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립석강 제방 위에서 수용자들은 무거운 돌을 가슴에 안고 같은 방향으로 달렸다. 그들을 향해 '감시반' 완장을 찬 죄수들이 막대기를 허공에 휘두르며 고함을 질러댔다.
"뛰라! 뛰라!"
"야! 너 일어나지 못해?"
그 고함들이 잦아들 무렵이었다.
"휴식! 15분 휴식!"
제2작업반 반장의 외침이 허공을 갈랐다. 9분조는 하나둘 검은손 주위로 모여들었다. 도성진은 무거운 돌을 드느라 안으로 굽은 허리와 다리를 뻗으며 기다랗게 누웠다. 그러자 누가 발로 그의 옆구리를 툭 건드렸다.
"앉아 있어. 처맞으려고. 눕긴 왜 눕는 거야."
성진은 화들짝 놀라며 몸을 일으켰다. 15호 수용자들은 잘 때만 눕는 게 허락되었다. 휴식마저 감시하는 공간이었다.
"남이 눈에 띄지 않는 게 오래 사는 방법이야."
가수가 옆으로 와서 조용히 말했다. 그러고는 성진의 옆구리를 발로 친 아저씨를 턱으로 가리켰다.
"리종옥 부주석 동지 아들이야. 별명도 '도련님'"
그 소리를 들은 성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와... 정말요?"
도련님은 옷을 훌쩍 벗고, 안감에 낀 먼지를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다들 쉴 때 이 잡아. 내게 옮기지 말고."
곁에 있던 주둥이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도련님은 개뿔."
도련님도 무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버지는 나랏일하고, 아들은 관리소 일한다."
주둥이가 받아쳤다.
"속상해하지 마. 딱 한 글자 차이잖아. 아버지는 정치인, 아들은 정치범."
짧은 농담에 9분조 사람들의 희미한 웃음이 번졌다. 그는 정말로 현직 국가 부주석의 아들이었다. 15호에서는 모르는 이가 없을 만큼 유명인사다. 보위원의 총구보다 더 큰 경종. '그런 사람 자식도 붙잡혀오는 곳'이라는 상징이었다.
도성진처럼 평범한 가정 출신의 정치범은 15호 전체에서도 소수에 불과했다. 아는 자가 먼저 나서고 보위부도 그 맨 앞줄, 가장 눈에 띄는 사람, 그러니까 비중이 상당한 사람부터 잡아들여야 실적이 쌓였다.
국가보위부 부부장은 자신의 충성을 입증하기 위해 직접 아들을 신고해 15호에 넣었다. 그러나 도련님은 자기가 직접 지은 죄로 들어온 진짜 반동이었다. 그는 소련 유학생으로서 김일성종합대학 물리학 교수였다. 강의 도중 주체사상을 맹신하는 학생에게 말했다.
"학생이라면 전공의식을 가져야지."
그 한마디가 화근이었다. 공개적인 강의 자리에서 사상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주체사상 원칙을 부정했다는 이유였다.
"우리 분조장은 1966년 월드컵 영웅이야. 별명은 검은손."
가수는 검은손을 말했지만, 도성진의 시선은 줄곧 한 사람, 금발에 푸른 눈의 남자에게 꽂혀 있었다.
"저... 아저씨는 외국인이에요?"
성진이 가수에게 물었는데 주둥이 목소리가 들렸다.
"조선에 인민이 부족해서 외국인을 납치해왔단다!"
'외국인'은 씁쓸하게 웃었다. 소련 남자와 조선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였다. 특이한 외모로 당사회문화부의 눈에 띄어 해외파견 공작원 교육을 받기도 했다. 탈북하려다가 붙잡혀 이곳까지 끌려왔다. '옹헤야'는 9분조원들이 지어준 별명이었다. '잡종'이라는 조롱을 밀어내기 위해 그의 어머니가 즐겨 부르던 민요 옹헤야를 따른 것이었다. 그때 검은손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래, 이제 막내 별명도 지어줘야지!"
