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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호의 보위원들은 때때로 죄수들을 부러워할 때가 있었다. 사회에서 간부로 잘살았거나 외국 경험을 가졌기 때문이다. 요덕의 산과 강만 보고 살아야 하는 보위원들에게 외교부 출신 죄수들은 모든 것을 잃고 붙잡혀왔는데도 뭔가 아직 남은 놈들이었다. 해외출장 거리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멀어질수록 '개별 면담' 시간도 길어졌다.
최종배는 대부분의 외교관 출신들이 금방 싫증 났다. 아무리 고령의 대사 출신이라도 체류국 하나에만 한정된 경험이었다. 그러나 32살의 미꾸라지는 달랐다. 그는 북한이란 국가를 대표하는 UNDP 사무관 출신이었다. 미꾸라지는 유엔 가입국 전체를 다 돌아본 사람처럼 최종배에게 말하곤 했다. 거의 2년째 꾸며내는 이야기였다. 그 특권 덕에 그는 남들이 노역에 나가 있을 때도 혼자 최종배 턱 밑에 바짝 도사리고 있을 수 있었다.
"자, 이번엔 도미니카공화국으로 넘어가겠습니다."
미꾸라지는 자신만만한 표정이었다. 그는 착실히 준비했을 때보다 즉흥적으로 '썰'을 풀어낼 때 더 잘 된다는 신념 같은 것이 있었다. 오늘도 사람 일은 뜻대로 되지 않고, 뜻밖에 되는 것이라고 내심 생각했다.
"우리 대표단이 대통령 궁전에 들어갔는데, 미국 여자 기자가 달려와 제 손을 탁 잡더니 이러더란 말입니다. '어머나, 조선 남자들은 이렇게 다 잘 생겼어요?’"
최종배는 거짓말하지 말라는 경고로 미꾸라지의 머리통을 툭쳤다.
"이 새끼가 진짜... 그년 생긴 건 어때?"
"인형 같습니다. 눈도 파랗고, 얼굴은 하얗고."
"야! 너 지금 미제 승냥이년을 인형처럼 곱다고 했어?"
"본 대로 말하는 겁니다."
미꾸라지는 여기서 밀리면 끝장일 것 같아 목을 치켜세웠다. 최종배는 그 얼굴에 한 대 쥐어박고 싶어 주먹을 흔들었다.
"이 새끼야. 여기 다 본 대로 들은 대로 말했다가 들어온 놈들이야."
미꾸라지는 금세 주눅 들며 목소리를 낮췄다.
"그 여자가 조용히 만나자면서 요래 요래 하더란 말입니다."
그는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윙크를 흉내 냈다. 최종배는 그를 한참 노려보다가 진지하게 물었다.
"그래서, 했어?"
미꾸라지는 비밀을 영원히 간직할 사람처럼 입을 꾹 다물었다. 최종배는 보는 눈이 없는지 두리번거린 뒤 바닥에 담배 한 개비를 툭 던졌다. 미꾸라지는 때가 잔뜩 낀 손으로 그걸 얼른 주워들었다.
9분조가 소속된 독신자 2작업반의 담당 보위원이 중위 최종배였다면 가족세대 담당은 상위 지형철이었다. 그의 얼굴은 늘 정돈돼 있었다. 화를 내지도, 웃지도 않았으며 감정은 주로 눈꺼풀 아래에 숨겨 두었다. 남의 가장 깊은 곳을 들여다보면서도 자기는 시선 하나 허투루 흘리지 않았다. 성격은 섬세했고, 믿음은 느렸으며, 상처는 길게 품었다. 그의 침묵은 너무 많은 것을 품은 사람의 마지막 자제력이었다.
그런 그에게 단 한 사람, 처음으로 속을 나누고 싶은 여자가 있었다. 2분조의 윤진경이었다. 갇힐 이유도 없고, 갇혀서도 안 될 사람이 억압까지 감내하고 있을 때, 지형철은 처음으로 질서가 아닌 사람을 보았다. 그녀는 그에게 자신이 지켜온 원칙보다 훨씬 더정직한 인간다움의 발견이었다.
