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시간쯤 지나 2작업반 반장의 외침이 들렸다.

    "점심시간! 점심시간!..."

    15호의 점심은 아침에 나누어진 주먹밥으로 때웠다. 말이 밥이지 옥수수와 다진 시래기로 만든 주먹밥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수용자들은 그것을 '숟가락'으로 먹었다. 식사의 위로였다. 그 시늉이 허기를 달랬고, 도구로 먹었다는 품격이기도 했다. 15호에서 숟가락은 생명줄이었다. 가슴에 단 수번호가 '수용소의 낙인'이라면 목에 건 나무 숟가락은 '자기 손으로 만든 목숨의 한 조각'이었다. 

    무엇보다 그 숟가락은 나무를 깎아 만든 자서전이었다. 누가 어떤 마음으로 만들었는지 무슨 문양과 글자를 새겼는지 숟가락 하나로 그 사람의 인생을 읽을 수 있었다. 그래서 시체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얼굴이 아니었다. 목에 걸린 숟가락이었다. 살아 있을 땐 생존의 도구였고, 죽고 나면 그 증거였다.

    자기 몸에서 가장 가까운 숟가락인지라 안 좋을 때도 있었다. 허기진 날에는 특히 그랬다. 빈 숟가락이 살갗에 닿을 때마다 살고자 했던 의지보다 죽고 싶은 절망을 재촉했다.

    성진도 아침에 검은손에게서 숟가락만 받으면서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터져 나왔다. 가수는 성진에게 분조의 결속력은 점심시간의 '숟가락 풍경'만 봐도 알 수 있다고 설명해줬다. 각자 주먹밥을 따로 먹는 분조는 곧잘 싸움이 터졌다. 그중 몇 명은 그해 겨울을 넘기지 못했다. 반면, 모두의 밥을 한군데 모아 풀이나 버섯을 넣고 비벼 숟가락으로 나눠 먹는 분조는 긴 겨울도 함께 무사히 넘겼다.

    오늘도 9분조 수인들은 각자 들고 온 주먹밥을 양동이에 모았다. 옹헤야가 품속에서 봉지 하나를 꺼냈다. 간밤에 보위원 식당에 몰래 들어가 훔쳐 온 생존의 양념이었다. 된장! 

    검은손이 막대기로 주먹밥과 된장을 골고루 섞었다. 된장 냄새가 퍼지자 모두가 코를 실룩이며 입을 다셨다. 나른한 얼굴들에 짙은 화색이 감돌았다. 15호에서는 이런 향기를 '사회냄새'라 불렀다.

    "오늘 또 방귀 끼면 안 돼."

    도련님이 중얼거리자 주둥이가 씩 웃었다.

    "걱정 마. 사회방귀 있잖아."

    그때였다. 투덜거리며 다가오는 미꾸라지의 얼굴이 보였다.

    "너 왜 와?"

    옹헤야가 목소리를 높였다.

    "우리 5분조는 밥맛 없는 놈들만 있어서요."

    "네가 제일 밥맛 없어. 가."

    주둥이는 바닥에서 조그만 돌멩이를 하나 집어 들었다. 미꾸라지는 품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흔들며 약 올리듯 몸을 비비 꼬았다.

    "이래도?"

    15호 남자들에게 담배는 밥보다 귀했다. 사회의 향을 느낄 수 있어서. 보위원이 피우다 버린 꽁초를 놓고 다투는 일도 흔했다.

    미꾸라지가 깐죽대며 흔드는 온전한 담배 한 개비를 보고 검은손은 고개를 끄덕였다. 미꾸라지는 맨 끝자리 성진이 옆에 궁둥이를 놓았다. 밥을 섞을 때는 한 사람만 가능했다. 그 주인공인 검은손의 막대기에서 비빔밥이 완성되자 9분조는 박수까지 했다. 검은손이 일어나 힘차게 외쳤다.

    "자, 우리 9분조 양심식사 준비! 두 눈은 정면으로! 숟가락은 뒤로!"

