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한성감옥 종신죄수 26세 청년 이승만(왼쪽)이 1901년
    ▲ 한성감옥 종신죄수 26세 청년 이승만(왼쪽)이 1901년 "천하 근본이 농사가 아니라 상업"이라 주장한 [제국신문]사설(4월19일자) 제목과 결론부분.

    창간 20주년을 맞은 뉴데일리가 지난 1016일 롯데호텔에서 기념식을 열고, 뉴데일리의 미래 100년 비전을 보여주었다. 그 중에 새로운 슬로건으로 기업이 대한민국이다를 발표, 기업인들로부터 뜨거운 호응을 받았다. 국내외 경제위기 속의 시대정신과 방향을 적확히 제시하였다는 평가와 함께, 작금의 반()기업 입법공세가 글로벌 경쟁력의 파괴에 따른 국가자멸을 자초할 시대착오라고 걱정하는 소리들이 쏟아졌다.

     국가지도층의 시대착오로 말미암은 국가자멸의 예를 들자면 조선왕조의 국가포기선언이 대표적일 것이다. 120년년 고종황제의 을사늑약에 이어, 5년후 순종이 일본천황에게 500년 사직과 백성을 기꺼이 양여하노니 신민들은 소란을 일으키지 말고 일본천황에게 복종하여 행복을 구하라고 발표한 성명이 그것이다. 2천만 백성에게 친일 충성을 요구하는 어명을 내렸으니, 조선황제가 친일파의 두목이었던 셈이다.

    이 소식을 미국에서 들은 이승만은 땅을 친다. “나의 준비는 끝났는데 돌아갈 나라가 없어졌구나그의 준비란 미국유학 5년 만에 일류대학들에서 학사-석사-박사 학위를 받은 일이다.

     청년 이승만이 미국 유학을 꿈꾼 것은 20대시절 한성감옥에서다.

    왜 투옥되었던가, 20세때 배재학당에 들어가 자유의 유토피아미국을 발견하고, 부패한 왕정을 개혁하여 입헌군주제라도 해보자며 국민계몽투쟁을 벌였기 때문이다.

    고종이 반역자로 찍어 감옥에 넣자 우남은 미국같은 나라만들기 위한 논설들을 몰래 써서 발표한다. 19014129일자 [제국신문] 사설이 대표적이다. 그 혁명적 요지를 보자.

    이제는 천하근본이 농사가 아니라 상업이다는 제목아래 국가산업개편을 주창하였다.

    “...이런고로 지금은 상업이 천하의 가장 큰 근본이라. 세계의 큰 싸움이 장사 말고 더 큰 것이 없은 즉, 나라와 백성의 부강을 일으키려거든 우리나라도 장사길을 널리 열어서 해마다 항구에 들어오는 돈이 나가는 돈보다 몇 천배나 되게 하기를 바라노라

    유사이래 5천년간 땅만 파먹고 살던 농경사회 조선왕국은 당시 세계열강의 산업혁벙, 식민지쟁탈전, 무역 전쟁을 알 턱이 없었다. 이에 셰계의 대세를 꿰뚫어본 26세 이승만은 농사보다 상업이오, 자유통상을 통하여 국가경제를 일으키라고 들이댄 것이었다. 가히 박정희보다 70년 앞선 수출입국론이라 하겠다.

    그는 캄캄한 감옥에서 죄수들에게 지급되는 조그만 항아리 속에 촛불을 밝혀놓고 거의 날마다 쓴 논설이 500여편, 그가 꿈꾸는 자유민주독립과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설파한 것들이다.

    당시 사농공상(士農工商) 계급사회에서 상업은 말업(末業), 즉 장사치는 천민 취급이었다.

    이승만은 러일전쟁이 터지자 영어사전편찬작업을 중단, 회심의 명저 [독립정신]을 집필한다.

    이 책이 대한민국 건국의 설계도였으며 독립운동가들의 교과서가 되었다. 이승만은 이 책에 쓴대로 공산독재 소련과 싸워서 대한민국을 건국하였다.


  • ▲ 미국 유학 5년만에 프린스턴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이승만(1910년 6월). 오른쪽은 프린스턴대학이 단행본으로 출판한 박사학위 논문 표지.
    ▲ 미국 유학 5년만에 프린스턴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이승만(1910년 6월). 오른쪽은 프린스턴대학이 단행본으로 출판한 박사학위 논문 표지.

