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승만 없었다면 대한민국 없다> 로버트 올리버 저, 박일영 번역(2008, 동서문화사)
    편집자 주: 이승만의 독립투쟁시절(1942년)부터 하와이망명(1960년)까지 정치고문이었던 로버트 T 올리버 박사. 광복후 대한민국 건국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승만을 도왔고, 6.25전쟁 과정에서 대미관계에 큰 역할을 맡았던 그는 수많은 이승만의 편지를 자료로 책을 썼다. <나라세우기 X파일--이승만 없었다면 대한민국 없다>(박일영 번역, 2008.8.15. 동서문화사). 다음 내용은 이 책에서 해방공간을 중심으로 극히 일부만 발췌한 것이다.

    일본의 '진주만 공격' 예언...베스트 셀러로
    --일본인들을 일본열도로 다시 몰아넣기 위해 미국은 영도력을 발휘하라.
    궁극적으로 미국과 일본의 충돌은 불가피하다. 소련이 나치스 독일과 싸우는 동안 일본은 머지않아 시베리아의 연해주를 점령하든가 태평양으로 밀고 나올 것이다.
    (이승만 두 번째 저서 1941년 6월출간 <일본의 내막을 벗긴다: Japan Inside Out>의 예언, 6개월 뒤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하자 베스트셀러가 됨)

    "일본 패망하면 소련이 한반도 강점할 것" 경고
    --나치스 점령하에서 도망나온 유럽 여러나라 망명정부를 승인했듯이 우리 임시정부도 똑 같은 승인과 원조를 주어야한다. 왜냐하면 소련은 오래전부터 한반도의 부동항을 얻으려 노력해왔기 때문에 미국은 먼저 손을 써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소련에 앞서 승인해둬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일본이 패망한 뒤 소련이 반드시 끼어들어 한반도를 강점할 것이다.
    (2차대전중 이승만이 미국무성등에 계속 주장해온 말)

    "동유럽처럼 좌우합작하라는 미국...공산주의에 내맡기라는 것"
    --동부유럽 여러 나라들처럼 코리아도 좌우합작 방식을 수락하도록 국무성이 끊임없는 압력을 가한다. 연립정부 안을 수락하라는 것은 코리아를 공산주의에 내맡기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온 생애를 일본지배 반대투쟁에 바쳤는데 이제 소련의 지배를 찬성하는 것으로 일생을 마칠 수는 없다. 아내와 나는 충분히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 자신의 이익을 위해 코리아를 팔아넘기느니 나는 차라리 아이오와주의 조그만 양계장으로 은퇴하겠다.
    (1945년 5월 이승만의 말: 미국무성관리들의 혹평과 한국인 정적들의 비난에 대하여)

    "미국에 꼭 밝이고 싶은 것은 코리아에 저지른 죄과 알아야 한다는 것"
    --영도권 문제에 대하여 중국 외무장관 송자문(宋子文)은 중경(重慶)의 임시정부 내각을 우선적으로 고려하도록 국무성과 교섭중이고, 김구 김규식 김약산 조소앙은 모두들 공산주의자들과의 합작을 위한 연합국 측 안을 수락할 용의가 있다고 한다. 어제와 그저께 뉴욕타임스에 실린 사설들을 보았는지? 오늘 아침 워싱턴 포스트에 나온 사설 1부를 여기에 동봉한다. 미국 사람들은 이들 기사에 의해 크게 영향 받으리라고 확신한다. 두 신문기사가 한국의 조속한 독립을 찬성하는 내용이오. 미국사람들에게 꼭 밝히고 싶은 것은 미국이 한국 사람들 모르게 코리아에 저지른 몇가지 죄과를 반드시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1945년 6월 11일 이승만, 워싱턴에서 로버트 올리버에게)

    "공산당이 나를 수반으로 정부 조직...영광이라고 말했소"
    글을 쓸 시간이 없어 5시 반 잠에서 깨어 침대에서 이 글을 적고 있소. 얼마 뒷면 윤치영이 여기 올 것이고 이 사람들이 동대문 밖에 큰 집을 마련해준다 하오...중략...공산 그룹(김구와 손잡은 김원봉의 국민혁명당)을 제외하고 중경의 김구와 그 밖의 인사들을 데려올 계획을 하고 있소. 모든 정당이나 국민들은 단결하여 나를 밀고 있소. 여운형(呂運亨)과 그의 동생은 내가 바라는 것이면 어떤 일이든지 하겠노라고 말하고 있소.
    오늘 오후 나는 각 정당 단체들과 회의를 가질 것이며, 그들은 중앙위원회를 구성하기 바라고 있소.
    가소로운 부분은 공산당이 나를 수반으로 해서 정부를 조직한 일이오. 나는 그들에게 소련이 나를 반공주의자라고 공격하는 마당에 내가 공산당 지도자가 되었으니 큰 영광이라고 말하였소.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으니 이만 줄이오. 언제 이 유명한 3인조(이승만-김구-김규식)가 덕수궁에서 자리를 함께 할 수 있게 될는지요.
    (1945년 10월21일 새벽, 이상만이 귀국 6일째 쓴 편지)

    *1946년 3월5일 윈스턴 처칠 미국서 “소련이 유럽에 ‘철의 장막’을 쳤다”고 선언.
    *1946년 4월 18일 미-소 공동위원회 ‘임시정부구성 협의대상 자격’ 발표. 신탁통치 찬성자와 위원회의 정부구성 절차 준수등 선언문에 서명한 자에 한함.
    *1946년 12월 27일 모스크바 3상회의, 한국 신탁통치 부과 협정 발표.