관례상, 별명을 지으려면 먼저 '죄'를 알아야 했다. 성진은 자리에서 발딱 일어섰다. 반동 중에 자기가 상 반동이라고 떠벌리고 싶었다. 그는 평양시 신리고등중학교 학생이었다. 16세 소년이 받은 혐의는 '간첩죄'였다. 알고 보면 전말이 단순했다. 북한과 중국 사이를 가로지르는 두만강을 건넜다는 것. 그게 전부였다.
"네, 제 이름은 도성진. 아버지가 아팠습니다. 저는 아버지 고칠 약이 중국에 있다는 친구 말을 듣고..."
"뭔 죄냐고?"
검은손이 못 참고 다그쳤다. 모두가 도성진을 바라보았다. 그동안 없던 존재처럼 가만히 앉아 있던 월왕령까지 귀를 기울였다. 성진은 좀 더 또렷이 말했다.
"네. 저는 간첩죄였습니다. 보위부 1년 예심기간..."
"앉아, 앉아."
검은손이 성진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다른 사람들도 '간첩죄'에 더는 흥미가 없었다. 도련님이 금방 잡은 이를 보여주자, 다들 한방울 피를 가져간 그 죄에 더 집중했다.
"애 별명 뭘로 할 거냐고?"
짜증 섞인 목소리의 검은손 재촉에 주둥이가 생각 없이 대답했다.
"방귀 꼈다잖아요. 그럼 사회방귀지."
"사회도 불법이야. 독신자에서 제일 어리면 '얼라반동'이지 뭐."
도련님이 이를 잡으며 아무렇게나 내뱉은 말이었다. 그 한마디로 성진의 별명은 정리가 된 듯했다. 성진은 얼굴을 붉히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주둥이가 자기 무릎을 탁 치며 도련님에게 돌아앉았다.
"깜빡했다. 야, 가마치 좀 먹자."
북한에선 누룽지를 가마치라고 한다. 도련님은 이거나 먹으라는 식으로 자기가 잡은 이를 내밀었다. 주둥이가 그 손을 툭 치며말에 힘을 실었다.
"가족세대 그 여자 만나라니까. 얼마나 좋아! 다 먹으라는 거잖아."
분위기가 출렁거렸다. 사람들이 놀란 눈으로 주둥이와 도련님을 번갈아 쳐다봤다. 도련님은 그 시선들을 흘긋 훑더니 주둥이 얼굴에 대고 옷을 탁 털었다.
"꿈도 꾸지 마. 내가 부주석 아들인데."
"부주석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지금 네 꼴 봐. 어이구, 생 거지 주제에."
주둥이가 혀를 차며 돌아서자 가수가 끼어들었다.
"가마치는 또 뭔 소리요?"
주둥이가 손가락 하나를 곧게 세워 자기 입에 물었다 뺐다.
"가족세대 여자가 자기랑 이거 하면 준대. 가마치."
도련님의 얼굴이 붉어졌다.
"아니 형! 그걸 말하면 어떡해?"
"했으면 말 안 했지. 안 하잖아!"
"나 절대 안 해."
도련님은 진짜로 토라졌는지 홱 돌아앉았다. 이를 잡는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사람들이 더는 말하지 않았다. 마치 무관심이라는 합의에 도달한 것처럼 조용해졌다. 그러던 중, 성진이 눈치 없이 입을 열었다.
"여긴... 가마치 어디서 구하나요?"
도련님의 얼굴엔 꾹꾹 눌러 참는 울화가 진해졌다. 가수는 고개를 숙여 웃음을 참았다. 옹헤야는 손으로 코를 비틀어 막았다. 결국, 주둥이가 터뜨렸다.
"보위원 식당에서 일하나 봐. 그 여자 가족이."
와! 9분조에 웃음이 터졌다. 도련님은 애꿎은 도성진에게 신발을 냅다 던졌다.
"이 새끼가 정말…"
그 순간 모두가 빵하고 폭소를 날렸다※ 다음 편에 계속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