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월 16일은 몇몇에겐 구원이었지만 대부분에겐 또 1년의 구형 선고와 같은 날이었다. 검은손은 해제명단 발표가 끝나자마자 막사 밖으로 분조원들을 모두 불러 모았다. 빙 둘러앉은 그들 앞에서 그는 조용히 말했다.

    "자. 서로 손부터 잡자."

    도성진이 제일 먼저 가수의 손을 잡았다. 도련님은 맨 마지막까지 망설이다가 할 수 없이 주둥이의 손등 위에 손을 대충 얹었다.

    손과 손이 한 줄로 이어진 걸 확인하고서 검은손이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여기 무슨 말이 있는 줄 알아? 2월 16일, 이 하루만 버티면 1년을 살 수 있다. 오늘 한잠 자고 일어나면, 별거 없어."

    그때, 주둥이가 고개를 푹 숙이며 숨이 넘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죽고 싶어요…"

    늘 웃던 그가 울상이 되자 도성진은 숨을 들이켰다.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유독 도성진만 주둥이를 따라 고개를 숙였다.

    "오늘 진짜 심각하구나."

    성진은 땅을 보며 그렇게 믿었다. 그런데 주둥이는 눈물 한 방울 없는 마른 얼굴을 쳐들고 긴 한숨처럼 말했다.

    "그분이 태어나신 날인데... 아! 진짜 사람 힘들게 하네. 하필 이 최대의 명절에 죽고 싶냐. 후~~"

    성진은 분조원들을 들러보았다. 도련님은 입꼬리부터 실룩거렸다. 가수는 눈을 꽉 감았다. 옹헤야의 고개 숙인 어깨는 소리 없이 떨리고 있었다. 주둥이는 하늘을 향해 계속 중얼거렸다.

    "얼마나 힘들면 다들 손을 잡으라니 진짜로 이렇게 잡고 있을까."

    끝내 서로 맞잡은 손의 띠에 웃음을 참는 힘이 팽팽해지다 못해 툭 끊겼다. 모두가 와! 하고 터져버렸다.

    9분조는 웃었지만 다른 분조에선 이빨이라도 보이는 자가 있으면 곧장 주먹이 날아왔다. 보위부가 '혁명화 해제'의 날이라고 강변했음에도 수용자들에게 그것은 새롭게 판결받는 날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날에는 감시반도 각별히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모두가 매우 예민했고 누구나 벼르고 있어서였다. 이날에 수용자들이 제일 많이 하는 말은 "법보다 주먹이 가깝다"였다. 오직 감정과 원망만이 펄펄 끓는 날이었다.

    미꾸라지는 무자비한 수용소의 법만 믿고 민족 최대의 명절이라고 나대다가 당일 밤에 최대로 얻어터졌다.

    그를 때린 자들은 한때 해군사령관 방철갑의 충성부하였던 작전참모와 그 측근들이었다. 아무리 공포마저 갇힌 수용소라 해도 미꾸라지 하나쯤 짓밟을 틈새는 얼마든지 있었다.

    하필이면 그가 자주 몰래 먹거나 꽁초를 피우던 운동장 옆 구석이었다. 거긴 최종배가 막사에서 관리실로 오가는 길옆이었다. 작업 도구 창고가 방패막이 돼줘서 숨어 있기 딱 좋았다. 최종배가 흘리고 간 것이라면 꽁초든 무엇이든 남보다 먼저 주울 수도 있었다.

    미꾸라지를 찾아 나선 작전참모의 무리는 멀리 갈 필요가 없었다. 좀 더 구석 안쪽으로 끌려온 미꾸라지는 무게도 없는 빈 마대 같았다. 바닥에 거칠게 내팽개쳐졌다. 마대에서 튀어나와 꿈틀대는 미꾸라지 꼴은 코와 이마에서 피가 줄줄 흐르고 한쪽 눈이 벌겋게 부어올라 있었다. 그는 자기 손에 묻은 피를 보며 수용소라는 데가 참 허술한 곳이구나 싶었다. 감시반장 이전 시절로 돌아간 느낌마저 들었다.

    "야, 뭐 철갑이? 철갑상어? 이 새끼가 하다 하다 사령관 동지한테 별명까지 붙여?"

    작전참모의 말에 미꾸라지는 잘못하다가는 죽겠다 싶었다. 본능적으로 다리를 모으고 얼굴을 보호하기 위해 두 손으로 최대한 머리를 감쌌다.

    "상어라면 더 멋있을 것 같아서... 그리고 감시반장한테 이러는 거 아닙니다. 구류장에 갑니다."