    남한의 중학이상 졸업자 겨우 2만5천명.....친소 분위기 바꾼것은 이승만
    --1월3일 한국의 공산주의자들은 신탁통치 지지를 공식선언함으로써 남한에서 미국 정책을 지지하는 조직이나 정당은 유일하게 공산주의자들뿐이라는 이상한 판국을 빚어냈다.
    중학교 이상 졸업한 학력자가 겨우 2만5천명에 지나지 않는 남한에서 자연히 지방 도읍이나 농총 지역 전역에 걸친 공산당의 연합은 한국의 항일운동을 지원한 공산당의 역사와 함께 친소 감정을 초래하였다.
    건강을 회복되자 이승만박사는 남한 일대에 걸친 유세여행을 떠났으며 매일 1회 또는 여러 차례 군중들에게 연설을 하였다.
    “나를 따르시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습니다.”
    연설 사이사이에 그는 지방 지도자들과 회의를 가졌다. 그의 주제는 언제나 같은 것으로, 공산주의는 콜레라 질환과 비슷한 것이라는 내용이다. 빨갱이와의 타협이나 협력은 불가능한 것이다, 유일한 선택의 길은 공산독재정치에 항복하거나 대항하여 싸우는 길이다는 등, 한국 민족주의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구원의 길은 신탁통치의 거부를 포함하여 전적으로 공산주의를 몰아내는 길 뿐이었다.
    남한의 친소 분위기에서 국민감정의 밀물을 뒤엎고 공산주의 거부운동을 시작한 것은 바로 이박사에 의한 것이었다. (1946년 1월 로버트 올리버)

    웨인 가이징거 소령과 경기도 군정관 앤더슨 대령과 함께 나는 서울 북방 50마일 떨어진 개성으로 차를 몰았다. 이박사는 3시간 뒤에 따라오게 되어 있었지만 길거리에는 이박사를 환영하려는 사람들이 줄지어 있었다. 나는 “다른 한국 지도자가 저런 군중을 끌어낼 수 있을까요?”하고 물었다. 그들은 “천만의 말씀이오, 다른 지도자들은 어림도 없죠.” 이 말이 아니라도 이박사는 여전히 한국의 실권자임에 틀림없다.
    지난 12월 이박사가 영향력을 행사했을 때 아놀드 장군이 그에게 대들었다는 이야기를 가이징거가 들려 주었다. 국무성의 습관대로 아놀드가 이박사에게 “내가 보기에는 당신도 그저 하나의 한국 사람일 뿐이오. 당신은 그 누구도 대표하지 않소.”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박사는 즉각 서울 시민에게 ‘나라의 명절’을 지키라고 요구하였다. 사흘간 서울에서는 일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화부가 석탄을 실어가버려 불을 일굴 수가 없었다. 호텔과 사무실의 라디에이터는 얼어 붙었다. 사람들이 2마일이나 늘어서는 대대적인 시위행진을 벌여 남대문에서 중앙청까지 꽉 찼으며 길거리는 양쪽 길가까지 넘쳐났다. 아놀드 장군은 헐떡이며 이박사를 불러들여 잘못했노라고 빌었다. 이 박사는 민주의원 의장에 선출되었다. 그후부터는 아무도 그의 실력을 의심하지 않았다. (1946년초 로버트 올리버)

    --이승만 박사는 군정에 쓸모 있는 역할이 끝났습니다. 그를 공개적으로 비난함으로써 망신시켜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당신(로버트 올리버)을 한국에 들어오게 한 단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당신이 이박사에게 어떤 통제를 가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당신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승만의 생애는 끝난 것이고, 소련과 한국통일을 위해 합의해야 할 우리의 기회를 그가 이미 망쳐버렸는지 모릅니다. 이 박사는 한국정치가들 중에서 너무나 위대한 인물이며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가 유일한 인물이라고까지 말합니다. 그러나 그가 공산주의에 대한 공격을 멈추지 않는 한 그는 한국정부 내에 어떤 자리도 차지하지 못할 것입니다. (미군정사령관 하지 장군의 말: 1946년 6월 3일 입경한 로버트 올리버에게)

    여론조사 '이승만 지지 70%'..."과반수이하로 낮춰라"
    --미군정 운영의 방법으로 심히 중요한 사항의 하나는 정기적인 여론 조사이다. 최근에는 한국 지도자들에 대한 조사를 했다. 인구의 70%가 이승만박사 지지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것은 군정청 정책과 안맞기 때문에 러치장군은 그린에게 그 조사결과를 조작해서 이승만의 지지표가 과반수도 못 되는 듯이 보이도록 했다. 또 한가지 문제를 들자면 지방행정직을 위한 지방 선거가 각 도별로 벌어졌는데, 공산당은 어디에서도 21%를 넘는 곳이 없고 겨우 15%의 후보자를 뽑았을 뿐이다. 이런 사실도 소련을 달래기 위해서는 공산당을 동등하게 인정한다는 군정청의 정책 때문에 보도가 안되도록 빼 버렸다. 이박사가 감정적으로 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군정청에서는 이박사가 공산주의를 맹렬히 공격하고 있기 때문에 집권을 허용하지 않겠노라고 소련에게 스스로 언질을 준 바 있었다. 그래서 이박사가 국민의 지지를 못받고 있는 것처럼 보이려고 더욱 어려운 술책을 꾸미고 있다. (1946년 7월 로버트 올리버 일기에서)

    --신탁통치를 지지하는 단 한명의 유력 인사인 안재홍(安在鴻)은 군정청에가 인기 높은 고문관이다. 김규식과 여운형은 ‘남북한을 망라한 좌우합작’을 위해 협력한다는 서약 아래 좌우 합작위원회를 조직하도록 권장 받았다. 김구는 독립후 대통령직을 확보할 근거를 마련해줄 독자적인 거점을 확보하려 추진하고 있었다. 한국인들에 대한 이박사의 영향력을 자기말에 순응하는 정치적경쟁자에게 넘겨보려는 하지 장군의 노력은 잘 되어가는 듯 보였다.
    세계정세를 보니 루즈벨트(Franklin D. Roosevelt)가 저질렀고 트루먼 대통령으로서는 바로 잡을 지혜도 능력도 없는 잘못된 정책 때문에 한국뿐만 아니라 자유국가들이 희생물이 되었다. 소련 제국주의는 거침없이 뻗어나고 엄청난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수개월 동안에 동유럽 전역에 걸쳐 합작정부의 공산당이 지배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소련은 북한에 발판을 굳혔다. 중공은 본토 정복작전에 박차를 가하면서 미국 마셜 장관 사절로부터 원조와 격려를 받고 있었다. (1946년 겨울, 로버트 올리버)

    "미국이 할일은 소련의 팽창을 허용하자는 것"
    --이 박사의 위험하고 비현실적인 정책을 지지하지 마시오. 우리가 아시아에서 할 일은 옆으로 비켜서서 소련의 세력권이 자연적인 팽창한계까지 가도록 허용해주는 것입니다. 귀하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요? 전쟁이요? 미국은 어떤 값을 치르더라도 전쟁은 피해야 하오.  한반도에서 전쟁은 안 일어나오. 워싱턴의 어느 실권자들도 공산당이 폭력으로 남한을 점령하리라고 믿는 사람은 없습니다. 신탁통치와 연립정권이 실현되면 아무 걱정 없을 것이오. 미국 정책이 실패하는 것은 정세변화 때문이 아니라 이승만 때문이란 말이오.
    (1946년 겨울 미군정청 관리들의 말)

