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건국사》(93) 한미동맹 ③
「...요즘 이승만 대통령은 기분이 저조한(down) 상태이다. 협상에서 너무 양보하지 않았는지, 다가오는 정치회담에서 한국이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겠는지 걱정하고 있다...」올리버(Robert T. Oliver) 교수(펜실베이니아 주립대학)는 휴전협정 조인후의 이
《이승만 건국사》(92) 한미동맹 ②
숨죽인 세계가 주목했던 이승만과 로버트슨의 경무대회담이 고비를 넘자 판문점의 휴전 협상은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소(小)휴전회담‘으로 불리던 이승만의 휴전협상이 돌파구를 열어주었기 때문이다. 잠잠하던 전선에선 중공군이 물밀 듯이 쇄도하였다. 휴전이 임박하자
<이승만 건국사> (91) 한미동맹 ①
”나의 일생은 고독한 투쟁의 연속이었다“지난해 7월 부산 정치파동이 끝났을 때 이승만이 회고한 말이다.24세 청년시절 한성감옥에서 6년간, 미국 유학에서 5년간, 하와이에서,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미국 전역에서 사사건건 사면초가 혼자만의 투쟁 30여년, 공산당은 물론
<이승만 건국사> (90)
6월8일 포로송환협정을 서명하러 도쿄에서 날아오는 클라크는 옆자리 최덕신을 돌아보았다.“제너럴 최, 비행기에서 내리면 기자들이 달려들 텐데 당신은 아무 말도 하면 안되요. 내가 직접 이승만 대통령을 만나 설명드릴 것이오” 클라크의 말을 듣는 최덕신은 가슴이 쿵 내려앉았
<이승만 건국사> (89)
“침략 원흉이 급살 맞았다니 원한 풀어야겠다”“통일 방해자가 사라졌으니 드디어 통일의 날 온다”“전쟁 곧 끝나겠네, 단독북진 내 고향 찾으러 가자” 스탈린의 죽음은 통일을 기다리는 일반 국민도 정치인들도 참호 속의 군인들까지도 춤추게 만들었다.어찌 한국뿐이랴.
<이승만 건국사> (88)
아이젠하워가 한국에 왔다. 11월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그는 ’당선자‘ 자격이다.1952년도 저무는 12월2일 저녁 7시57분, 영하12도의 찬바람이 부는 수원 공군기지에 미공군 4발기 2대가 착륙한다. 최고 극비의 방문이므로 환영객도 없고 기자들도 수행기
<이승만 건국사> (87) 부산정치파동 ⑤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의 건국은 건국의 완성이 아니라 건국의 시작이었다. 소련과 싸우고 미국과 싸우는 이승만은 그의 평생지론 ‘외교독립’의 전략에 따라 유엔 외교로 대한민국을 세웠고, 건국 즉시 농지개혁, 의무교육, 지방자치제 실시를 서둘렀지만 공산군의 6.25
<이승만 건국사> (86) 부산정치파동 ④
계엄령 선포 한달, 6월 25일 무더운 부산 충무로 광장에서 6.25침략 2주년을 맞아 ‘반공 총궐기’ 기념식이 열렸다. 이날 기어이 이승만 대통령 저격사건이 일어난다.조선일보의 보도: 「25일 오전 11시 부산 충무로광장에서 거행된 6.25 2주년 기념식에 임석하신
<이승만 건국사> (85) 부산정치파동 ③
통칭 1백만 피란민이 들끓는 부산거리 시민들은 계엄이든 아니든 밥줄에 매달려 땀 흘리고 있었으나, 난데없는 소문들이 쏟아져 나와 어수선하기 그지없었다. 어느 국회의원이 일본으로 도망쳤다느니 어느 유명 인사들이 미국 망명신청을 했다느니, 국회가 곧 해산되면 선거는 언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