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국회의장석. ⓒ뉴시스
    ▲ 국회의장석. ⓒ뉴시스
    [데스크칼럼] 헌법이 국회의장에게 '무소속'을 명령한 이유

    대한민국 헌법과 국회법이 국회의장에게 그 어느 정당에도 속하지 못하도록 한 조항에는 명확한 이유가 있다. 우리 헌법의 아버지들은 의사봉을 쥐는 순간 특정 정파의 대변인이 아닌 '국민 전체의 봉사자'로서 여야의 극한 대립을 중재하고 의회 민주주의의 보루가 되라는 뜻에서 '무소속'이 될 것을 명령한 것이다. 하지만 최근 국회를 바라보는 국민의 시선은 참담하다. 국회의장의 '중립'은 낡은 유산이 된 지 오래이고 그 자리는 '당심(黨心)'과 '정권 재창출'이라는 노골적인 정파성이 채우고 있다.

    국회의장은 삼권분립의 한축인 국회의 수장이다. 대통령 다음인 국가 의전 서열 2위라는 상징성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무게를 지닌다. 여야가 첨예하게 충돌하는 순간에도 최소한의 균형추 역할을 해야 하고 다수당의 이해관계를 넘어 국회 전체와 헌정 질서를 바라봐야 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장 후보군의 출사표를 보면 이러한 원칙이 무색해진다. 의장 선거라기보다 마치 당대표 경선을 방불케 한다. 후보들은 "당정청과 하나로 움직이겠다"(6선 조정식), "정권 재창출에 기여하겠다"(5선 박지원), "권리당원의 요구를 충실히 받들겠다"(5선 김태년)는 메시지를 경쟁적으로 내놓고 있다. 국회를 대표할 인물이 아니라 집권당의 대표를 뽑는 듯한 인상마저 준다.

    물론 현실 정치에서 완벽한 중립은 존재하기 어렵다. 국회의장도 특정 정당 소속 정치인으로 성장해 온 인물들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최소한의 거리 두기와 정치적 절제다. 국회의장직이 존중받았던 시절에는 그 원칙을 지키기 위한 노력이라도 있었다.

    과거 이만섭 전 국회의장은 여야 충돌 속에서도 의장으로서의 권위를 지키려 누구보다 애썼다. 정의화 전 의장도 직권상정 요구를 거부하며 "국회의장은 정당의 하수인이 아니다"라는 신념을 행동으로 증명했다. 삼권분립의 한 축인 입법부 수장으로서 지켜내야 할 '숭고한 품격'이었다. 

    반면 최근 국회는 점점 '다수당 대표'처럼 비쳐지고 있다. 특히 우원식 국회의장을 둘러싸고도 친정인 민주당 입장을 적극 대변한다는 비판이 반복적으로 제기돼 왔다. 의장석은 여야 갈등을 조정하는 자리인데 오히려 특정 진영의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창구처럼 활용된다는 평가도 받았다. 이처럼 의장석에서 나오는 발언과 결정이 특정 정당의 전략과 궤를 같이할 때 국회는 '민의의 전당'이 아닌 '정당의 출장소'로 전락한다.

    국회의장직의 권위 약화에는 정치권 스스로 만든 구조적 문제도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정세균 전 의장이다. 그는 국회의장을 지낸 뒤 다시 행정부 서열 2위로 이동해 국무총리를 맡았다. 물론 헌법상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삼권분립의 한 축을 대표한 인물이 다시 대통령 휘하 행정부 수장으로 들어가는 모습은 국회의장직의 독립성과 상징성을 흔들었다는 평가를 남겼다. 국회의장이 정치 경력의 '중간 단계'나 차기 권력으로 가는 징검다리처럼 비치기 시작한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흐름이 결국 국회 전체의 기능 약화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국회의장이 다수당의 이해관계를 우선시하면 야당은 의사 진행을 신뢰하지 못하게 되고 협치는 물거품처럼 사라지게 된다. 여야는 타협 대신 힘겨루기에 몰두하게 되고 국회는 민생보다 정쟁의 무대가 된다. 지금처럼 의장 후보들이 노골적으로 당파성을 경쟁하는 모습은 '의장도 결국 우리 편이어야 한다'는 인식을 제도화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정치가 뉴노멀의 시대를 맞았다는 말이 자주 나온다. 과거의 관행과 문법이 무너지고 새로운 정치 스타일이 등장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헌정 질서의 기본 원칙까지 허물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국회의장의 중립성은 낡은 관습이 아니라 민주주의 운영을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다.

    국회가 특정 정당의 전유물처럼 운영될 때 가장 큰 피해를 보는 사람은 결국 국민이다. 국회의 권위가 무너질수록 정치 불신은 커지고 협치는 실종되며 민생 현안은 뒷전으로 밀려난다. 이 때문에 국회의장은 다시금 무거운 '중립의 옷'을 입어야 한다. 그것이 무너진 의회 민주주의를 복원하고 국민의 신뢰를 되찾는 유일한 길이다.

    자유민주주의를 일찍이 정착시킨 영국에서는 의회의 숭고함을 지키지 위한 헌신과 자기성찰이 존재했고 오늘날 영국 의회를 지탱하는 밑거름이 되고 있다. 실례로 18세기 '보수주의의 아버지'이자 영국의 정치인 에드먼드 버크는 "의회는 서로 적대적인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사절단의 집합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17세기 하원의장이던 윌리엄 렌털은 국왕 찰스 1세가 하원에 난입해 의원 체포를 요구했을 때 국왕 앞에서 "나는 하원이 뜻하는 것 외에는 볼 눈도 말할 혀도 없다"고 말했다. 의장은 권력의 대리인이 아니라 '의회 전체의 수호자'라는 뜻이었다.

    과거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지금 우리 국회에 필요한 것은 '당을 위해 무엇을 하겠다'는 충성 경쟁이 아니라 '국회를 어떻게 중립적으로 운영하겠다'는 책임의 언어다. 그것이 무너진 의회 민주주의를 복원하고 국민의 신뢰를 되찾는 유일한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