    --동유럽에서 전혀 성공시킨 바 없는 좌우합작조직을 이 박사에게 만들어내라니, 이런 요구는 일본인 상전을 공산지배자로 바꾸는 일에 동의하라는 것 밖에 안 된다. 언제나 이를 거부하고 반대발언에서 가장 강격하고 노골적인 이승만박사는 세계 언론으로부터 <극우>라는 호가 붙었다. 중도파들까지 이박사는 극단적 반동주의자라는 견해가 널리 유포되어갔다. 결국 한국에서 미국의 정책은 ‘품위있는 철수’ 가 가능하도록 소련과의 협약을 계속 추구하는 것이었다. (1946년 겨울 로버트 올리버)

    --남한에서 진행중인 미국 정책에 공식적으로 반대하고 항의하기 위해 워싱턴을 방문한 이승만 박사는 칼튼 호텔에서 긴박한 정치상황에 집중해 있었다. 루마니아, 체코슬로바키아, 그리고 ‘좌우합작’을 강요당했던 다른 동구권 국가들에서 보여준 바와 같은 식으로, 소련식 지배하에 남북한을 바꿔 놓기 위하여 남한을 북한에 통합시키려는 첫 걸음에 불과하다는 확실한 예상, 4개국 신탁통치를 한국에 강요하려는 미-소 협정을 저지시키는데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 나가는 길이 가장 합리적이 되겠는가? (1946년 겨울 로버트 올리버)

  • ▲ 이승만과 김구가 미군정장관 하지 중장을 만나고 있다. ⓒ 뉴데일리
    ▲ 이승만과 김구가 미군정장관 하지 중장을 만나고 있다. ⓒ 뉴데일리

    하지는 이박사의 귀국을 지연시키고...김구는...

    --남한 정세는 폭발적이었다. 소련과의 합의를 이루기 위해 미국은 최정적이고도 절박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는데, 이것이 이박사의 귀국을 방해하면서 고의적으로 지연책을 쓴 근본 이유였다. 그러나 이박사의 서울 귀환을 싫어하는 인물은 하지 장군 하나뿐이 아니었다.
    3월2일 김구는 남한 전역에서 1500명 대표로 구성된 이른바 한국국민대표회의를 소집하고 임시 대한민국 수립을 승인하라고 요구했는데, 장시간의 신랄한 논쟁 끝에 김구는 이박사를 지지하는 여론을 자기가 과소평가해 왔음을 깨달았다. 김구는 의작징을 사임했고 그 자리에 도 없는 이승만 박사가 대신 선출되었다.
    그 후 이박사는 조용히 임시정부를 김구가 의도했던 ‘반란정부’가 아닌 하나의 정당 위치로 방향을 전환시켰다. 그 후 김구와 이승만은 다시는 서로 협조하고 합작하는 일이 없었다.
    (1947년 3월 로버트 올리버)

    --후일이 되어서야 이해되거나 알게 되는 수많은 중대사건들처럼 결정적인 전환점이 3월 12일 워싱턴에서 일어났다. 그것은 트루먼 대통령이 공산세력의 진출을 저지하기 위한 자금 4억달러를 국회에 요청한 사건이다. 이른바 <그리스와 터키에 관한 트루먼 독트린>이다.
    발칸반도를 삼키는 소련 공산주의 확장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소련과의 협력을 통해 평화를 성취하려는 전후의 노력이 끝났다는 사실이며 이후로는 공산독재국가에 대항함으로써 평화와 안정이 추구될 것이었다.
    “새로운 계획이 바야흐로 실현되려 하고 있고 남한정부에 관해서 우리가 원하는 바 제공하게 모두를 제공하게 될 것입니다” 힐드링 국무성 차관보는 개인적으로 따뜻하게 대해주었고 도움을 주었다. (1947년 3월 로버트 올리버)

    --하지 장군의 가장 큰 잘못은 이 어려운 시기에 이승만 박사를 그렇게도 철저하게 연금시켜 격리시킨 일이었다. 그것은 비밀과 암흑속에 가리운 최악의 시기였다.
    이 박사는 7월20-일자로 다음과 같은 ‘각서’를 보내왔다. 이 박사는 각계의 이해를 돕기 위해 자신을 제3자로 한 관점에서 쓴 것이었다.
    “.....하지장군은 이승만을 버리고 이승만과 대항하는 2,3개의 집단을 마련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가 이박사의 신용을 떨어뜨리려는 시도를 되풀이 할수록 사람들은 이박사를 더욱 지지하게 되었고 하지장군에 대한 저항은 더욱 강렬하게 바뀌어갔다. 하지장군은 이박사를 반미주의자니 반하지파라느니 비난을 퍼부었다. 한국 사람들은 오직 한 가지 즉 자기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모든 것을 희생하는 사람을 따른다는 사실를 그는 모르고 있다.
    맥아더 장군의 말을 빌리면 ‘한국인들이 자치능력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말이다. 동물조차도 스스로 돌보는 방법을 알고 있다. 하지장군은 한국인들을 칼을 만지기에도 너무 애송이들로 보는 것이다....................중략................
    미국 민주주의도 하룻밤 사이에 생겨나지 않았다. 모든 역사학도들은 미국 사람이 170년의 민주주의 시련기를 통하여 얼마나 고난을 겪어 나왔는지를 알고 있다. 그러므로 한국인들은 미국 초창기의 실패를 교훈으로 삼아 자신들에게 맞는 민주주의를 이루는 길을 찾게 될 것이다. 우리들의 방법이 미국 표준에는 들어맞지 않을 것이다. 미국식 표준이 한국을 위해서는 필요치 않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만일 미국이, 우리는 능력이 없으니까 미국사람들이 대신 하겠다고 고집한다면, 그들은 오래지 않아 잘못을 깨닫게 될 것이다. 첫째로 한국사람들은 미국의 동기를 오해하고 저항할 것이다. 또 수많은 유혈극을 치르게 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미국의 무역은 오랜 세월동안 3000만의 고객을 잃게 될 것이다. (1947년 7월 이승만이 로버트 올리버에게)

