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동성에 매달리는 기업들 … 한국 산업 체력 약화 속 등장한 150조 펀드정책펀드의 화려한 과거, 초라한 성적표 … 국민성장펀드도 반복될 것인가중복 투자·관치 리스크 여전, ‘국민의 돈’ 쓰는 펀드의 무거운 책임이제 필요한 것은 구호가 아니라 실적을 증명할 숫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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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조원. 숫자만 놓고 보면 한 시대의 산업 지형을 바꿀 수 있는 규모다. 오늘 공식 출범하는 '국민성장펀드'가 들고 나온 금액이다.정부는 인공지능(AI), 반도체, 바이오, 로봇 등 전략산업에 향후 5년간 대규모 자본을 투입하겠다고 한다. 표면적으로는 한국판 '첨단 산업 르네상스' 선언에 가깝다. 그러나 시장의 공기는 그리 낭만적이지 않다. 이 거대한 펀드가 산업 혁신을 여는 출발점이 될지, 혹은 뉴딜펀드의 실패를 반복하는 또 하나의 혈세 블랙홀이 될지 누구도 장담하지 못한다.국민성장펀드의 구조를 뜯어보면 기대와 의구심이 동시에 생긴다. 전체 150조원 가운데 절반인 75조원은 정부 보증 기반의 기금채와 산업은행 출연으로 마련된다. 나머지 75조원은 금융권과 일반 국민의 자금이 채운다. 하지만 정부의 실제 재정 출자는 연 1조원 수준, 정책금융 구간 75조원 대비 6%대에 불과하다. 위험 부담은 민간이 먼저 떠안는 구조다.시장 불신의 뿌리는 명확하다. 과거 정책펀드가 남긴 성적표다. 녹색펀드, 코스닥벤처펀드, 소부장펀드, 그리고 뉴딜펀드까지. 시작은 거창했지만 회수율 부진으로 조용히 퇴장한 사례가 더 많았다. 특히 뉴딜펀드는 10조원이 넘는 자금이 투입됐지만 회수율은 여전히 한 자릿수다. 정책은 화려했지만 결과는 초라했다.국민성장펀드 역시 뉴딜과 구조가 비슷하다. 정부가 방향을 정하고 민간이 실행하며 위험을 분담한다. 문제는 이 구조가 더 어려운 경제 환경 속에서 등장했다는 점이다.최근 국내 주요 대기업 CFO들은 내년 재무 전략의 최우선 과제로 '유동성 확보'를 꼽았다. 이미 10대 그룹의 현금성 자산은 100조원을 넘어섰지만, 기업들은 "미래가 더 불확실하다"며 곳간을 더 채우고 있다. 고환율, 국고채 금리 급등, 글로벌 경기 둔화, 행동주의 펀드 리스크까지 '불확실성 4종 세트'가 현실화하면서 투자보다 방어가 우선이 된 것이다.특히 150조원에 달하는 대규모 정책펀드가 본격 가동될 경우, 시중 자금이 정책펀드로 빨려 들어가 오히려 회사채 시장 등 민간 자금 조달 통로를 위축시킬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정책이 마중물이 아니라 '블랙홀'처럼 유동성을 빨아들이는 역설이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이런 국면에서 150조원의 정책펀드를 내놓는다는 발상 자체가 시장에는 또 다른 질문을 던진다. 이 돈을 투입했을 때 성과를 낼 산업은 실제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인가다. 자칫하면 기업은 유동성 방어에 매달리고 정부는 정책 펀드에 의존하며, 두 축이 따로 놀게 된다. 결국 정책이 시장의 체력과 괴리될수록 자금은 효율적으로 흐르지 못한다.투자 대상 중복 문제도 여전히 명확히 해소되지 않았다. 정부 부처, 산업은행, 모태펀드 산하에 이미 유사한 정책펀드가 빼곡하다. AI·반도체·바이오·방산·콘텐츠 등 이름만 달랐지, 동일 산업을 향한 투자 구조가 겹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큰 우산을 하나 더 씌운다고 투자 효율이 올라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관치 중첩'으로 자금이 특정 기업에 몰리는 왜곡이 다시 반복될 가능성이 크다.정부의 위험 부담이 희석된 점도 부담을 키운다. 펀드 규모는 100조에서 150조로 늘었지만 출자액은 그대로다. 즉, 후순위 보강 비율이 낮아져 민간이 감당해야 할 손실 위험이 커졌다. 그럼에도 정책펀드라는 간판 아래 민간이 적극 참여할 것이라는 기대는 낙관적이다.국민성장펀드는 이름 그대로 '국민의 돈'을 사용하는 펀드다. 실패하면 부담도 국민의 몫이다. 그렇기에 투자 심의의 독립성, 회수 전략의 현실성, 정치적 간섭 차단은 이번 펀드의 생존 조건이다. 숫자로 증명하지 못하면 정책은 또 하나의 구호로 남는다. 정책펀드는 꿈을 팔 수 있지만, 꿈만으로 수익은 만들어지지 않는다.때문에 국민성장펀드의 1호 투자 프로젝트는 미래를 가를 첫 시험대다. 만약 상징성에 치우친 테마 선정이나 단기 주가 부양식 이벤트로 흐른다면 이 펀드는 출범 즉시 신뢰를 잃을 수 있다. 반대로 산업 경쟁력과 투자 회수 가능성을 입증하는 선택이라면 시장은 비로소 펀드의 방향을 인정할 것이다.150조원은 기회이자 경고다. 이 돈은 한국 산업의 체질을 바꿀 수도, 또 하나의 실패 사례로 기록될 수도 있다. 지금 한국 시장이 묻는 질문은 단순하다. "이번에는 정말 다를 것인가." 국민성장펀드가 이름 그대로 성장을 만들기 위해서는 이제부터는 구호가 아니라 숫자로 답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