    모두가 허리를 펴며 숟가락을 목 뒤로 넘겼다.

    "양심식사가 뭐예요?"

    도성진이 작게 물었다. 가수가 귓속말로 알려주었다.

    "똑같이 한 숟가락씩 떠먹는 거야. 밥 뜰 때 숟가락 보면 안 돼."

    검은손이 다시 소리쳤다.

    "옹헤야가 된장을 얻어왔으니 순서는 옹헤야부터! 노래도 '옹헤야!'" 

    9분조는 즉석에서 부르기 시작했다.

    옹헤야, 옹헤야
    어절시구 옹헤야
    저절시구 옹헤야


    옹헤야가 절도 있게 목 뒤에서 숟가락을 가져와 양동이의 비빔밥을 떴다. 그가 첫 숟가락을 뜨는 동안 노랫소리는 잦아들었다.

    옹헤야가 맛을 보고 엄지를 치켜들자 억눌렸던 노래가 다시 솟구쳤다. 양동이는 옆으로 옮겨졌다. 각자는 자기 차례가 오면 먼 산을 바라보며 숟가락을 앞으로 가져왔다.

    한 숟가락, 한 숟가락, 그 광경은 마치 신성한 의식을 거행하는 것 같았다. 그러던 중 노래가 뚝 멈췄다. 미꾸라지가 징그럽게 웃음을 날리며 목 뒤에서 가져오는 엄청난 크기의 숟가락...

    "저놈은 숟가락이 아니라 밥주걱을 들고 왔네."

    주둥이가 못 참고 돌멩이를 미꾸라지에게 던졌다.

    "2작업반 전체집합! 집합!"

    갑자기 반장의 목청이 울렸다. 동시에 감시반원들이 밥을 먹던 사람들에게 달려들었다. 수용자들은 죄다 뛰기 시작했다. 이제 겨우 한술 뜬 9분조는 황당했지만 일어설 수밖에 없었다.

    성진이도 숟가락을 입에 물고 달렸다. 그들이 멈춰 선 곳에는 최종배가 버티고 서 있었다. 도착하는 분조 순서대로 일렬로 길게 늘어섰다. 2작업반 반장의 고함이 강가를 흔들었다.

    "빨리들 모엿! 뛰지들 못해? 빨리 뛰어!"

    9분조도 줄 끝에 섰다. 2작업반 반장의 엄포는 최종배 못지않게 독했다.

    "네놈들, 이 15호 규정 알지? 죄지은 놈이나, 보고도 입 다문 놈이나, 똑같이 처벌이야!"

    도성진은 옆에 선 가수에게 속삭였다.

    "저 반장이 여기서 제일 센 사람인가요?"

    가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회에서도 중앙당 부부장 간부였대."

    도성진의 입가에 비웃음이 스쳤다. 2작업반 전체가 모인 걸 확인하자 최종배는 빈 옥수숫대를 흔들며 큰 돌 위에 올라섰다.

    "아침에 작업장 올 때, 이거 훔쳐 먹은 놈 나와! 10초 준다."

    최종배가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며 또 초침을 세기 시작했다.

    "1초, 2초, 3초……"

    9분조 사람들의 얼굴이 잿빛으로 변했다. 도성진이 앞으로 나서려는 찰나, 월왕령이 그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주둥이도 이를 드러내며 눈으로 겁박했다. 검은손이 주먹을 들고 외쳤다.

    "선생님! 작업장 올 때 오소리를 봤습니다!"

    "내가 여기 온 지 몇 년인 줄 알아? 짐승 이빨, 사람 이빨도 구별하지 못할 줄 알아?"

    최종배는 독이 더 바짝 올라 있었다. 당장 물을 떠 오라고 지시했다. 감시반원들이 강물에서 바케스와 양동이에 물을 퍼 날랐다. 첫 줄에 선 수용자들 앞에 그것들이 놓였다.

    "그거 하나씩 다 먹여. 야, 야! 감시반은 토하거나 설사하는 놈들, 강냉이 나온 지 잘 보고."