    흥미진진한 희극 배우들...이박사의 예언이 맞아들어가는 비극

    --만일 그리스의 희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가 1947년 남한의 정치상황을 각본으로 쓰려 한다면, 풍부한 자료와 충분히 흥미진진한 인물들을 찾아 낼 것이다. 등장하는 배우들에게 연기는 희극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비극이 될 것이다.
    워싱턴에서 정세급변을 내다보면서 한국문제가 새로 국제연합에 제출되는 마당에 9월22일 내가 이박사에게 써보낸 편지와 같이 나에게도 감회가 깊었다.
    “이 박사님이 추구해온 노선의 정확한 슬기는 두 나라 회의론자들이 설 땅을 잃을 만큼 이제는 너무나 뚜렷합니다. 뒤늦은 그들의 뒷궁리가 박사님의 예견과 거의 같다는 사실이 현재 입증되고 있습니다.”
    찬사가 지나쳤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 무대와 장면에 서서 연기를 맡았던 다른 배우들의 서투른 솜씨가 이 박사를 더욱 돋보이게 만든 것을 어찌하랴.
    (1947년 9월 워싱턴에서 로버트 올리버)

    --군정에 비협조적이라 해서 미국 관리들과 미국 언론들로부터 받고 있는 공격으로부터 나를 막아주도록 좀 더 일 해주어야겠소. 연립정부를 수립하고 나를 뒷전에 몰아내려고 하지 장군은 지금도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고 있소. 나의 부재중에 그는 나를 위한 모금운동을 중지 시켰고, 대한국민협회는 미국의 나에게 송금하는 대신 자기들 멋대로 250만원 이상을 써버렸소. 빨갱이 조직에 대항하도록 우리 사람들을 선거에 대비하여 각지방에 파견할 준비가 되어있으나 자금이 들어올 때까지 기다려야겠소.
    (1947년 5월 6일 이승만의 편지)

    --연회석상에서 미국 장군은 자유를 팔아넘기기를 거부한 한국의 애국 인사들을 비난하고 모든 정치적 권리를 박탈당할 것을 각오하라고 협박했습니다. 이런 공갈에 한국 손님들은 분노하고 흥분했으나, 소련 대표단 사람들은 미국인이 어린애처럼 자기들의 손아귀에서 놀아나는 꼴을 보며 냉소를 띄우고 있었습니다.
    공산당과의 합작은 소련의 지배하에 굴복하는 것이란 사실이 가장 최근에는 헝가리와 불가리아를 통하여 충분히 입증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연립정부’를 수립하라고 떠벌리고 있습니다. 미국 사람들은 연립정부가 민족주의자들과 공산당의 순수한 타협을 대변한다고 스스로를 속이고 있습니다.
    일본의 한국강점에 앞섰던 1910년의 상황이 1947년에 되풀이 되고 있습니다. 미국이 잔인하고 독재적인 소련과 협력하여 한국 국민들을 목졸라 죽이려는 것입니까?
    미국 관리들은 한국문제를 소련과의 폭넓은 관계속에서 ‘보다 광범위한 각도’에서 고려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소련으로부터 어떤 지역을 양보받기 위해 한국을 희생시킬 수 밖에 없다는 의미 아닙니까. 미국 사람들은 또 한국 사람들이 공산주의를 싫어하는 것을 꾸짖고, 소련과도 행복하게 같이 사는 법을 배워야한다고 말합니다. 오늘의 이데올로기 전쟁에서 미국 사람들은 실제로는 스스로가 자신들의 최대의 적이 되고 있습니다.
    (1947년 6월18일 워싱턴에서 임병직이 이승만에게)

    --하지 장군은 과거에도 지금도 여전히 공산분자들과의 협력이 필수적이라는 것이오. 신탁통치를 포함한 모스크바 결정은 ‘불변의 법칙’이라고 주장하오. 3대국 결정을 내릴 때 한국인과 상의한 바도 없고, 미-소 공동위원회는 우리가 남한의 공산화를 막지 못하도록 ‘좌우합작 정부’를 세우려고 하니 거부해야하는 것이오. 하지 장군은 소련과 무슨 합의를 얻으려 애쓰면서 김규식과 여운형을 공동의장으로 하는 이른바 ‘좌우합작위원회’라는 것을 시작했소. 그러면서 이박사는 반미주의자다, 건국을 방해한다, 등등으로 떠들고 있소.
    (1947년 7월13일 이승만의 편지)

    --류 영사 부부와 세자녀, 김규식 박사 부부 그리고 김구씨와 그 아들, 이렇게 점심을 하기 위해 정오에 중국 영사관으로 갔소. 식사후 나는 말하였소. “우리 셋은 모두 한 평생을 조국 독립을 위하여 투쟁하여 왔소. 구체적인 문제들에 관해서는 약간의 의견 차이가 있겠지만 대체로 지금까지 같은 목표를 위하여 함께 일하여 왔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소. 머잖아 메논 박사(유엔 한국위원회 대표)와 호세택 박사(중국측 위원)가 소총회로 귀환할 텐데, 이들이 한국 지도자들이 장래성 없이 분열되어 있다는 인상을 가지고 돌아간다면 불행한 일이 될 것이오. 우리는 류박사가 이 설날에 이렇게 맛있는 점심을 대접해 주면서 우리가 생각보다는 덜 갈라져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여 준데 대하여 감사의 뜻을 표하려는 것이오. 김구씨도 우리 셋이 공동성명을 발표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우리가 완전 단결되어 같이 나가고 있다는 말을 하는 것이 괜찮을 것이라고 말하였소. 류 박사는 우리가 국제연합 위원단에 통일전선을 과시할 수 있으니 자기도 만족스럽다고 말하였소.
    (1948년 1월 이승만의 편지)

