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룡평

    15호에도 그 나름의 평등은 있었다. 사회와 똑같이 이곳 수용자들도 생활총화를 한다는 것이었다. 북한 사람들의 생활총화는 8세에 시작해 평생 계속된다. 그야말로 '요람에서 무덤까지' 이어지는 조직생활인 것이다.

    15호도 조직생활을 강요했다. 그 구조는 일반 사회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았다. 초등학생부터 노인까지 직업 유무를 막론하고 매주 조직 앞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또 타인의 과오를 지적했다.

    그 반성이 곧 사상성의 증명이며 그런 삶으로 충성심을 드러내 보여야 했다. 차이가 있다면 밖에서는 반성하면 살아남지만, 이 안에서는 반성해도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점이었다. 15호에선 죄의 실질적 유무에 상관없었다. 존재 자체가 죄였다. 숨 쉬는 것조차 반성의 의무가 됐다. 이곳에서의 평등이란 누구에게나 죽음이 똑같이 열려 있다는 의미일 뿐이었다.

    15호의 생활총화는 일주일에 한 번씩 토요일에 진행했다. 이날 수용자들의 노역은 평소와 달리 오후 3시로 끝났다. 이런 노역 감소 때문에 그들에겐 일주일 중 가장 기다려지는 휴일이었다. 그 대신 정신적 공포의 '생활총화'를 견뎌야 했다. 정치 권력으로 의례화한 자백과 질타는 결국 개인을 철저히 지우는 절차였다.

    생활총화는 독신자세대 운동장에서 열렸다. 말이 운동장이지 숨소리조차 조심해야 하는 침묵의 공터였다. 담장처럼 ㄷ자 형태의 막사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감시탑에서는 기관총과 조명이 늘 아래를 감시하고 있었다.

    개인이 뛰거나 걷는 운동장이 아니었다. 때로는 수용자를 심판하는 형벌의 광장으로 사용되거나, 그 집단도 예외가 되지 않는 보위부의 놀이터로 쓰였다. 운동장 정면에는 벽돌 다섯 단을 층층이 쌓아 만든 조그만 콘크리트 무대가 있었다. 무대 뒤로 망루처럼 나무 기둥이 하나 뻗어 있었다. 그 중간에 투박한 전등을 매달았다. 맨 꼭대기에는 나팔 모양의 스피커가 붙어 있었다.

    오늘처럼 2작업반 200여 명이 조별로 모두 모이면 비판과 고발의 무대가 된다. 비상소집이 떨어지는 날이다 싶으면 처벌과 처형의 살벌한 무대로 변했다.

    그렇게 '평화로운' 생활총화의 날이 찾아왔다. 성진에게는 사회와 생판 다르게 이름을 부르지 못하게 하면서도, 자기의 과오를 공개적으로 토로하게 하는 15호의 질서가 괴이했다.

    2작업반은 빠짐없이 운동장에서 분조 별로 앉아 대기했다. 총화 지도 간부가 늦게 온다는 통지가 날아왔다. 생활총화를 앞둔 공기는 무겁기 마련인데 기다림은 언제나 약간의 여백을 허락했다.

    주둥이가 평소처럼 무게 없는 농담으로 9분조의 분위기를 간질였다.

    "야, 얼라반동, 네 또래 여자 보니 보위원도 좆 같았어? '작업 시작!' 그것도?"

    터지는 웃음들. 그 흑암 속에서도 스스로 웃는다는 사실에 성진은 뿌듯했다. 주둥이 얼굴엔 늘 뭔가가 묻어 있었다. 말장난을 치기 위해서거나 그걸 준비하는 속셈 때문이었다. 그 특유의 표정으로 도련님에게 또 트집을 잡으려고 시선을 돌렸다.

