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뜨거운 햇살이 머리 위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립석강 강둑을 따라 줄지어 쪼그려 앉은 수용자들은 각자 분조별로 주먹밥을 허겁지겁 먹었다. 시래기와 뒤섞인 옥수수 몇 알이라도 놓칠세라 손과 입이 쉴 새 없이 분주했다. 하지만 성진은 그 무리에 끼지 못했다. 작은 돌무더기 옆에서 혼자 고개를 떨군 채 웅크리고 있었다. 배가 고파 눈앞이 아찔하게 돌았지만 차마 일어날 수 없었다.

    "아침에 그러지 말걸." 

    텅 빈 속을 두드리며 성진은 후회를 삼켰다. 그래서 미운 얼굴들이 더 또렷하게 떠올랐다. 최종배, 미꾸라지, 월왕령. 그 이름들이 허탈하게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런 성진을 보며 분조원들과 함께 밥을 먹던 가수가 걱정했다.

    "얼라반동 우는 거 아냐?"

    검은손의 목소리는 거칠었다.

    "냅둬. 욕심부리면 혼자 된다는 걸 배워야 해."

    조금 뒤였다. 멀리 다른 분조 쪽에서 "영차! 영차!" 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 앞에선 왜소한 여자아이가 수레를 필사적으로 밀고 있었다. 가족세대 3작업반 2분조 김상미였다. 바퀴가 돌부리에 깊숙이 박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양손으로 밀고 당겨도 수레는 요지부동이었다. 그걸 본 독신자 남자들이 깔깔 웃으며 놀려대듯 소리쳤다.

    "영차! 영차! 조금만 더! 영차!"

    남자들의 광기 섞인 조롱에 김상미는 더 초조해졌다. 수레 손잡이를 부여잡고 바둥거렸다. 그 광경을 보다못해 도성진이 천천히 일어섰다. 비틀비틀, 마른 나무처럼 흔들리는 걸음이었다. 성진이 수레 뒤에 다가서자 제방을 들썩이던 남자들의 함성은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야 이 새끼야! 당장 오지 못해?"

    정적 속에서 검은손의 외침이 일어섰다. 9분조원들만이 아니라 다른 분조원들도 긴장해서 성진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는 들은 척도 안 했다. 수레 뒤에서 상미에게 퉁명스럽게 말했다.

    "야. 밀어. 하나... 둘..."

    그러면서 힘껏 밀어주었다. 몇 차례 시도 끝에 수레가 덜컥 돌틈에서 빠져나왔다. 김상미가 수줍어하며 고맙다고 입술을 떼기도 전에, 반대쪽에서 번개처럼 고함이 터졌다.

    "야! 7번! 9분조 7번!"

    최종배였다. 도성진은 수레에서 몸을 떼며 고개를 돌렸다. 그의 고함과 강렬한 눈빛에 성진이 당황했다. 최종배는 성진이 앞에까지 잰걸음으로 다가왔다.

    "왜 남의 혁명화를 도와줘? 네가 저년 대신 살아줄 거야? 이 안에서. 그게 불법인 줄 몰라?"

    도성진은 입을 열지 못했다. 그게 불법인 줄 몰랐다. 오히려 돕는 건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김상미는 수레 뒤로 덜덜 떨며 몸을 숨겼다. 최종배가 고개를 홱 돌리며 외쳤다.

    "식사 그만! 전체 일어섯! 바로 작업!"

    짧은 명령에 강둑 위에 남아 있던 마지막 숨까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그 사건까지 겹치며 그날은 성진이가 15호에 입소한 뒤 가장 고된 하루가 됐다.

    "점심은 아침과 달라. 굶으면 하루 못 버텨."

    아침 막사에서 월왕령이 했던 말이 돌 하나하나를 들 때마다 무겁게 체감되었다. 하지만 그것이 고통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김상미의 혁명화를 도왔다는 죄 아닌 죄로 기합도 따로 받았다.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점심 식사 시간을 빼앗긴 2작업반 수용자들의 분노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도성진을 에워싸고 주먹을 휘두르려는 분조도 있었다. 옹헤야가 제 때에 막아주지 않았다면 성진의 하루는 피로 끝났을지도 모른다.

    어느새 해가 서서히 룡평산 너머로 기울기 시작했다. 2작업반 반장의 외침이 다시 터졌다.

    "15분 휴식!"

