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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공기는 눅눅했다. 산 아래로 뿌연 안개가 내려앉은 들녘을 수용자들은 줄을 맞춰 무거운 발걸음으로 걸어갔다. 손에는 빠짐없이 양동이나 삽 같은 작업 도구를 들었다. 축축한 새벽이슬이 뺨을스쳤다. 성진의 심장은 아직도 낯선 공포에 두근거렸다. 길옆으로 녹슨 철조망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군데군데 붉은 글씨로 쓰인 '섯! 쏜다!' 경고판이 매달려 있었다.
그 너머에 7살쯤 돼 보이는 퀭한 얼굴의 어린 꼬마 남자애가 나타났다. 그가 철조망을 넘어 손을 불쑥 내밀었다. 도성진은 흠칫 놀랐다. 아이의 눈은 오직 성진만을 향하고 있었다. 자기만 정조준하며 히죽거리는 미소에 성진의 솜털이 쭈뼛 곤두섰다.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성진은 걸음을 재촉했다.
한참을 걷고 나서야 철조망도 아이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대신 드넓은 옥수수밭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어제 오후 입소할 때 봤던 옥수수밭이었다. 가까이서 보니 여물지 않은 푸른 옥수수들이 촘촘히 서 있었다. 죄수들의 굶주린 시선은 본능처럼 그 옥수수밭을 향했다. 대열 맨 앞에서 2작업반 반장의 고함이 터졌다.
"강냉이밭에 들어가는 놈들 보면 신고해! 서로 잘 감시하고!"
반장은 대열을 따라 걸으며 눈을 사방으로 부라렸다. 9분조에 다가서자 도성진과 눈이 마주쳤다. 성진은 너무 반가워 소리칠 뻔했다. 하지만 반장은 모른 척 재빨리 얼굴을 돌리며 지나쳤다. 머리를 갸우뚱하는 성진의 옆으로 주둥이가 달라붙었다.
"사회방귀. 너 아침도 못 먹었는데 배고프지?"
주둥이는 성진이 대답할 겨를도 없이 팔을 확 낚아챘다. 억센 주둥이의 손아귀에 성진의 몸은 속절없이 옥수수밭으로 끌려 들어갔다. 두 사람은 짙은 옥수수 잎 사이로 몸을 숨겼다. 서늘한 흙냄새와 젖은 공기가 코끝을 간질였다.
"강냉이를 따면 절대 안 돼. 짐승 이빨 자국처럼 만들어야 해. 나 봐."
주둥이는 옥수수를 붙들고 껍질을 벗긴 뒤 이빨로 아래서부터 위로 거칠게 훑어 올렸다. 눈 깜빡할 사이였다. 그의 턱질에 성진도 두 손으로 옥수수를 감싸 쥐고 서툰 이빨질을 했다. 아직 어린 옥수수알은 억센 이빨질로 짓이겨져 입안에서 풋내만 짙게 풍겼다. 단맛은 별로 없었다. 그런데도 배고픈 입안은 요깃감으로 반겼다. 멀리서 꾸벅대며 졸던 경비들이 눈치를 챘는지 다급하게 소리쳤다.
"일어나! 독신자 놈들 벌써 지나갔어!"
"잘 찾아봐! 어디 숨어서 갉아먹을지 몰라!"
성진은 움찔했다. 그러나 주둥이는 털끝만큼도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다람쥐처럼 날래고 능청스럽게 옥수수를 털어내는 것이었다.
"저것들은 산에선 뱀도 잡아먹고 강가에선 물고기도 다 잡아먹는대."
"한 놈만 잡혀봐라. 대갈통 박살이다."
경비들이 말할 때마다 주둥이는 고개를 끄덕였다가 절레절레 흔들며 맞장구쳤다. 경비들의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주둥이는 땅바닥에서 돌멩이 하나를 집어 들어 멀리 던졌다. 돌멩이가 허공을 가르며 옥수수밭을 흔들었다.
"누구얏!" 경비들이 그쪽으로 달려갔다.
