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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부장은 걸음을 멈췄다. 방금 소장 방에서의 대화가 귓가에 맴돌았다.
"조직부장이 내 방에 또 왔다 갔소. 본부에서도 퇴근하지 못하고 기다린다오."
"아직 24일입니다. 조금만 더 기다립시다… 지금 회고록 마지막 장을 쓴다고 해주십시오."
단독막사로 오는 내내, 정치부장은 몇 번이나 발걸음을 멈추었다. 누군가의 마지막을 향해 간다는 것은 길이 아니었다. 걸음도 아니었다. 막사 앞에서 더 가야 할지, 멈춰야 할지 몰라 서성이고 있을 때였다. 어디선가 얇고 평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동규와 도성진. 두 사람이 막사 앞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도성진은 손에 누렇게 익은 옥수수 세 개를 쥐고 있었다.
정치부장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 어린놈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손목을 끌어다 쥐었다.
"네 손에… 왜 이게 있어?"
도성진이 겁을 먹고 움츠리자 김동규가 미소를 지었다.
"내가 준 거요. 주고 싶어서."
그 말에 정치부장의 손이 풀렸다. 도성진은 뒷걸음질 쳤다. 달아나기 직전, 김동규가 다정히 불렀다.
"성진아… 그동안 고마웠다. 할아버지라고 불러줘서."
도성진은 이별처럼 말하는 김동규를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할아버지에게 허리를 깊이 숙였다. 옥수수를 주머니에 쑤셔 넣은 아이는 뛰어가면서도 한 번 더 돌아보았다. 정치부장의 시선이 그 아이에게서 김동규로 옮겨졌다. 그는 아이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냥 손을 흔들었다. 끝내 어둠만 남은 그곳을 좀 더 서서 지켜보았다.
"오늘은… 잡수시지 그러셨습니다."
정치부장의 목소리였다. 그는 김동규를 따라 막사 안으로 들어서면서 그 말이 제일 편했다. 김동규는 자리에 앉으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삶의 무게를 다 내려놓는 홀가분한 소리였다.
"내가… 그 군복 입은 사람한테 이런 말 하게 될 줄은 몰랐소, 정말 고맙소."
정치부장은 고맙다는 말이 더 부끄러웠다.
"참 위안이 되는구려. 마지막 가는 날에. 누구 손에 뭔가 줄 수 있다는 게…"
김동규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이 끝에 선 사람 심리가 뭔지… 궁금하지 않소?"
정치부장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마주 앉았다. 김동규는 시선을 허공 어딘가에 고정한 채 말을 이었다.
"미련일 줄 알았소. 후회일 줄도 알았고… 겁이겠지 싶을 때도 있었소."
그는 앞에 놓인 회고록을 천천히 끌어당겼다. 마치 아무 소용이 없는 종잇조각처럼. 그 위에 먹물 묻힌 펜 끝으로 작은 점 하나를 찍으며 말했다.
"이 끝에 와 보니 말이오, 죽음이 점인 줄 알았는데… 쉼표 더구만."
김동규는 한 박자 숨을 쉬었다.
"나 대신 살아줄 사람들의 추억, 기억, 그리움... 그리고 나 대신 살아줄 그 소망까지."
그러고는 펜을 다시 들어 종이에 곡선 하나를 그리며 웃었다.
"삶이 더 애매하고 짧더구만. 이 물음표처럼."
정치부장의 눈이 김동규의 손에서 아무렇게나 낙서 되는 회고록으로 내려앉았다. 김동규는 먹물을 다시 진하게 묻혔다. 이번엔 종이에 크게 하나의 부호를 그려 넣었다.
"이 느낌표 말이오… 한 생을 끝맺는 감탄표가 뭔지 아시오?"
정치부장은 입을 굳게 다물고 펜 끝을 지켜보았다. 김동규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평온이요. 이만큼 살았으니, 이대로 가도 되겠다 하는 마음. 난 덤으로, 성진이란 그 애에게 뭔가 남기고 가니 내 감탄부호는… 그 옥수수요."