    짧은 구령 하나에도 9분조원들은 거의 본능처럼 검은손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성진이 때문에 더 힘든 작업이었지만, 그렇다고 불평하는 조원은 없었다. 저마다 가쁜 숨만 몰아쉬며 엎어지듯 달려왔다. 맨 마지막에 도착한 주둥이는 털썩 주저앉으며 어딘가를 손으로 가리켰다.

    "얼라반동, 저기 왜 혼자 있어? 강냉이밭 노리는 거 아냐?"

    장난스럽게 내뱉은 그의 말에 9분조원들의 시선이 그 방향으로 집중됐다. 붉게 타오르는 저녁노을 아래 옥수수밭은 핏빛 강물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황혼에 물든 그 잎사귀들은 바람결에 가볍게 흔들렸다. 그 소리가 밭의 신음처럼 귓전을 울렸다. 주둥이는 옥수수 잎이 유난히 풍성한 한 구역으로 길게 팔을 뻗었다.

    "저기가 시체가 많이 묻힌 곳이야."

    도련님이 콧방귀를 끼었다.

    "치, 지가 묻혀봤나?"

    "봐봐. 딴 데보다 강냉이가 잘 자랐잖아. 여기 비료가 있어? 뭐가 있어?"

    주둥이의 말에 9분조원들은 아무도 반박하지 않았다. 검은손이 나뭇가지를 주워들며 조용히 말했다.

    "그쪽은... 겨울에 묻힌 사람들이고."

    말끝이 이내 옅어지더니 가지 끝으로 옥수수가 듬성듬성 자란 허전한 구역을 가리켰다.

    "저쪽은 가을 되면... 저기 몇이 묻힐 거야."

    도련님이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가을이요...? 뭘 보구요?"

    검은손은 담담하게 설명했다.

    "저긴 강냉이가 아예 없거나 다른 데보다 덜 자랐잖아. 봄에 씨앗을 뿌리지 않고 몰래 먹어버린 거지. 강냉이 분조는 가을까지 자기 밭을 책임지게 해. 저기만 비었으니 맞아 죽든 구류장 가든 처벌이 뻔하지."

    그의 말에 9분조 수용자들의 눈빛이 하나같이 침울해졌다. 누구 하나 소리 내어 말하지 않았지만 다 같은 감정을 느꼈다. 옥수수 잎들이 붉은 노을을 머금고 끝없이 흔들렸다. 죽음을 기억하려는 땅의 울렁임처럼 보였다. 파란 본색을 빼앗긴 실존들이었다.

    멀찍이 떨어진 돌무더기 옆에는 도성진이 홀로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목 끝까지 차오른 울컥거림을 참으려 고개를 푹 숙인 모습이었다. 배고픔은 이미 감각이 아니었다. 절망이 점점 더 아래로 꺼지다 못해, 그 맨 밑바닥에 남은 한숨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생각하는 것도 사치였다. 머릿속엔 그저, 끝났으면 좋겠다는 막연한 감정만 떠다닐 뿐이었다.

    그의 발끝 곁으로 개미 한 마리가 빠르게 기어가고 있었다. 그 조그만 생명조차 자신보다 더 강해 보였다. 성진은 살점이 찢겨 피가 마른 손바닥을 새삼스럽게 들여다보았다. 그런데 시야에 불쑥 나타나는 다른 손이 있었다. 그 손바닥 위에는 절반의 주먹밥이 놓여 있었다. 도성진은 고개를 들었다.

    그 고마운 사람은 월왕령이었다. 순간 울어야 할 이유가 밀려왔다. 그게 뭔지 딱히 몰라서 눈물이 먼저 흘렀다. 목 안이 따끔하고 숨이 턱 막혔다. 입이 떨리고 소리가 새어 나왔다.

    "형... 설마, 안 먹고... 나 주는 거예요?"

    월왕령은 처음으로 웃었다.

    "미쳤냐? 난 절반도 배불러."

    성진의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것은 주먹밥이 아니었다. 생존이었다. 몸이 아니라 영혼이 먼저 채워졌다. 그 고마운 한 입, 한 입이 어루만져 주고 위로해주고, 달래주며, 그렇게 씹을수록 눈물이 났다. 성진이 울면서 먹는 동안 월왕령은 옆에 앉아 주었다.