주둥이는 입에 옥수수를 문 채 잽싸게 몸을 일으켰다. 옥수수알로 입안을 가득 채운 성진의 이마를 툭 치고는 먼저 몸을 낮춰 빠져 나갔다. 성진도 허리를 숙이곤 죽을힘을 다해 따랐다. 옥수수밭을 빠져나오니 차가운 새벽 공기가 옷 속을 파고들었다. 이슬에 젖어 가랑이가 축축했다. 주둥이는 얼굴 가득히 웃음을 머금고 대열 끝으로 성진을 이끌었다.
"어제 누가 내 입에 수건으로 장난쳤대요?"
성진은 힘주어 물었는데도 월왕령은 아무 말 없이 걸었다. 가수가 옆으로 오더니 성진의 어깨에 자기 팔을 감싸며 말했다.
"아, 그 수건? 그건 신입이 들어오면 잠꼬대 실수할까 봐 우리 9분조가 해주는 특별 취침 배려야. 잠꼬대하다 당 욕하면 반역죄로 바로 쏜다니까."
가수의 설명은 고마웠지만, "쏜다"는 단어에 성진은 공포감이 들었다. 가수는 새벽 공기를 흔들고 싶었는지 목을 풀듯 "아! 아!"하고 소리쳤다. 그러자 주둥이가 곧장 받아 뽑았다. 그의 목소리는 막걸리 한 잔에 푹 젖은 판소리 같았다.
강냉이로 유혹하고, 강냉이로 매우 쳐도
사또 양반 바지 입소! 내 이름은 춘향이오!
네 이년! 요덕으로 가겠느냐 물었더니
사또 양반 바지 벗소! 내 이름은 춘향이오!
대열 속에서 킥킥대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도성진도 피씩 입꼬리를 올렸다. 그 미소는 이곳이 오직 공포만 도사린 곳이 아니라는 것, 살아 있다는 본능을 깨우는 작은 희망이었다. 대열은 느릿하게, 그러나 꿋꿋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그들의 머리 위로 동녘 하늘이 붉어지며 천천히 열리고 있었다.
도성진이 속한 제2작업반은 15호 관리소의 지휘 본부가 있는 구읍리에 소재했다. 본부 건물은 회색 콘크리트 덩어리로 길쭉했다. 처음부터 건축미는 안중에 없었다. 그렇게 설계할 리 만무했다. 개성이 아닌 통제, 곡선이 아닌 수직 명령을 고집하는 그 철골 위에는 오직 목적과 임무만이 세워져 있었다.
무미건조한 외관과 달리, 건물 2층 중앙에 자리 잡은 소장의 방은 '아방궁'으로 만들려고 작정한 듯했다. 가구 하나하나가 수용자들이 만든 예술품이었다. 작은 진열장 나무 표면도 그냥 매끄럽지 않았다. 대패질은 결마다 방향이 달랐다. 미는 각도에 따라 무늬처럼 다르게 보였다. 소파와 의자, 테이블 등 어느 것 하나 범용한 것이 없었다. 옛날 황제의 처소에서나 볼 법한 장식들로 아주 고급스러웠다. 금색만 아니었을 뿐 팔걸이며 등받이에는 바다의 파도가 음각돼 있었다. 손으로 만지면 물결이 흐를 것처럼 섬세했다.
방구석에는 팔뚝 크기의 인민군 병사들의 흉상이 병종 별로 줄지어 있었다. 방 한가운데는 짙은 옻칠이 빛나는 책상이 웅크리고 있었다. 죄수들이 일일이 손으로 깎아 만든 그 책상은 단순한 가구가 아니었다. 그 앞면에는 은빛 선으로 백두산이 새겨졌고, 아래의 숲은 나뭇잎 하나하나까지 약동했다. 자연의 일부를 옮겨와 옻칠로 붙여놓은 듯했다.
책상 위의 전화기에서 "따르릉!..."하는 소리가 울렸다. 소장은 곧바로 수화기에 손을 뻗지 않았다. 느긋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방한쪽 거울 앞으로 걸어갔다. 거울 테두리도 과했다. 누군가를 모시기 위해 특별히 제작한 액자 같았다. 첫 번째 벨이 끊기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그는 거울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아주 익숙하고도 공들인 웃음이었다.
