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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월1일 38선을 돌파한 국군이 26일 압록강변 초산을 탈환, 태극기를 꽂은 것을 긴급보도한 조선일보 1면 머리기사. 1950년10월28일자ⓒ조선DB
인천 상륙에 성공한 맥아더는 연합군에 명령을 내린다.
“즉각 서울을 점령하고 남으로 전진을 계속하라” 제10군단은 경인가도를 동진(東進)하여 수도 서울을 조속히 탈환해야 하며, 적의 보급선을 차단하고, 낙동강 전선에서 북진하는 워커 사령관의 제8군과 합류하도록 작전을 지휘하였다.
앞장 선 한미 연합부대와 유엔군은 김포공항부터 장악하고, 남으로는 수원 군용비행장을 점령하였다. 김포에서 한강을 건너 행주산성을 빼앗은 연합군은 서울 서쪽 험한 산줄기인왕산, 안산, 노고산, 용산에 돌입하였고, 영등포에서도 마지막 발악하는 적군을 소탕하며 한강을 가로질러 마침내 남산 위에 올랐다.
「적은 필사적으로 항전했으나 보급이 끊긴데다가 협공을 받아서 퇴로도 막힌 상태인지라 순식간에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떼를 지어 퇴각하는 적은 69마일이나 북쪽으로 달아났으며 완전히 분열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크고 작은 도로에는 적이 버린 탱크, 대포 박격포, 무기와 장비들이 마구 흩어져있었다. 북한군은 몇 천명씩 떼를 지어 항복해 와서 포로의 총수는 13만명에 달했다.」 (맥아더, 앞의 책), 점령지역마다 직접 돌아본 맥아더 장군의 기록이다.
워싱턴의 반대를 뿌리치고 강행한 맥아더의 ‘크로마이트 작전’은 세계가 보란 듯이 대승을 거둔 것이다.
맥아더는 수많은 축하전보를 받았는데 그 중에서 이승만대통령의 축전을 회고록에 소개하고 있다. 이번 승리가 극동과 전 세계에 던져준 심리적 영향을 유럽의 어느 정치가보다 잘 이해하고 있던 사람은 이승만 대통령이었다고 맥아더는 강조한다.
“역사적인 서울 수복에 즈음하여 한국 정부와 국민을 대표하여, 극히 불리한 여건에도 불구하고 승리를 거둔 귀관(맥아더)의 훌륭한 지휘에 충심으로 감사하며 영원히 기억할 것입니다. 귀관이 길고 탁월한 공적생활에서 거둔 위대한 업적 중에서도 귀하가 대한민국에서 취한 유엔군사랑관으로서의 업적은 가장 뛰어난 것이라고 역사는 기록할 것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축전 일부. [맥아더 회고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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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후퇴 3개월만에 부산임시수도에서 날아 온 이승만대통령, 중앙청 정부청사에 도착하여 '수도 반환식' 참석자들과 악수하고 있다.(1950.9.29)
◆ 감격의 수도 서울 반환 … 워싱턴 “승인 받아라” 반대
마침내 9월28일, 중앙청애서 반항하던 적들이 잠잠해지면서 서울은 완전 탈환되었다
북한군이 서울을 장악한 날이 6월28일, 다시 찾은 날이 9월28일, 꼭 3개월만의 원상복구였다. 맥아더는 부산에 있는 대한민국 정부를 서울로 복귀시키는 준비를 서두르라 지시한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워싱턴의 합동참모본부가 놀랄만한 메시지를 보내왔다. “이승만 정권을 부활시키는 계획은 ‘미국 정부의 승인’을 필요로 한다”는 경고였다.
맥아더는 어이가 없다. 이것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반감을 가진 국무성의 교사”를 받은 짓이 분명했다. 국무성의 실세로 이승만을 사사건건 방해했던 소련 간첩 앨저 히스 이래로 친소분자들이 극동국장 등을 맡아서 이승만의 독립운동과 ‘건국’을 방해했던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맥아더는 즉시 회신을 보낸다.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가 두 차례(6.25-27) 채택한 결의안은 ‘대한민국 정부에 대한 무력공격을 격퇴하고 원조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한번도 그 기능을 정지한 적이 없다. 유엔에 의해서 한반도 유일의 합법정부임을 인정받았다. 따라서 당연히 서울로 환도해야 한다. 그것은 무너진 정부를 부활시키는 것이 아니며 정부를 교체하는 것도 아니다. 현존하는 정부를 그 소재지로 복귀케 하고, 적의 지배로부터 해방된 지역에서 신속하고 효율적인 치안을 회복해야 한다. 그동안 내가 받은 명령에서도 이것은 명백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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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맥아더 사령관에게 인천상륙작전 성공을 축하하고 공로를 치하하는 연설을 한뒤,이승만 대통령이 훈장을 수여했다. 오른쪽 문서는 맥아더 장군이 '탈환한 서울을 이승만대통령에게 반환하겠다'고 워싱턴에 보고한 전문. 미국정부는 한때 반대하였다.
