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배는 지형철에게 혼자라서 독신자 중대가 편하다고 했지만 반대로 부러운 것도 있었다. 독신자세대 보위원은 늘 작업현장에 따라붙어야 했다. 수용자들이 모여서 움직이니 한눈에 통제가 됐다. 한꺼번에 나가고 들어오는 텅빈 막사는 굳이 신경 쓸 일도 없었다.

    그러나 가족세대는 달랐다. 작업장보다 더 위험한 곳이 바로 그 '비어 있는 집’들이었다. 그 틈에는 늘 무언가가 꿈틀거렸다. 숨겨둔 약초, 몰래 찢은 당 문헌지, 벽 틈에 적은 글자 하나라도 감시해야 했다. 거기엔 사라진 말, 감춘 표정, 들끓는 의도가 남아 있었다. 가족세대 보위원들이 책상 앞에 오래 앉아 있는 건 한가해서가 아니었다. 그 공백 안에서 무엇이 자라고 있는지 계속 상상하고 확인해야 해서였다. 필요하다면 빈집도 수색해야 했다.

    지형철은 남자 담당이기도 하지만 가족세대 전체를 책임지는 위치에 있었다. 하루에도 작업장과 사무실을 번갈아 오가며 살펴야 할 일이 많았다. 그걸 핑계 삼아 남자 독신자세대와 공동작업하는 날이면 지형철은 작업장에 나가지 않았다. 혹시라도 성근이의 눈빛이 어떤 반가움으로 읽힐까 두려웠다. 그가 아는 척 한번 잘못했다가는 곧장 보고가 올라가고 다른 리로 배치될 게 뻔했다. 그러면 그날로 윤진경과도 이별이었다.

    그날도 지형철은 진경이를 공식적인 ‘개별담화’로 사무실에 불러냈다. 어제 작업장에서 민유정으로부터 윤진경의 급한 만남 요청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다른 날과 다르게 그날 둘은 긴 침묵으로 함께 있었다. 윤진경은 책상 모서리 앞에 머리 숙이고 서 있었다. 지형철은 창밖을 내다보며 팔짱을 풀지도 않았다. 윤진경이 먼저 겨우 입을 열었다.

    "처음부터 속이려고 했던 건 아닙니다. 조사받으면… 밤에 강간당해서 누군지 모른다고 하겠습니다."

    지형철은 한숨을 내쉬었다. 우정도 사랑도 모두 수용된 자기 현실이 감옥만 같았다. 자신에게 가장 가까운 이름들조차 숫자로 불러야 한다는 사실이 그 무엇보다 자신을 더 깊이 가두었다.

    "6개월이라면서... 처음부터 말했어야지. 그리고 다들 그렇게 변명해. 이젠 그런 말 안 통해."

    윤진경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 틈으로 새어 나오는 숨은 떨고 있었다. 지형철은 윤진경에게 돌아섰다. 말하면서도 눈을 감았다.

    "걱정마. 내 친구가 군의관이야. 부탁해 볼게."

    "낳으면요."

    불쑥 나온 윤진경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지형철의 눈동자가 순간 흔들렸다. 그는 큰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힘주어 말했다.

    "여기 규정 몰라?... 아이나 엄마. 둘 중 하나만 살려주잖아."

    "애 낳은 여자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것도… 독신자 여자가요. 이름도 다 알아요. 선미라고. 사회에 내보냈다고."

    그 말에 지형철은 더 어성을 높였다. 감정이 말을 먼저 밀어냈다.

    "죽은 거야! 나간 게 아니라, 죽었다고! 이 안에서도… 애를 낳고 싶은 생각이 들어? 매일 같이 붙어 안고 울고, 싸우고, 서로 죽이고, 자살하고 그 꼴 다 보면서도?"

    그는 숨을 몰아쉬었다. 그 얼굴엔 분노보다 더 오래된 감정과 지치고 망가진 회한이 깔려 있었다.

    "낳은 정보다. 낳아준 죄가 더 좆같은 게 가족세대야. 그걸 알면서도… 엄마가 되고 싶었던 거냐고."

    그는 다시 창밖으로 몸을 돌렸다. 침묵이 길게 흘렀다. 윤진경은 고개를 숙인 채 그대로 서 있었다. 눈은 반쯤 감겨 있었지만 안에서 뭔가 번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지형철은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엔 부드럽고 피로한 목소리였다.

    "…이번 주 내로, 군의관 데리고 올게. 그렇게 알고 있어."

    "제가 싫다면요."

    "뭐라고?"

    그들의 대화를 문밖에서 몰래 엿듣는 귀가 있었다. 문이 닫혔어도 안쪽의 대화는 너무 또렷했다. 지형철의 목소리는 중간중간 낮게 깔렸다가 때로 얇게 갈라졌다. 윤진경의 대답은 거의 들리지 않았다. 사이의 공백이 말을 대신했다. 더 들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는지 문에서 얼굴을 떼는 여자가 있었다. 가족세대 여자보위원 홍신영이었다. 웃음을 띠는 그녀의 얼굴은 흥분으로 붉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27세인데도 눈두덩이가 두툼할 정도로 살쪄 있었다. 눈을 감을 때는 무거워 보여도 뜨고 나면 눈꺼풀 무게만큼 주변을 어떻게 찢을지 계산하는 눈빛이었다. 미간은 늘 의심으로 좁혀있었다. 윗니를 드러내며 웃는 게 어떡하든 이기려는 표정에 가까웠다. 키는 작았다. 마치 자기보다 크다는 이유만으로도 남의 어깨를 눌러야 풀리는 직성으로 다져진 것 같았다.

