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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열부장의 말처럼 룡평수용소는 가족세대 수용자들을 갈라놓는 곳이었다. 수용소 한복판에는 하늘조차 가려지는 높은 담이 있었다. 감히 올려다볼 엄두도 내지 못하게 높았다. 담장 위로는 고압 전류의 전선들이 가득했다. 담벼락은 단순한 구조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김정일의 언어로 태어난 분리의 존재, 사람의 힘으로서는 도저히 넘나들 수 없는 좌절의 괴물이었다.
"조선인민군대가 체제 대립의 휴전선을 지키는 국가의 수호자라면, 국가보위부는 사상 대립의 38선을 지키는 이념의 수호자이다."
김정일의 그 말은 곧바로 장벽과 감시탑을 만들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시선을 끊어 놓는 칼이 되었다. '공화국'에는 두 개의 휴전선이 있다. 하나는 민족의 허리를 동강 내는 체제의 선이고, 다른 하나는 내부를 찢어 놓는 이념의 선이다.
룡평의 장벽 위에선 날던 새조차 하늘이 달라진 듯 날개를 접었다. 사람들은 그 벽을 '통곡의 벽'이라 불렀다. 벽 너머 저편에선 처자를 부르는 오열이, 이편에선 아버지를 찾는 통곡이 동시에 하늘을 울렸기 때문이다. 세월이 흐를수록 그리움은 더욱 깊어졌다.
어떤 이들은 차라리 죽어서라도 마주 잡는 영혼의 손이 되고자, 그 벽에 스스로 머리를 찧어 목숨을 끊었다. 하지만 그 결단조차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자살마저 목숨으로 반항하는 반역죄에 해당한다. 죽으면 끝나는 일이 아니었다. 남은 수명까지 자식이 이어서 죄인으로 살아야 했다.
살아도, 죽어도 목숨이 제 것이 아닌 룡평의 죄인들은 어쩔 수 없이 '숨 쉬는 자살'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 숨은 한 번으로 끝나는 죽음이 아니었다. 산 채로 지옥을 경험하게 하는 두 번의 죽음이었다. 처음 들어온 사람들이 '통곡의 벽'이라 불러도 오래 버틴 사람들은 '조각상'으로 칭했다. 서로를 마주 보던 얼굴들이 그대로 새겨져 남은, 세상에서 가장 선명하고 가장 마음 아픈, 비극의 예술품이었다.
가족의 그리움조차 완전히 끊기 위해 룡평은 하루 24시간도 반으로 쪼갰다. 장본인은 새벽 4시부터 밤 11시까지, 그의 가족들은 정반대로 밤 11시에 막장으로 내몰려 다음 날 새벽 4시에 나왔다.
그들이 갱도에 들어가면 하루를 잊고, 한 달이 지나면 계절을 잊었다. 석탄만 봐야 하는 시커먼 1년을 넘기면, 사람들은 자신의 이름마저 잊어먹었다. 가족과 생이별을 당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 영영 가족을 볼 수 없다는 것은, 실상 살았으나 죽었다는 것, 삶의 의미가 죄다 박제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 무명의 사지(死地) 같은 세월 속에서도 가족을 향한 몸부림은 활로(活路)를 조성했다. 어쩌면 가정은 인간이 아닌 신이 만든 것일지도 모른다. 막장 벽의 틈을 파서 빛을 만들려고 시도한 개척자가 있었던 것이다. 도망치려는 게 아니었다. 단지, 한 줌의 숨결을 저장할 구멍 하나가 필요했을 뿐이었다. 그렇게 생겨난 룡평 막장 속 구멍들은 수용자들에게 혈육의 정을 담는 커다란 우체통이 되었다. 거룩한 축복이었다.
보위부는 룡평의 24시간을 반 토막 냈어도 수용자들에겐 하루가 25시간이었다. 그 한 시간은 물리적인 시간이 아니었다. 시간과 세월을 초월한 인간 정신의 창조물이자, 가족애의 서정시였다. 막장에서 만나볼 수 없는 가족을 껴안는 눈물의 상봉 서사시가 시작되었다. 수용자들은 막장 곳곳에 작은 구멍을 파 놓고 편지나 물건을 넣어 혈육의 정을 나누었다. 월왕령의 목에 늘 걸려 있던 나무 인형 백구도 바로 그런 구멍에서 만난 것이었다.
그건 월왕령의 아버지가 만들어준 우체통이었다. 처음에 그의 아버지는 매일 편지로 사랑을 전했다. 그 편지에서 가장 많이 썼던 단어는 "살아라"였다.