정치부장은 모자를 벗었다. 숨을 깊게 내쉬어야만 했다. 이내 그 숨이 부끄러워지며 고개를 숙였다. 김동규는 먹통을 끌어다 회고록 옆에 바투 갖다 붙였다.
"근데 말이오. 그 마지막을 모르는 오만한 이 펜대란 놈은 말이오… 먹물의 감사함은 잊고,"
그는 회고록의 갈피를 대충 손으로 훑었다.
"자기 혼자 이걸 다 쓴 것으로 착각하지."
오른손에 들린 마른 펜대를 들어 허공에 흔들었다.
"그러다 먹물이 떨어지면… 그땐 이렇게 종잇장에 화풀이하는 흉기로 변하지."
그는 그 펜으로 회고록의 종이 위를 깊이 찔렀다. 그리고 좌우로 거칠게 찢었다. 회고록도 펜도 다 훼손되었다. 그의 얼굴엔 말로는 다 쓰지 못한 회한이 침묵보다 깊게 번지고 있었다.
"이 15호에 갇힌 사람들은… 종잇장이오."
김동규는 정치부장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당신처럼 그 옷 입은 사람들은 먹물이고... 먹물은 고갈되거나, 실수로 이럴 수도 있고."
그는 손등으로 책상 위의 작은 유리병을 밀었다. 먹물 병이 넘어졌다. 먹물은 서서히 회고록 위로 퍼졌다. 글자 위에 스며들었고, 날짜 위에 번졌고, 누구도 다시는 읽을 수 없을 페이지까지 적셨다. 자신이 쓴 회고록 위에 자기 손으로 먹물을 쏟아부은 김동규의 얼굴은 결연했다. 정치부장의 놀란 눈은 책상 위에서 그 얼굴로 옮겨졌다. 김동규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신이 시커먼 양심이 못 된다 싶으면… 차라리 미친 척해서라도 맹물로 사오. 그게… 제 인생을 다 사는 방법이오."
밖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디선가 몰려오는 기척이었다. 김동규는 먹물이 뚝뚝 떨어지는 손으로 달력 앞에 가 섰다. 정치부장도 천천히 모자를 쓰며 일어섰다.
"...왜 굳이 이날을 선택하셨습니까? 개인적으로 묻는 겁니다."
김동규는 대답 대신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젠… 시간이 다 됐겠구만."
정치부장이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11시 59분 57초.
초침은 정확하게 움직였다.
58.
59.
0!
"이젠 24일이 지났습니다."
정치부장은 힘들게 대답했다. 그러자 24일을 넘긴 그 초침 앞에서 김동규는 먹물 묻은 손을 쳐들었다. 달력의 '12월 24일', 그 위에 굵고 검게 X 하나를 그었다. 그것은 달력에 기록하던 김동규 회고록의 마지막 한 문장이었다.
"...기다려줘서 고맙소."
그는 마지막으로 정치부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주체 조선의 부주석이었던 이 김동규가 죽고 싶었던 날은… 실은 24일이 아니오."
그는 25일 날짜를 손끝으로 가리켰다.
"오늘이오. 진짜 신(神)이 태어난 12월 25일, 이날이오."
정치부장의 두 눈이 굳어졌다. 말을 끊은 사람과 말을 잃은 사람이 마주 보았다.
그때였다. 문이 뜯길 듯 거칠게 열렸다. 차가운 바람과 함께 조직부장이 먼저 들어섰다. 그 뒤로 자동소총을 든 두 군인이 잰걸음으로 뒤따라 들어왔다. 구두가 바닥을 긁는 소리가 튀었고, 방 안의 온기도 금세 사라졌다.
