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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호에서 보위원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자기 이름이었다. 수용자들이 복수심에 실명을 품기 때문이었다. 수용자들은 그것들을 숨겨진 명부처럼 서로 주고받았다. 그래서 보위원들에겐 자기 이름이 가장 큰 공포였다. 자신이 저지른 폭력이 구체적일수록 그 이름은 더 오래, 더 깊게 기억되었다.
아무리 두려워해도 숨길 수는 없었다. 수번이 없는 보위원의 이름은 어디선가 흘러나오게 되어 있었다. 서류에, 구호에, 호출에, 어딘가엔 반드시 남고, 다시 퍼져나갔다.
홍신영. 가족세대 여자 담당 보위원. 15호 구읍리에서 가장 악명 높은 이름이었다. 사람을 죽인 숫자까지 다른 리(里)의 수용자들도 다 기억했다.
가족세대 남자 담당 보위원인 지형철은 상대적으로 '칭찬'처럼 불렸다. 그는 오히려 자신의 이름을 수용자 앞에서 대놓고 말했다. 숨기지 않았고 무언가를 감추지도 않았다. 그 정면성은 의외의 명성이 되어서, 윤진경이 그를 남자로 보게 된 첫 번째 이유였다. 그는 보위원 같지 않았다. 그 '같지 않음'이 15호 안에서는 유일한 인간성처럼 느껴졌다.
15호의 보위원들도 자유롭지 않기는 매한가지였다. 특히 수용자를 만날 때에는 반드시 '개별면담'이라는 형식을 빌려야 했다. 시간은 30분 이내로 제한되고 횟수가 많아지면 면담이 아니라 '만남'으로 의심받았다. 그 순간부터 감시와 추적의 대상이 되고, 그 추적은 기록으로 남았다.
소장이라고 예외가 없었다. 오히려 간부들일수록 보초가 배치되고 거쳐야 할 절차도 많아 더 자유롭지 못했다. 면담 기록부에는 시간과 횟수, 대화의 목적까지 남겨야 했다. 보위원이 수용자를 따로 만나야 할 이유는 오직 하나 추궁 또는 추적뿐이었다. 그래서 면담이 잦은 수용자일수록 늘 한쪽 다리를 구류장 안에 걸쳐놓고 살아야 했다.
그러나 윤진경은 달랐다. 그는 2분조의 결속력 덕분에 지형철을 몰래 만날 수 있었다. 그 은밀함은 고립된 공간 하나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혼자가 아닌 여럿의 움직임, 동행과 동석의 증인들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오늘도 윤진경은 2분조의 보호 속에 지형철의 사무실로 들어섰다. 거울 앞에 지형철과 윤진경이 나란히 섰다. 그들은 같은 색의 옷을 입고 있었다. 죄수복도 사회복도 아닌 그저 평범한 파란색 티셔츠였다. 어쩌면 그것 하나가 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두 사람을 같은 호흡으로 엮어주는 인간 표지 같았다. 윤진경은 그의 품에 와락 안겼다. 몸 전체가 스며들 듯 파고들었다. 지형철은 웃으며 물었다.
"이 옷이 그렇게 좋아?"
윤진경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대신 그의 가슴께에 볼을 붙인 채, 조용히 말했다.
"네. 서로 다르지도 않고… 정말 함께 있는 것 같아 너무 좋습니다."
그 말은 짧았지만, 누구에게도 뺏기고 싶지 않은 감정이었다. 지형철은 그녀의 이마를 한번 쓸어 만졌다.
"진경아. 이렇게 우리가 만나는 이 시간만은 15호에 갇혔다고 생각하지 마. 오히려 내가 너에게 갇혔으니까."
그 말은 사랑의 고백이라기보다 체념의 고백이었다. 여기선 미래를 말하면 고문이고 절망이 된다. 오로지 눈앞의 현재만 말하는 것이 최선이다. 공간의 의식만 가능한 감정의 세계였다. 이곳에서의 남녀의 사랑이란 숨을 나누는 일이었다. 지형철은 보위원으로서 목숨 건 숨을 주고, 윤진경은 수용자로서 전부의 숨을 내어주는 셈이었다.