★ 시체 썩는 냄새 지독한 중앙청, 눈물의 이승만은 맥아더에 훈장
9월29일 아침, 부산에서 새벽같이 날아 온 이승만은 김포공항에 마중 나온 맥아더를 얼싸안았다. 맥아더는 도쿄에서 날아왔다. 맥아더가 대통령의 차를 앞세우도록 지시하자 이승만은 “오늘은 개선장군이 먼저 환영을 받아야 하오. 한국 국민 전체의 뜻이오”라며 맥아더 차를 앞세웠다.
대한민국의 건국과 호국의 두 영웅은 포탄 자욱에 검게 그을린 중앙청 중앙홀로 들어선다. 창문들이 부서지고 시체 썩는 냄새가 코를 찌른다. 무장한 유엔군과 한국군 장군들이 의자에 앉아 있다가 일어선다. 연단에 맥아더와 이승만, 그리고 프란체스카가 올랐다.
“하나님의 은총을 입어 우리는 서울을 해방시켰습니다. 시민들은 다시 자유와 존엄성을 결코 양보하지 않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다시 살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맥아더는 감격에 겨운 말로 “결정적인 승리를 허락해주신 전능하신 하나님께 다 같이 일어나서 ‘주기도문’을 외우자”며 고개를 숙인다. 장군들은 모자를 벗고 주기도문을 외운다.
꼿꼿이 서있는 75세 이승만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린다. 맥아더는 이승만의 손을 잡았다.
“대통령 각하. 수도 서울을 각하에게 돌려 드립니다. 저와 저희 장교 일동은 이 순간부터 군무에 전념하고, 모든 행정은 각하와 각하의 정부에 맡기고자 합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진심으로 감사했다. “압도적으로 우세한 적을 무찌르고 승리를 획득한 귀관의 탁월한 지휘에 심심한 사의를 표명하는 동시에 영원히 감사의 뜻을 잊지 않을 것을 맹서하는 바입니다. 우리민족의 구원자로서 장군을 사랑합니다.”
치사를 마친 이승만은 맥아더에게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했다. 훈장을 만들 겨를이 없어 서훈(敍勳) 문서로 대신할 수 밖에 없다. 훈장은 뒷날 전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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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탈환전투에 앞장 섰던 박정모 소위(가운데)가 최초로 9월27일 새벽 중앙청 건물 꼭대기 돔 발코니에 태극기를 거는 장면을 재현하고 있다(왼쪽). 오른 쪽 중앙청 앞마당 게양대에 태극기를 게양하는 장면은 뒷날 기념식때 촬영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 “중앙청엔 국군이 먼저 태극기 꽂아라” 이승만 명령 지킨 국군용사들
수도 반환식이 열린 중앙청엔 두 곳에 태극기가 휘날리고 있었다. 앞마당 국기 게양대와 가장 높은 곳 중앙 돔(dome) 앞에도, 사실은 이 돔 태극기가 역사적 유물이다.
흔히 9.28수복 기념물로 국군 두 명이 국기게양대에 태극기를 게양하는 사진을 인용하지만, 그것은 1959년 서울수복 9주년 재연행사 때 촬영된 것으로 밝혀졌다. 그보다 먼저 9.28 서울수복 당시 비밀리 감행한 최초의 ‘태극기 게양 작전’은 따로 있었다.
◉ 박정모와 소대원들 = 서울수복작전 선봉대가 서울에 진입한 것은 9월25일 저녁, 이튿날 새벽서울 시청을 점령한다. 옥상에 걸린 북한 인공기를 내리고 태극기를 게양한 팀은 박정모 소위(당시 24세)를 비롯한 해병대 1연대 2대대 6중대 1소대원들이었다.
그때 박정모는 취재하는 종군기자 박종환으로부터 중앙청 태극기 게양을 두고 부대간에 경쟁이 있다는 말과 함께 “이승만 대통령도 중앙청만은 국군이 먼저 태극기를 꽂기 바란다”고 지시했다는 말을 알려주는 것이었다.
순간 박정모는 결심했다. 서울의 상징 시청 탈환을 먼저 성공한 한국해병대가 대한민국의 상징 중앙청도 미군보다 먼저 탈환하여 대한민국의 자존심을 세워야한다고. 하지만 유엔군사령부의 작전에 따라 한국해병대의 진로는 시청-을지로였고, 중앙청 공격은 미 해병대 몫이었다. 이대로 두면 중앙청엔 태극기 아닌 미국 성조기만 올라갈 판이다. 박정모 소위는 김종기 대대장에게 달려갔다.
“중앙청 태극기를 우리가 달겠습니다. 허락해주십시오.”
김 대대장은 연대장 신현준 대령의 허락을 받았다.
