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선교 목사. ⓒ 뉴데일리
    ▲ 이선교 목사. ⓒ 뉴데일리

    6,25 한국 전쟁사에서 지금도 풀리지 않은 의문이 하나 있다.

    파죽지세로 밀려와 사흘 만에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이 왜 남하를 미룬 채 서울에서 다시 사흘이란 소중한 시간을 허비했을까?

    이 사흘의 여유로 국군은 방어선을 가다듬고, 미군은 한반도에 병력을 전개할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이에 대해 여러 가지 주장이 있지만 가장 설득력 있는 것은 “김일성이 남한 인민들의 봉기를 기다렸다”는 것이다. 그가 봉기를 기다린 이유로 흔히 “박헌영의 남한 인민의 봉기에 대한 호언장담을 김일성이 믿었다”는, 그래서 봉기가 안 이뤄지자 패전 후 박헌영에게 책임을 물었다는 것이 거의 정설로 돼 있다.

    이선교 목사는 ‘김일성이 남한 인민들의 봉기를 기다렸다’는 주장엔 동의한다. 하지만 그 원인은 박헌영의 호언장담이 아니라 제주 4.3사건에서 적화통일의 가능성과 남한 인민 봉기 가능성에 대한 확신을 얻었다고 주장한다.

    “한강을 건너야 하는 북한군이 부교 등 도하설비를 안 가지고 왔어요. 서울만 점령하면 나머지는 저절로 무너질 거라고 생각한 결정적 증거입니다.”

    이 목사는 제주 4.3사건을 우리 근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제주 4.3사건으로 국군 14연대의 여순반란이 벌어졌고 이들이 6.25라는 민족 최대의 비극으로 이어졌다는 시각이다.

    국방부에서 장교로 근무하던 이 목사는 틈나는 대로 한국전쟁사를 공부했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한국전쟁의 여러 의문점들을 연구하게 됐고, 그 속에서 제주 4.3사건이 갖는 중대한 의미를 인식하게 됐다고 한다. 그 전인 1966년 잡지 ‘사상계’가 다룬 제주 북촌리 사건 기사에서 600여 명이 사망한 내용의 기사를 읽은 적이 있어 이 목사의 제주4.3사건에 대한 관심은 더욱 커졌다.  

    우선 제주4,3사건의 개요를 보자.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의 김달삼 외 400여 명의 폭도들이 대한민국 건국 5.10선거를 반대하고 제주도에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세우기 위해 새벽 2시 무장을 하고 제주도의 12개 지서를 공격했다. 당시 제주엔 일본군이 무장해제를 하며 남겨진 소총 등 장비가 많았다고 한다.

    고일수 순경의 목을 쳐 죽이고, 김장하씨 부부를 대창으로 찔러 죽인 뒤 우익인 문영백의 10살 그리고 14살 딸을 죽이고, 선거관리위원과 우익들을 비참하게 죽였다.

    그리고 5.10 선거를 폭력으로 반대해 3개 선거구 중 2개 선거구를 무효화 시켰고, 북한의 8.25 선거에 5만 2000여 명이 표를 가지고 가 북한을 지지했다.

    김달삼 외 5명의 남로당 제주도당 대표는 북한 해주 인민대회에 참석해 김일성 만세를 불렀다. 1948년 9월 15일부터 김달삼이 이북으로 가자 이어 이덕구가 뒤를 이어 폭도사령관이 되어 경찰과 우익을 죽이고, 11월 2일에는 9연대 6중대를 공격해 하루에 21명의 국군이 전사하는 내란을 일으켰다.

    제2대 폭도사령관 이덕구는 10월 24일 대한민국에 선전포고를 하고 내란을 일으켜 진압군과 폭도들과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제주남로당 3만여 명이 폭도들에게 협조하고, 주민 5만 2000여 명의 지지를 받는 내란군들은 거칠 것이 없어 마을에서 적기가를 부르고 인민재판을 할 정도였다.

    제주 주둔 9연대 안에서도 박진경 연대장이 좌파 군인들에 의해 암살당하고, 장병 41명과 그 후 11명 등 총 51명이 탈영해 지서를 습격, 경찰들을 죽이고, 강의현 소위 등 80여 명이 반란을 일으키려다 실패하기도 했다.

    경찰 및 관공서 직원 75명 등이 폭도들과 합세하여 제주도를 적화하려다 그 음모가 사전에 적발되어 실패할 정도로 내란군들은 대한민국을 위기에 빠뜨려 당시 정부는 11월 17일 제주도에 게엄령을 선포하고 가까스로 내란을 진압했다.

