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날 밤 막사로 복귀하는 작업 대열은 어느 때보다 웃음소리가 높았다. 주둥이가 말할 때마다 웃음이 일어 몸을 데워주는 온기가 됐다.

    "그놈 얼굴 봤어? 시계 깨졌는데 무슨 지애비 죽은 표정이야."

    옹헤야의 말에 도련님이 속 편하게 웃다가 발끝을 헛디뎠다. 옆에 섰던 성진이 아까 옹헤야가 자기에게 해줬던 것처럼 도련님의 등을 잡아줬다.

    "내가 명색이 국가 부주석 아들인데 달랑 시계 그거 하나 가진 촌놈 때문에 에잇. 그놈 자기 시계 자랑질하려고 우리 매일 뛰게한 거잖아."

    이어서 도련님은 주둥이에게 삿대질을 했다.

    "그렇게 잘할 거면 미리 좀 하지. 앞으론 제 때에 해. 알았어?"

    도련님은 칭찬도 투정처럼 흔들어댔다. 주둥이는 그의 말을 무시하며 도성진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놈 오늘 처벌은 불경죄 때문이야. 전번 김동규 어른 묻을 때도 자세가 영 안 좋았어."

    도성진은 주둥이를 올려다보았다.

    "그놈 악질이잖아요. 내일부터 더 할 거예요."

    "우리는 살아야 할 이유라도 있지. 그놈 하루는 이제 아무 의미가 없어."

    주둥이의 그 말에 모두가 또 한 번 최종배를 약 올리듯 무작정 수궁했다.

    "자, 막사까지 멀지 않았다. 힘내자!"

    대열 앞에서 2작업반장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예전 같으면 다들 눈치 봤을 그 목소리였지만 분위기가 상당히 풀어졌다. 사람들은 그가 최근에 달라졌다고 수군거렸다. 전에는 막대기였는데 이제는 맨살 같은 곳이 있다고 칭찬하는 사람도 생겼다.

    검은손은 반장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알았다. 그도 비밀을 약속한 성진을 믿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먼저 시선을 피하고 9분조 근처로 오려고 하지 않았다.

    반장을 독하게 만든 것은 비겁한 자신 때문이었다. 지금 그를 본래의 '자리'로 되돌릴 수 있는 이는 말 한마디 없는 성진이었다.

    존재만으로도 벅찬 아이. 눈이 마주치면 숨이 막히고 등을 보이면 오히려 안도하게 만드는 성진이었다. 검은손은 혼자 웃으며 손바닥으로 괜히 막내의 머리를 한번 쓱 만졌다.

    바로 그때였다. 대열 뒤편에서 귀를 찢는 경적이 길게 울렸다.

    동시에 한 줄기 강한 빛이 어둠을 가르며 달려왔다. 눈발이 일었고 언 땅이 꿀꿀 울렸다. 5톤 트럭 한 대가 달려오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풍차'라 불리는 차량이었다. 적재함은 차가운 재질의 쇠로 꽁꽁 가려진 차였다.

    “뽈밥차다!”

    그 외침은 불씨가 되어 대열 곳곳에서 다른 말들로 번졌다.

    "평양에서 온 거래."

    "아냐, 청진이래."

    "와봤자 보위원들 처먹을 것만 한가득이지."

    "난 굶어 죽어도 상관없어. 내일 해제명단에만, 제발 내 이름만 있으면…"

    희망을 말하기도 하고 비관을 씹기도 했다. 성진은 옆에 있던 가수에게 물었다.

    “왜 뽈밥차예요?”

    가수는 눈도 돌리지 않고 대답했다.

    "내일 명절이잖아. 밥그릇 위로 밥이 뽈처럼 뽈록 올라온다고 뽈밥."

    그는 왼쪽 손바닥을 펼치고 오른손으로 밥 산을 그렸다.

    "일 년에 두 번. 김일성 생일, 김정일 생일. 4월 15일, 2월 16일. 그날만 흰쌀밥이 나와. 국도 준다. 명태 대가리 들어간 동태국."

    그 말에 성진은 눈물이 핑 돌았다. 쌀밥이라니! 기억 속에서도 흐릿해진 단어였다. 그러나 사람들을 더 설레게 하는 건 동태국도 쌀밥도 아니었다.

    "말린 명태 세 마리도 줘."

    가수는 그 말을 할 때 유난히 목에 힘을 주었다. 그건 사회에서 명절 때면 배급되던 돼지고기처럼 '당의 특별공급'으로 내려온 말린 생선이었다. 수용자들은 매년 단 두 번, 세 마리씩 총 여섯 마리를 받았다.