둘은 오랜 시간 껴안고 있었다. 지형철은 그녀의 체온과 숨소리가 오랜 시간 어둡던 자신의 내면을 따뜻하게 덥히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그의 등 뒤에서 윤진경은 눈을 감고 있었다. 그녀의 손엔 지형철이 준 참빗이 들려 있었다. 머리를 빗을 때마다 자기 손처럼 생각하라는 그의 말에 눈물이 북받쳤다. 남자는 자기 여자 앞에선 모든 걸 잊게 되지만 여자는 사랑 앞에서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그 둘은 서로 다른 사랑을 껴안고 있었다. 지형철은 꿈꾸는 사랑을, 윤진경은 현실처럼 무거운 사랑을.
같은 시간, 독신자세대 운동장 어둠 속에서도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도성진과 옹헤야였다. 도성진은 초승달을, 옹헤야는 최종배 사무실 쪽을 보고 있었다. 옹헤야는 입가에 나뭇가지 하나를 물었다. 도성진은 옹헤야의 시선을 따라 슬쩍 사무실 쪽을 바라봤다. 불 꺼진 창문 안에서 오히려 최종배가 이쪽을 노려보며 감시할 것만 같아 소름이 끼쳤다.
"아저씨. 내가 뭘 또 도와드릴 일 없나요?"
그 말에 옹헤야가 미소 지었다. 말은 없었지만, 눈매가 먼저 풀렸다. 성진은 옹헤야의 옆모습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쳐다봐…?"
"아저씬 외국인이죠? 우리나라 사람 아니죠?"
"정말 외국인이고 싶다."
옹헤야의 시선은 정면에 고정돼 있었다.
"또 최종배 사무실에 몰래 들어가려는 거죠?"
옹헤야는 정색하지도 부정하지도 않았다.
"아저씨 이름도 특별나요. 한 글자. 길인."
그 말에 나뭇가지를 씹던 그의 입술이 멈췄다. 눈빛은 그 이름이 시작된 어딘가로 향하는 듯 밤하늘 어느 한 점에 오래 머물고 있었다. 도성진이 말한 그 이름 하나가 생기기까지의 시간으로 달려갔다. 옹헤야는 다섯 살 때까지 이름이 없었다. 출산이 축복이지만 그의 어머니에겐 비난이었다. 갓난아이를 안고 지나갈 때마다 동네 여인들의 눈빛이 차가웠다.
"눈알이 파랗대. 뭔 아기가 괴물처럼, 코도 내 손가락만 하대."
"백인이 아니고, 탄 덩이 같은 흑인이래. 엄마 젖도 까만 젖이 나온다며?"
"어이구나, 주체의 나라에서 외국 놈이랑 엉덩방아를 찧고 잡종까지 낳아? 저런 년은 왜 안 잡아가?"
아줌마들의 그 뒷방아들이 형벌처럼 가혹했다. 그때마다 옹헤야의 엄마는 아이를 더 깊게 끌어안고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밤길에만 외출했던 그 그림자는 누구보다 더 검고, 더 길었다.
옹헤야 외할아버지는 당 간부였다. 집도 당에서 준 평양시 고급아파트였다. 넓고 어두운 거실 한쪽엔 훈장이 빼곡히 걸린 인민복 한 벌이 벽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 안에 들어설 때마다 옹헤야 어머니는 딸인데도 무릎을 꿇었다. 아들의 이름을 받기 위해서였다.
"내 가문에 쏘련 놈의 씨가 말이 돼? 이름 못 지어준다."
외할아버지의 그 한 마디는 주체사상 가문의 선언이었다. 태어난 아이가 아니라, 태어나서는 안 되는 피에 대한 부정이었다. 하지만 엄마는 물러서지 않았다.