조직부장은 엄숙하게 방안을 둘러보았다. X로 가득 찬 달력. 먹물이 흘러내려 검게 번진 회고록. 그 흔적들 위로 아직 마르지 않은 의미들이 조용히 흘러내리고 있었다. 조직부장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손에 들고 있던 가죽장갑 한 짝을 흔들었다.
그 순간 정치부장은 고개를 돌렸다. 그 정면에 김동규의 감탄표가 아직 떠 있었기 때문이었다. 총성이 터졌다. 어지럽게 불꽃이 정치부장의 얼굴로 번졌다. 눈꺼풀 사이를 지나, 입술 위로 흩어졌다.
뚜-뚜-뚜-뚜-뚜—!
그 총성이 15호의 밤을 흔든 뒤 한 시간쯤 지나서였다. 처형의 울림은 사라지고 흔적을 지우기 위한 작업만이 남았다. 김동규가 인생의 감탄부호처럼 자부했던 옥수수! 그 옥수수가 맺어준 인연이었던가. 마지막 배웅자로 9분조가 지정되었다. 정치부장이 도성진과 김동규의 관계를 알아서 배려해준 것이 아니었다. 15호에서는 우연마저도 미움과 앙심으로 굴절된 필연이었다. 먼저 '시체처리작업' 지시를 받은 자는 미꾸라지였다. 신난 얼굴로 막사로 돌아온 그는 곧장 9분조를 깨웠다. 검은손은 하밥 먹는 분조라며 항변했어도 미꾸라지에겐 그것도 이유였다.
"그럼, 성진이만이라도…"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미꾸라지의 발이 자고 있던 성진의 엉덩이를 세게 걷어찼다. 어쩔 수 없이 9분조는 남들이 모두 잠든 그 시간에 '시체처리작업'에 동원되었다. 그들은 삽과 곡괭이를 들고 늘 작업장으로 오가던 길목, 독신자구역 경계 철문 앞으로 향했다. 그곳엔 군인 넷이 총을 들고 서 있었다. 그 옆에 최종배가 기다리고 있었다. 희미한 새벽어둠 속에서도 그의 그림자는 금속처럼 서늘하고 분명했다.
최종배는 담뱃불을 들어 무언가를 가리켰다. 그 불빛이 가리키는 곳에 들것 하나가 놓여 있었다. 새벽의 어둠이 다 그 위에 모여 있는 것처럼 그 형체는 유독 꺼멓고 묵직하게 보였다. 시신이었다.
검은 천으로 얼굴을 단단히 싸매 가렸고, 몸 위엔 가마니짝이 아무렇게나 덮여 있었다. 그 아래로는 두 발이 불쑥 나와 있었다. 그 중 왼발엔 신발이 없었다. 맨살이었다. 그 하얗고 텅 빈 왼발이— 오히려 죽은 사람의 얼굴 같았다.
성진은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그가 늘 찾고 기대하던 '옥수수 할아버지'였는데도 말이다. 어젯밤 자신을 기다리며 막사 앞에 서 있던 그 자리에— 지금은 굳은 채로 누워있는 김동규였는데도 말이다. 그러나 성진이만 몰랐던 것이 아니었다.
9분조원들 모두 마찬가지였다. 매일같이 옥수수 세 개를 건네주던 그 손이, 이제 더는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9분조는 결국, 김동규를 묻는 동지가 되었다. 말없이 들것을 들고, 침묵만 가득한 그 어둠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손전등을 든 최종배가 앞서고 다른 군인들은 불을 밝히며 그 뒤를 따랐다. 그 빛은 주변의 안개를 밀어내지 못하고, 오히려 그 안에 갇힌 채 허우적거렸다. 땅을 밟을 때마다 누군가의 발아래에서 얼음 조각들이 툭툭 부서졌다.