    건국후 야당은 이승만대통령을 가리켜 외교엔 귀신경제엔 등신이라 폄하한다터무니없는 왜곡 선동이다건국즉시 농지개혁을 단행하고귀속재산을 분양하여 수 많은 기업을 일으켰으며특히나 헌법을 고쳐(사사오입개헌파동자유시장경제체제를 명문화 시킨 그의 불굴의 집념을 보라유학과 독립운동시절 기업체까지 경영해본 이승만은 누가 뭐래도 경제대통령이다교육혁명을 일으켜 미국과 동등한 현대적 국민구가 만들기에 모든 수단을 동원한 건국 대통령미국과 싸워 안보의 만리장성 한미동맹을 쟁취한 냉전시대 전략가였다.

    더구나 무역입국을 위해 수출5개년계획을 실시하고 경부고속도로 건설까지 추진한 그가 경제등신인가무엇보다 한미동맹은 군사안보동맹만이 아니라 글로벌 경제동맹임을 알아야한다.

    대륙의 전제주의 농노였던 나라는 이제 드넓은 5대양 해양문명권 한가운데로 나아가 한성감옥에서 꿈꾸던 상업부국을 위해 셰계시장을 개척했던 것이다박정희 시대 실시했던 수출 지원책들은 이승만이 이미 시작한 것들이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이승만이 깔아놓은 근대화의 철길 위에 박정희의 역명열차가 고속 질주할 수 있었던 것이 대한민국 기적의 신화 전후독립국 가운데 유일한 선진화” 성공의 비결이다.

     

    언제부터였던가자유민주주의를 파괴하는 가장 효과적인 무기가 자유민주주의였음을 입증한 독재는 스탈린-히틀러의 컴뮤나치(Communazis; 이승만 신조어)로 끝나지 않았다.

    이승만-박정희가 겹겹이 둘러친 한미동맹 철벽안에서 이승만-박정희의 혁명 과실만 파먹는 욕망쟁탈전은 나라가 망해도 좋다는 듯 헌법유린사태로 치닫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누가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이승만은 말한다. “자유와 정의는 언제나 반드시 승리하고야 만다”---절대다수 자유민의 각성을 재촉하는 말, “늦기전에 깨닫고 뭉치면 산다는 선각자의 목소리가 들리는가.

     

     

     

     

     

     

     

     


     

     

     

     

     

     

     

     

     

     

     “기업이 대한민국이다”--124년전 26세 청년 죄수의 똑같은 주장은?


    창간 20주년을 맞은 뉴데일리가 지난 10월16일 롯데호텔에서 기념식을 열고, 뉴데일리의 ‘미래 100년 비전’을 보여주었다. 그 중에 새로운 슬로건으로 ‘기업이 대한민국이다“를 발표, 기업인들로부터 뜨거운 호응을 받았다. 국내외 경제위기 속의 시대정신과 방향을 적확히 제시하였다는 평가와 함께, 작금의 반(反)기업 입법공세가 글로벌 경쟁력의 파괴에 따른 국가자멸을 자초할 시대착오라고 걱정하는 소리들이 쏟아졌다.


    국가지도층의 시대착오로 말미암은 국가자멸의 예를 들자면 조선왕조의 ’국가포기‘선언이 대표적일 것이다. 꼭 120년년 고종황제의 ’을사늑약‘에 이어, 5년후 순종이 ”일본천황에게 500년 사직과 백성을 기꺼이 양도하노니 신민들은 소란을 일으키지 말고 일본천황에게 복종하여 행복을 구하라”고 발표한 성명이 그것이다. 2천만 백성에게 ‘친일 충성’을 요구하는 어명을 내렸으니, 조선황제가 친일파의 두목이었던 셈이다. 

    이 소식을 미국에서 들은 이승만은 땅을 친다. “나의 준비는 끝났는데 돌아갈 나라가 없어졌구나” 그의 ‘준비’란 미국유학 5년 만에 일류대학들에서 학사-석사-박사 학위를 받은 일이다.


    청년 이승만이 미국 유학을 꿈꾼 것은 20대시절 한성감옥에서다.

    왜 투옥되었던가, 20세때 배재학당에 들어가 ‘자유의 유토피아’ 미국을 발견하고, 부패한 왕정을 개혁하여 입헌군주제라도 해보자며 국민계몽투쟁을 벌였기 때문이다.

