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건국사 (83) <부산정치파동> ①
개성과 판문점 일대에서 휴전협상을 저지하려 ‘특공대 습격’ 지령까지 내렸던 이승만은 새로운 카드를 뽑았다. 한국방첩대의 휴전회담장 총격사건으로 공산측이 유엔 측에 시비를 걸며 소동을 벌일 무렵, 이승만 대통령이 1951년 8월15일 광복절 ‘정부수립 3주년 기념식’에서
이승만 건국사 (82)
“대통령 재임시절 가장 유감스러운 것은 그 많은 희생를 치르고서도 한국을 통일시키지 못한 일이오. 의당히 마지막까지 싸워 한국 통일을 봤어야 했는데, 국제적인 반대여론이 적지 않아서 성취를 못했소. 이젠 노령이라 한국 통일을 보지 못하고 큰 짐을 지고 가게 될 것 같소
이승만 건국사 (81)
1.4후퇴후 밀리던 유엔군은 총반격에 나섰다. 워커 8권사령관 후임 리지웨이 장군은 이승만에게 약속한대로 1월 15일부터 ‘늑대사냥개 작전’(Operation Wolfhound)을 펼쳤다. “미군의 패배주의부터 청소하자” 일방적 후퇴작전을 계속하다보니 패배주의
이승만 건국사 (79)
서울 환도 3개월 만에 또 ‘임시 수도’가 된 부산은 지난번보다 엄청 많은 피난민이 들끓는다. 경남 도지사 공관은 다시 임시 경무대가 되고 경남 도청은 정부청사와 국회의사당이 되었다.워낙 인구 50만명도 안되던 부산은 6.25이래 1백만이 넘는 피난민이 들이닥
이승만 건국사 (78)
풍전등화(風前燈火)의 위기! 6.25침략 6개월만에 통일 문전에서 대한민국이 맞닥뜨린 운명이다. 중공군이란 새 태풍이 몰아치자 북한의 국내전선도 미국과 유엔의 외교가도 풍비박산, 미군 철수론이 일어나고 38선에서 휴전하자는 패배주의가 벌벌 떠는 12월 한달을 살펴보자.
이승만 건국사 (77)
선전포고 없는 게릴라 전쟁, 비겁한 마오쩌둥의 은밀한 침략은 미국과 유엔군을 완전히 속이는 데 성공한다. 미국을 한반도에서 몰아내려는 마오는 ’선전포고‘ 대신 ’경고‘를 몇 번 발하기는 했다. 앞에서 본대로 우리 국군이 먼저 38선을 넘은 직후 10월3일 저
이승만 건국사 (76)
“중공군 포로가 잡혔다” 10월26일 압록강 초산까지 진격했던 제6사단 7연대의 최선봉 제1중대(연대장 이대용)이 뜻밖의 기습을 받고 놀라 한바탕 전투 끝에 이런 보고를 올렸다. “북한군복을 입었는데 우리말을 못하는 군인, 솜옷을 입은 중국인”이라고...그 중
이승만 건국사 (75)
압록강 물을 담은 국군의 수통을 받아들자 이승만은 하나님께 감사 기도부터 하였다.6.25가 터지자 ”이것은 대한민국 통일 전쟁이다“ 선언했던 이승만, 그 통일이 눈앞에 왔다. 그것은 대한민국 건국이 그러했듯이 하나님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인데, 문제는 뜻밖에도
이승만 건국사 (74)
인천 상륙에 성공한 맥아더는 연합군에 명령을 내린다. “즉각 서울을 점령하고 남으로 전진을 계속하라” 제10군단은 경인가도를 동진(東進)하여 수도 서울을 조속히 탈환해야 하며, 적의 보급선을 차단하고, 낙동강 전선에서 북진하는 워커 사령관의 제8군과 합류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