성진은 그 소리들이 마치 시체에서 나는 소리 같았다. 입도 닫지 못하고 아직 열려 있는 마지막 비명처럼 들렸다. 하지만 삐죽 나온 왼발은 맨살로 고요했다. 살아 있는 자들의 무감각을 탓하지 않는다고 거듭 흔들어 위로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15분쯤 걸었다. 최종배가 불쑥 멈추라고 지시했다.
"이쯤 어디, 아무 데나 묻어."
최종배의 손전등이 계곡을 대충 휘저었다. 먼저 검은손이 주변을 둘러보며 곡괭이로 땅을 두드렸다. 그나마 평평한 곳을 고르고 있었다. 이윽고 그는 한 곳에 멈춰 곡괭이를 힘껏 내리쳤다. 눈과 흙이 뒤섞인 너른 땅이었다. 삽을 쥔 성진의 손이 떨렸다. 그것은 추위나 배고픔 때문이 아니었다. 눈앞에 놓인 이 잔혹한 역할, 누군가를 묻는 자로서의 무력하고도 냉정한 사명. 그것들이 땅에서 올라와 손끝까지 아프게 해서였다.
곡괭이 날이 박힐 때마다 딱—딱— 파열음이 새벽 공기 속을 찢었다. 불꽃처럼 튄 얼음 조각 하나가 성진의 뺨을 스쳤다. 그 순간, 시체가 일어서 손을 뻗은 것처럼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 죽은 사람 옆에서 그들은 말없이 땅을 팠고, 보위원들은 잡담을 나눴다.
"이거 봐. 야광이라 파랗게 다 보이지? 봐봐."
최종배는 손목을 들어 몰려든 경비병들에게 시계를 자랑하고 있었다.
"어디, 저도 좀 봅시다."
"진짜 신기합니다. 이거 어느 나라 겁니까?"
"그냥 봐봐, 손전등 댔다가 치워봐. 더 환하지?"
"우와. 전지 약 들어가는 것도 아닌데, 이게 어떻게 가능합니까?"
죽은 이를 묻는 곁에서, 빛나는 시계를 자랑하는 그들. 죽은 자의 체온은 사라졌는데, 그들은 빛도 아닌 그 푸른 점들에 열을 쏟고 있었다. 도련님이 뒤를 돌아보자, 최종배는 시계에 대한 자부심까지 던지며 성질을 부렸다.
"야, 빨리 안 해? 다들 증오하면서 묻어. 혁명화도 안 되고 죽는 놈은, 죽어서도 반동이니까!"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주둥이의 곡괭이가 땅을 쾅, 쾅, 내려쳤다. 날이 박힐 때마다 그는 소리쳤다.
"원수를 묻자! 원수를 기억하자! 원수를 증오하자!"
9분조원들이 하나가 되어 소리쳤다. 공기 속으로 퍼져나간 그 울림은 단순히 묻힌 자의 한을 대신하는 소리만은 아니었다. 그건 살아남은 이들 각자에게 되돌아와 스스로를 다짐하게 만드는 목소리였다.
"이젠… 묻자."
검은손의 목소리에 주둥이와 옹헤야, 도련님은 들것 쪽으로 다가갔다.
"더 깊게 파야 하지 않나요?"
도성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묻는 규정이 있어."
가수가 짧게 대답했다. 주둥이와 옹헤야가 시신을 옮겨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 가슴 위에 올려주었다. 마지막 존엄이나 이름도 없이, 다만 정리되는 자세였다.
"잠깐만."
분조원들이 삽을 다시 드는데 분조장의 목소리가 막아섰다. 그는 허리를 굽혀 시신의 풀어진 단추 두 개를 차분히 채워주었다.
"이젠… 묻자."
그의 말은 묵념처럼 들렸다. 성진은 남의 죽음이 신성해야 혹시나 자기가 묻힐 때도 묻는 손에 한 줌이라도 더 부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도성진의 턱에서 땀방울이 뚝, 뚝 떨어졌다. 거의 흙에 골고루 가려지자, 분조원들이 하나둘 허리를 펴며 고개를 숙였다.