    “누가 뭐래도 제주4.3사건은 무장폭동이자 작은 남북전쟁이었습니다. 그런데 좌파가 이 폭동을 경찰과 국군이 미군정의 지도에 따라 양민 8만여 명을 학살했다”고 주장하고 전교조는 이렇게 우리 어린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목사를 놀라게 할 일은 지난 2003년 벌어졌다.

    2000년 1월 12일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당시 정부는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조사단을 조직해 진상조사보고서 작성기획단에 의해 2003년 10월 15일자로 진상조사보고서를 채택했다.

    그런데 이 진상조사보고서가 문제였다. 보고서는 중요한 내용을 일방적으로 허위 및 좌편향적 시각으로 작성했다.

    ‘제주4.3폭동’을 ‘제주4.3 민중봉기’라고 바꿔 표현했다.

    1948년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을 내릴 정도로 폭도들의 폭동이 심각한 데도 계엄령을 내린 이유와 폭동을 진압할 필요성과 정당성은 싹 빼버리고 진압군이 아무 잘못이 없는 제주 양민을 학살하였다는 내용이었다.

  • ▲ 노무현 전 대통령은 두 번이나 제주도민에게 4.3사건과 관련, 사과를 했다. ⓒ 뉴데일리
    ▲ 노무현 전 대통령은 두 번이나 제주도민에게 4.3사건과 관련, 사과를 했다. ⓒ 뉴데일리

    “공산 폭동에서 무장반란으로 발전된 제주 4.3사건의 본질을 왜곡해 결과적으로 공산 반도들에겐 면죄부를 주고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훼손하는 일이었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도 두 번이나 제주도민에게 사과했어요. 하지만 진상보고서도 대통령의 공식사과도 모두 잘못된 겁니다. 아니, 자체는 원천무효입니다.”

    이 목사는 지난 4월 20일 이 같은 진상보고서에 맞서 헌재에 헌법소원을 냈다. 제주4.3 진상조사보고서가 반도들의 살인 만행 등 내란 등은 모두 빼버리고 ‘아무 잘못이 없는 제주 양민을 진압군이 총살하였다’는 등 모든 책임을 진압군에게 뒤집어 씌웠다는 반론이었다.

    “제주시 평화공원 가 봤어요? 거기 사료관 가면 정말 왜곡의 극치를 볼 수 있습니다.”

    이 목사는 지난 2008년 제주시 봉개동 12만평에 583억 원을 들여 조성한 평화공원 사료관은 이승만 대통령과 국군이 제주 양민을 학살한 자로 묘사하고, 1만 3564명의 위패는 국군이 죽였다고 부각시켜 전시하고 있다고 한탄했다.

    “폭도사령관 김달삼은 영웅같이 묘사한 사진을 전시하고, 좌익에서 만든 영상물 ‘레드헌트’를 상영합니다. 30분짜리인데 국군이 폭도를 진압하는 장면만 보여주어 진압군을 증오하게 하고 있습니다.”

    ‘레드헌트’는 1999년 제작된 제주4.3사건을 일방적인 좌파의 시각으로 그려낸 영화로 원작은 84분 분량이다.

    이 목사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2회에 걸쳐 제주도민에게 사과하는 장면을 영상물을 만들어 사과 내용 중 ‘제주민중항쟁’이라는 말을 부각시켜 계속 방영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평화공원이 제주도 관광객과 수학여행을 온 학생들에게 국군과 경찰을 증오와 타도의 대상으로 인식하게 만들어 반미·친북 좌파 양성의 학습장, 연방제 적화통일의 학습 장소가 됐다는 것이 이 목사의 주장이다.

    “특히 제주대에서는 교양과목으로 ‘제주4.3의 이해’라는 정규과목을 개설하고 2학점을 배정하여 ‘제주4.3 진상조사보고서’의 허위 및 좌편향적인 보고서를 진실인 양 배우고 있습니다. 제주교육청은 ‘아픔을 딛고 일어선 제주’라는 책자를 발간해 제주4.3의 좌편향적인 책자를 만들어 제주 중`·고등학교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어요.”

    이 목사는 “이 같은 좌편향 교육이 버젓이 행해질 수 있다는 것이 너무 놀랍다”고 한탄했다.

    이 목사가 제주 4.3사건 바로잡기에 나서자 위협과 협박도 만만치 않다.

    “당신 목이 몇 개냐”고 전화로 윽박지르는 것은 양반이다. 이 목사는 “하지만 이쪽이 증거를 대며 반박하면 항의하는 쪽에선 아무런 증거도 대응 논리도 내놓지 못 하고 그저 목청만 높인다”고 씁쓸해했다.

    “진정한 애국심은 우리 역사를 잘 가르쳐야 생기는 것입니다. 제주 4.3의 진실은 꼭 밝혀내고 말 겁니다.”
    이 목사는 이 일이 그에게 주어진 소명처럼 여기는 듯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