    태양을 마주하고 둘은 나란히 앉았다. 붉게 물든 하늘 위 룡평산 능선에 해가 반쯤 걸쳐 있었다. 붉은 산등성이가 꿈틀거리며 숨 쉬는 듯했다. 월왕령이 헝겊이나 다름없는 장갑이지만 성진의 손에 얹어주었다.

    "나 손 안 아파요."

    성진이 장갑을 거절하니 월왕령은 자기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거칠게 갈라진 손바닥, 빛바랜 굳은살이 얹힌 그 손은 흙과 돌을 쥐고 살아온 축적의 시간 그 자체였다.

    "봐봐, 내 손. 얼마나 단단한가."

    성진은 신기하다는 듯 그의 손바닥을 쓸어 만졌다. 까끌까끌한 굳은살 사이로 어린 손끝이 조심스럽게 스쳤다.

    "와... 이거 다 굳은살이에요?"

    월왕령은 슬쩍 웃었다. 한 번도 뽐낸 적 없는 생존을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내보이는 뿌듯함이었다.

    "찔러도 피가 안 나. 룡평 손이라서."

    "정말요? 찔러 봐요?"

    성진은 어린애처럼 웃었다. 월왕령도 따라 피식 웃었다. 성진은 한참 망설이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형이라 불러도 돼요?"

    말을 꺼내고도 스스로 민망했는지 성진은 멋쩍게 웃었다. 월왕령은 담담하게, 그러면서도 깊은숨을 묻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부르고 싶으면 부르든가."

    그 단순한 허락에 성진은 어설픈 안도감으로 다시 밝게 웃었다.

    "형, 난 형이 부러워요."

    "뭐가?"

    되묻는 월왕령의 어투에는 이미 모든 것을 잃어본 자 특유의 무심함이 깃들어 있었다. 성진은 두 손으로 무릎을 감싸 안고 허공을 바라보다가 아주 순진한 얼굴로 말했다.

    "저 산이요. 아주 가깝잖아요. 소리쳐도 들릴 것 같아요."

    그의 말에 월왕령도 고개를 들었다. 노을에 잠긴 룡평산은 가까워 보였지만 걸어서는 결코 닿을 수 없는 아득한 거리였다. 아득하고 슬프도록 먼 거리였다. 성진은 다시 입을 열었다.

    "형 아버지도 아마 저 산 너머에서 형 생각하고 있을 거예요."

    그 말에, 월왕령의 눈빛이 떨렸다. 그 눈동자 안에 맺힌 것은 당혹감이었다. 기억이 아니라 늘 숨겼던 깊은 속이 드러날까 봐, 마음을 급히 닫는 초조함이었다. 채 닫히지 않은 그 틈으로 가만히 기억들을 떠올렸다. 어머니가 눈을 감던 날부터 아버지가 아기를 품고 집집마다 젖을 얻으러 다니던 저녁, 짐을 싣고 15호로 향하는 군인 트럭을 따라오다 먼지 속으로 사라지던 작은 강아지... 월왕령은 숨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1분 후 작업 시작!"

    또다시 2작업반 반장의 작업 지시 고함이 멀리서 터졌다. 그러자 성진이 벌떡 일어났다.

    "형!"
     
    그는 월왕령의 팔을 덥석 잡아당겼다.

    "형이 소리치면 아버지가 들을지도 몰라요. 나 봐요."

    그리고는 룡평산을 향해 목청껏 외쳤다.

    "작업 시작!"

    순간, 제방 위 남자들이 모두 쳐다봤다. 최종배가 담배를 피우다 켁켁 기침을 터뜨렸다.

    "저게 돌았나?"

    성진은 머뭇거리지 않았다. 표정까지 간절하게 월왕령을 재촉했다. 

    "형, 어서요!"

    성진이의 강요에 못 이겨 일어선 월왕령의 눈은 이미 젖어 있었다. 천천히 두 손을 모았다. 그리고 붉은 하늘을 향해 가슴이 터져라 힘껏 외쳤다. 

    "작업 시작!"

    그 외침은 룡평산을 넘어 노을 속으로 메아리쳤다. 성진과 월왕령. 두 사람은 나란히 아버지에게 닿기를 바라며 다시 외쳤다.

    "작업 시작!"

    메아리는 바람을 타고 핏빛 하늘 아래로 길게 퍼져나갔다. 그 메아리 끝에서 두 사람은 아주 잠시, 자유로웠다.


    ※ 다음 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