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5가 아니라도 공산화 불가피한 국제환경

  • ▲ 손세일씨 ⓒ 뉴데일리
    ▲ 손세일씨 ⓒ 뉴데일리

      이승만 박사는 한국현대사의 영광과 곤욕을 상징적으로 체현했던 대표적인 인물이다. 현대 한국은 3·1운동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3·1운동의 유일한 가시적인 성과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이었다. 그런데 그 임시정부가 미국식 민주주의를 이상으로 생각하는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하고, 신생 소비에트 러시아를 이상국가로 생각하는 공산주의자 이동휘(李東輝)를 국무총리로 하는 연립정부로 출발했다는 사실은 우리의 현대사가 얼마나 심각하게 이데올로기의 갈등에 휘말려야 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1948년에 남북한에 두 개의 정부가 수립될 때에 이승만은 자유민주주의를 이념으로 한 대한민국의 초대대통령으로 다시 공산주의와 대결했다. 그리고 그의 반공이데올로기가 아니었더라면, 비극적인 6·25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도, 아마 대한민국의 운명은 동유럽 나라들의 그것보다 훨씬 더 불행해졌을 것이다.

    "主義는 옳으나 폭력적인 행동은 옳지 못하다"

      이승만 박사는 공산주의를 어떻게 인식했는가? 해방되고 귀국한 뒤 한달 남짓 지난 1945년 11월21일 저녁에 그는 서울중앙방송국의 주례 라디오 방송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늘은 공산당에 대한 나의 감상을 간단히 설명하고자 합니다. 나는 공산당에 대하여 호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 주의(主義)에 대하여도 찬성하므로, 우리나라의 경제대책을 세울 때에 공산주의를 채용할 점이 많이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 그는 과거의 한인 공산주의자에 대하여 둘로 나누어 말하겠다면서, 경제 방면에서 노동대중에 복리를 주자는 운동인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으나, 공산정권을 수립하기 위하여 무책임하게 각 방면에서 폭력적인 행동을 자행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비판했다.
      공산당에 대하여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말은 물론 이 시점에서 그가 추진하던 독립촉성중앙협의회운동에 모든 정파들을 참여시키기 위한 제스처였다. 그러나 젊어서 독립협회 운동을 하던 때부터 평민주의자인 이 박사는 공산주의의 ‘평등’ 주장에 대해서는 일찍부터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빈부격차 없애는 평등주의엔 찬성

      공산주의의 이론에 대한 이승만 박사의 인식을 보여주는 초기의 글들 가운데에서 대표적인 것은 “공산당의 당 부당”(1923. 3)이라는 논설이다. 이 논설에서 이 박사는 평등문제에 대하여 설득력 있게 설명했다. 몇 천년 동안 내려온 귀족(양반)과 상민의 세습적 신분제도는 프랑스혁명과 미국의 공화주의로 타파되었지만, 근대 자본주의사회의 빈부격차로 말미암아 불평등이 여전하다면서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노예로 말할지라도 법률로 금하야 사람을 돈으로 매매는 못한다 하나 월급이라, 공전이라 하는 보수 명의로 사람을 사다가 노예같이 부리기는 일반이라. 부자는 일 아니하고 가난한 자의 노동으로 먹고 살며 인간행락에 모든 호강 다하면서 노동자의 버는 것으로 부자 위에 더 부자가 되려고 월급과 삭전을 점점 깎아서, 가난한 자는 호구지계를 잘 못하고 늙어 죽도록 땀 흘리며 노력하야 남의 종질로 뼈가 늘도록 사역하다가 말 따름이오, 그 후생이 나는 대로 또 이렇게 살 것뿐이니, 이 어찌 노예생활과 별로 다르다 하리오. 그러므로 공산당의 평등주의가 이것을 없이하야 다 균평하게 하자 함이나, 어찌(어떻게)하야 이것을 균평히 만들 것은 딴 문제이어니와, 평등을 만들자는 주의는 대저 옳으니 이는 적당한 뜻이라 하겠고…”
      이처럼 이 박사는 공산주의의 평등사상을 인정했다.

    "재정가들의 경쟁 없어지면 진보도 개명도 중지될지라..."

  • ▲ 미국 유학시절의 이승만. ⓒ 뉴데일리
    ▲ 미국 유학시절의 이승만. ⓒ 뉴데일리

      그러고는 공산주의의 부당한 점으로는 공산주의 이론의 핵심적인 주제인 (1) 재산을 나누어 가지자 함 (2) 자본가를 없이하자 함 (3) 지식계급을 없이하자 함 (4) 종교단체를 혁파하자 함 (5) 정부도 없고 군사도 없으며 국가사상도 다 없이한다 함, 곧 이른바 국가 소멸론을 들었다.
      그 가운데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2)의 자본가를 없애자는 주장의 부당성을 설명한 대목이다.
      “모든 부자의 돈을 합하여다가 나누어가지고 살게 하면 부자의 양반 노릇하는 폐단은 막히려니와, 재정가(기업가)들의 경쟁이 없어지면 상업과 공업의 발달이 되기 어려우리니, 사람의 지혜가 막히고 모든 기기미묘한 기계와 연장이 다 스스로 폐기되어, 지금에 이용 후생하는 모든 물건이 다 더 진보되지 못하며, 물질적 개명이 중지 될지라…”
      그것은 시장경제의 경쟁의 원리와 기술혁신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이었다. 이러한 그의 공산주의 비판은 60년이 더 지나서 소련공산당 서기장 고르바초프에 의하여 옳았음이 확인되었다. 고르바초프는 1989년 가을의 마지막 소련공산당대회에서 “자본주의체제 안에서 기술혁신이 이토록 발달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라고 실토했었다. 이처럼 이 박사는 시장경제의 핵심원리를 일찍부터 터득하고 있었다.