    최종배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감시반원들이 바케스와 양동이를 들이댔다. 수용자들은 억지로 물을 들이켰다. 첫 줄에 섰던 몇몇은 토하거나 바지를 급히 벗었다. 미꾸라지가 자기에게 다가오는 바케스를 보더니 버럭 소리 질렀다.

    "어떤 놈이야! 선생님이 용서해준다고 할 때 당장 나오지 못해?"

    담배에 불을 붙이려던 최종배의 손이 멈췄다.

    "누구야? 금방 내가 용서해준다는 놈이?"

    미꾸라지는 울상 짓다가 결국 손을 들었다.

    "방귀 낀 놈이 똥 싼다고, 야! 저놈부터 물 먹여!"

    최종배의 손짓에 감시반원들이 미꾸라지를 붙잡아 바케스를 들이댔다. 그는 바케스에 빠진 '미꾸라지'처럼 허우적거리며 온갖 엄살을 다 떨었다.

    이어 9분조 차례가 되었다. 검은손이 바케스를 들려고 할 때였다. 주둥이가 팔을 공중으로 쳐들었다. 월왕령은 도성진이 따라 나가지 못하도록 발을 꾹 눌렀다. 최종배는 주둥이를 앞으로 불러냈다. 그리고 자기 손 대신, 물 먹은 죄수들에게 때리라고 지시했다. 바닥에 쓰러진 주둥이를 짓밟는 시커먼 무리 속에서 미꾸라지가 가장 높게 팔딱거렸다.

    그 일이 있고 나서 9분조는 연대책임으로 휴식 없이 일했다. 작업량은 가히 엄청났다. 다른 분조들의 돌더미에 비해 세 배나 많은 돌이 쌓여 있었다. 주둥이에게 미안해서라도 도성진은 이를 악물고 작업했다. 다리에 힘이 풀려 무릎을 꿇으면 기어서라도 돌을 밀어냈다.

    "야! 7번! 9분조 7번!"

    고개를 돌리는 데도 힘이 든다는 사실을 도성진은 그제야 깨달았다. 등 뒤에서 최종배가 흔들흔들 걸어오고 있었다.

    "보위원이 부르면 어떻게 대답해야 해?"

    "네, 선생님!"

    "늦었어, 이 새끼야. 이거 들어."

    도성진은 허리를 굽혀 돌을 들려고 했다. 그러나 최종배의 군화가 그의 손등을 짓밟았다. 옆에 있는 더 큰 돌을 가리키는 최종배의 막대기에, 도성진은 떨떠름하게 손을 뻗었지만, 돌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들라니까!"

    "……"

    "못 들면 네 애비 사진 불태워 버린다."

    '사진'이라는 말에 도성진은 손끝까지 힘을 모았다. 그러나 돌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 순간 도성진의 등에서 벼락이 일었다. 최종배의 딱딱한 막대기가 요동친 것이다.

    "부르면 선생님! 돌을 들라면 선생님! 못 들어도 선생님!"

    멀리서 검은손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성진이 옆에 차렷 자세로 섰다.

    "선생님! 애가 오늘 입소 첫날인데, 용서해주십시오!"

    최종배는 막대기를 멈추고 검은손을 노려보았다.

    "첫날? 평생을 하루같이! 하루를 평생같이! 이게 네놈들의 혁명화야! 이게 15호야!"

    15호에는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33법칙'이 있었다. 가수가 알려줘서 성진이 제일 먼저 기억한 15호 첫 문장이기도 했다.

    "여기서 3개월을 버티면 생존의 희망이 생기고, 3년을 넘기면 죽음과도 친해진다."

    하지만 성진의 첫날은 최종배의 그 말에 무너졌다.

    "이 지독한 첫날이 내 평생이라니."