    고종이 반역자로 찍어 감옥에 넣자 우남은 ‘미국같은 나라’ 만들기 위한 논설들을 몰래 써서 발표한다. 1901년 4월129일자 [제국신문] 사설이 대표적이다. 그 혁명적 요지를 보자.

    ‘이제는 천하근본이 농사가 아니라 상업이다’는 제목아래 국가산업개편을 주창하였다. 

    “...이런고로 지금은 상업이 천하의 가장 큰 근본이라. 세계의 큰 싸움이 장사 말고 더 큰 것이 없은 즉, 나라와 백성의 부강을 일으키려거든 우리나라도 장사길을 널리 열어서 해마다 항구에 들어오는 돈이 나가는 돈보다 몇 천배나 되게 하기를 바라노라”

    유사이래 5천년간 땅만 파먹고 살던 농경사회 조선왕국은 당시 세계열강의 산업혁벙, 식민지쟁탈전, 무역 전쟁을 알 턱이 없었다. 이에 셰계의 대세를 꿰뚫어본 26세 이승만은 “농사보다 상업”이오, 자유통상을 통하여 국가경제를 일으키라고 들이댄 것이었다. 가히 박정희보다 70년 앞선 ‘수출입국론’이라 하겠다.

    그는 캄캄한 감옥에서 죄수들에게 지급되는 조그만 항아리 속에 촛불을 밝혀놓고 거의 날마다 쓴 논설이 500여편, 그가 꿈꾸는 자유민주독립과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설파한 것들이다.

    당시 사농공상(士農工商) 계급사회에서 상업은 말업(末業), 즉 장사치는 천민 취급이었다. 

    이승만은 러일전쟁이 터지자 영어사전편찬작업을 중단, 회심의 명저 [독립정신]을 집필한다.

    이 책이 대한민국 건국의 설계도였으며 독립운동가들의 교과서가 되었다. 이승만은 이 책에 쓴대로 공산독재 소련과 싸워서 대한민국을 건국하였다.


    건국후 야당은 이승만대통령을 가리켜 “외교엔 귀신, 경제엔 등신”이라 폄하한다. 터무니없는  왜곡 선동이다. 건국즉시 농지개혁을 단행하고, 귀속재산을 분양하여 수 많은 기업을 일으켰으며, 특히나 헌법을 고쳐(사사오입개헌파동) 자유시장경제체제를 명문화 시킨 그의 불굴의 집념을 보라. 유학과 독립운동시절 기업체까지 경영해본 이승만은 누가 뭐래도 ‘경제대통령’이다. 교육혁명을 일으켜 미국과 동등한 현대적 국민구가 만들기에 모든 수단을 동원한 건국 대통령, 미국과 싸워 안보의 만리장성 ‘한미동맹’을 쟁취, 일본-중국-소련의 패권경쟁 침략을 끝장낸 전쟁종결자, 냉전시대 세계질서를 재편한 전략가였다.

    더구나 무역입국을 위해 수출5개년계획을 실시하고 경부고속도로 건설까지 추진한 그가 ‘경제등신’인가? 무엇보다 한미동맹은 군사안보동맹만이 아니라 글로벌 경제동맹임을 알아야한다.

    대륙의 전제주의 농노였던 나라는 이제 드넓은 5대양 해양문명권 한가운데로 나아가 한성감옥에서 꿈꾸던 상업부국을 위해 셰계시장을 개척했던 것이다. 박정희 시대 실시했던 ‘수출 지원책’들은 이승만이 이미 시작한 것들이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이승만이 깔아놓은 근대화의 철길 위에 박정희의 역명열차가 고속 질주할 수 있었던 것이 대한민국 기적의 신화 “전후독립국 가운데 유일한 선진화” 성공의 비결이다.


    언제부터였던가? 자유민주주의를 파괴하는 가장 효과적인 무기가 자유민주주의였음을 입증한 독재는 스탈린-히틀러의 컴뮤나치(Communazis; 이승만 신조어)로 끝나지 않았다.

    이승만-박정희가 겹겹이 둘러친 한미동맹 철벽안에서 이승만-박정희의 혁명 과실만 파먹는 욕망쟁탈전은 나라가 망해도 좋다는 헌법유린사태로 절정을 달리게 되고 말았다.

    누가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이승만은 말한다. “자유와 정의는 언제나 반드시 승리하고야 만다”---절대다수 자유민의 각성을 재촉하는 말, “늦기전에 깨닫고 뭉치면 산다”는 선각자의 목소리가 들리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