9월27일 새벽 3시 대대본부 조선호텔의 직원들을 동원해 구한 대형 태극기를 배에 둘러 감은 박정모는 소대원을 이끌고 비밀 돌파작전에 나섰다. 미군이 알면 안 된다. 촘촘하게 설치된 인민군의 모래주머니 진지를 넘고 넘어 세종로를 따라 중앙청 안으로 돌입했다. 어디선지 총탄이 쏟아진다. 소대는 수류탄을 던지며 적군을 죽이고 전진 또 전진...병사들은 군용 허리띠를 풀어 잇고 이어서 검붉은 연기를 뿜는 중앙청 건물 돌기둥을 타고 오르고 오른다. 마침내 꼭대기 돔 발코니에 올랐다.
박정모는 허리에 감았던 태극기를 꺼내 매달았다. 만세!! 먼동이 트는 27일 새벽6시10분, 인천상륙작전 12일 만에 이룬 수도탈환의 태극기였다. 인공기와 김일성-스탈린 초상을 끌어내 화염방사기로 불태웠다. 이튿날 9월28일 서울수복 완료, 다음날 수도반환식이 열렸던 것이다.
뒷날 미국 트루먼 대통령이 ‘알려지지 않은 숨은 공훈이 크다’며 표창장을 보냈다.(이상 예비역 박정모 대령의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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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선을 방문한 이승만 대통령이 정일권 육군참모충장(오른쪽)과 대화하는 모습.
◆ 이승만의 붓글씨 명령 "국군은 즉시 38선을 넘어 북진하라"
맥아더의 결단으로 수도 서울을 인계받은 이승만 대통령은 이제 거칠 것이 없다.
수도 반환식 그 자리에서 맥아더에게 통보한다. “우리는 북진할 것이오. 도와주시오”
맥아더는 그러나 즉답을 피한다. 유엔 결의와 트루먼의 명령은 “38선까지만”이기 때문이다. 유엔군사령관은 “유엔이 38선을 넘으라는 권한을 부여하지 않았다”는 이유를 대며 “좀 더 기다려봅시다”고 난색을 표할 수 밖에 없었다.
다음날 9월30일, 이승만대통령은 정일권 육군참모총장을 경무대로 부른다. 육군 고위 간부들이 모두 따랐다. (정일권 [정일권 회고록] 고려서적 광문출판사, 1996)
「....이 대통령은 첫 마디부터 여느 때와 달랐다.
“우리 3사단과 수도사단이 38선에 도달했는데도 어찌하여 북진 명령을 내리지 않는 것인가? 38선 때문인가? 아니면 딴 이유 때문인가.”
“38선 때문입니다”라고 답하자 노(老) 대통령의 노기 띤 목소리가 한층 높아졌다.
“38선이 어찌 되었다는 것인가? 무슨 철조망이라도 쳐 있다는 것인가, 장벽이라도 쌓여 있다는 것인가, 넘지 못할 골짜기라도 있다는 것인가?”
나로서는 처음 겪는 노 대통령의 노여움이었다. 고개를 들지 못했다.
잠시 후 다시 말이 떨어졌다.
“인사국장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38선을 넘어도 되는 것인가, 안 되는 것인가?”
황헌친 대령은 주저 없이 명쾌하게 답했다. “각하의 명령이면 언제라도 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어서 일행 모두에게 같은 질문이 떨어졌다. 대답은 모두 하나였다.
특히 강문봉 대령은 유엔이 북괴군을 침략자로 낙인찍은 이상, 도망치는 침략자를 추격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덧붙였다. 최경록 대령은 “38선은 이미 북괴군이 짓밟은 것이니 우리 국군만이 지켜야 할 이유가 없다”고 강조했다.
이 대통령은 그제야 노기를 풀어 흡족한 듯한 얼굴로 나의 결심을 물었다. 나는 힘주어 대답했다.
“저희들은 대한민국의 군인입니다. 유엔군과의 지휘권 문제가 있습니다만, 저희들은 각하의 명령을 따라야 할 사명과 각오를 지키고 있습니다. 38선 돌파는 이제 시간문제일 뿐입니다. 명령을 내리신다면, 제가 현장에 가서 책임지고 결행하겠습니다.”
잠시 후 이 대통령이 결론을 내렸다.
“여러분의 의견은 나에게 용기를 주었습니다. 나는 맥아더 장군에게 우리 국군 지휘권을 맡기기는 했으나, 내가 자진해서 한 것입니다. 따라서 되찾아 올 때에도 내 뜻대로 할 것입니다. 지휘권을 두고 이러쿵저러쿵 따질 일이 아닙니다. 그러한즉, 대한민국 군인인 여러분은 대한민국 대통령의 명령만 충실히 지켜주면 되는 것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책상에서 종이 한 장을 집어 들어 나에게 주었다.
“이것은 나의 결심이오, 나의 명령입니다.”
그 하얀 종이에는 힘찬 붓글씨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대한민국 국군은 38선을 넘어 즉시 북진하라
1950년 9월 30일 대통령 이승만
전시작전통제권을 유엔군 사령관에게 이양한 한국군 통수권자의 직접 명령서, 이승만은 국군과 미군을 이렇게 지휘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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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 10월1일 국군 제3사단이 38선을 최초로 돌파한 뒤, 김백일 1군단장이 기념 말뚝을 세우고 있다.