    성진은 최종배가 말한 그 첫날같이! 열흘을 버티어 냈다. 그 사이 얼굴은 반쪽이 되었다. 매일 반복되는 강제노동, 먹을수록 더허기지는 끼니, 걸핏하면 날아드는 욕설과 매질, 조금만 삐끗해도 이어지는 기합과 그보다 더 무거운 심리적 공포, 그때마다 주둥이는 청산유수였다.

    "여기서 살아남자면, 매사에 척척해야 해."

    때리면 병신인 척, 힘들면 울부짖는 척, 배고프면 기절하는 척, 별의별 척척을 다 가르쳐주었다. 하지만 성진에게는 살아난 척도, 죽은 척도 부족했다. 그냥 과거인 척, 내일이 없는 척, 현실과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부정해야 했다. 아니, 그 부정조차 부정하는 척 해야만 겨우 숨을 쉴 수 있었다.

    그렇게 버티던 성진은 보름 만에 끝내 쓰러졌다. 원인은 심한 허기와 탈진이었다. 길섶에 돋아난 새파란 풀을 보는 순간, 성진의 눈에는 그것이 남들이 먼저 가져갈 곡물로 보였다. 그는 대열을 이탈했다. 풀을 마구 뜯어 입에 욱여넣었다.

    철조망 너머, 첫날 작업장에서 봤던 그 '꼬마귀신'의 손이 다시 튀어나왔다. 식량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본능에 성진은 정신없이 풀을 씹었다. 월왕령과 분조장이 달려와 그의 손을 붙잡았다. 가수와 도련님이 그의 입에서 풀을 끄집어냈다. 주둥이와 옹헤야까지 합세해서 그를 꼭 붙들고 입을 틀어막았다.

    그날 밤 성진은 결국 기절했다. 그의 얼굴은 검게 질렸다. 입술은 죽겠다는 의지로 꽉 닫혀 있었다. 그런 모습으로 하루가 꼬박 지나갔다. 새벽이었다. 도성진은 악몽에 시달리다 비명을 지르며 눈을 떴다.

    "최종배 이 개새끼야!"

    다행히 그의 입에는 수건이 감겨 있었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주변을 둘러본 성진에게 옆자리 월왕령이 낮게 말했다.

    "살았냐? 여기선 멀쩡한 풀은 다 독풀이라고 생각해. 먹을 수 있는 거면 남아 있지도 않았어."

    성진은 수건을 벗어 던지고 숨을 몰아쉬었다. 월왕령이 담요를 끌어당겨 주며 덧붙였다.

    "새벽 4시야. 더 자."

    "4시인지 어떻게 알아요?"

    성진이 속삭였다. 월왕령은 조용히 대답했다.

    "룡평에선… 이 시간에 일어나. 거기서 8년을 살았거든. 내 몸이 먼저 기억해."

    그의 말끝엔 어느 쪽도 닿지 않는 외로움이 묻어 있었다. 월왕령은 품 안에서 조심스럽게 무언가를 꺼냈다. 나무로 깎아 만든 조그마한 강아지 인형이었다. 곳곳이 닳고 어두운 광택이 배어 있었다. 성진의 두 눈이 반짝였다.

    "와... 만져 봐도 돼요?"

    그 말엔 아직 소년의 마음이 남아 있었다. 지옥에서도 순결을 잃지 않는 호기심이었다. 월왕령은 목에 걸려 있던 줄을 풀어 조심스레 건넸다.

    "얘 이름은 '백구(白狗)'야. 아버지가 만들어줬어."

    "룡평에서 아버지도 같이 왔어요?"

    월왕령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근데 여기서도 룡평산은 보여."

    그 말끝이 묘하게 떨렸다. 성진은 담요로 얼굴을 반쯤 가리고,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잡혀올 때 아버지 얼굴도 못 봤어요. 좀 전에도 아버지 꿈을 꿨어요."

    성진은 담요 끝자락을 입에 물고 울먹거렸다. 월왕령은 말없이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도성진보다 더 깊고 멀리 울고 있는 듯했다. 그 상태로 두 사람은 기상 시간을 맞이했다.


    ※ 다음 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