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승만 대통령 부부와 프란체스카 여사가 쓴 6.25침략 8개월 기록 [프란체스카의 난중일기] 표지.
    ▲ 이승만 대통령 부부와 프란체스카 여사가 쓴 6.25침략 8개월 기록 [프란체스카의 난중일기] 표지.
    “우리는 전 세계 우방들에게 분명히 밝혀두고 싶은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어떤 나라든지 이 전쟁을 중재하기 위한 계획이나 제안을 내놓기 원할 경우, 반드시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한국정부에 제시해야 된다는 점이다...(중략)...우리의 우방들이 이 전쟁에 참여해서 우리를 도와주고는 있지만 현재 이 전쟁은 궁극적으로 우리 자신의 전쟁이다...” (프란체스카 [프란체스카의 난중일기] 8월16일)

    북한군이 낙동강 전선을 압박하는 시점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부인 프란체스카가 이런 내용을 일기에 적은 것은, 당시 이미 영국을 비롯한 영연방국가들이 ‘휴전’을 거론하기 시작했던 상황을 반영한다. 
    중국공산당 마오쩌둥이 1년전 대륙을 장악하고 중공 정부를 수립하자 가장 먼저 ‘국가 승인’을 발표하고 수교한 영국 처칠은 중공군 참전가능성과 스탈린의 유럽 위협을 거론하면서, 미국 트루먼에게 ‘확전’을 경고, 일방적인 휴전을 종용하기 시작하였다.

    이승만은 날마다 진해로 대구로 포항 등지로 날아다니고 있었다. 쉴 틈 없는 국군 격려와 전쟁지휘 때문이다. 각료들은 툭하면 “부산으로 수도 이전”을 건의하더니 이승만이 진해로 내려간 8월18일 조병옥 내무장관이 이를 멋대로 발표해버렸다. 놀란 시민들은 대구를 빠져나가려고 아우성을 쳤다. 대구 공항 근처까지 적군의 포탄이 날아들던 날이다. 
    달려온 이승만은 조병옥을 질책하고, 맥아더에게 “담판 하겠다”며 끈질긴 요구를 되풀이 전하였다. 한국군에게 즉시 무기를 제공할 것, 하루 빨리 전면 북진을 개시할 것, 무슨 일이 있어도 대구를 사수할 것 등이다. “대구는 최후의 방어선이자 생명선이요” 이승만은 날마다 입술이 부르틀 정도로 외치고 다닌다.
  • ▲ 백선엽 1사단장의 작전대화 모습과, 회고록 [군과 나] 표지.
    ▲ 백선엽 1사단장의 작전대화 모습과, 회고록 [군과 나] 표지.
    ◆부산으로 전략적 후퇴...극비 보고 “곧 인천상륙작전”

    결국 대구를 떠나게 되었다. 북한군의 포탄이 대구 공항까지 폭격하는 판이다. 
    미군이 경남 사천(泗川)에서 철수 하고 고성으로 밀렸다. 중공 팔로군 출신의 막강한 북한 6사단(방호산 사단)은 파죽지세로 섬진강을 넘어 하동(河東)을 휩쓸고 밀려드는 것이었다. 
    부마(釜馬) 방어선을 지키려 채병덕이 직접 뛰어들었다가 전사(7.27)한 곳도 하동 고개다. 몸집이 뚱뚱하고 실눈을 반짝이는 채병덕은 인기가 없었다. 미군도 “굴러가는지 걸어가는지 뒤뚱거리는 뚱보 장군”은 장군 취급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승만은 “미남 장군들의 큰 눈이 못 보는 것을 채장군의 졸린 듯한 눈은 다 꿰뚫어본다”며 채병덕의 군사-무기 지식을 높이 샀다고 한다. (프란체스카, 앞의 책)
    포항(浦項)이 고립될 위험에 빠지고 대구 서쪽 왜관(倭館)까지 뚫렸다. 
    진해로 내려갔던 이승만 대통령 일행은 8월30일 진해 비행장에서 헬리콥터 편으로 부산에 도착한다. 그날 영군군부대도 한국에 도착하였는데 환영을 못 나갔다는 대목이 [난중일기]에 보인다.
    피난 수도 부산의 임시경무대는 경남도지사 관사, 도착 즉시 국무회의가 열렸다.
    신성모 국방장관이 뛰어들었다.
    “이번 금요일 모든 전선에서 총공격을 개시합니다. 수도사단을 뽑아내 해병대와 함께 인천쪽으로 보내 미군과 상륙작전을 곧 벌일 예정입니다.”
    이것은 극비! 맥아더와 수시로 소통하는 이승만은 알았다는 듯 아무 말이 없다. 인천상륙작전이 임박했음을 알기에 ‘최후의 생명선’ 대구를 떠나 부산으로 ‘전략적 후퇴’를 한 것이다.
    일본 오키나와에서 미군 1개연대가 부산항 부두에 내렸다. 실종자가 늘어나는 24-25사단을 보충하고, 인천상륙작전을 벌이기 위해서다.
  • ▲ 백선엽 제1사단장의 진중회의.(자료사진)
    ▲ 백선엽 제1사단장의 진중회의.(자료사진)
    ◆다부동 결전...백선엽의 돌격 > 김일성의 U턴

