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으로 버텼고, 농담으로 공포를 비틀었다"가족이 죽어야만 풀려나는 지옥 ‥ 요덕수용소 그 안에서 피어난 사랑과 우정, 그리고 해학'실존 인물' 증언 바탕 ‥ 리얼리티 극대화매주 월~금요일 '캠프 15' 1권 장기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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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노을 아래서"죄수 인수인계!"
지프가 멎기도 전에 차문을 열며 호송군인이 소리쳤다. 뒤따라 죄수 하나가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짐짝처럼 굴러떨어졌다.
이제 겨우 16세. 그의 이름은 도성진이었다.
성진은 보위부 예심초대소에서 1년을 버텨낸 끝에 결국 이곳 '15호 관리소'로 오게 됐다. 들머리에는 '조선인민경비대 2915부대'로 표시되어 군부대 주둔지처럼 보였다.
'정치범'이라 일컫는 사람들을 은밀하게 수용하기 위해 실제로 외곽 경비 임무를 푸른색 견장의 경비대 군인들이 맡고 있다. 하지만 철조망 안의 수용자들을 실질적으로 관리하는 숨겨진 주체는 황색계급장의 국가보위부다.
성진은 뒤로 묶인 팔을 비틀어 간신히 뒤쪽을 훔쳐보았다. 그제야 코앞에 버티고 선 철문이 눈에 잡혔다. 초록 페인트가 빛바랜 채 군데군데 벗겨져 있었다. 녹슨 자국은 피부를 찢고 부풀어 뒤틀린 살점 같았다. 좌우로는 한껏 벌린 양팔처럼 담장이 길게 뻗어 있었다. 그사이에 선 철문은 땅을 뒤집고 일어서다 멈춘, 머리 없는 괴물의 몸통 같았다. 그 앞에서는 끌려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삼켜지는 것과 영락없었다.
문 중앙에는 핏덩이처럼 불거진 붉은 별 하나가 시뻘겋게 박혀 있었다. 그 문이 애당초 닫기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억지로 열렸다. 땅을 부여잡고 버티며 질질 끌려가는 쇳덩이 소리는 도성진의 온 신경까지 닥닥 긁었다. 처음 맞닥뜨린 그 철문은 세상과 지옥을 가르는 첫 경계선에 불과했다. 거기서도 그는 다시 트럭에 실려 한참을 더 안쪽으로 끌려갔다.
트럭에 실려 가는 죄수는 2명이었다. 성진이 눈물을 닦다가 자기 가슴에 붙은 수번(囚番)을 자세히 보았다. '2작업반 9분조 7번'이라고 씌어 있었다.
맞은편에 앉은 백발 죄수가 입은 군청색 옷의 가슴팍은 비어 있었다. 멀쩡한 안경이며 온화한 미소까지 평범한 죄수 같지 않았다. 성진은 얼른 고개를 돌렸다. 정치범에게 웃음은 반항과 같아서였다.
트럭 후부에는 총을 든 호송군인 두 명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쫓아오는 흙먼지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덜컹거리며 가는 동안 성진의 심장 고동 소리는 묘하게 조용해졌다. 두려움이 흙먼지와 더불어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풍경은 예상보다 평온했다. 사람도 살림집도 보이지 않는 넓은 들판이었다. 푸른 옥수수밭이 널찍이 펼쳐져 있었다. 참새 몇 마리가 옥수수 숲속으로 사라지는 모습도 보였다.
"여기도 생명이 허용되는 곳이구나."
성진은 생각했다. 하지만 그 안도감은 오래 가지 않았다. 옥수수밭이 끝나자, 서서히 철조망이 눈에 들어왔다. 장승처럼 서 있는 경고판도 스쳐 갔다.
'들어가지 말 것!'
'섯! 쏜다!'
초라한 감시초소들도 드문드문 나타났다. 사람의 흔적이 보이자 오히려 더 뼛속 깊이 공포가 파고들었다. 트럭이 멈춘 곳은 엮은 통나무 외관의 작고 낡은 병실 앞이었다. 문 옆에는 글씨마저 흐릿해진 낡은 철제 문패가 삐딱하게 매달려 있었다.
'2작업반 관리실'
성진은 호송군인의 거센 손에 떠밀려 문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보다 안쪽의 정적이 귀를 더 눌렀다. 방안에는 젊은 중위가 앉아 있었다. 그는 2작업반 담당 보위원 최종배이다. 콧등은 잔뜩 치켜 올라 참지 못하는 성질을 그대로 드러냈다. 좁은 이마는 28세에도 불구하고 깊고 자잘한 주름들로 얽혀 있었다. 유난히 번들거리는 눈동자 안에는 설명할 수 없는 공허와 지워지지 않는 불안이 숨어 있었다. 거대한 공포 체제 안에서 분노를 무기로 삼아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던 남자의 신념 같았다.
방안은 눅눅한 먼지 냄새로 가득했다. 철제 책상 하나, 오래된 전화기 한 대, 그리고 정면 벽에는 선홍색 붉은 글씨로 쓰인 액자가 걸려 있었다.