    --이 사람들이 말하기를, 소련이 총선거 제안을 거절했기 때문에 우리가 모두 남한에서의 총선거를 찬성하는 것이라고 했소. 그러나 선거를 실시하기 전에 우리는 북쪽의 지도자들과 이 문제를 토의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고, 이것이 의견의 차이점이오. 나는 남북 회담 구상이 몇 번 제출되었으나 이것이 총선거를 지연시킬 것이라고 해서 국민들이 이를 반대하는 것이라는 말을 하였소. 그러나 남북회담이 총선거를 지연시키지 않는다면 나는 여기에 반대하지 않겠소. 그런 뒤 우리 모두는 김규식과 김구가 남한의 총선거에 찬성하고 이승만은 남북간 지도자의 합동회의를 찬성한다는 일반적인 합의에 도달했다고 말하였소.
    김규식 박사는 이박사가 공개적으로 남북회담을 옹호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는데, 왜냐하면 만일에 그렇게 한다면 북쪽의 공산분자들이 우리와 합류하려고 하지 않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라는 것이오. 여기에 대하여는 우리 모두가 찬성하였소. (1948년 2월 이승만의 편지)
    *두 김씨의 북행을 묵인하기로 해준 뒤에 이승만은 윤석오 비서에게 이렇게 말했다.
    --평양은 무엇 하러 가나? 모스크바로 가야지. 김일성을 백날 만나봤자 무슨 소용 있나, 스탈린을 만나서 직접 담판이라도 한다면 모를까...


    두 金 "영구분단 욕먹을까 두려워"...이승만 "그 책임은 내가 지겠소"

    --김규식 박사는 그날 저녁 우리는 아무 일에도 동의한 바 없다고 말하였소. 그는 “김구씨와 나는, 우리가 남북 지도자간에 회의를 열도록 노력하는 동안 선거는 당분간 제쳐놓아야 한다는 점에 합의를 보았다”고 말했소.
    나는 김박사에게 물었소. “당신이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소? 그 모임엔 우리뿐 아니라 메논, 후시쩌(胡世澤), 잭슨, 류유완 영사도 있었소. 이 사람들이 우리가 총선거와 남북회담 계획을 동의하였다고 공개적으로 논평까지 하지 않았소?
    김구씨는 자기로서는 선거 실시에 반대하지 않으나 자기와 김규식 박사는 남북회담을 열고 싶다고 말했소. 김박사는 “우리가 만일 남과 북을 단결시킬 수 있을지의 여부를 알아볼 수단을 써보지도 않고 남한에서의 총선거를 지지한다면, 장차 국가의 분단을 영구화시킨 역사의 반역자로 불릴 것”이라고 하였소.
    나는 “당신들이 거기에 대하여 염려할 필요는 없소이다. 내가 전적으로 책임을 질것이오. 당신들이 남한에서의 총선거를 반대하는 이유가 무엇이오?”라고 물었소.
    김박사는 “우선 이 정부가 국제연합의 승인을 받을 것인지? 둘째로 얼마 정도의 원조를 미국으로부터 얻어낼 수 있는지? 이런 문제들을 알지 않고 우리는 여기에 뛰어 들 수는 없소”라고 대답했소.
    나는 그에게 말해주었소. “여보게 우사(尤史)! 우리 한국 사람들이 스스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도 모르는 판국에 어떻게 외국에 대하여 우리를 위해서 얼마만큼 일을 할 수 있는지 요구할 수가 있겠는가?
    우리가 정무를 세우면 우리를 승인해 주겠는가 하고 그들에게 미리 물어 볼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정부를 수립하기 위하여 가능한 모든 일을 다하고서야 국제연합에게 이것을 승인해 주도록 요구해야 하네”하고 말해 주었소.
    하지 장군은 김규식에게 “당신이 남한에서의 총선거를 반대한다면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무엇이오?”라고 물었소. 김박사는 이 질문에 답을 주지 않았소.
    이묘묵 박사는 이야기 내용을 일일이 김구씨에게 통역해 주었소.
    그 때 나는 말하였소. “하지 장군, 당신이 이야기하다시피 국제연합 위원단이 소총회에 대하여 지금 선거를 실시하도록 설득하는 일이 어려울는지도 모르오. 한국 국민의 지도자의 한사람으로 이 사실들을 우리 국민에게 밝히는 것이 나의 의무요. 오늘 저녁 장군이 이야기한 바와 같이 여기 이 양반들이 선거에 대한 찬성을 거절하기 때문에 국제연합 위원단이 남한에서 선거를 실시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말이오. 만약에 소총회 역시 만찬가지로 세 사람의 위대한 한국 지도자들이 찬성하지 않기 때문에 선거에 대한 결정을 거부할 때에는 어쩌겠소? 이럴 경우에 국민들 앞에서 여러 가지 질문에 답하려면 누군가는 불려 나가게 될 것 아니겠소?” 그리고 나는 벌떡 일어났소. 나는 이 두 양반들, 특히 김구를 선거에 합심하도록 설득해보려고 가능한 방법을 다 하였으나 끝내 실패했노라고 말했소.
    하지 장군에게 덧붙여 말했소. “장군의 영향력은 성공을 거둘 것이오. 장군은 내가 지금 어떤 지경에 무엇을 대표하고 있는지 잘 아실거요. 이 점에 관해서 나의 능력으로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다 하겠소. 이 두 양반을 장군에게 맡기니 그저 당신들이 성공하기를 바라오.”
    김구씨는 “남북회담을 위한 소련의 계획은 하나의 초안에 지나지 않고 우리는 아직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고 있소”라고 말하였소.
    이 모임은 두 시간이나 계속되었소.
    그 다음날 노블 박사(국무성 관리)가 찾아와 김규식이 2월 20일 오전에 하지 장군을 방문하였고 그는 김구도 대표한다고 하더라고 일러 주었소. 김박사는 이미 발표된 대로 소련이 3월 15일을 기해 북한정부를 수립하려고 정말 앞장 선다면 자기들(김구와 김규식)도 공개적으로 우리 선거를 지지하겠노라고 말했다고 전해주었소.
    21일 토요일 오전 동아일보의 어떤 기자가 찾아와 말하기를 김구가 한국 언론들에게 식사를 내고 자기는 남한 선거에 반대한다고 말하였다 하오. 이때 동아일보 기자가 김구에게 “나의 이박사에 대한 의리는 결코 변치 않을 것이오. 남산위의 소나무가 그 색깔이 변한다 해도 결코 안그럴거요”하고 한 그의 말을 상기시켰다는 것이오. 그리고 김구에게 “지금 선생님 입장이 이 말고 모순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을 때 김구가 약 10분간 침묵하더니 이렇게 말하더라는 것이오. “우리는 작은 문제들에 대하여 의견이 다를 수가 있다.”고.
    나는 그 기자에게 “남산의 모든 소나무가 지금 다 죽어가고 있소”라고 말해주었소.
    오늘 2월22일 김규식의 성명이 나왔는데 자기는 절대적으로 선거에 반대한다는 것이오. 남조선 과도 입법의원은 선거에 찬성하는 결의문 채택을 원하고 있소. 43명이 찬성에 서명했고 10명의 의원들이 여기에 반대하여 투쟁 중이오.
    (1948년 2월 이승만의 편지)