입꼬리는 정확히 15도 올라갔다. 눈썹은 자연스럽게 살짝 치켜 세워졌다. 제 얼굴인데도 초면처럼 새로워 보였다. 그러나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솔직한 것들이 보였다. 광대뼈 아래는 굳어 있었다. 턱선에는 44년 지친 나잇살이 느슨하게 처져 있었다. 거울 속에 비친 것은 권위라는 껍데기와 체념이라는 속살이 정확히 반반씩 갈라진 두 겹의 얼굴이었다. 소장은 한참 그 틈을 찾으려다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아무튼."
소장의 입버릇은 늘 "아무튼"이었다. 말반동이 태반이고, 사람 목숨도 동강 나기 일쑤인 15호 안에서 긴말이나 설명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자신의 권위를 한마디로 대신할 때도 "아무튼"으로 충분했다. 소장에게 그보다 더 편리한 조선말은 없었다. 다시 전화기가 울렸다. 소장은 자기 자리로 돌아가 앉으며 수화기를 들었다.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다급했다.
"소장 동지. 저, 대열부장 맹인수입니다."
대열부장은 관리소 안의 하급 보위원과 수용자들의 인사기록을 관리하는 자리다.
"정치부장 동지가 후방부장에게 사망자 명단에 문제가 있다면서... 왜 62명이 빠졌냐고 물었답니다."
소장의 입술 주름이 살짝 구겨지려는 순간, 노크 소리가 났다. 곧이어 군인 하나가 여자 수용자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섰다. 30대 중반쯤으로 보였다. 고려호텔 안마사로 외국인에게 달러를 받은 죄로 잡혀 왔다. 군인은 여자를 남겨두고 방문을 닫았다. 수화기 너머로 대열부장의 보고가 계속 이어졌다.
"작년 사망자들까지 올해 배급은 계속됐는데, 그 식량은 다 어디로 갔냐고 묻습니다. 그리고 내부 처형자 명단까지 내놓으라고 야단입니다."
소장은 여자 수용자에게 사무실 끝의 안쪽 문을 가리켰다. '혁명화학습실'이라는 붉은 액자가 걸린 방이었다. 여자는 그 방이 익숙한지 들어가면서 문짝에 붙은 작은 금속 문패를 살짝 뒤집어놨다. '외출중'에서 '학습중'으로 바뀌었다. 소장은 부릅뜬 눈으로 그 문이 완전히 닫힐 때까지 지켜봤다.
"…아무튼, 이따 조직부장 집에 갈 테니까... 야, 너 창고 가서 내 차에 천연색 텔레비전 싣고. 아무튼, 점심에 내 방 들려."
그가 수화기를 내려놓았을 때였다. 노크 소리와 함께 다시 문이 열렸다. 여자 수용자를 넣었던 군인이 몸을 살짝 숙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정치부장 동지 오셨습니다…"
군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가에 정치부장이 들어섰다. 소장과 같은 대좌 계급. 그러나 그 존재감은 결이 좀 약했다. 소장은 혁명화학습실의 문을 힐끗 확인한 뒤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아이구. 연락도 없이... 아무튼, 잘 오셨습니다."
그는 문 쪽으로 걸어가며 몸을 비스듬히 돌려 소파를 가리켰다. 거기는 혁명화학습실에서 가장 먼 자리였다. 정치부장이 앉자 소장은 장식장 위에 놓인 녹음기의 스위치를 켰다. 스피커에서 낡은 음질의 혁명가요가 흘러나왔다. 군가와 선동 사이 어딘가를 부유하는 도식적인 선율이었다. 정치부장은 그 소음에 눈썹을 찡그렸지만 이내 조용히 말했다.
"제가 새로 와서 잘 몰랐는데… 그 내부자 처형 명단 말입니다."
소장은 입술을 삐쭉 내밀고 손등을 문질렀다.
