지다.이억원 금융위원장은 "추가 자금 공급 여력이 위기 극복과 경제 재도약의 마중물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금융당국은 이번 조치를 단순한 규제 완화를 넘어 사실상 정책 추경에 준하는 대응으로 보고 있다. 중동 사태로 위축된 시장에 유동성을 불어넣겠다는 이른바 '금융판 추경' 구상이라는 설명이다.숫자만 보면 압도적이다. 은행권 74조 5000억원, 보험업권 24조 2000억원이라는 자금은 웬만한 추경을 능가하는 규모다. 하지만 이 거대한 숫자는 껍질을 벗기는 순간 힘을 잃는다. 새로 풀린 자금이 아니라 규제 완화를 통해 금융회사에 '빌려줄 수 있는 여력'을 덧붙인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이를 두고 시장에서는 '보이지 않는 돈'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저수지에 물을 채운 것이 아니라 수위 표시선만 낮춰놓은 격이라는 얘기다. 겉으로는 물이 늘어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흘러나올 수 있는 유동성은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구조를 보면 더 분명해진다. 은행권의 74조원은 과거 금융사고로 발생한 손실을 자본에 반영하는 기간을 10년에서 3년으로 줄이면서 생긴 '장부상의 여유'다. 리스크 자체가 줄어든 것이 아니라 회계상 부담만 앞당겨 털어낸 셈이다. 보험업권 역시 위험계수를 낮춰 24조원을 확보했지만, 그 자금이 실제 전략산업으로 흘러갈지는 전적으로 금융사의 판단에 달려 있다.결국 99조는 '확정된 공급'이 아니라 '가정된 가능성'이다. 숫자는 있지만 흐름은 없다. 정책이 만들어낸 것은 유동성이 아니라 기대감이자, 더 정확히 말하면 착시에 가깝다.문제는 이런 방식이 반복되고 있다는 점이다. 정부는 이미 26조 2000억원 규모의 추경을 편성해 단기간 내 상당액을 풀 계획이다. 여기에 이번 99조원까지 더해지면서 정책은 끊임없이 '돈을 공급하고 있다'는 신호를 보내고 있다. 그러나 시장의 체감은 정반대다.수입물가는 16.1% 급등했고, 원유 가격은 88.5% 치솟았다. 성장률 전망은 1%대에 머물고, 소비 심리는 빠르게 위축되고 있다. 이런 환경에서 금융회사들이 리스크를 감수하며 대출을 공격적으로 늘릴 유인은 크지 않다. 수문을 넓힌다고 해서 물이 저절로 흐르지는 않는다.정책 간 엇박자도 문제다. 한쪽에서는 가계대출을 강하게 조이면서, 다른 한쪽에서는 민간 금융을 통해 대출 확대를 기대한다. 정책금융과 시장금융의 경계가 흐릿해지면서 자금은 방향을 잃고 표류할 가능성이 커졌다. 이런 구조에서 실체가 불분명한 정책은 재정과 금융 모두에 부담을 키울 수밖에 없다.국제통화기금(IMF)은 한국의 국가부채 비율이 2029년 GDP 대비 60%를 넘어설 것으로 전망하며 재정 여력 악화를 경고하고 있다. 특히 올해 54.4%였던 부채 비율이 내년에는 56.6%로 올라서며 비기축통화국 평균(55.0%)마저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하이에크의 경고처럼 시장은 설계의 대상이 아니라 조정의 대상이다. 이미 추경을 통해 수십조원이 풀린 상황에서 경제 성장 속도를 웃도는 부채 증가세까지 겹치고 있다. 99조라는 숫자는 거대하지만, 선언된 유동성과 체감되는 자금 사이의 간극은 의문만 낳을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