    구류장이란 말에 더 심하게 매질을 당했다. 미꾸라지는 "에잇!" 하며 팔을 힘껏 휘저어 보았지만 팔보다 먼저 허벅지가 밟혔다. 엎어진 채로 허둥지둥 기어가다 다리를 또 짓밟혔다. 선생님을 소리쳐 부를 수도 없었다. 첫 매질에 딱 한 번 불렀다가 입술이 찢어졌었다.

    "이 새끼 더 패."

    작전참모가 손을 털며 일어섰다. 이번에는 세 남자가 미꾸라지에게 접근할 때였다. 뒤에서 또렷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냥 가!"

    모든 이의 시선이 뒤로 몰렸다. 거기엔 옹헤야가 손으로 허리를 부여잡고서 서 있었다. 작전참모가 실눈을 만들어 비웃었다.

    "잡종이 순수 주체 혈통의 조선 사람들 일에 왜 끼어들어?"

    그러자 옹헤야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에게 수용자 셋이 달려들었다. 첫 번째가 엎어졌다. 두 번째는 갈비뼈 쪽을 감싸며 뒷걸음쳤다. 세 번째는 달려오던 기세로 그냥 나가떨어졌다. 미꾸라지는 그 광경을 한쪽 눈으로 바라보다가 입을 해죽이 벌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의 얼굴은 놀람보단 경외에 가까웠다. 코에서 떨어지는 피도 아랑곳하지 않고 옹헤야를 향해 불끈 쥔 두 주먹으로 응원했다.

    그러던 그의 시선이 멈췄다. 옹헤야보다 더 무서운 사람들이 뒤에 서 있었다. 특별경비 순찰을 하던 조직부장과 군인들이 들이닥쳤던 것이었다. 미꾸라지는 구타당한 자기 몸을 강조하려고 그들 앞으로 기어갔다.

    "선생님! 여기가 관리소지 해군사령부입니까? 사령관이요, 참모요, 저것들이 저희끼리 해군놀이 하다가 이 감시반장까지 폭행했습니다!"

    조직부장이 짧게 소리쳤다.

    "야! 저것들 구류장 끌고 가. 네 놈도 썩 사라져!"

    조직부장이 돌아서 가니 미꾸라지가 네발로 뛰어 그의 앞에 털썩 엎드렸다.

    "선생님. 저 잡종을 우리 감시반에 소속시켜 주십시오. 그럼 제가 이놈들이 다시는 대가리를 못 들게…!"

    조직부장은 발을 번쩍 들어 그의 등을 넘어갔다.

    그 시각, 9분조는 막사 옆 어귀에 모여 앉아 있었다. 가운데에 놓인 불통 위에 말린 명태가 얹혀 있었다. 검게 타는 껍질 사이로 희미한 비린내가 피어올랐다. 그 명태는 아침 일찍 검은손에게 바쳐진 것이었다.

    그건 9분조의 오랜 전통이었다. 그래야 평소에 다른 분조에 손 벌리지 않았다. 빚지는 일도 없었다. "같이 굶고, 같이 나눈다"는 9분조만의 자부심이었다. 내일의 음식으로 남기지도 않았다. 한 번에 다 없앴다. 미련을 없애고 다시 9분조라는 이름 하나로 기대자는 의지였다.

    마침내 기다리던 옹헤야가 멀리서 모습을 드러냈다. 나머지 명태를 불판 위에 올린 뒤 9분조의 잔치가 시작되었다. 명태 굽는 냄새가 운동장에 가득 퍼졌다. 다른 분조의 눈빛이 하나둘 모였다.

    그들의 입속에는 침이 고였다. 눈빛엔 부러움이 서렸다.

    "9분조 명태는 뺏을 수도, 거래도 할 수 없다"는 말이 운동장 곳곳에서 들려왔다. 명태의 살이 거의 떨어질 무렵 주둥이가 사탕처럼 입에 물었던 꼬리를 빼내 그 끄트머리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저거... 가족세대 2분조 걔 아냐?"

    모두의 시선이 동시에 그리로 옮겨 고정됐다. 어둠 속 독신자 관리실 문 앞에 김상미가 서 있었다. 곁에는 경비대 군인이 보였다. 도련님이 의아해했다.

    "쟤가 가족세댄데… 이 밤에 왜 독신자 관리실에 불려갔지?"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 앞에서 머뭇거리던 김상미를 경비군인이 등 떠밀었다. 그녀는 억지로 한 걸음을 내디뎠다. 그다음 문틈에 잠시 몸을 기대고 있는가 싶더니 결국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기 전 최종배의 머리가 나와 밖을 살폈다. 그 시선은 부정한 의도로 느렸다. 문이 닫히면 돌변할 것 같았다. 도련님이 마치 그 안을 들여다본 것처럼 말했다.