    "그런 공갈에 신물...미정부가 이승만 쏴죽이라고..."
    --이런 얘기는 처음 듣는게 아니오. 좌우합작을 지지하지 않으면 자기들은 철수하고 공산주의자들이 내려올 거라는 말을 수없이 들었소. 이제 총선거조차 시차제나 지역적 선거로 하겠다니, 이것은 남한 공산 테러분자들에게 길을 열어주는 것이오. 엄청난 새로운 문제를 야기 시킬 선거는 있을 수도 없고 해서도 안되오. 미국정이 공갈을 치는 일에 우리는 이제 신물이 나고 피곤합니다. 그리고 여러 번에 걸쳐 자기들이 미국정부로부터 ‘이승만 쏴 죽이라’는 명령까지 받았노라고 말한 적도 있소.
     (1948년 3월 노블 미국무성 관리에게 이승만의 반박)

    김구는 미군철수 외치고...김규식은 자기 꾀로 소련 이긴다고...

    --일반 국민들이 믿기에는 김구와 김규식은 평양으로 갈 것이고, 그들의 참석은 그곳에서 크게 떠들어댈 것으로 보고 있소. 이미 공산당 신문들이 그들은 찬양하고 있소. 그네들은 김구를 부의장으로 앉히고 그 곳에 붙잡아 둘지 모르오. 그들의 선전은 북한 국민들에게 김구가 구국의 뜻으로 환향하게 되었다 운운하며 혈안이 되어 있소. 당분간은 그런 식으로 나갈 것이나 그 다음에는 모스크바 결정(신탁통치)을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자기들 정부가 진정한 한국정부라고 떠들어대며 밀고 내려올 것이오. 그네들의 모든 군사적 준비 태세는 이 점에 집중시키고 있소.
    김구는 미군 철수를 요구할 것이고 그는 항상 그렇게 외쳤소. 소련 사람들은 북한에서 시베리아로 가까운 국경을 넘어가서 미국이 어떤 행동으로 나오는지를 지켜볼 것이오. 미국이 뒤따라 철수하면 그 후의 일은 당신도 짐작할 것이오.
    김규식 박사는 영리한 사람이긴 한데 아직도 자기가 소련 사람들을 꾀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소. 우리가 오직 해야 할 일은 지체 없이 남한에서의 우리 계획을 그대로 밀고 나갈 뿐인 것이오.
    (1948년 4월 5일 이승만의 편지)

    --요란한 선전과 더불어 오래 기다려왔던 평양회의는 4월 19일부터 25일에 걸쳐 열렸고 남한에서는 김구와 김규식이 이끄는 대표단이 참가하였다. 그들은 5월5일 서울로 돌아왔고 김일성과의 별도 회담을 통해 북한만의 단독정부는 ‘결코’ 세우지 않겠노라고 확약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모든 문제는 남북 지도자들이 자주 만나 논의함으로써 해결될 것이며 국제협력문제는 외국의 작용으로 해결될 것이라고도 했다. 또한 북한이 압록강 수력발전소로부터의 전력 송전을 끊지 않겠다는 것과 북쪽 수리조합 저수지는 남한의 논에 물을 대기위해 곧 문을 열게 될 것이라고 확인하였다.
    남북회담은 ‘모든 외국군대의 철수를 요구하고 이에 뒤따라 전국을 통치할 국민정부 수립을 위한 선거 실시를 요구하는 결의문을 채택하고 막을 내렸다.
    공산당 언약의 진실 여부가 밝혀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5월 14일 북으로부터의 전기는 끊겼다. 저수지는 문을 열지 않았다. 이것은 5월10일 선거 이후의 일이다.
    평양의 남북회담에 이어 열린 국제연합 한국위원단 일동은 모임을 가지고 5월10일 총선거를 밀고 나가기로 만장일치 의결을 보았던 것이다.
    선거는 완전한 승리였다. 5월10일까지 남한의 유권자 94%가 등록하였고 91%의 등록자가 한국 역사상 최초의 총선거에 임했다. 선거는 미군정이 관리하였고 유엔 위원단이 팀별로 전국의 투표소를 예고없이 방문하면서 감시하였다. 이승만은 동대문 갑구에서 당선되었다. (1948년 5월 로버트 올리버)

    NYT등 미언론들 "한국을 곧 소련에 포기한다" 보도
    --선거에 대한 미국의 즉각적인 반응은, 이제 우리는 책임을 벗어날 수 있게 되었구나 하는 일종의 안도감 그것이었다.
    <키프링거 뉴스레터>와 <유에스 뉴스 앤드 월드 리포트>지는 모두 미국이 곧 한국을 소련에게 ‘포기’하리라는 보도를 하고 있다. 기사를 쓴 사람들을 만나보았는데 이들이 특별한 정보를 가진게 아니라 다만 이번 선거가 의미하는 바를 나름대로 해석했다는 것이었다. 당지의 군사지도자들 간에는 이박사가 <반미적>이라는 견해가 확고히 뿌리를 박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가장 심각한 문제이며 가능한한 최대의 관심을 기울여야 할 필요가 있다.
    5월17일 <뉴욕타임스>는 한국을 소련 지배하에 들어가도록 넘겨주려는 미국의 계획이 무르익었다는 주장을 내세운 칼럼을 실었다.
    김구와 김규식은 유엔 한국위원단과 만난 자리에서, 평양 정치회담이 이미 국가 통일의 기초를 다져 놓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앞으로 더 이상 회담이 필요치 않다고 말했다. 김규식은 말하기를 김일성이 자기에게 개별적으로 “북으로부터의 남침은 없을 것”이라고 약속하였노라면서 ‘나는 이것을 의심할 이유가 없고’라고 확언했다. 김구는 평화통일과 진정한 국민정부 수립은 가능하다고 자신감을 밝혔는데 그 이유는 ‘남북한 정당, 사회단체들이 공동성명에 서명했고 틀림없이 그대로 추진해나가기로 약속을 했기 때문이오’ 라고 말했다. (1948년 5월 로버트 올리버)