◆ 맥아더의 분통 … 미국무부 "3차대전 우려" 갈팡질팡
이승만이 ‘북진’을 명령하는 그 시간에 맥아더는 또 하나의 ‘장벽’과 씨름을 해야 했다.
트루먼 대통령이 ‘상륙작전 축하’ 전보를 보낸 후, 백악관과 국무성은 무얼 하는지 침묵상태다. 맥아더는 워커 장군에게 답답한 속내를 털어놓는다.
“전쟁을 하는 유일한 목적은 승리를 거둠으로써 정치적 평화를 확립하기 위한 정세를 만들어내는데 있거늘, 우리 정부의 외교는 전혀 활동력이 없어서, 절호의 기회가 왔는데도 이를 잡지 못하고 놓쳐버릴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이런 상태로는 전쟁이 끝나기는커녕 오히려 길어지기만 할 것이다” (맥아더, 앞의 책)
★ 애치슨, 합참에 ‘확전방지 작전원칙’ 주문
맥아더의 지적은 적중했다. 미국 외교의 사령탑 애치슨 국무장관은 허둥지둥이다.
그의 관심 속에 ‘코리아’는 겉돈다. 오로지 “소련이나 중공이 참전하지 않도록“ 3차대전 발발의 예방에 집중되어 있었다. 북한침략 보고를 받은 순간부터 그랬다.
6.25 자체가 소련의 침략인 줄도 모르는 듯, 국무장관 애치슨은 모스크바 주재 미국대사 커크(Alan G. Kirk)에게 지시한다. ”북한 침략에 소련의 책임이 없다는 보장을 받아내고, 소련의 영향력을 발휘하여 북한 침략군을 철수시키도록 요청하라“ 이에 커크 대사는 다섯 차례나 면담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한다. 면담은커녕 소련 외무차관 그로미코가 보낸 답변서는 29일에나 전달되었다. 요지는 ”이번 사건이 남한 군대에 의해 도발된 것이므로 남한과 그 배후에 책임이 있고, 소련은 남한 내정에 간섭한 외국세력에 대하여 불용(不容)의 원칙을 고수한다, 더 이상의 답변은 없다“는 것이었다.
침략의 책임전가와 미국에 대한 철수 압력과 협박이 분명한데도 애치슨의 ‘확전방지’ 노력은 인천상륙작전 성공 직후에도 변함이 없다.
드디어 서울을 탈환하고 38선을 향해 진격하는 미군과 유엔군이 풀어야 할 문제가 ‘발등의 불’이다. 바로 ‘38선을 넘느냐, 마느냐’의 선택, 유엔 결의안의 원칙변경을 바꿔야 하는데 문제는 미국정부의 결정에 달려있다.
이 민감한 이슈는 벌써 언론이 먼저 논쟁을 벌인다.
미국무성은 갈팡질팡이다. 동북아과장 앨리슨(John Allison)은 “북한진격과 유엔에 의한 통일정부 수립”을 주장한다. 소련전문가라는 조지 케난과 국무성 간부들은 소련 참전위험을 들어 ‘38선 월경’을 극구 반대한다. 국무성 정책기회국은 “한국 통일을 지원해야 하지만 ‘무력에 의한다는 공약’은 없었다’면서 국제정치적 여건이 성숙될 때까지 기다려야한다고 했다. 애치슨의 결론은 무엇인가.
◉ 맥아더에 ‘국경 고수’ 명령 = 서울 탈환이 눈앞에 다가온 9월27일 맥아더에게 합동참모본부의 ‘금후 작전 지시’라는 문서가 하달되었다.
「귀관의 군사적 임무는 북한군을 파괴하는 데 있다. 이를 위해 귀관에게 38선 이북에서의 군사작전 수행을 승인한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도 귀관의 모든 병력, 지상군, 공군, 해군은 만주나 소련 국경을 넘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한국군이 아닌 지상군이 소련과 국경선이 맞닿은 동북지방이나 만주 국경지역에서 작전을 하거나, 공군 또는 해군이 포함되어서는 안 된다. 북한군의 무장해제와 항복조건의 이행을 위해서는 미군 대신 한국군을 앞세워야 한다. 귀관의 북한 점령계획은 합참의 승인을 받아야한다」
”전쟁하라는 거야, 협상하라는 거야?“...요령부득의 정치적인 지시에 고개를 흔드는 맥아더는 입술을 깨물며 다음과 같은 답변 겸 작전계획서를 9월28일 타전한다.