"내가 죽어도, 너는 꼭 살아야 한다."
그는 자신의 수명까지 아들에게 건네주고 싶어 했다. 아버지와 아들은 순간도 떨어진 적 없다고, 집에서 기르던 강아지 백구도 우리 곁에 있다고 했다. 그 말을 끝으로 편지가 더는 오지 않았다. 텅빈 날들이 쌓일수록 영민은 울부짖었다. 사실 그때 아버지는 더는 편지를 쓸 수 없게 되었다. 그리움도 죄가 되는 룡평에선 편지를 쓰다 발각되면 처벌로 두 손목을 잘랐다.
아버지는 그날부터 글자 대신 사랑을 깎기 시작했다. 손이 잘린 자리에 헝겊을 묶고서 붉게 맺힌 상처로 나무토막을 끌어안았다. 손이 잘려 아무것도 쥘 수 없었지만, 이빨로 뜯어 씹고 혀로써 다듬었다. 나뭇결마다 아들의 얼굴을 떠올렸고 한 번 물때마다 "살아라"는 목소리를 심었다. 고통은 아프지 않았다. 오직 남기고 싶은 것 하나 백구! 그 사랑을 유물로 남기고 싶은 강렬한 부성애뿐이었다.
아버지는 병마에 신음하면서도 자신의 남은 시간을 천천히 갈아 넣었다. 그렇게 완성된 나무인형 백구를 만났을 때 김영민은 처음으로 '기뻐서 우는 눈물'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하지만 그 시각 그의 아버지는 숨을 거두었다. 죽어서도 인간의 형상을 허락하지 않는 룡평의 원칙에 따라 그는 봉분도 없이 평토장으로 묻혔다.
그렇게 '죄를 진 장본인'이 죽은 뒤 룡평은 당의 크나큰 은덕이라며 아들 김영민을 지옥에서 '해방'시켜 주었다. 배려라 해봤자 2급 관리소에서 3급 관리소로 단 한 걸음 밀어내는 게 전부였다. 룡평에서 구읍리로 오는 길에는 월왕령(越王嶺)이라는 고개가 가로 놓여 있었다. 옛날의 왕조차 넘지 못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었다. 15호 사람들은 '지옥의 령을 넘은' 김영민에게 기꺼이 '월왕령'이라는 별명을 부여했다.
생활총화가 끝나 숙소로 돌아온 월왕령은 성진이와 긴 밤을 소곤소곤 나누었다. 월왕령도 성진도 두 눈이 촉촉이 젖었다. 남들이 곤히 자는 새벽녘에 둘만의 대화를 비추는 막사 안의 전등은 그날 밤만큼은 한 번도 깜빡이지 않았다. 도성진은 백구를 손에 꼭 쥐고 울먹였다.
"나도 아버지 사진 갖고 왔는데... 최종배, 개새끼..."
그리고, 그들의 대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엿듣는 귀가 있었다. 담요 밑에서 미꾸라지가 음험한 웃음을 날리고 있었다.
과연 주둥이 말대로였다. 다음날 립석강 제방의 작업장엔 여자들까지 가세해 북적였다. 립석강 강둑 공사는 단순한 하천 정비가 아니었다. 이 물줄기는 곧장 터널을 지나 산기슭에 세워질 거대한 수력발전소로 이어질 예정이었다.
"국가에 손 내밀지 않고 관리소 자력으로 전기를 생산하겠다."
평양 본부의 결정 아래 3년째 이어지는 혁명화 사업이었다. 누구도 이유를 묻지 않았다. 무너지면 쌓고, 멈추면 매를 맞았으며, 넘어진 자 등 위로 발이 올랐다. 배관엔 '집수량'이니 '전력손실'이니 쓰여 있었지만, 수용자에겐 전부 하나의 단어로 귀결됐다. 전기! 하지만 자기들의 것이 아닌 탈출을 더 정밀하게 막기 위한 감시의 전기였다.
하늘에서 천둥이 울렸지만 비는 내리지 않았다. 먹구름은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 벼랑 끝에 매달려 있었다. 그러나 그 벼랑은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고개를 뒤로 한껏 젖히고 주둥이가 중얼거렸다.
"비 말고, 그냥 콱 무너져라."
"내가 뭐 어쨌다고?"
자기 속마음이 들킨 것 같아 주둥이는 기겁했다. 미꾸라지였다. 굶주림으로 퀭한 눈, 그 눈이 크게 보이는 얼굴이었다.