'혁명의 계급적 원수들에게 죽음을!'
성진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자신을 향한 저주처럼 느껴져서였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왓!"
최종배의 대답과 거의 동시에 40대 중반의 수용자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중대장 선생님! 2작업반 9분조 1번! 선생님 호출받고 왔습니다."
너무 많이 맞아 다져진 소리처럼 들렸다. 최종배는 고개도 들지 않았다. 서류를 넘기는 손놀림만 분주했다. 보위원이 침묵할 때 죄수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 정해져 있는 듯했다. 남자는 곧바로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그의 이름은 박승민이었다.
1966년, 전 세계를 놀라게 했던 북한 축구 대표팀의 주전 미드필더였다. 잉글랜드 월드컵 8강의 전설은 아직도 평양 사람들 뇌리에 선명히 남아 있었다. 이름을 부르는 것이 금지된 이곳에서 사람들은 그를 '검은손'이라 불렀다. 그가 이곳에 끌려온 이유는 간단했다. 8강전 전날 호텔 밖에 나가 여자들과 어울렸다는 혐의였다. 당은 경기 패배의 책임을 '일탈'로 몰아 15호로 보냈다. 축구 인생이 끝난 지도 20년이 흐른 셈이다. 광대뼈 아래로 날 세운 턱선, 꾹 다문 입술에 감춰진 고집, 무엇보다도 모든 걸 견디다 못해 삶의 기회로 바꿔낼 줄아는 슛의 감각이 그의 두 눈 속에 아직 살아남아 있었다.
성진은 그의 가슴에 붙은 숫자를 보고 직감했다. 같은 9분조의 1번이다. 아마 이 남자가 자기 분조의 책임자일 것이다.
"너, 열여섯이야?"
"네!"
성진의 짧은 대답에 최종배는 그의 얼굴을 한참이나 노려보았다. 종잇장 같은 창백한 피부는 빛을 몰랐는지 희미하게 투명했다. 날카롭게 깎인 턱선 어딘가엔 아직 벗지 못한 유년의 잔영도 남아 있다. 그 위에 깊은 눈동자와 짙게 새겨진 눈썹이 또래와 다른 무게를 품고 있었다. 두려움과 철없음, 당돌함과 설명할 수 없는 직관, 그것들이 모여 한 소년의 표정을 얼개 짓고 있었다.
최종배는 입을 열려다가 막대기로 문가에 선 검은손을 가리켰다. 그는 다시 외쳤다.
"네, 선생님! 이 안에선 보위원 선생님을 반드시 '선생님'이라 불러야 합니다! 보위원 선생님은 우리의 인간개조를 책임진 혁명화 스승입니다!"
"규정도."
"네, 선생님! 허락 없이 고개를 들거나 눈을 마주치면 안 됩니다! 그땐 살해 의도로 간주돼 즉시 사살될 수 있습니다!"
성진은 빠르게 머리를 숙였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성진의 그런 즉각적인 반응이 마음에 들었는지 최종배의 목소리가 한결 느슨해졌다.
"여긴 정해진 형량이 없어. 나갈 때 알려주니까. 그건 나가서 세보면 되고...."
그는 깜빡 잊었던 생각을 다잡고 가려는 듯 손바닥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아, 제일 중요한 것! 여기선 수령님 존함을 함부로 부를 수 없다. 당의 배려로 석방될 때만, 그때만 공화국 공민의 최고 권리로 부를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거야. 알았어?"
"넷! 선생님!"
성진의 힘찬 대답이 사무실 안 공기를 북처럼 두드렸다. 마치 그 울림에 밀린 듯, 서류 더미 위에서 아버지 사진 한 장이 사르륵, 바닥으로 미끄러졌다.
성진의 시선이 그 사진 위에 꽂혔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사진을 주우려 하자, 곁에 서 있던 검은손이 잽싸게 성진의 팔을 잡아당겼다. 우악스러운 손에 성진의 관절이 비틀렸다. 성진이는 어린애처럼 몸을 바둥거리며 비명을 질렀다.
"이거 놔요! 선생님, 소원이 있습니다!"
'소원'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오는 순간, 검은손의 손아귀에 더욱 강한 힘이 실렸다. 정치범에겐 있을 수 없는 소원이자 무례였다.
최종배는 호기심을 느꼈는지 막대기를 바닥에 툭툭 쳤다.
"…뭔데?"
"부모님 사진, 갖고 들어가게 해주십시오. 혁명화를 더 잘할 수 있습니다!"
성진이 목청 높여 애원했으나 최종배는 냉소 섞인 웃음을 지었다.
"이 새끼야. 여긴 어차피 추억도 감성도 까맣게 재가 되는 곳이야."
그리고는 험악해진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당과 수령께 불효한 새끼한테는 자식 효도도, 부모 사랑도 없다! 이게 15호의 법이자, 형벌이야!"※ 다음 편에 계속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