오늘도 지형철은 남의 눈을 피해 자기 사무실에서 그녀와 함께 있었다. 창문에 걸린 커튼은 빈틈이 없었다. 그가 돌아서자 윤진경이 원피스를 입고 서 있었다. 사진 속에서 걸어 나온 듯한 미모였다. 그녀는 천천히 몸을 돌려 거울을 바라보았다. 그 눈동자엔 오랜 망각 끝에 되찾은 정체성의 조각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네, 이 옷이었습니다. 제가 사회에 있을 때 제일 좋아했던, 꼭 이 옷입니다. 어머나... 어떻게 이걸... 고맙습니다."
지형철도 만족하게 웃으며 앉았다.
"네가 갖고 들어온 사진들에 이 옷이 몇 번 보이길래... 그렇게 좋아?"
"네. 그리고 꼭 맞아요. 정말, 정말 고맙습니다."
지형철은 낡은 카메라의 필름을 돌렸다. 찰칵. 찰칵. 셔터 소리가 연달아 울렸다. 윤진경은 원 없이 다 주겠다는 사람처럼, 카메라 앞에 더 가까이 섰다. 처음엔 수줍은 미소였다. 하지만 셔터 소리가 이어질수록 그녀의 얼굴은 서서히 어두워졌다.
지형철은 카메라를 내려놓고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두 사람은 벽거울 앞에 나란히 앉았다. 윤진경은 원피스를 입은 채 지형철의 품에 머리를 기댔다. 움직임 없는 두 사람 사이엔 말로 옮길 수 없는 것들이 흘렀다.
"정말 이 옷 입고... 대동강 강가를 함께 걸을 날이 올까요?"
지형철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내 삼촌이 본부 부부장이야. 네 혁명화 평정서도 내가 잘 써주고 있어. 절대, 마음 약해지면 안 돼."
윤진경은 고개를 천천히 떨궜다. 눈빛은 다시 바늘 끝에 따라서는 실처럼 가늘고 무표정해졌다.
"저희 분조장 언니는... 올해가 열두 해째랍니다."
지형철은 아무 말도 안 했다. 다만 그녀를 껴안은 두 팔에, 그보다 더 많은 걱정을 실었다. 그렇게 한 시간이 흘렀을까. 지형철이 돌아섰을 때 윤진경은 이미 수용자 옷으로 갈아입은 뒤였다.
그녀는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그녀가 두 팔로 품고 있는 건 원피스였다. 터져 나오는 통곡을 참으려는 숨이 한 번, 두 번 끊기더니 이내 원피스 천 속으로 얼굴을 깊이 파묻었다.
"우린 안 됩니다. 잡혀 온 지 겨우… 1년인데…"
목소리는 거의 들릴락 말락 했다. 그 한마디, 한마디마다 눈물이 뒤따랐다.
"옷부터… 이렇게 다른데... 어떻게 우리가 어떻게..."
지형철은 그녀를 바라보다가 그대로 끌어안았다.
"미안해. 미안해. 내 생각만 했어. 네 생각을 하지 못했어."
그의 품에 안긴 윤진경은 더는 참지 않았다. 작게 시작된 오열이 금세 방 안 전체를 채웠다. 그녀는 엉엉 울었다. 단순히 슬퍼서가 아니었다. 그 옷은 그저 좋아했던 옷이 아니었다. 그녀가 자기의 삶만 믿고 살아가던 시절의 마지막 표식이었다. 그 시절을, 이제 두 손으로 껴안고 있었다. 하루를 고르는 옷이 아니라 그 옷 하나에도 다가설 수 없는 한 생애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정말… 살고 싶습니다. 나가고 싶습니다… 정말 소원입니다…"
그녀는 그날, 처음으로 지형철 앞에서 "살고 싶다"는 말을 통곡 속에 섞어 꺼냈다.
"11초, 12초, 13초……"
최종배가 미꾸라지에게 기합 주며 내뱉는 소리였다. 그 모습을 보며 도련님이 신경질적으로 푸념을 쏟아냈다.
"여기 바쁜 사람 하나도 없는데 저 새끼는 맨날 시간 재고 지랄이야."
가수가 기합을 받는 미꾸라지를 고소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저 촌놈이 세이코 자랑하려고 저러는 거야."
재일교포 출신 수용자가 입소할 때 보위원들의 첫 질문은 이름이나 죄목이 아니다. 압수 품목 중에 "세이코 있나? 없나?"였다.
15호에도 나름대로 청렴의 법이 있었다. 사람의 목숨은 함부로 거두어도 괜찮지만, 반동의 물건은 절대로 가져가면 안 되었다.