"내 하루 혁명화 목표가 뭐라고? 담배꽁초 줍기라고?"
주둥이는 시비를 피하려 아무 돌이나 집어 들고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미꾸라지는 바싹 붙어 떨어질 줄 몰랐다.
"이 안에 매일 주울 꽁초가 어디 있는데?"
주둥이가 무시하자 미꾸라지가 다시 따졌다.
"말해봐. 여기가 꽁초가 그렇게 흔한 곳이냐고!"
주둥이는 소리쳤다.
"선생님! 여기 맨손으로 뛰는 사람 있습니다!"
미꾸라지가 허겁지겁 돌을 찾아 집었다. 그사이 도망치는 주둥이를 멀리서 지켜보던 월왕령이 말했다.
"주둥이 아저씨한테도 뭐라고 하나 봐."
옆에 선 도성진이 비웃었다.
"아까는 가수 아저씨한테도 막 욕했어요."
옹헤야는 미꾸라지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대상이었다. 주먹은 둘째치고 금발 머리 자체가 이미 미꾸라지에겐 '금지구역'이었다. 자기 분노의 시작과 끝은 색다르다고 말없이도 경고하는 것 같았다. 게다가 도성진을 보호하는 그 끈기에도 틈이 없는 철저한 자였다. 빈혈에 눈동자가 한 바퀴 돌아가던 미꾸라지의 시야에 도련님이 걸려들었다. 그는 가족세대 쪽을 넌지시 바라보며 혼자 히죽거리고 있었다.
"나 하나만 진심으로 묻자."
도련님이 돌아보며 미소를 거두었다. 미꾸라지는 뛰어가는 도련님 뒤에 끈질기게 딱 붙었다.
"내가 어딜 봐서 부러웠는데? 왜 존경했는데?"
"음… 가끔 그렇게 보이던 때가 있었지. 내가 지금 좀 바빠서…."
"강제노동인데 뭐가 바빠? 내가 늘 편했던 적이 언제냐고?"
"아 글쎄, 존경스런 면이 있었다니까."
"거짓말하지 마. 부주석 아들이 왜 나 같은 걸 존경하냐고!"
도련님은 부주석 아들답게 뚝 멈춰 섰다. 들었던 돌을 쾅 내던졌다. 뒷짐 지고 천천히 몸을 돌려 미꾸라지를 노려보았다.
'다음 주 생활총화 때 너희들 두고 보자!'
호기롭게 말을 걸었던 미꾸라지는 입속으로 욕하며 달아났다.
그래도 도련님의 시선이 계속 따라오자 그걸 확인하다가 그만 돌에 발을 걷어 채였다. 아픈 발을 끌어 쥐고 배고픔까지 통탄할 때였다. 멀리서 혼자 일하는 월왕령이 눈에 들어왔다. 그쪽으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미꾸라지는 성난 표정으로 월왕령 앞을 막아섰다. 그 귀찮은 '어른'을 비켜서자 미꾸라지는 기어이 옆으로 다시 옮겨가며 그의 앞을 막아섰다.
"내가 부주석 자식 놈은 못 잡아도 너 새끼는 죽일 수도 있지."
월왕령이 그를 쳐다보았다. 차가운 시선으로 쏘아붙였다.
"호상비판 보복하면 구류장 가는 거 몰라요?"
미꾸라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입꼬리가 귀까지 치솟았다.
"구류장? 웃기지 마. 너 목에 걸고 다니는 그거, 반역자 애비 유물 맞지? 어젯밤 들었지롱. 신고할 거야."
그 말에 월왕령의 눈빛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그걸 본 미꾸라지는 더 신나서 지껄였다.
"반동 유물 감추면, 같은 반동 되는 거 몰라? 오늘부터 네 점심 주먹밥 갖고 와. 그럼, 입 다물어 줄게."
그때 멀리서 성난 목소리 하나가 달려왔다.
"야! 이 개새끼야!"
젠장! 또 그 금발 머리였다. 9분조의 선을 긋던 '금지구역'이 직접 찾아오기까지 하다니!
"잘 생각해봐."
그 말을 남기고 미꾸라지는 웃으며 도망쳤다.
그날, 작업장은 다른 날과 달랐다. 여느 날과 똑같은 무게의 돌인데도 수용자들의 발걸음엔 어딘가 모르게 탄력이 붙어 있었다. 누구도 대놓고 웃진 않았지만 뛰는 각도와 팔 동작이 예전보다 조금씩 경쾌했다. 몇몇은 헛기침하며 일부로 시선을 돌렸다.