    그 짧은 다리로 곧장 지휘부를 찾아갔다. 어디 문을 두드려야 할지도 잘 알았다. 조직부장 방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조직부장 방문에는 작은 구멍이 있었다. 언제나 조용히 열려 있는 15호 지휘구조의 가장 은밀한 통로였다. 홍신영은 수첩과 볼펜을 꺼내 벽에 대고 깨알 같은 글씨를 서둘러 썼다. 그때 복도를 지나가던 소장이 벽에 붙어선 홍신영을 보고 소리쳤다.

    "야. 야. 너 이리 와 봐."

    깜짝 놀란 홍신영의 두 손이 반사적으로 뒷춤으로 돌아갔다. 그걸 보고 소장은 더 엄하게 소리쳤다.

    "금방 손에 그것 그대로 갖고 와. 아무튼 당장 뛰어오지 못해?"

    홍신영은 손을 뒤로 묶인 사람처럼 등뒤에서 종이를 찢으며 뛰어갔다.



    소장은 빠르게 걸었다. 그 옆에선 홍신영이 짧은 다리로 뛰다시피 따라붙었다. 일부러 곁에 두고 걷는 이유가 있었다. 정보도 얻고 실제론 건물에서 끌어내 작업장에 옮겨놓으려는 심사였다.

    하지만 홍신영은 감격했다. 15호에선 자기는 늘 외톨이었다. 소장과의 동행은 그가 가진 것의 일부라도 빼앗아 오는 것 같았다.

    그 보답으로 지형철에게 자기가 강간당한 것처럼 격분해서 설명했다. 소장은 묵묵히 걷기만 했다. 이 여자가 어디까지 말을 흘리고 다닐지 감을 잡는 중이었다. 그러다 끝내 걸음을 멈추었다.

    "그런 일이 있으면, 아무튼. 내게 먼저 왔어야지. 네 상관이 정치부야?"

    "전 지금 정식으로 소장 동지께—"

    "야야야. 너 내가 얼마나 아꼈는데. 지금도 널 감싸느라 아무튼 얼마나 애먹는 줄 알아?"

    "뭘 감싼단 말입니까?"

    "내가 모르는 줄 알아? 너 군의관이랑, 아무튼… 그 짓거리 하는 거."

    홍신영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군의관은 이미 장가간 남자였다. 그들 사이는 애정이 아니고 각자의 필요였다. 욕구를 해결하기 위해 붙었다가 욕망이 식으면 떨어지는 관계였다. 여자 쪽이 더 손해 보는 것 같았지만 홍신영에겐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15호 총각 보위원들 그 누구도 그녀를 인간으로 대해주지 않았다. 말끝을 흐리면 거짓말이고 확실히 맺으면 신고였다. 모함을 재치처럼 굴렸고 그게 필요한 순간에만 웃음을 도구같이 사용했다. 15호에서 가장 무서운 보위원은 총을 든 자가 아니라, 말을 든 그 여자란 딱지가 붙어 있었다.

    "내 선에서 처리할 테니까, 아무튼 너 그 입 조심해. 여잔 두 입을 조심해야 돼!"

    소장은 그 말조차 버리고 가듯 등을 돌려 혼자 걸어갔다. 홍신영은 늘 그랬다. 패배하면 눈물이 흘렀다. 그 얼굴로 그 자리에 남겨져 있었다. 소장이 그 걸음으로 간 곳은 공동작업장이었다. 산 아래 작업장은 남자 수용자와 여자 수용자가 함께 섞여 돌아가고 있었다. 제방 공사에 쓸 통나무를 다듬고 쌓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남자들은 산에서 굴려내려 온 나무를 어깨로 메고 나르며 땀을 철철 흘렸다. 여자들은 잘라낸 가지들을 묶고 다듬는데 두 손이 쉴새 없이 움직였다. 한쪽에선 자잘한 손놀림과 숨죽인 눈빛이 오가고 다른 쪽에선 낫과 도끼의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의 손을 거쳐 헐벗은 통나무들이 한쪽에 언덕처럼 일어서고 있었다. 그 사이를 소장은 뒷짐지고 걷고 있었다. 아무런 지시도 눈길도 없이 자기 그림자만 끌며 걸었다. 최종배가 달려와 거수경례 동작을 취했다.

    "휴식 시간 언제야?"

    "아직 한 시간 남았습니다."

    소장은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내일 명절이잖아."

    그날은 4월 14일이었다. 그러면 분위기상 전날부터 명절이라는 의미다.

    "이것들 일이 손에 잡히겠어? 소장이 왔는데 그냥 휴식 줘."

    소장은 앉을 자리를 찾으며 말했다.

    "주둥인지 뭔지 그놈 데려오고."


    ※ 다음 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