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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쳇GPT
10일 서울 중구 은행회관. 8대 금융지주 회장들을 불러 모은 자리에서 이찬진 금융감독원장이 꺼낸 한 줄이 금융권 공기를 바꿔 놓았다.
“전 국민을 대표하는 기관의 주주 추천 등, 사외이사 추천 경로를 다양화하겠다.”
겉으론 지배구조 선진화였다. 그러나 간담회장을 나선 금융권의 해석은 달랐다. “감독당국이 이제는 이사회 문 앞이 아니라, 문 안으로 들어오려는 것 아니냐”는 반응이었다. ‘전 국민 대표 기관’이라는 표현에서 자연스럽게 국민연금이 연상됐기 때문이다.
이 원장은 이날 국민을 대표하는 기관의 사외이사 추천, IT·보안·금융소비자 전문가 사외이사 포함, 지배구조 개선 TF 신설, CEO 자격 요건·승계 절차 손질 구상을 한꺼번에 꺼냈다. 국정감사에서 금융지주 회장의 ‘참호 구축’ ‘들러리 후보’ 관행을 정면 비판한 데 이어, 이사회 판 자체를 바꾸겠다는 신호다. 문제는 그 수단으로 국민연금을 사실상 지목하는 순간, 논의의 성격이 달라진다는 점이다.
국민연금은 KB·신한·하나·우리 등 주요 금융지주의 최대 기관투자자이자 장기 대주주다. 현행 법·제도 아래에서도 의결권 행사, 이사 선임·해임 주주제안 등 주주권 행사는 가능하다. 별도의 입법을 거치지 않아도 이미 쓸 수 있는 카드다.
그럼에도 감독당국이 “사외이사 직접 추천”을 공개 화두로 올렸다는 것은 의미가 다르다. 이는 단순한 의결권 행사를 넘어 후보 발굴과 선별 단계부터 국민연금이 개입하는 구조를 상정한 것이다. 실질적으로는 특정 기관에 ‘사외이사 추천 전용 채널’을 새로 열어 주는 셈이다.
여기서 관치 논란이 불가피해진다. 국민연금은 형식상 독립 기금이지만, 기금운용위원회 의장은 보건복지부 장관이고 기획재정부·고용노동부 등 정부 측 당연직 위원이 참여한다. 시장이 “국민연금이 사외이사를 보낸다”는 신호를 “정부 라인이 이사회에 진입한다”는 메시지로 읽을 가능성이 큰 이유다. 회장 연임 견제를 명분으로 한 장치가 “정부–국민연금–이사회–회장 선임”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관치 회로로 굳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여기서 나온다.
이 원장의 문제의식 자체가 비합리적인 것은 아니다. 지배구조법 취지는 이사회가 회장을 견제하는 방향으로 설계돼야 한다는 데 있다. 특정 회장이 장기간 재임하면서 사외이사를 자기 사람으로 채우고, 승계까지 좌우하는 관행은 분명 손봐야 할 대상이다. “셀프 연임을 막기 위해 독립적인 사외이사를 강화하자”는 취지에 반대할 주체는 많지 않다.
하지만 이미 갖춰진 틀을 제대로 작동시키는 것이 먼저다. 이미 금융지주 이사회 안에는 사외이사후보추천위원회가 있고, 일부 그룹은 서치펌·기관투자자·노조·노동이사 등 다양한 채널에서 후보를 제안받는 방식을 도입했다. 제도가 완벽하지는 않지만, 최소한 회장이 혼자 후보를 정하던 과거와는 다른 단계에 와 있다.
이 구조를 실효성 있게 만드는 방법은 비교적 분명하다.
사추위의 구성과 운영을 정기적으로 점검하고, 후보군 관리 과정과 정보 제공의 공정성을 감독당국이 평가해 공시하고, 특정 회장 ‘라인 인사’ 정황이 확인되면 제재와 시장 평가가 함께 작동하도록 설계하는 방식이다.
이 과정을 건너뛰고 특정 공적 기금에 ‘직통 추천권’을 쥐여주는 순간, 지배구조 개혁은 곧바로 연금 사회주의·관치 금융 논란과 맞물리게 된다.
국민연금의 역할도 다시 짚어봐야 한다. 국민연금은 국민 노후자금을 맡은 수탁자다. 지배구조 개선과 주주권 행사는 어디까지나 중장기 수익률 제고를 위한 수단이어야 한다. 반복되는 내부통제 실패, 배임·횡령과 같은 중대한 비위, 장기 주주가치를 훼손하는 지배구조 왜곡에 대해서는 국민연금의 적극 개입 명분이 비교적 분명하다. 이 경우 이사 해임 제안과 의결권 행사도 수탁자 책임의 연장선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회장 연임 여부나 사업 방향처럼 정치·사회적 논쟁이 뒤섞인 영역에 상시적으로 개입하는 구조가 만들어지면, 수익자 이익과의 직접 연관성이 흐려진다. 연금이 자주 전면에 나설수록 책임의 부담은 미래 세대 가입자에게 돌아간다. 국민연금은 평시 금융지주를 ‘통제하는 손’이 아니라, 지배구조가 중대하게 일탈한 예외적 상황에서만 작동하는 ‘최후의 안전장치’에 가까운 위치를 지키는 편이 제도 취지에 더 가깝다.
IT·보안·금융소비자 전문가 사외이사를 포함하겠다는 구상도 취지 자체는 설득력 있다. 잇따른 전자금융 사고와 불완전판매를 감안하면 이사회에 관련 전문성을 보강해야 한다는 문제 제기는 정당하다. 다만 그 자리를 어떤 기준으로, 누구에게 맡기느냐에 따라 결과는 완전히 달라진다. 소비자·시민단체 출신 인사가 수익성과 건전성보다 정치적 메시지를 앞세우거나, 특정 이해집단의 요구가 의사결정을 과도하게 좌우하는 구조가 만들어지면 부담은 예금자·보험계약자·국민연금 가입자에게 전가된다.
지배구조 개혁 필요성에 이견은 없다. 다만 감독과 경영 사이의 경계는 분명해야 한다. 금융당국이 할 일은 원칙과 기준을 명확히 세우고, 그 기준을 어긴 금융회사에 제재·평가·시장 압력이 작동하도록 제도를 설계하는 것이다. 반대로 국민연금을 통로로 이사회 인선에 사실상 참여하는 순간, 책임은 금융회사뿐 아니라 정부·감독당국·국민연금 전체로 분산된다. 관치의 회로를 하나 더 늘리는 방식으로는 지배구조 선진화라는 명분을 시장에 설득하기 어렵다.
필요한 것은 회장 연임만 두려워하는 이사회가 아니라, 정치와 연금으로부터도 거리를 두고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는 이사회다. 금융당국의 ‘국민연금 사외이사’ 구상이 이 기준에 얼마나 부합하는지, 지금 금융시장이 던지고 있는 질문은 그 지점에 모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