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복절 기념식을 거부하고 백범기념관으로 가는 사람들                           
                                            
    지금 우리 사회는 민족주의의 명분 밑에서 강하게 주장되고 있는 좌우합작론(左右合作論), 또는 남북협상론 때문에 심각한 국론분열의 고통을 겪고 있다. 그것을 입증하는 사건의 하나가 작년 8월15일에 건국60주년을 맞아 정부가 세종로에서 기념식을 열고 있는 바로 그 순간에 그것에 반대한 야당측이 백범기념관에서 광복63주년을 기념하는 행사를 가지게 된  분열상을 보인 사실이었다.  

    그러한 국론분열 때문에 국가발전이 크게 방해받고 있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우리 사회의 빈민들과 약자들을 위해 사용되어야 할 막대한 돈이 우리를 위협하고 있는 호전적인 국가에게 제공되어 군사력 증강을 돕는 데 사용되고 있는 불행한 사태까지 일어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불행은 모두 실현가능성이 전혀 없는 좌우합작-남북협상의 공허한 명분론(名分論)에 사로잡힌 데서 나온 현명하지 못한 행동의 결과였다.

    좌우합작의 명분론에 멍든 나라   

    그러한 좌우합작-남북협상 주장은 1948년의 대한민국 건국 자체를 부정하는 주장으로까지 확대 해석되고 있다. 그러한 주장 가운데 하나가 대한민국은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에 세워졌다는 1919년 건국설이다. 

    그 때문에 1948년에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대한민국 건국에 앞장을 섰던 이승만, 김성수, 송진우,장덕수,조병옥, 장택상, 윤치영, 임영신과 같은 “건국의 아버지들”은 역사에서 지워지고, 그것에 반대했던 여운형, 김규식, 김구 등이 역사의 주역으로 부각되는 기이한 현상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그처럼 “죽일 놈”과 “영웅”이 구분되는 기준은 간단했다.  좌우합작-남북협상을 통해 남북통일정부를 수립하려는 주장을 끝까지 내세웠는가 내세우지 않았는가 하는 명분의 문제였다.  그들에게는 당시의 국제적, 국내적 현실이 그러한 목적의 실현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것이었던가 하는 점은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그저 구호로나마  통일과 민족주의의 명분에 충실했으면 그만이었다.

    차라리 박헌영처럼 자신을 공산주의자로 뚜렷이 드러낸 사람들은 오히려 대응이 쉬웠다. 그러나 좌도 아니고 우도 아니라면서 애매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좌우합작론자-남북협상론자는 적군인지 아군인지 구별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더욱 더 어려운 상대이다. 좌,우익이 힘을 합처 나라 문제를 해결하자는 데 무엇이 나쁜가, 풍요한 남쪽이 빈곤한 북쪽을  민족으로서 도와주자는 데 무엇이 나쁜가 하는 식의 주장은 우리 사회를 더욱 더 이념적 혼미 속에 밀어 넣고 있는 것이다.

  • ▲ 김대중-노무현 두 정권은 대한민국 건국을 반대한 김구 기념관을 세웠다. 사진은 백범 기념관에 있는 김구의 '좌우합작'노력에 대한 설명문. ⓒ 뉴데일리
    ▲ 김대중-노무현 두 정권은 대한민국 건국을 반대한 김구 기념관을 세웠다. 사진은 백범 기념관에 있는 김구의 '좌우합작'노력에 대한 설명문. ⓒ 뉴데일리

일찍이 미국의 좌우합작 의도를 간파한 이승만

오늘날 우리가 건국대통령인 이승만(李承晩,1875-1965) 박사를 다시 생각하게 되는 것은 바로 이와같은 우리의 위기상황 때문이다. 그는 일생동안 독립, 건국, 호국을 위한 싸움을 벌이는 과정에서 어느 지도자 보다도 좌우합작-남북협상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조직이 약한 우파가 조직이 강한 좌파와 손을 잡았을 때 그 결과는 공산화밖에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제2차세계대전이 한창 진행되고 있을 당시, 이승만은 미 국무부가 전후문제를 처리에서  좌우합작 정책을 계획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당시 루즈벨트 대통령을 비롯한 미국 정부 안의 영향력 있는 인사들은 앞으로 공산주의 이념이 세계를 지배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미국은 전후처리 문제에 있어서 소련과 맞서기 보다는 소련과 협조해야 한다는 방침이었다. 