"내각에서 지시하는데… 어떻게 해요. 제게 쏘련말 배우라 한 것도 아버지잖아요. 아버지가 먼저 강요하신 거잖아요."
어느 날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우연히 이름 없는 손자의 처지를 보게 됐다. 5년 만에 딸의 집을 찾아오는 두 노인의 손엔 보자기가 들려 있었다. 그들은 아파트 현관 앞에 있는 놀이터 안을 잠시 보게 됐다. 그들의 시선 끝에 누가 봐도 혼혈아인 옹헤야가 서 있었다. 금발 머리에 회색빛 눈동자. 그는 모래를 손에 쥐고 있었다. 그 아이 주변으로 또래 아이 셋이 모여들었다. 가장 먼저 다가선 여자아이가 말했다.
"내 이름은 최진순, 얜 박철남, 쟤 이름은 강성민."
그리고 마지막 금발의 아이를 가리키며 고개를 갸웃했다.
"얘 이름은… 잡종."
웃음이 퍼졌고, 아이들은 잡종이라며 놀려댔다. 나중에는 아무도 남지 않은 그 자리에 옹헤야만 홀로 서서 울고 있었다. 뒤늦게 뛰어온 어머니는 억지로 웃으며 아이를 품에 안았다. 아이의 말은 가슴을 찢었다.
"엄마, 난 언제 이름이 생기나? 이름이 없으니까 자꾸 잡종이래."
그 말에, 옹헤야의 등을 껴안고 있던 엄마 손이 떨렸다. 아들의 뒤에서 엄마도 울었다. 그걸 본 옹헤야 외할아버지는 이름을 준다며 집으로 불렀다. 옹헤야 어머니는 기쁜 마음으로 친정에 들어섰다. 외할아버지는 손자의 얼굴보다 노동신문을 보는데 더 눈을 두고 있었다. 5살의 옹헤야도 외할아버지란 안길 수 없는 절벽 같은 존재였다.
"아버지…5년 만에 외손자 이름 지어준다는 게, 기껏… 외자예요? 뭐가 다르다고! 외자로! 그것도, 왜 사람 인(人)자 하나로 끝내냐고요!"
옹헤야가 이름을 가지는 그날은 엄마에겐 통곡, 외할아버지에겐 분노였다.
"길! 길이다. 내 성을 허락한 것도, 이미 내가 크게 양보한 거야! 주체의 이 조선에서, 저 금발로 태어나서 뭘 할 수 있냐? 당원이라도 되겠냐고? 그냥… 사람인(人), 길인(吉人)이다."
그렇게 얻어진 이름 길인! 그 한 글자마저 왜 사람의 의미밖에 가지지 못했는지를 옹헤야는 썩 나중에 알게 됐다. 그것도 어머니의 입이 아닌 글에서. 일기장에서 몰래 훔쳐본 것이었다. 수용소에 와서도 엄마의 일기장은 시도 때도 없이 옹헤야의 눈앞에 어른거렸다. 그걸 지우고 싶어 옹헤야는 16세 성진이 앞에서도 이름의 사연을 흘리는데도 주저하지 않았다.
"그 한 글자도 5년 만에 가진 거다."
도성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둠 속에 잠긴 옹헤야의 얼굴이 처음으로 가까이 보였다.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그 끝에서 옹헤야가 또박또박 말했다.
"내 이름은 말이다… 죽어도 내 갈 길을 끝까지 가는 인간, 그런 길인이다."
그의 말소리는 작아도 묵직하게 밤공기를 때렸다. 성진의 가슴에도 옮겨오는 무게였다. 성진은 옹헤야의 손등에 자기 손을 얹었다. 그 온기에 서로 조용히 웃는데 검은손이 달려왔다. 그의 손에 작은 주머니가 들려 있었다. 검은손은 그걸 주면서 빨리 갔다 오라는 눈짓을 했다.※ 다음 편에 계속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