    "최종배, 오늘 바지 벗는 날이구나…"

    그 순간이었다. 도성진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주위가 놀랄 새도 없이 그는 냅다 달려갔다.

    "야야!"

    뒤에서 검은손의 외침이 튀어나왔다. 그러나 도성진은 멈추지 않았다. 그의 두 발은 단순히 뛰는 게 아니었다. 무언가 무너지는 속도보다 더 빨리 닿으려는 일념이었다. 달리며 이미 계획을 세워둔 것처럼 도착하자마자 창문에 귀를 붙였다. 상미의 비명이 또렷하게 들려왔다.

    "어머나, 손 치우십시오!"

    "봐봐. 명태 여섯 마리 있잖아. 너 이거면..."

    "나 명태 싫어합니다. 가겠습니다."

    "지금 보위원 명령에 불복하는 거야? 죽고 싶어? 빨리 안 벗어?"

    몸으로 저항하는 흐트러진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지체하지 않고 도성진은 입을 열었다. 폐부에 남은 온기를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짜내며 노래를 불렀다.

    장백산 줄기줄기 피어린 자욱!
    압록강 굽이굽이 피어린 자욱!


    처음은 삐걱거렸지만 두 소절이 넘어가자 음정도 놀라울 만큼 정확해졌다.

    아, 그 이름도 그리운 우리의 장군!
    아, 그 이름도 빛나는 김일성장군—!


    창문이 벌컥 열렸다. 최종배의 얼굴이 튀어나왔다. 욕정과 방해 받은 두 흥분이 얽힌 낯짝이었다.

    "이 새끼가…!"

    그의 손이 그대로 뻗어 아이의 뺨을 세차게 갈겼다. 성진은 노래하는 사람을 왜 때리냐는 듯 쳐다보았다. 입을 열 때의 눈은 마치 같이 칠 기세였다.

    "지금 저 때렸습니까? '김일성 장군의 노래'를 부른다고 보위원 선생님이 저를 때린 겁니까?"

    최종배의 얼굴이 굳었다. 주먹은 더 불끈 쥐었는데 그걸 쳐들지 못했다.

    "이, 이 새끼… 그게 아니라… 너 또 왜 왔어?"

    도성진은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분명 '김일성 장군'의 노래 불렀다고 때렸습니다. 저 지금 맞았고! 본 증인들도 있습니다!"

    그러는 사이 현관문이 확 열리며 김상미가 뛰쳐나왔다. 가슴골이 드러난 옷깃을 한 손으로 부여잡고 어둠 속으로 도망치며 소리질렀다.

    "엄마! 엄마!"

    도성진은 그 뒤를 기웃거리며 중얼거렸다.

    "와, 안에 사람도 있었구나. 여자구나..."

    "증인 같은 소리 하고… 썩 사라지지 못해?"

    최종배가 윽박질러도 그 목소리는 이미 공허했다. 그때였다. 막사 운동장 저쪽에서 낮고 느리게 시작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장백산 줄기줄기 피어린 자욱—

    9분조원들이었다. 쭈그리고 앉아 있다가 하나둘씩 일어서고 있었다. 옆에 앉았던 다른 분조에서 발끈하는 소리가 들렸다.

    "저 9분조 새끼들 미쳤나? 여기가 어딘데 감히..."

    "보위원만 무섭고, 우린 안 무섭다 이거지…"

    최종배의 얼굴은 갈 곳을 잃었다. 도성진은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선생님 전 아무것도 본 게 없습니다. 대신 아버지 사진 한 번만 보여주십시오."

    "야! 너 죽고 싶어? 복귀 안 해?"

    도성진은 돌아서기 전에 중얼거렸다.

    "명태도 있고..."

    창문이 쾅 닫혔다. 최종배는 헐떡이는 숨을 내뿜으며 책상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손등에 핏줄이 벌겋게 올라와 있었다. 쾅! 책상 위에 그 주먹이 그대로 내려 찍혔다.

    "이 새끼가…"

    최종배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더니 서랍에서 권총집을 꺼냈다. 권총을 꺼내는 손이 아주 익숙했다. 총구를 바라보는 눈에는 이미 총알이 장전돼 있었다.

    "이 새끼 이번 명절만 지나 봐."

    그의 손가락이 방아쇠를 당기자 쇳소리가 방안을 짧고 날카롭게 가르며 울렸다. 찰칵— 그것은 최종배 가슴에서 나는 소리 같았다.


    ※ 다음 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