이승만이 볼 때, 그러한 미국의 방침은 한국의 운명을 불행하게 만들 위험이 있었다. 한 만도 문제에 대해 미국이 소련에게 양보하는 경우에는 공산정권이 들어 설 것이고, 미국과 소련이 타협하는 경우에는 공산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을 절반씩 섞는 좌우합작의 연립정권이 들어 설 것이 확실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결국 한 반도의 공산화로 이끌고 말 것이었다. 이승만은 그 위험성을 1942년 1월에 미 국무부의 실세로서 나중에 소련 간첩으로 밝혀진 알저 히스를 면담하는 과정에서 확인하게 되었다. 이후부터 이승만의 가장 큰 걱정은 해방후에 소련이 한 반도에 들어오는 것을 막는 일이 되었다.

독립운동가 대부분이 좌우합작의 함정에 빠지다 

이와는 달리, 독립운동가들은 대부분이 좌우합작론자들이었다.  그들은 소련과 공산주의의 위력에 대해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에 대해 상당한 호감도 가지고 있었다.  당시 미국에 있던 한국인들의 대부분도 마찬가지였는 데, 김규식의 추종자인 한길수가 대표적인 경우였다. 그들 좌우합작론자들은 미 국무부의 극동전문가 조지 맥퀸 박사로부터 후원을 받았는 데, 그는 평양에서 선교사의 아들로 태어나 성장했기 때문에 서북지방의 안창호 계통 인사들이나 흥사단 계통 인사들과 가까웠다.

사실 이승만과 안창호는 손을 잡을 가능성이 가장 많은 독립운동가였다. 이승만의 외교독립론(外交獨立論)과 안창호의 무실역행론(務實力行論)은 모두 꼭같이 무장투쟁론을 주장하는 과격한 독립운동가들로부터 공격을 당할 위험이 있었다. 그리고 두 인물의 활동무대도 미국이었다. 이승만은 말할 것도 없고, 안창호도 가족을 미국에 두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지도자는 협조관계에 있지 못했다. 그 원인 가운데는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 흔히 강하게 나타나는 지역적인 차이에 따른 갈등도 있었다. 이승만의 지지기반이 서울-경기 지역 출신들인 데 대해, 안창호의 지지기반이 평안도 등의 서북지역 출신들이었던 것이다.  

보다 더 큰 차이는 이념적인 것이었다. 안창호는 일본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사회주의자들도 포함된 모든 세력을 결집시켜야 한다는 민족유일당과 대공(大公)주의의 명분을 내세웠다. 그러나 그와는 달리 이승만은 반공주의자였다. 두 사람의 관계는 이승만이 1925년에 안창호 세력이 우세한 임시정부 의정원에서 임시대통령직으로부터 면직되는 수모를 겪는 것을 계기로 거의 완전히 끝나고 말았다.

독립운동가들의 좌우합작 선호는 중국에 있던 임시정부에서도 나타났다.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가 재정 지원을 무기로 압박한 때문이기도 했지만, 어떻든 김구(金九)는 1942년에 김원봉의 좌파 세력을 받아들여 임시정부를 좌우합작 조직으로 바꾸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이승만은 임시정부와 협력하면서도 그 노선에 대해서는 근본적인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장개석도 미국의 좌우합작 노선을 따르다가 패망