*제8군은 평양 점령을 목표로 38선을 넘어 평양축선까지 진격한다. *10군단은 원산상륙작전을 전개한다. *정주-영원-흥남 선의 이북지역에선 한국군만 작전하게 한다. *제8군의 38선돌파 예정일은 10월15일이후가 될 것이다. (맥아더, 앞의 책, 남시욱 [6.25전쟁과 미국] 청미디어, 2015)
애치슨은 만족했는가. 국무부의 정책지침을 받는 합참은 이틀 후 9월30일 맥아더의 계획을 승인하였다. 북한 진격은 허락하되 소련과 중국 국경선엔 얼씬도 하지 말라는 애치슨의 비현실적인 원칙, ‘전쟁은 승리’가 진리인 장군 맥아더는 분통을 터트리며 북진 준비에 들어갔다.
◉ 10월1일 한국군 38선 돌파 = 3개월전 북한이 38선을 넘어 침략하던 순간 이승만 대통령이 결심한 것은 ‘남북통일’이다. 그 통일의 첫걸음 ‘38선 돌파’ 명령을 붓으로 써서 정일권 육참총장에게 주었다. 정 총장은 워커 8군사령관에게 보고하고 강원도 1군단으로 달렸다. 이승만 대통령의 명령을 전달 받은 제1군단장 김백일(金白一,1917~1951)은 제3사단에 ‘북진 명령’을 내리고 현장으로 달려갔다.
38선 남쪽 2㎞지점 양양군(襄陽郡) 현남면(縣南面) 인구리(仁邱里)에 주둔하고 있던 23연대(대대장 김종순)는 10월1일 새벽5시 드디어 국군 최초로 38선을 돌파하였다. 질풍처럼 진격한 국군은 적군5사단을 격파하고 양양을 점령한 시간이 오전 10시. 꿈에 그리던 내나라 북한 땅을 유엔군보다 먼저 수복한 개가였다.
김백일 장군은 38선상에 ‘三八線은 없다’ 플래카드를 펼치고 나무 말뚝에 ‘아아 감격의 38선 돌파!’를 써서 기념비로 세웠다.
◉ 영국 ”38선 넘지말라“ = 9월30일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는 도쿄와 서울의 방송을 통해 김일성에게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반응이 나올 리 없다.
10월1일은 중공의 정권수립 1주년 기념일, 수상 겸 외상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는 유엔군의 38선 돌파 가능성에 경고하는 성명을 발표한다. ”중국인민은 외국의 침략을 절대 용인할 수 없다. 이웃에 대한 비겁한 침략은 좌시하지 않겠지만, 남한군 단독으로 38선을 넘으면 중국군이 개입하지는 않겠다“는 묘한 여운을 달았다.
이에 중공 정권을 승인한 영국의 노동당 애틀리 정권은 ‘맥아더의 진격이 한반도 이외의 지역으로 확대되는 것을 반대한다고 경고한다. 무력분쟁이 영국영토 홍콩이나 타이완으로 번지지 않도록 반드시 영국과 사전협의하라고 촉구했다. 영국 공군참모총장도 미군의 38선 돌파를 반대했다. 영연방 인도의 네루 정부도 ”중국의 위협이 공갈 아니다“라면서 맥아더의 진격 중지를 되풀이 요구하였다.
미국과 유엔은 그로부터 일주일 뒤 7일에야 ‘유엔군의 38선 진격’를 승인한다. 너무나 상식적인 전쟁논리를 외면하고 ”스탈린 개자식“을 물리치겠다는 트루먼의 초심(初心)도 잊은 미국 전략은 목표를 잃고 말았다. 그저 3차 대전 위험을 피하자는 꼼수만 계산하다가 한국군의 38선 돌파 북진을 보자 현실에 눈을 뜬 것인가. 아니다,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공산화전략에 대한 정보 부재(不在)가 낳은 미국의 결정적 오판, ‘국경 충돌’만 피하면 된다는 유아적인 착각의 패착이다. 일본과 독일에 집중되었던 미국 정보기관들의 정보취재력 역시 개점휴업상태였음을 말해준다. 마오쩌둥의 중공군 참전 결정과정은 다음 회에서 살펴보자.
맥아더는 유엔의 결정에 따라 8일 일제히 북진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중국 공산당을 모르는 맥아더 역시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한 무시무시한 ‘참패의 악운’이 눈앞에 다가오고 있음을 어찌 알았으랴. 정보가 부족한 한국군 역시 ‘남북통일’을 행야 평양으로 달리고 있었다.
◆ 백선엽, 고향 평양을 탈환 … 6사단 ”압록강 물을 경무대 보내자“
”내 머릿속에 늘 푸른 강이었던 대동강의 물결이 언뜻 보였다.