    도련님은 아무 생각이 없는 사람처럼 앉아 있었다. 무심하게 하늘을 보며 입으로는 가끔 쩝쩝 소리를 냈다. 생각이 없거나 감정이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한번 표정을 드러내면 그 안에 묻혀 있던 자존심과 억울함, 그리고 두려움까지 모두 한꺼번에 토해낼 것 같아서 도련님이라는 가면을 눌러 쓰고 있었다. 

    그의 구부정한 어깨에는 과거의 체면과 지금의 수치심이 나란히 걸쳐져 있었다. 주둥이는 생글생글 웃으며 길게 뻗고 있는 발로 그의 등을 툭툭 건드렸다.

    "도련님. 도련님."

    그가 들은 척도 하지 않자 이번엔 그의 어깨를 흔들어댔다.

    "야. 야. 너도 얼라반동한테 좀 배워. 남자가 이래야지. 내일부터 가족세대랑 공동작업 붙는다잖아. 가마치 어쩔 거야? 다 썩잖아!"

    도련님이 다시는 그 말을 듣지 않으려고 작심했는지 돌아앉아 말했다.

    "그래, 좋아. 부주석은 떼내고 내 몸값만 애기하자. 내가 가마치값이냐고?"

    "그것도 안 되니까 준다는 거잖아. 그 여자도 아는 거야. 넌 그냥 받기만 하면 된다니까."

    도련님은 주둥이를 흘겨본 뒤 옹헤야에게 물었다.

    "너 같으면 하겠냐?"

    "하지. 하구 말구."

    옹헤야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가수도 합세했다.

    "그럼. 하지. 나는 한다."

    주둥이는 자기 무릎을 탁 쳤다.

    "이게 민심이라니까. 나라의 도련님이라면 민심을 받들어 해야지!"

    그리고는 도련님의 얼굴을 향해 손가락질했다.

    "너 이게 반동이야. 동지들 다 배신하는 거잖아."

    주둥이의 성화를 피하고 싶어 도련님은 아까부터 검은손과 수군대던 월왕령에게 작은 돌을 던졌다.

    "룡평 얘기해?"

    월왕령은 고개만 끄덕였다. 검은손이 대신 대답했다.

    "여기가 더 힘들대."

    9분조원들의 시선이 모두 월왕령에게 쏠렸다. 도련님이 제일 놀라는 얼굴이었다.

    "3급인데 힘들어?! 룡평 비하면 여기는 천국이잖아?"

    "룡평은 평생 탄광 일만 하니까 마음 둘 곳이라도 있어요."

    월왕령의 말에 누구보다 가수가 제일 어이없어했다.

    "마음 둘 곳?"

    "네. 바깥은 보위부 세상, 갱도 안은 죄수들 세상인데 여긴 그런 게 없잖아요."

    분위기가 가라앉자 주둥이가 손을 들며 가로챘다.

    "자, 우울한 얘기는 그만하고 다들 내 손 잡아. 낼 맛있는 거 가져올 거니까."

    조원들이 처음엔 망설이다가 행여나 싶어 하나둘 그의 손등에 자기 손들을 태웠다.

    "다들 따라 해. '우리 9분조는...' 어어- 안 해?"

    "9분조는"

    주둥이의 선창에 따라 모두가 합창했다. 주둥이는 거만하게 말을 이어갔다.

    "약속한다."

    "약속한다."

    "절대, 혼자 먹지 않는다."

    도련님이 못 참고 짜증 내며 손을 뿌리쳤다.

    "그게 뭔데?"

    다들 기대하며 쳐다보는 가운데 주둥이는 교활하게 웃으며 속삭였다.

    "가마치."

    그 말에 모두가 동시에 도련님을 쳐다봤다.

    "아 진짜, 안 된다니까."

    도련님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 옆에서 검은손이 피식 웃고 말았다. 그 순간, 2작업반 반장의 우렁찬 목소리가 운동장을 찢었다.

    "생활총화 준비! 각 조별, 2열 종대로!"

    웃음은 단숨에 증발됐다. 모두가 무거운 몸을 일으켜 세웠다.


    ※ 다음 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