제2차세계대전이 거의 연합국의 승리가 될 것이 분명해져 가던 1945년 4월에 샌프란시스코에서 유엔창립총회가 열렸다. 회의장 분위기는 전후의 문제를 소련과 협조해 처리한다는 좌우합작 노선으로 굳어졌음을 보여 주었다.  장개석(蔣介石)의 국민당 정부도 이미 모택동의 공산당과 국공합작(國共合作)에 들어감으로써 미국의 좌우합작 노선에 동조한 상태였다. 그렇게 된 데는 주로 외교부장으로 좌우합작론자였던 송자문(宋子文)의 공작이었다. 그는 장개석의 처남이었지만 결국 중국 대륙을 공산당에게 넘겨주는 데 크게 돕는 역할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바로 그 송자문이 샌프랜시스코 유엔창립총회에 나타나서는 한국인 독립운동가들에게 좌우합작을 받아들이도록 압력을 넣었다. 그에 대해 대부분의 한국인 참석자들이 찬성했다. 그러나 이승만만은 반대했다.  좌우합작으로 폴란드 등의 동유럽 국가들이 공산화(共産化)의 길로 가고 있는 마당에, 단순히 미국과 중국에게 잘 보여 해방후에 권력을 잡기 위한 방편으로 좌우합작 노선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승만에게 그것은 정치적 자살을 의미했기 때문에, 그의 열렬한 후원자인 로버트 올리버 박사는 좌우합작 노선을 받아 들일 것을 간곡히 권유하였다. 그런데도 이승만은 완강히 반대했다.  공산화로 이끌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렇게 하느니 차라리 아이오와 같은 시골에 가서 닭을 키우며 살겠다고 말했다.
 
미 군정청과 이승만의 충돌

미국의 정책에 반대했기 때문에, 이승만은 해방후 한국으로 돌아올 때 미국무부로부터  귀국 방해를 당했다. 이승만과 같은 반공주의자가 한 반도에 나타나게 되면 소련과의 협조가 방해받을 받을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이승만은 귀국을 서둘렀지만 해방이 된지 두 달이 지난 1945년 10월 16일에야 서울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승만의 예상은 들어 맞았다. 1945년 12월말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소련을 포함한 4개국 신탁통치가 발표되자, 앞으로 좌우합작의 연립정부가 들어 설 것이 확실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탁통치 방식을 통해 소련이 일단 한국 땅에 발을 붙이게 되면, 한반도는 동유럽 국가들처럼 공산화될 것이 확실했다.  

그러므로 이승만은 김구와 함께 신탁통치 반대 운동을 벌이는 한편, 미국에 다시 가서 미국의 정책을 바꾸어 보려고 했다.  이승만은 맥아더 장군의 협조를 얻어 1946년 12월에 워싱톤에 도착했다. 임병직,임영신과 미국인 친구들의 도움으로 미국 국민의 호응을 얻어내는 데는 상당히 성공했지만, 국무부의 정책을 바꾸지는 못했다. 그 때문에 이승만은 또다시 귀국 길에 방해를 받아야 했다. 서울에 도착했을 때는 마침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리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과 소련의 협의에 방해가 될 위험성이 있다는 이유로 미 군정청으로부터 가택연금까지 당했다.