전쟁이 터지면서 나는 임진강을 떠나 대한민국 수도를 품에 안고 흐르는 한강을 넘었다. 다시 낙동강에서 대한민국의 숨결을 지켜내고 한 달 뒤, 나는 고향의 대동강에 다가서고 있었다. 동생 인엽(仁燁)과 뛰어놀면서 그 바닥까지 헤집고 다녔던 고향의 강...“ 만90세를 맞은 백선엽 장군의 또렷한 기억이 오래된 추억의 풍경을 그려낸다. (이동현 ‘6.25전쟁 60년’ [중앙일보] 연재, 2010. 이하 백선엽의 회고담)
◉ 내고향 내집 내방 = 백선엽이 인천 상륙 작전 뒤 38선을 넘을 때였다. 한국군은 탱크가 없으니 해주로 가라고 했다. 백선엽은 미군장성을 설득했다. ”내 고향 평양을 내가 찾게 해주시오“ 결국 소원은 이루어져 선봉대에 섰다. 힘든 줄도 몰랐다. 군화도 없던 병사들의 발은 피에 젖은 상처투성이...”밤에는 내가 ‘평양’하면 병사들도 ‘평양’이라 복창하며 진격 또 진격...죽을지 살지 모르고 적과 싸우며 달렸습니다.“ 미군보다 내가 먼저 고향을 탈환하겠다...이것은 이승만 대통령부터 병사들까지 일치된 정체성의 본능, 마침내 10월 19일 백선엽의 1사단이 미군 제1기병사단보다 먼저 평양에 입성한다.
”내 인생 최고의 날이었습니다“ 불과 30여분 뒤 중심가 선교리 로터리에서 호바트 게이 미1기병사단장과 합류, 감격의 포옹을 나누었다. 화이저 중위도 “드디어 내 고향 평양에 왔어요” 눈물을 흘렸다. 선교사의 아들이 출생한 곳도 평양이었다.
평양 시가지는 많이 파괴되지 않아서 평양 백화점 등 겉모습이 멀쩡했다. 만수대 김일성 집무실에 들어가 책상에 앉아보고 나서 평양형무소로 향했다. 지독한 악취가 코를 찔렀다. 살아있는 죄수들은 없고 마당에 쌓여있는 시체뿐이다. 쫓기는 적군이 무차별 학살한 것, 우물과 구덩이마다 처참한 모습들, 여성들과 자녀 같은 아이들, 국군 포로도 미군 포로도 보였다. 납북된 인사들도 끼어있을 것이었다. 평양만이 아니다. 원산 형무소, 함흥 형무소도 그렇다고 했다.
주민들에 대한 선무(宣撫)공작을 벌였다. 삐라를 뿌리고 전단을 붙였다. ‘국군이 평양에 왔으니 주민들은 마음 놓고 생업에 임하라’는 내용이다. 평양에 진입한 15연대, 12연대, 11연대의 진격 상황 등, 시내는 순조롭게 질서 회복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신리 국민 학교에 사단 CP를 차렸다. 바로 그 옆에 우리 집이 옛 모습이라 반가웠다. 밤이 깊어지자 잠이 올 리 없어 부관과 함께 학교를 나와 집을 찾아갔다. 어머니가 어린 3남매를 키우던 집, 누님이 살다가 피난 갔다는 걸 확인했다. 내 방으로 들어가 군화를 신은 채 누웠다. 공산당 핍박에 쫓겨 월남한지 5년 만에 다시 누워보는 방은 수많은 추억들이 잠 못들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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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압록강에 최초로 당도한 제6사단 7연대 제1중대 중대장 이대용과 당시 증언 회고록 표지, 오른쪽 압록강 물을 수통에 담는 사진은 뒷날 후방에서 재현한 것으로 확인됨.
◉ 압록강 물 = 화천을 점령하고 북진하는 6사단 선두 7연대(연대장 임부택 대령)는 노획한 북한 트럭 300여대 덕분에 진격속도가 빨라서 가장 먼저 압록강에 도착한다. 북한군의 완강한 저항을 뚫은 초산(楚山) 전투의 최선봉 제1중대 중대장 이대용(李大鎔,1925~2017, 뒷날 사이공 주재 한국대사관 공사) 대위가 중대원들과 압록강으로 달려가 가장 먼저 도착하였다. 10월26일 오후 2시 15분이었다.
“압록강이다! 아, 이 나라 남아로 태어나서 자유의 종을 울리며 남북을 통일하고 나니 지금 죽어도 무슨 유한이 있으리오!" (이대용 [국경선에 밤이 오다] 한진출판사, 1984)
해방 이래의 ‘꿈’ 압록강 국경에 선착한 승리의 감격, 7연대 1중대는 자신들이 민족의 숙원 남북통일을 이룩한 것 같았다. 환호성을 올리는 눈앞에 펼쳐진 국경의 강물은 출렁출렁...건너편엔 뗏목을 타고 만주로 건너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강물을 수통에 담자” 이대용은 압록강 물을 수통에 담도록 지시하여 연대 본부로 보냈다. 남북통일의 염원으로 노심초사하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통일의 물’을 자랑스럽게 보여주고 싶었다. 그 물을 서울 경무대의 이승만 대통령에게 전달한 사람은 신찬균(1931~!2023) 대위로 뒷날 밝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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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패퇴한 김일성이 '서울수복'에 놀라 소련 스탈린에게 긴급지원을 간청한 편지(왼쪽)과, 같은 날 중국 마우쩌둥에게 보낸 참전요청 편지.