    --일찍부터 언론보도는 나를 반미주의자-극우분자- 반동분자등등으로 비난해 왔는데, 말로써 이런 비난에 답할 필요는 없소. 우리 헌법이 채택될 때 그 속에는 우리가 반동적으로 보일 구절은 없다고 생각하오. 시민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미국 헌법의 구절이 우리 헌법에도 채택되어 있으며 우리는 미국 사람들보다 더 앞서가려는 것이오.
    유엔 위원단과 만났더니 북한과 한 차례 더 합동회의를 여는 것이 어떠냐고 물었는데 나는 이렇게 말하였소. “우리가 북한과 무작정 문호개방을 원한다면 국제연합을 통하지 않고도 하는 방법을 우리는 알고 있소. 그저 북한으로 올라가서 공산주의를 받아들이고 소련의 한 속국이 될 것을 결정하겠다고 말하기만 하면 북한은 문호를 개방할 것이오. 그러나 어떠한 연립정부도 또 하나의 체코슬로바키아를 만들게 될 것이고 이런 일은 할 수 없는 일인데 우리가 그렇게라도 해야 한다는 것이 유엔의 희망인지를 나는 알고 싶소.”
    (1948년 7월 이승만의 편지)

    --헌법독회는 미국 의회와 마찬가지로 소란스럽소. 계속되는 토론의 일진일퇴가 그렇게 민주주의적일 수 없소. 모든 사람에게 발언할 기회를 준 것은 매우 현명하였소. 달리 했다면 의장은 독재자라는 비난을 받았을 것이오. 지금은 아무 소리도 할 수 없지만---이 박사의 편지를 받은 후 7월21일에 다음과 같은 전문이 들어왔다.
    180표로 이박사 대통령 당선, 김구 31표, 안재홍 2표, 그리고 서재필 1표는 무효임.
    부통령은 이시영 133표, 김구 62표.
    대통령과 부통령의 취임 선서식이 7월24일에 있었다. 대한민국의 공식 출범일은 일본패망 제3주년이 되는 8월15일로 정해졌다. (1948년 7월 로버트 올리버)

    --국무총리는 북한 출신이어야하고 부유계급 출신이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오. 김성수는 내가 함께 일하고 싶은 인물이지만 그와 가까운 사람들이 ‘죽기 아니면 살기 식’의 정략을 중심으로 한데 뭉쳐있소.(김성수는 7석의 각료자리 요구).....
    미국인들이 한민당과 기타 불평분자들을 지지하고 있기 때문에 정부의 여러 계획을 뒤엎으려 하고 있소. 계획들이 성공하는 것보다는 뒤집어 엎어버리는 것이 낫겠다는 것이오.
    김성수가 이끄는 한민당이 우리를 반대하고 있기 때문에 동아일보와
    기타 신문들의 내각에 대한 공격이 날로 심해가고 있는 중이오
    .
    그러나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각료직에 대한 한민당의 추천에 내가 굴복하였더라면 사태는 더 악화되었을 것이라는 점이오. 그때에는 지방의 국민들이 지주들 편에 선 나를 반대하고 나섰을 터이니 말이오. 지금은 다만 서울의 정치인들이 나를 반대하고 있소. 나는 항상 외로운 싸움을 해 나왔고, 또 앞으로도 외로운 싸움을 계속하지 않으면 안되오. 서울의 정치인들은 귀하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심한 악당들이오. (1948년 9월 이승만의 편지)
    *국무총리엔 만주서 공산당과 싸운 이범석에게, 좌파 조봉암은 농림장관이 되었다.

    --내각에 대한 비판은 한민당이 동아일보나 기타 신문을 통해서 계속할 것이오. 무초 대사와 콜터 장군은 어제 나에게 “당신은 지금 한민당과 용감하게 잘도 싸우고 있소. 이 사람들은 양곡 수매를 원치않는 사람들이오.”라고도 하였고 “이 사람들은 당신의 빈민구제 계획을 만류하려 하고 있소.”라고도 하였소. 나는 무초대사와 콜터 장군에게 식량배급 방식을 바꾸어야 한다고 말했소. 일본식 방법이기 때문에 현행 배급은 환영을 못 받고 있소.
    (1948년 10월 이승만의 편지)

    --미국 신문들은 이대통령과 그의 새정부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기사를 게재하기 시작했다. 그는 시민의 자유를 억압하며 국민을 탄압한다고 공격을 받았다. 사실상 군정이 철수할 때 남한에는 공산당 소굴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미군 제1진이 철수한 직후, 남한 각지에는 파업, 시위, 무장반란이 만연되었다. 예상했던 그대로 공산당 봉기를 진압시키려는 이대통령의 노력은 각국 언론에서 ‘반동주의’ ‘독재정치’ 그리고 테러리즘으로 묘사되었다. 국방경비대원 신원에 대한 ‘사상적 심사’를 미군정이 거부했었던 직접적인 결과였다.
    노골적인 공산반란이 제주도와 여수, 순천, 대구등 여러 도시에 주둔한 국방경비대 내부에서 일어났다. 미 군정에서 조직한 경비대로부터 이탈한 2천여명의 공산군이 작전을 시작하여 약 5백명의 정부 관리들이 피살되었다. 계엄령을 선포한 이대통령은 5만명의 병력을 무장훈련시키기 위한 미국의 원조를 요청했으나 거절되었다. (1948년 10월 로버트 올리버)