그걸 지켜야 하는 보위원들은 편법을 썼다. 빼앗는 대신 바치게 하는 방식이었다. 그들은 시계를 원했다. 시계를 손에 넣기 위해선 먼저 공포와 환심을 번갈아 작동시켰다. 위협을 느낀 수용자는 살아남기 위해 시계를 바쳤다. 보위원은 받은 것을 '충성'이라 불렀다. 그땐 시계가 아니었다. 투철한 혁명가, 당의 보위전사의 손목 위에서, 시간을 충성으로 돌리는 '세이코'였다.
"작업시작!"
그 소리와 함께 수용자들은 다시 돌을 들고 뛰기 시작했다. 최종배는 시계를 보며 가끔 막대기로 미꾸라지 머리를 건드렸다. 성진은 그의 시계가 세이코가 맞는지 궁금했다. 일부러 돌을 안고 그쪽으로 뛰어갔다.
"이 새끼야. 시작할 땐 다 벗고 뒹굴 것처럼 뜸을 들이더니, 마지막엔 뭐? 악수?"
최종배가 군화로 미꾸라지 손등을 밟으며 소리쳤다.
"아야아야. 그래도 손은 만지지 않았습니까?"
"담배까지 줬는데 악수만 했다고?"
"담배는 선생님이 버린 걸 제가 주운 거 아닙니까! 으악!"
최종배는 더 세게 미꾸라지 손을 짓밟으며 사방에 대고 외쳤다.
"뛰어라! 뛰어라! 서 있는 새끼들 내 눈에 걸려봐!"
도성진은 바투 들리는 최종배의 목소리에 기겁하며 주둥이 옆으로 달아났다. 거기는 붉은 대형 구호판이 세워진 강둑이었다.
'수령님을 따라 천만리! 당을 따라 천만리!'
빨간 글귀를 바라보며 도성진은 숨을 몰아쉬었다.
"이거 사회 구호 아닌가요? 왜 이 안에 있어요?"
주둥이는 폐 속에서 가래를 끌어내 퉤 뱉었다.
"수령님을 따라 천만리 지옥까지 왔는데, 당을 따라 천만리 또 어디로 가냐? 멀다. 멀어."
주둥이는 가는 길이 황당하다는 듯 일부러 비틀거렸다. 비워진 그 옆자리를 가수가 메웠다.
"너. 9분조니까 이렇게 말 놓는 거야. 딴 데선 반동답게 입 닥치고 있어라. 큰일 난다."
가수는 숨을 헐떡이면서도 착실히 충고했다. 반동답게 말하는 주둥이나, 반동답게 닥치라는 가수나, 성진에겐 둘 다 어쩐지 웃기는 '반동'처럼 보였다. 막내 얼라반동이 걱정스러웠는지 이번엔 옹헤야가 우측으로 달려왔다. 뒤늦게 도련님도 합류했다. 가수, 도련님, 옹헤야 그 셋은 32세 동갑내기였다. 9분조는 그렇게 결속이 남달랐다.
"아저씬 외국인인데 왜 여기 들어왔어요?"
성진의 순진한 질문에 옹헤야는 씁쓸하게 웃었다.
"여기는 아는 게 너무 많아서 들어온 사람들이야."
성진은 계면쩍은 표정으로 멀리에서 일하는 월왕령과 검은손을 바라봤다.
"우리 분조장 말이에요. 축구라면 발인데 왜 검은손이예요?"
옹헤야와 가수는 서로 마주 보았다. 막내한테 알려줘도 되는지, 눈빛으로 주고받았다. 가수는 돌을 더 깊이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짧게 대답했다.
"우리 분조에 나쁜 놈들이 있었거든. 밀고자, 감시자."
"그런데요?"
"분조장이랑 작업 나갔다가 둘 다 죽었어."
"죽였어요?"
성진이는 저도 모르게 소리 질렀다.
"그야 모르지. 한 놈은 벼랑에 떨어져 죽고, 다른 놈은 나무에 머릴 정통으로 맞아 죽었어."
옹헤야가 힘을 주어 덧붙였다.
"그 후부터 다른 분조에서도 검은손이라 부른 거야."
그때 뒤에서 따라오던 도련님이 오금박듯 말했다.
"너도 허튼짓할 생각 마."
도련님의 그 말이 성진이 가슴에 안고 뛰는 돌덩이보다 더 무겁게 내려앉았다.※ 다음 편에 계속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