◆ 김일성 = ‘RUN 일성’ … 평양 함락 1주일전 만주로 줄행랑
“...인민군은 미 공군의 폭격으로 막대한 손실을 입어 전차 대부분과 화포를 잃었다. 지금 인민군은 힘겨운 지구전 양상에 놓여있다. 부대에는 탄약과 연료가 부족하고 보급도 차단되었다. 무엇이 얼마나 부족한지에 대한 산출조차 불가능하다...” (A.V.토르쿠노프 지음, 구종서 옮김 [한국전쟁의 진실과 수수께끼] 에디터출판사, 20003. 김용삼, 앞의 책)
인천상륙작전의 성공 후 남북으로 포위되어 협공을 받은 북한군의 궤멸 실상을 스탈린에게 보고한 소련군 장성의 기록이다. 부대마다 와해되어 장교들조차 군복을 버리고 사복을 빼앗아 위장, 산으로 산으로 도주하기에 바쁘다. 민가의 가축과 양민들을 살해하고 식량을 강탈하는 사건이 줄을 이었다.
★ 김일성, 9.28서울수복 그날에 북한 탈출 시작
한미연합 유엔군이 서울을 탈환한 9월28일, 김일성은 ‘북한 탈출’ 회의를 열었다.
그날 이른 아침부터 평양에도 B-29 편대가 나타나 포탄을 퍼붓는 굉음이 천지를 진동시키는 소리를 들으면서, 김일성은 평양 근교 지하 방공호에 7인군사위원호를 소집하여 다음과 같은 비밀지령을 내린다.
*패퇴하는 군지휘관, 장성급과 공산당 고위간부들의 사상과 행동을 철저히 감시할 것. *김일성의 일가친족들을 압록강 건너 만주 땅으로 안전하게 호송할 것. *납치해 온 남한 요인들을 즉시 처형자와 후송할 자로 분류할 것. *감금중인 조만식을 국경도시 강계(江界)로 옮기거나 불응시 처형할 것. (이기봉 [인간 김일성 그의 전부] 길한문화사, 1989)
요컨대 김일성은 북한정권을 만주로 ‘망명’할 준비태세를 서두르고 있었다.
◉스탈린-마오쩌둥에 SOS=다음 날 29일 김일성은 전쟁의 총책임자 스탈린에게 다음과 같은 요지의 긴급구원 편지를 보낸다.
「친애하는 스탈린 동지께....적군이 서울을 점령하는 대로 북에 대한 침략이 예상되므로 귀하의 특별한 지원을 요청한다. 적이 38선을 넘을 경우를 대비하여 소련의 직접적인 군사원조를 부탁한다. 만일 이것을 정치적 이유로 받아들일 수 없다면 중국 및 그 밖의 국제 의용군 창설을 도모하여 군사지원을 해줘야한다...」 (A.V.토르쿠노프, 앞의 책)
동시에 중국의 마오쩌둥에게도 긴급구원과 참전을 애원하는 편지를 썼다.
「...적이 시간을 주지 않고 38선 이북으로 계속 진격할 경우, 우리 자체역량만으로는 이 위기를 극복하가 어렵다. 부득이 귀하에게 특별지원을 요청한다. 중국 인민해방군이 직접 출동하여 우리 작전을 지원해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박헌영과 연명으로 두 편지를 보낸 김일성은 다음날 10월1일 원병요청사절단을 북경으로 급파한다. 박헌영(부수상 겸 외상, 인민군정치총국장)과 유상철(인민군 부총참모장), 이상조(부총참모장 겸 경찰국장) 등은 북경에서 마오와 저우언라이를 비롯, 군부 간부들에게 긴급 파병을 애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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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군이 38선을 넘자 평양을 탈출한 김일성은 스탈린의 선물 승용차를 타고 가다가 반공청년들에게 쫓겨 차를 버리고 도망갔다. 이 승용차는 탈북한 인민군이 국군에게 바친 것, 현재 전쟁기념관에 전시중임.
◉김일성의 평양 탈출=한국군이 38선을 돌파했다는 급보에 접한 김일성은 10월3일에 9살 아들 김정일과 가족들 및 가재도구 등을 4대의 대형버스에 실어 만주의 심양(瀋陽:봉천)으로 출발시켰다. 수행하는 정치보위부원과 경무원 및 1개중대 경비대가 고사포 등을 장착한 여러 대의 트럭을 타고 따랐다.
한국군 제3사단과 수도사단이 10워11일 원산에 돌입하고 제6사단이 평강을 점령하자 김일성은 발등에 불이 붙었다. 중국에서는 ‘파병한다, 안한다’는 전갈이 오락가락, 김일성은 공황상태에 빠져 마지막 명령을 내린다.