    이 귀중품은 껍질, 꼬리, 심지어 눈알 하나까지도 값이 정해졌다. 그 여섯 마리는 그들의 전 재산이고 거래 수단이었다. 무언가를 얻고 싶을 때, 누군가의 손을 빌리고 싶을 때, 수용자들은 주저없이 명태를 돈처럼 활용했다. 생일로 어김없이 찾아오는 '수령'이기 때문에 그 신용이 확실했다.

    풍차가 온 다음 날이면 받는 즉시 떼이는 자가 있었다. 빼앗은 자는 그것으로 자기만의 생존 가능성을 넓혀 나갔다. 보위부는 수령의 최고 존엄을 강요해도 수용자들에겐 자기들 거래의 최고 보증자일 뿐이었다.

    15호에서 풍차는 또 다른 의미가 있었다. 명절엔 기쁨을 싣고, 평일엔 공포를 실어 왔다. 만약 풍차가 평일에 나타나면 뒤이어 "전체집합! "명령이 떨어졌다. 대중이 모이면 풍차에서 입에 재갈물린 죄수가 내려지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공개총살을 했다. 

    그러니까 풍차는 한 번은 '배려'를, 또 한 번은 '죽음'을 나르는 운반차였다. 기쁨과 공포의 차. 사람들은 그 풍차를 같은 얼굴로 맞이해야 했다.

    "내일 사람들이 나가는 날이에요?"

    성진의 물음에 가수는 비웃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일 년에 딱 한 번. 출소자 명단 발표하는 날."

    그 말이 아직 공기를 다 덮기도 전이었다. 주둥이의 목소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그거 기다리다가는 미치거나 정신병자 돼. 차라리 저 뽈밥차 기다리는 게 낫지."

    대열은 평일과 다르게 끊임없이 묻고 답하며 수용자들의 온갖 경험들이 쏟아졌다. 도성진의 눈이 철조망에 꽂혔다. 길옆의 '섯! 쏜다!' 붉은 경고판이 여느 날처럼 노려보고 있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수용소 내 모든 게시 글자들은 볼 때마다 뚜렷했다. 말이 없는 곳에선 글자가 대신 엄포를 놨다. 그런데 오늘의 철조망은 무언가 허전했다. 언제나 그 자리에 있던 꼬마가 보이지 않았다. 늘 철망 너머로 자기가 가진 전부인 웃음을 줄 테니 뭐라도 달라는 식으로 손을 내밀던 아이였다.

    꼬마가 밟고 선 땅은 가족세대 지역이었다. 철책선이 가족세대와 독신자를 갈라놓고 있었다. 그 손과 웃음이 오늘만큼은 없었다. 도성진은 뒤를 돌아보았다. 발자국 너머 어둠 속을 속속들이 살폈지만 꼬마는 끝내 보이지 않았다. 

    그사이 대열은 독신자 막사 입구를 향해 나아갔다. 회색 철문 너머 안쪽은 수용자들의 밤이 머무는 곳이었다. 특히나 2월이면 혁명화 해제의 꿈들을 가두는 구역이었다.

    도착지점엔 낯선 얼굴들이 보였다. 풍차에서 내린 후방국 군관 한 명이 초소에 앉아 있던 경비 군관과 한담을 나누고 있었다. 그 옆에서 초소 병사가 종이를 들고 풍차 운전석으로 다가가 서류를 건넸다. 풍차의 시동이 무겁게 켜졌다. 

    옹헤야는 슬그머니 뒤로 빠져 신발 끈을 고쳐 매는 시늉을 했다. 시선을 밑에 단단히 고정시키고 대화를 엿듣기 위해 귀를 쫑긋 세웠다.

    "술 한잔하고 새벽에 출발할 거지?"

    "해야지. 이따 와. 들쭉술 두 병 챙겨왔어."

    단순한 말들이었다. 그러나 옹헤야는 그 짧은 교환 속에 무언가를 읽어냈다. 그는 일어서 다시 대열로 합류했다. 두 눈은 풍차의 뒷모습을 기어이 따랐다. 풍차는 마당을 지나 독신자 관리소 안으로 조용히 빨려 들어갔다.

    대열 속 도성진의 시선은 단독막사 쪽에 멈춰 있었다. 발길은 이어져도 눈은 그 막사에 붙들려 있었다. 그 막사 안에서 김동규 할아버지가 아직도 웃고 있는 듯했다.

    그가 해준 말들이 나무처럼 심겨 있는 느낌이었다. 눈에 남은 잔상이 천천히 옅어지며 도성진의 눈은 촉촉이 젖었다. 

    빠른 걸음으로 9분조 대열에 합류한 옹헤야는 성진이와 같은 시선이었지만 날카롭게 곤두서 있었다. 그의 눈길은 단독막사 옆에 있는 최종배의 사무실 창문을 겨누었다. 옹헤야는 혼자 무언가를 계산하고 있었다. 단지 창문이 아니라 그 너머의 무엇이었다.


    ※ 다음 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