강가 제방 아래쪽, 멀찍이 떨어져 돌을 나르고 있는 여자들이 보여서였다. 그들과 같은 공사 구간을 공유한다는 이유만으로도 남자 수용자들의 피로는 잠시 뒤로 밀렸다. 무너진 돌 틈 사이로 언뜻언뜻 비치는 여자들의 그림자가 수용자들의 맥박을 조금 더 빠르게 만들었다.
여자들과 함께 일한다는 건 단순한 성적 긴장이 아니었다. 보위부의 채찍을 잠시 잊고 같은 죄수끼리 같은 사람끼리 마주 선다는 새삼스러운 평등 의식이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은밀히 고개를 드는 건 지워졌던 남성성이 다시 회복되는 본능이었다.
그런 남자들보다 오히려 더 노골적으로 이쪽을 자주 건너보는 여자가 있었다. 가족세대 3작업반 2분조 박해순이었다. 그녀의 시선은 처음부터 뚜렷했다. 단 한 명만 주목하고 있었다. 독신자 9분조의 도련님이었다.
도련님의 관심은 전혀 다른 방향에 꽂혀 있었다. 저만치서 담배를 급히 빨며 어디를 집요하게 주시하는 최종배였다. 당장 달려갈 기세로 막대기를 잡는 걸 보니 다른 손에 있는 꽁초가 곧 떨어질 것 같았다. 늦으면 놓친다. 아니 남에게 빼앗기는 것이다. 도련님은 최종배에게로 냅다 달려갔다. 판단과 행동이 적중했다. 도련님이 도착하는 걸음에 딱 맞춰 최종배가 누군가에게 "야!" 하며 뛰어갔다. 정말로 담배꽁초도 버렸다.
도련님은 담배꽁초를 얼른 주웠다. 주머니 속에서 움켜쥔 손끝에 금방 꺼진 불의 온기와 기분 좋게 남은 연초의 묵직함이 생생히 전해졌다. 그는 곧장 제방 아래로 내려갔다. 남몰래 담배를 꺼내 보았다. 꽁초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무려 새끼손가락만큼이나 실한 놈이었다. 눈을 의심하며 다시 확인해 보아도 횡재가 분명했다. 9분조 앞에서 자랑할 수준이었다.
"여보세요!"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도련님은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매를 피하듯 머리부터 감싸 쥐었다. 그 두 팔 짬으로 돌아보니 여자였다. 박해순! 도련님은 놀랐던 티를 감추려 머리카락을 툭툭 털며 일어섰다.
"할 거예요? 말 거예요?"
박해순의 말엔 서론도, 설명도 없었다. 도련님은 간부처럼 뒷짐을 졌다. 고개를 약간 들고 표정은 가당찮을 정도로 거만했다.
"하는 건 좋다 이거야. 홀딱 반하면 막 들이댈 수도 있지. 근데 말이지, 가마치가 뭐냐고."
"반하긴..."
박해순은 코웃음을 쳤다.
"준다는데 뭐가 불만이요?"
"주는 것도 좋다 이거야. 줄 수 있지."
도련님의 말투도 상당히 건방졌다.
"근데 예의란 게 있지. 뭔가 정중히 요구할 땐 상대방 품격도 좀 고려해가며…"
"꽁초나 주워 피는 주제에."
박해순은 그 한마디를 던지고 획 돌아서 뛰어갔다. 도련님의 표정이 굳어졌다. 거만한 웃음은 입가에 아직 남았는데 소용없고 눈썹이 슬쩍 치켜 올랐으나 거기서 멈췄다. 뜨끈한 뭔가가 좀처럼 식지 않고 온통 그의 주변에서 떠돌고 있었다. 주둥이와 도성진이 도련님에게로 뛰어왔다.
주둥이는 박해순이 사라진 쪽을 돌아보며 물었다.
"날짜 잡았어?"
도련님은 두 손을 툭툭 털었다.
"와서 하도 치근덕거려 욕을 콱 뱉어 쫓아버렸지."
도련님은 뒷짐 지고 흔들흔들 제방 위로 올라갔다. 거기서 최종배의 시선에 걸렸는지 넙죽 엎드려 돌을 찾아들고 뛰었다. 강둑 아래 도성진이 주둥이에게 물었다.
"그럼 우리 가마치 못 먹는 거예요?"
"저게 진짜…"
머리를 굴리듯 주둥이의 눈동자가 빠르게 돌아갔다.※ 다음 편에 계속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