좌우합작론자들이 결국 가게 되고 마는 길

이승만의 예측대로 미소공동위원회는 성공하지 못했다. 소련과 합의해서 모든 문제를 해결한다는 미국 좌우합작론들의 예측이 빗나간 것이다. 그 때문에 미국의 한반도 정책도 이승만이 바라던 반소,반공 노선으로 바꿀 수 밖에 없었다. 그에 따라 한 반도의 정부 수립 문제는 미소공동위원회에서 유엔으로 넘겨지게 되었다.  그리고 유엔은 유엔 감시하의 자유선거를 대안으로 제시했다. 그러나 북한이 그것을 거부했기 때문에, 선거는 남한에서만 치러지게 되었다. 반쪽 땅에서나마 자유민주주의적인 대한민국의 건국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그러자 지금까지 이승만과 행동을 같이 해오던 김구가 김규식의 좌우합작(左右合作) 진영으로 넘어가는 새로운 양상이 나타났다. 그러자 장개석의 중국 국민당 정부가 서울 주재 중국공사이며 유엔한국위원단 위원인 류어만(劉馭萬)을 내세워 이승만의 건국운동에 협조하도록 김규식과 김구를 설득하려 했다. 당시 장개석은 모택동의 공산당과 내전(內戰)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에 남한에 반공국가가 들어서기를 강력히 희망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중국은 독립운동 때 많은 도움을 받은 김규식과 김구가 그렇게 할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김규식과 김구는, 미국과 중국의 호소와는 달리, 남북협상을 통해 통일정부를 수립하려는 꿈에 사로잡혀, 북한에 남북협상을 제의했다. 당시 북한의 주된 관심은 남한에서  정부가 세워지지 못하게 시간을 끄는 것이었다.  김일성에게 두 김씨의 제안은 남한의 선거를 미루기 위한 구실이 될 수 있을 것이었다. 그 때문에 두 김씨의 남북협상 제안은 받아들여졌다. 

김구·김규식은 1948년 4월의 평양회담 참석하게는 되었지만, 사전에 아무런 협의조차 없이 북한측이 일방적으로 개최하는 회의에 손님 자격이 되었을 뿐이었다. 그리고는 결국   남한에서 자유선거를 통해 세워질 정부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다시 말해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반대한다는 이른바 “4·30 공동성명”에  서명하고 말았다. 그들의 의도는 분명히 좌익들의 그것과는 달랐다. 그렇지만 결과적으로는 좌익들의 주장에 동조해 주고 만 것이다.   두 김씨는 서울에 돌아와서도 계속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위한 5·10선거를 반대하는 활동을 계속했다. 좌우합작론들이 종국에 빠지게 되는 함정에 되는 그들로 빠지고 만 것이다.

유엔과 6·25전쟁에 나타난 좌우합작의 유령

1948년 5월 10일의 자유선거를 통해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는 했지만, 그해 9월에 열리게 될 파리 유엔 총회에서 승인을 받는 것이 시급한 문제였다. 소련이 극렬히 반대하고  중도적인 국가들의 동조가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신생국 대한민국이 유엔에서 승인받을 수 있을지는 불확실했다. 그러므로 이승만은 장면을 단장으로하고 로버트 올리버 박사를 고문으로하는 한국대표단을 파리에 파견하여 맹렬한 설득작업을 벌이게 했다.  

이때 김구와 김규식도 신생 대한민국의 승인을 막기 위해 별도의 대표단을 파리 유엔 총회에 파견할 준비를 했다. 그리하여 1948년 8월1일에 통일독립촉진회(統一獨立促進會)가 조직되고, 선발대로 중국에 있던 서영해가 파리에 파견되었다.  그러나 막판에 대표단장인 김규식이 출발을 거부함으로써 대표단 파견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미 세워진 나라를 무너뜨리기 위해 유엔총회에 가서 외국 대표들에 호소하는 일은 한국인으로서 할 도리가 아니라고 김규식은 판단한 것이다. 그러자 먼저 파리에 가 있던 서영해는 북한으로 가고 말았다. 대한민국은 살아 남은 것이다.  

그러나 신생 대한민국은 태어난지 2년도 못된 1950년 6월25일에 북한의 기습 남침을 당해 3일안에 거의 무너졌다. 유엔군의 참전과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일시적으로 만회되기는 했지만, 중공군의 침입으로 또다시 붕괴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 시점에서 유엔군측은 어떻게 해서든지 전쟁을 그만둘 생각이었다. 그래서 유엔은 1950년말 휴전3인위원회에게 공산측에 어떤 조건을 제시하면 휴전에 합의해 올지 조사케했다. 위원회는 대한민국을 해체(解體)한 다음 4대국(미,영,소,중) 감시하에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하여 새로이 남북통일정부를 수립할 것을 제안했다. 또다시 좌우합작의 유령이 나타난 것이다. 물론 이승만은 완강히 반대했다. 다행히 미국 하원이 중공을 침략자로 규정하고 격퇴를 결의하였기 때문에, 그 제안은 더 이상 거론되지 않았다.