    "우리 2천만이 모두 밀리어네아가 된다 할지라도 국가 소멸은 안돼"

      마지막 (6)의 국가소멸론과 관련해서는 1917년 레닌 혁명 뒤의 소련의 실상을 들어 그 주장이 얼마나 허구인가를 설명하고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설령 세상이 다 공산당이 되며 동서양 각국이 다 국가를 없이하야 세계적 백성을 이루며, 군사를 없이하고 총과 창을 녹여 호미와 보습을 만들지라도, 우리 한인을 일심단결로 국가를 먼저 회복하야 세계에 당당한 자유국을 만들어 놓고 군사를 길러서 우리 적국의 군함이 부산 항구에 그림자도 보이지 못하게 만든 후에야 국가주의를 없이 할 문제라도 생각하지, 그 전에는 설령 국가주의를 버려서 우리 2천만이 모두가 밀리어네아(백만장자)가 된다 할지라도 우리는 원치 아니 할지라.…”
      독립운동시기에 한국공산주의자들이 인터내셔널리즘(국제주의)라는 명분아래 코민테른(국제공산당)을 상대로 벌인 정통성 경쟁과 그에 따른 분파주의는, 제국주의 일본의 잔혹한 탄압이라는 상황을 감안하더라도, 한국공산주의 운동의 원죄가 아닐 수 없다.
      소련과 동유럽 공산권의 붕괴로 70년에 걸친 공산주의의 실험은 참으로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 실패했다. 공산주의가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이 박사는, 소비에트 러시아가 식민지 해방운동의 이상국가로 등장한 직후에 이처럼 정확하게 통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인식의 원천은 철저한 기독교정신이었다.

    "러시아를 저희 조국이라니...파괴주의자들은 저희 조국으로 가라"

      이 박사는 위와 같은 주장의 연장선상에서 마침내 1945년 12월 17일에는 “공산당에 대한 나의 입장”이라는 서울중앙방송국 연설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공산당과의 결별을 선언했다.
      “한국은 지금 우리 형편으로 공산당을 원치 않는 것을 우리는 세계 각국에 대하여 선언합니다. 기왕에도 재삼 말한 바와 같이 우리가 공산주의를 배척하는 것이 아니오, 공산당 극열파들의 파괴주의를 원치 않는 것입니다.…공산명목을 빙자하고 국경을 없이하여 나라와 동족을 팔아다가 사익(私益)과 영광을 위하여 부언위설[浮言僞說: 뜬소문과 거짓말]로 인민을 속이며, 도당을 지어 동족을 위협하며, 군기(軍器)를 사용하여 재산을 약탈하며, 소위 공화국이라는 명사를 조작하여 국민 전체의 분열 상태를 세인에게 선전하기에 이르다가…이 분자들이 러시아를 저희 조국이라 부른다니, 과연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의 요구하는 바는 이 사람들이 한국을 떠나서 저희 조국에 들어가서 충성스럽게 섬기라고 하고 싶습니다.… 한인의 형용을 쓰고 와서 우리 것을 빼앗아다가 저희 조국에 붙이려는 것은 우리가 결코 허락지 않을 것이니, 우리 3천만 남녀가 다 목숨을 내어 놓고 싸울 결심입니다.”
      그러므로 파괴를 주장하는 자는 비록 친부형이나 친자질(子姪)이라도 원수로 대해야 한다고 그는 역설했다.

    "정권장악때까지 싸우는 공산당과  연합하라는 미국...폴란드처럼 굴복하라고?"

      이승만 박사는 공산주의에 대한 이러한 인식에서 태평양전쟁동안에도 미국무부 관리들의 용공적인 태도를 비판했다. 일본의 항복이 얼마 남지 않은 1945년 4월4일에 그의  협조자인 시라큐스 대학교의 로버트 올리버 교수에게 보낸 편지에서 한국사람 전체가 완전히 단합되지 않는 한 중경 임시정부를 승인할 수 없다는 국무부 관리들을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한국사람 전체가 완전한 단합을 이루어야 한다는 조건을 내세움으로써 그들은 대한민국임시정부로 하여금 소수 공산분자들의 요구에 굴복하도록 강요하고 있습니다. 한국공산주의자들은, 중국이나 그리스나 폴란드나 그 밖의 해방된 나라들의 공산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정권을 장악할 때까지 자기네 정부에 반대하는 선동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미국무부는 공산주의자들이 만족할 때까지 정부를 승인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무엇이겠습니까? 공산주의 정권을 받아들이도록 강요당하고 민주정치의 원칙은 말살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해방된 민족은 인민의 의사에 따라 그들이 원하는 정치제도를 선택할 자유를 갖는다고 약속한 대서양헌장에 절대적으로 위배되는 것입니다.”
      이 박사가 대공정책에서 미군정 당국이나 미국 정부와 의견대립이 잦았던 것은 공산주의자들의 행동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과 대처방식의 차이 때문이었다. 세계를 놀라게 했던 1953년의 반공포로 석방은 그 대표적인 보기였다. 마침내 반공은 대한민국의 국시(國是)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