*일보도 퇴각하지 말라.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으니 끝까지 사수하라. *무기를 버리고 도망가는 자들은 지위여하를 가릴 것 없이 현장에서 처단하라.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자들을 색출하고, 후방 독전대를 조직하라 등이다.(하기와라 료, 앞의 책)
10월12일 김일성은 ‘조국의 위기에 처하여 전 인민에게 고함’이란 연설을 녹음하여 방송을 명령한다. 그리고 마침내 평양을 탈출한다. 그가 향하는 곳은 압록강 국경도시 만포진(滿浦鎭)이다. 백선엽 장군이 평양에 입성하기 꼭 일주일을 앞두고서였다.
박갑동 등 기록자들은 김일성의 녹음방송 요지를 소개하고 있다.
“미국 강도 놈들이 우리 조국을 식민지로 만들고 우리 삼천만 동포를 망국의 노예로 만들기 위해 침략적 공격을 계속하고 있다...우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이 전쟁을 원하지 않았고 유혈의 참극을 바라지 않았다....이승만 일당은 조국의 평화통일을 끝까지 방해하고 미국 제국주의 놈들의 지시하에 동족상잔의 국내전쟁을 준비하였다....우리 앞의 과제는 무엇인가? 조국의 한치 땅도 지켜야하며 최후의 피 한방울까지 용감하게 싸워야한다. 미국 놈들과 이승만의 개들이 우리 부모 형제를 살해한 것에 대해 최후까지 복수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 녹음연설은 날마다 밤낮으로 방송되고 있었다.
그 시간, 김일성은 스탈린이 선물한 소련 특제 승용차를 타고 도망가고 있었다.
◉승용차 버리고 도주=여비서 2명을 태운 김일성의 방탄차가 북으로 질주, 청천강을 건너 회천을 지날 때였다. 갑자기 길이 막혔다. 그동안 숨어있던 반공청년들이 일제히 봉기하여 관공서를 점령하고 무기를 빼앗아 유엔군을 도우려고 북한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있던 참이다.
진퇴양난, 김일성은 황급히 뛰어내려 산속으로 달린다. 경호대의 호위를 받아가며 적유령산맥 험준한 산속을 헤쳐 도망치는 과정에서 따라오던 호위병 10여명이 남으로 탈주하였다.
권총을 뽑아든 김일성은 호위대장 최현규의 머리를 마구 갈긴다. 정신을 잃고 쓰러졌던 호위대장이 일어나 김일성을 죽이려고 총을 겨누는 순간 빵빵빵 김일성이 먼저 그를 쏘아 죽였다.
사흘 후엔 호위1소대장 송윤철이 도주한다. 그는 회천 온천에 숨어 있다가 한국군 제6사단 7연대가 다가오자, 김일성이 버리고 간 승용차를 몰고 투항하였다. (이기봉, 앞의 책. 정일권, 앞의 책).
이 김일성의 리무진은 그해 12월23일 교통사고로 전사한 미8군사령관 워커 장군의 부인에게 선물로 주어 미국으로 갔다가, 워커 부인이 세상을 떠난후 1982년 다시 한국으로 반환된다. 90년대 소련 패망후 러시아 기술진의 도움을 받아 복원 처리하여 ‘평양 수복 기념물’로 관리하다가 지금은 용산 전쟁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만주에 ‘도망 정부’=만포진 근처에 도착한 김일성은 또 한번 기절한다. 스탈린이 보낸 전보는 이랬다. “우리의 저항은 전망이 없다. 중국은 군사개입을 거부하고 있다. 귀하는 소련이나 중국으로 탈출해야 한다. 적과의 싸움에 필요한 잠재력은 보전하라”
애타는 파병요구 SOS에 대한 스탈린의 답은 “망명하라”는 통보, 절망한 김일성은 압록강을 건너 만주 통화(通化)로 다급하게 도망한다. 인민군 보조사령부를 설치하고 이상조에게 맡겼다.
이 보다 두달전 8월14일,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대사 무초에게 권총을 뽑아 들이대고 호통을 쳤다. 제주도로 피난가라니 한 발짝도 한반도에서 나가지 못한다며 미국의 망명권유를 거부한 것, 그런 이승만을 ‘RUN승만’이라 덮어씌운 북한 공산당 두목 김일성이 ‘RUN일성’의 진짜 모습을 보여준 장면이다.
스탈린이 한반도 공산화를 위해 “말 잘 듣게 생긴” 빨치산 두목 김일성을 ‘북한 두목’으로 뽑은 이래, 김일성의 ‘스탈린 맹종‘으로 굳어진 한반도 분단체제, 즉 스탈린 체제는 이제 핵무장까지 갑옷 입어 대한민국은 물론 자유세계 전체를 이 순간에도 위협하고 있다.
그때, 김일성이 만주로 도망갔을 때, 이승만 대통령의 말을 안듣고 남북통일 기회를 무산시켜버린 미국은 무슨 말로 변명해왔던가. 중공군의 참전 때문이라고? 그것은 ’겁쟁이의 핑계‘였을 뿐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