그러나 휴전이 성립되고 다음 해인 1954년 4월에 제네바 정치회담이 열리면서, 대한민국 해체-남북한좌우합작 정부수립론의 제안이 또다시 등장했다. 미국을 비롯한 6·25전쟁 참전16개국 대표들은 한 반도에 영구적인 평화체제를 구축하려면 소련과 중공이 받아들일 수 있는 방안이 제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그들은 대한민국 해체를 통한 남북한통일 좌우합작 국가의 신설을 이승만 대통령에게 설득시키기 위해 로버트 올리버 박사를 내세웠는 데, 만일 이 대통령이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게 되면 대한민국은 국제적으로 어떤 동맹국도 갖지 못하는 무서운 고립상태에 빠질 것이라는 협박도 덧붙였다. 

그러나 이번에도 이승만은 또다시 버텼다. 만일 한 반도에서 새로운 선거가 필요하다면, 북한만 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대한민국은 이미 유엔 감시하의 선거를 치르고 탄생된 나라이므로 다시 선거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었다.  이승만의 반대가 너무나 완강했기 때문에, 결국 참전16개국들은 제안을 철회할 수 밖에 없었다.  그 이후로 그와 같은 제안은 다시 등장하지 않았고, 대한민국은 이승만이 1953년에 결성된 한미동맹(韓美同盟)을 기반으로하여  자유주의 국가로 발전해 나갔던 것이다.
  
이른바 “87년 체제”와 좌우합작의 불씨

 그러나 1987년의 6·29선언을 계기로 좌경화의 물결이 일어나면서, 대한민국은 또다시 좌우합작의 망령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러한 변화는 1987년 10월에 9차 헌법개정이 이루어지면서 느껴지기 시작했다. 

1948년에 제정된 제헌헌법은 전문(前文)에서 대한민국은 기미년 3·11운동의 “독립정신”을 계승했다고 선언함으로써, 1919년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는 직접 관련이 없음을 밝힌 바 있다. 1948년 5월30일에 제헌국회가 소집되었을 때 감상을 묻는 기자 질문에 대해 김구도 두 정부 사이에 아무련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거의 40년이 지난 1987년 10월에 이루어진 9차 개정헌법의 전문(前文)에서는 1948년의 대한민국이 1919년의 “임시정부” 법통을 계승한 것으로 바꾸어졌다.  그것은 중대한 변화였다. 왜냐하면 임시정부는 1942년에 좌우합작 정부로 바뀌었으므로, 대한민국이 임시정부를 계승했다는 것은 반공국가에서

  • ▲ 이주영 건국대 명예교수 ⓒ 뉴데일리
    ▲ 이주영 건국대 명예교수 ⓒ 뉴데일리

    좌우합작국가로 바뀌었다는 말도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사회주의를 용납해야 된다는 말로도 해석되는 것이다. 실제로 몇 년 전에 그러한 해석을 근거로 좌파 성향의 일부 재향군인들이 현재 10월1일로 되어 있는 “국군의 날”을 광복군 창설일인 4월 19일로 바꿀 것을 주장하기도 했다. 

    현행 헌법에 아직 국가보안법이 그대로 살아 있기 때문에, 위의 구절만 가지고는 대한민국의 정체성이 완전히 뒤바뀌었다고는 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를 오랫동안 괴롭혀 온 좌우합작의 요소가 헌법 속에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주목해야 한다. 자유주의적 민주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우리 대한민국 국민은 필요에 따라 사회주의자들을 비롯한 다양한 세력들을 품는 아량을 보일 수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대등한 입장에서 이루어지는 좌우합작은 허용될 수 없는 것이다. 혁명가들과의 합작은 우리의 파멸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