"여기가 혁명화구역 아닙니까? 근데 날짜를 미리 정해놓고, 사고사로 위장해서 처형하라는 게 무슨…"
"그걸 왜 제게 묻습니까? 평양 본부에 있다가 오신 정치부장 동지께서 더 잘 아실 텐데…"
소장은 일부러 말끝을 흐렸다. 정치부장은 43세였다. 인생 경험도, 관리소의 경력도 선배라는 점을 강조하려는 듯 소장은 대화의 끝부분을 숨결에 섞어 흘려보냈다.
"저야 본부 간부부에 있었으니 여기 실정을 잘 모르지 않습니까."
정치부장의 모른다고 한 말이 썩 마음에 들었다. 소장은 입가에 야릇한 웃음을 올렸다.
"아무튼, 저도 요덕의 쫄따구 아닙니까."
두 사람 사이에 짧은 침묵이 흘렀다. 녹음기만 계속 혁명의 한길을 노래하고 있었다. 정치부장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럼… 김동규도 그렇게 처리되는 겁니까?"
소장은 하기 싫은 말을 꺼내듯, 먼저 한숨을 들이 내쉰 후 대답했다.
"내년 2월 15일까지라고… 못 박았으니. 아무튼, 그때겠지요."
"아무튼이 아니라 정확한 날짜와 시간을 알고 싶습니다."
소장은 정치부장의 눈길을 피하며, 자기 손등의 두드러진 핏줄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젊었을 때던가요? 김동규 밑에서도 일한 경력이 있다던데…"
정치부장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저는 김동규가 회고록 집필을 끝내는 즉시, 원고를 회수하라는 본부 정치국장 동지의 지시를 직접 받았습니다."
소장도 같은 어조로 말했다.
"나도 마치는 즉시, 영도 계승을 정면으로 반대한 그 악질 반동을 단 1초도 살려두지 말라는 본부 부장 동지의 지시를 받았소."
정치부장은 소장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했다.
"처형 방법은요?"
소장은 몸을 한쪽으로 기울이며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갔다. 묵직한 쇳덩이를 꺼내 책상 위에 툭- 하고 내려놓았다. 권총이었다.
"아무튼, 과로사라니… 집필 현장이겠지요. 이걸로."
정치부장은 말없이 권총을 내려다보았다. 그 총구가 향할 사람은 김동규였다. 한때 국가 부주석이었던 인물이다. 도성진과 함께 트럭에 실려 구읍리로 들어온 그 노인이었다.
1969년 4월, 그는 노동당 국제비서 직함으로 프랑스를 방문한 적도 있었다. 북한 내부는 물론 해외 언론에도 꽤 알려진 인물이었다. 그러나 김정일의 후계 권력에 반대한 죄로 그는 룡평 2급 관리소로 끌려갔다.
당조직지도부는 혁명의 1세대인 그에게 수령을 찬양하는 회고록을 쓰라고 요구했다. 김동규는 처음에 그걸 거부했다. 그러나 단지 자기와 가깝다는 이유 하나로 함께 끌려온 빨치산 동지 여섯 명 중 한 명이 눈앞에서 죽자, 결심을 바꿨다. 남은 다섯 명과 그들 가족만이라도 살려 달라는 조건이었다.
조직지도부는 그 요구를 받아들이며 단 하나의 날짜에 못을 박았다. 김정일 생일인 2월 16일 전날까지 회고록을 완성하라는 것이었다. 그 대가로 완전통제구역에서 혁명화구역으로 이감되었다.
단독막사, 보안 통제, 글쓰기만 허락된 유일한 수용자인 그는 죄를 범한 자가 2급 관리소 역사에서 3급 관리소로 '내려온' 첫 사례이자 마지막 인물이 되었다.
그러나 15호가 그를 위해 준비한 진짜 특별대우는 '과로사'였다. 이곳의 혁명화란 살아 돌아갈 수 있는 이유만을 강요하는 곳이 아니었다. 김동규 같은 내부 처형자 명부에 오른 이들에게는 죽어야 할 이유를 은밀히 만들어주는 곳이기도 했다.※ 다음 편에 계속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