    --<한국 정치정세> 최근 중국에서 국민당 정부의 몰락과 적색분자들의 승리는 반드시 한국에 불리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어째서 이렇게 되었는가? 해답은 간단하다. 미국 정책이 자꾸 바뀌는 까닭이다. 때로는 반공이고 때로는 친연안파가 되는가 하면 때로는 이것도 저것도 아니었다. 그 결과 국민당은 기댈만한 지지세력을 얻지 못한 반면, 공산분자들은 지지세력 확보에 필요한 고무적인 자극과 시간을 벌었다. 지난 10년간을 두고 확고한 정책을 유지하는 소련과의 경쟁에서 흔들리는 미국이 무슨 수로 겨룰 수 있겠는가. 결국 미국은 철수하고 말았다.
    한국은 어떤가? 남한의 공산지도자 3명중 하나인 박헌영은 남한 공산주의자가 2천명이라고 자랑했다. 미국이 우리에게 이 상황을 처리하도록 맡겨주었던들 지금쯤 공산당문제는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허용되지 않았다. 우리는 어떤 정치조직에서나 공산 지도자들과 협조해야 했으며 그들과 손잡지않고는 정부도 국회도 가질수 없다고 했다.
    미국은 우리에게공산당을 비난해서도 안되며 그들의 근거없는 반미 반한 허위선전을 막아서도 안된다고 했다. 지나간 라디오방송 연설문을 보면 공산당에게 너무 가혹하다는 이유로 군정 검열에서 삭제된 구절이 많다. 최근의 여수 순천반란은 국방경비대 내부에 어떤 종류의 인간들이 들어있는지를 아는 인사들이 이미 오래전부터 예언했던 일이다.
    하지사령관이 임명한 프라이스 대령은 상당수의 빨갱이들을 경비대에 입대하도록 허용하였다. 몇 번이고 주의를 환기시켰지만 그는 그들이 선량하여 말썽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라고 답했다. 그 ‘선량한’ 자들에게 희생된 ‘선량한’ 국민들이 부상자를 제외하고 사망자만 5000명이 넘는다. 지난 2년간 공산당을 다루는 방법이 무정견했기 때문에 황무지에서 남한 공산당을 증강시킨 것이다.
    이제 독립정부의 탄생이 세계 대다수 민주국가들의 승인을 얻었기 때문에 한국인 스스로가 나라와 영토를 지키도록 허용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위도선의 경계를 넘지 말 것과, 만일 공산분자가 38선을 넘어오더라도 그 선을 넘어 따라 들어가선 안 된다고 주의를 받고 있다.
    북한의 우리 국민들은 매국노들을 응징하기 위해서 붉은 군대 내에 있는 우익의 협력으로 일치단결하여 총궐기할 때에 도와달라고 우리에게 호소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은 국제전쟁으로 번질까 두려워만 하니 북한동포를 도울 수가 없다.
    우리가 미국 정책입안자들의 변화무쌍한 정책만 따른다면 조만간 또 하나의 중국처럼 밀어 붙여질 것은 뻔한 일이다. 우리들이 재갈과 쇠사슬에 묶여 있다가 이미 때는 늦었다고 깨닫는 것보다는 차라리 싸우다가 부서지는 편이 낫다고 하는 국민감정이 지금 한국에 팽배하고 있다. (1949년 2월12일 이승만이 장면 주미대사에게 보낸 각서 요약)

    탱크를 요청했는데 '한국 지형에 안맞는다'고 핑계

    --우리들은 스스로의 방위를 가능하게 할 만큼의 무기를 신청하였소. 우리가 수없이 요청했으나 얻은 것은 아주 적소. 38선 저쪽 병력은 사정이 긴 소총으로 우리를 쏠 수 있소. 이런 소총을 못 가진 우리 경찰들은 적의 손아귀에 달려 있소. 사태를 악화시키지 말라는 지시에 따라 우리 군대는 38선 연변에 주둔하지 못하도록 되어있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지킬 권리만은 갖고 싶소. 지금까지 우리는 그렇게 못했소. 우리는 탱크, 화염방사기, 다른 현대무기를 요구하였소. 그러나 그들의 말은 항상 ‘지금 오는 중이오’라든가 ‘탱크는 이 땅에 맞이 않다’등등의 딴소리 뿐이오. 생각컨대 기갑부대를 창설한다는 말은 본론을 피하기 위한 그들의 ‘변덕’인 것 같소. 책임자로 남은 윌리엄스 로버츠 장군에 대해 아주 절망을 느끼오. 그는 퇴역을 앞두고 골치 아픈 일에 말려들고 싶어 하지 않소. 우리는 한국이 ‘너무 작고 너무 늦은’ 또 하나의 실패담으로 되는 것이 큰 걱정이오.
    (1949년 2월17일 이승만의 편지)

    --그자들은 한국정부와 국회 간의 충돌을 지나치게 강조하오.
    국회내 친공분자들과 반미분자들이 한편엔 한국독립당(김구)에,
    또 한편엔 공산당 조직인 남로당에 연결되어 있소.
    이들은 정부를 약화시키기 위해 무엇이든지 하려고 계획하고 있소. 이자들은 성공하지 못할 것이오. 왜냐하면 전 국민이 굳건히 정부 편에 서 있기 때문이오.
    최근 박헌영의 비서가 어떤 여인과 함께 38선을 넘어가려다 개성에서 붙잡혔소. 그들은 비민 통신문을 숨겨 가지고 있었소. 철저한 조사가 진행중인데 많은 다른 국회의원들이 관련되어 있소. 이들이 그렇게까지 악랄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소.
    가정 충격적인 일은 김구씨 암살 사건이오.
    그가 남북협상을 주장하면서 남한의 각 도를 망라하여 과거의 임시정부 지지를 맹세하는 단체들을 조직하는 한편, 내년 6월 국회의원 선거에 자기 지지자들을 당선시키려고 준비를 서두르며 반정부 선동을 하고 있소. 국민들간에는 그의 비애국적인 성명이나 활동을 비난하는 강한 감정이 번져있었는데, 그의 암살 소식이 전해지자 국민들은 충격을 받았소.
    그를 암살한 사람이 비밀회담을 하려고 그를 자주 방문했던 믿을만한 육군 장교의 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이 발표되자 세상은 모두 잠잠해졌소. 그 장교는 한국독립당 내에서 전략적 위치에 있던 사람들 중에 하나라를 사실도 알려졌소.
    내게 알려진 바로는 이 육군 장교가 김구씨를 방문했고, 김구씨는 비서들을 밖으로 내보내고 그와 비밀대화를 나누고 있었다는 것이오. 그 때 세발의 총탄이 발사되고 김구씨를 그 자리에서 숨지게 하였소. 사람들이 방으로 뛰어들어 그 자객을 붙잡아 혼수상태가 되도록 두들겨 팼소. 입원한 그가 회복되는 대로 그의 동기와 또 배후자가 있다면 모두 밝여내게 될 것이오. 철저한 조사가 이루어져야 하므로 이런 일들은 어느 하나라도 인용하지 말아 주시오. 조사가 완료되면 그들이 이 불행한 사건에 대한 전면보고서를 발표하게 될 것이오. (1949년 6월 28일 이승만의 편지)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