그들의 얼굴은 묻어주고도, 묻힌 자에게 사과하고 있었다.
"손등이 보여요. 흙을 더 덮어야 하지 않나요?"
도성진이 뒤를 돌아보며 다시 말했다. 그 말에 모두의 시선이 그를 향해 돌았다. 15호는 사람이 묻히는 곳이지만 묘의 봉분은 하나도 없었다. 죽어도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무덤은 '평토(平土)'라 불렸다. 죽어서도 편히 묻히지 못하는 시체였다.
삽과 곡괭이를 든 사람들이 자리를 뜨면 언젠가, 냄새를 따라 짐승들이 몰려왔다. 살점은 물어뜯기고, 뼈는 세월의 눈비에 녹았다.
평토는 죽음에도 법을 만든 보위부의 작품이었다. 그 법은 시신을 숨기기 위한 법. 저들의 만행과 역사를 지우기 위한 법이었다.
15호는 그런 땅. 그런 평토였다. 그 평토를 밟으며 9분조는 말없이 막사로 돌아갔다. 저벅, 저벅, 그 새벽만큼은, 땅에 붙은 9분조의 발바닥이 묻을 때의 감각을 놓지 못했다. 그 속에서 성진은 손에 남은 흙을 툭툭 털었다. 방금 일을 손끝에서 떨쳐내고 싶은 듯이 옷에 문대기도 했다.
"막사복귀!"
철문 안으로 들어서며 최종배가 마지막 명령을 던졌다. 그와 헤어진 뒤였다. 무심히 단독막사 쪽을 돌아보던 성진은 걸음을 멈췄다. 한겨울인데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늘 단단히 닫혀 있던 그 막사의 문이, 텅 비어 벌어진 채, 어딘가를 향해 열려 있었다. 그런데도 불이 켜져 있는 것이 더 이상했다.
성진은 천천히 마치 무언가에 이끌리듯 문 쪽으로 다가갔다. 창문 옆에 섰다. 조심스럽게 안을 들여다보았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톱밥 위에 번진 피였다. 그 바닥에 신발 한 짝이 있었다.
딱 봐도 왼쪽 신발이었다. 도성진의 눈이 조금씩 뜨거워지며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숨이 막혔다.
가슴 안에서 무언가가 부서졌다. 금방 자신이 묻었던 그 시신 하나가 누구였는지, 쏟아지는 눈물이 먼저 말했다. 뒤따라 온 9분조도 그제야 함께 알았다. 시신의 주름 깊던 그 손이 자기들에게 옥수수를 주었던 그 손임을 상기했다. 성진은 자기가 온 길을 다시 되돌아봤다. 숨을, 울음을, 삼키려다 목놓아 소리쳤다.
"……할아버지!"
그 목소리는 막사에 부딪혔고 언덕 위 돌벽에 부딪혔다. 그리고 차디찬 새벽하늘로 튕겨 올라 메아리로 되돌아왔다.
"할아버지—!"
도성진이 그렇게 불렀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김동규 스스로 회고록을 훼손한 여죄 때문이었을까. 분명한 건, 김일성은 자신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전권 속에서 김동규에 대해 단 한 글자도 언급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평북 어느 농민의 이름은 장황히 남기면서도 함께 무장을 들고 만주를 누볐다는, 해방 후 최초의 혁명 공산정권을 함께 세웠다는 동지는 지워졌다. 그는 혁명 1세대로 국가 부주석이었다. 북한 역사 속 가장 오래된 이름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 이름은 사라졌다.
기록에서, 사진에서, 회고에서 지워지고 배제되었다. 한 소년의 외침만이 그를 다시 부르고 있었다. 그 외침은 세상 어디에도 남지 않은 이름 하나를 얼어붙은 수용소 담장 너머로 단 한 번 되살려내고 있었다.※ 다음 편에 계속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