    6.25침략 한 달 반, 김일성의 ‘8월 공세’로 대구방어 전투, 영천(永川)전투, 동해안 전투, 서부경남 전투 등 수많은 혈전이 전개됐지만, 어느 전투보다 낙동강 북부 전략요충 다부동(多富洞, 경북 칠곡군)의 시산혈하(屍山血河) 전투가 핵심이다. 막강한 적의 무력에 밀린 미8군 사령관 워커 장군은 ‘최후의 저지선’으로 낙동강과 그 상류 산악지대의 천연장애물을 이용한 방어선을 구축해 사수하기로 결정, 이것이 ‘워커 라인’(Walker Line) 낙동강 방어선이다. 그 최전방 다부동에서 한 달간 벌어진 치열한 공방전이야말로 대한민국의 명운을 건 결전으로서, 30세 장군 백선엽(白善燁,1920~2020)이 거둔 승리는 스탈린과 김일성의 무력침공 전의를 무력화 시킨 역사적 분수령이 되었다. 

    ★“사단장이 앞장선 군대”...미8군 경악 “한국군은 神兵”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장담했다. “미국은 참전하지 못할 것이며 북한군이 3개월 내 적화통일을 해내겠다”고, 하지만 뜻밖에도 미군은 개전직후 유엔군까지 끌고 참전하였고 적화통일의 목표도 낙동강 전선에서 막혀 버렸다. 이러니 “8.15까지 부산 점령” 목표를 ”대구 점령“으로 바꿀수 바꿀 수 밖에 없었으며 전쟁계획 전반을 수정해야 했다. 북한군 3사단, 13사단, 1사단의 1개 연대 등 최정예 병력을 대구 함락작전에 총 집결시켜 결판을 내기로 정한다.
    그때 백선엽의 국군 제1사단은 대구 북쪽 다부동)에 방어선을 치고 있었다.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98대 B-29 융단폭격=미 8군부 정보처에서는 왜관 북서쪽부터 북한군 3개 사단과 105전차사단이 집결하고 있으며 그 병력은 4만여명 정도로 추산했다. 이에 미 8군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노르망디 상륙작전 시 감행한 융단 폭격을 유엔군사령부에 건의한다.
    맥아더는 도쿄 극동군사령부에 한국군 1사단 방어지역 좌우 사방에 대한 출격명령을 발한다. 8월 16일 일본 요코다와 가데나 비행장에서 출격한 B-29 전략폭격기 98대가 까맣게 날아와 이날 11시 58분부터 26분간 400~900㎏ 폭탄 960톤을 투하했다. 
  • ▲ 다부동 계곡 경비병.
    ▲ 다부동 계곡 경비병.
    ◉처절한 백병전=북한군은 화력이 강한 미군을 피해 무장이 허술한 국군의 정면을 결사적으로 파고들었다.  
    마침내 백병전(白兵戰, Hand-To-Hand Combat, 약어; HTH, H2H)이 벌어졌다.
    백선엽의 증언, ”피아(彼我)가 너무 가까이서 대치해 소총 사격보다 수류탄을 주고받는 혈투가 사단 정면 20km 전선에서 밤낮으로 계속되었습니다. 고지마다 시체가 쌓이고 시체를 방패삼아 싸운 겁니다. 드디어 한계상황에 이르렀어요.“ 
    백선엽은 8월15일 대구 미8군사령부와 한국군 2군단(군단장 유재흥劉載興준장)에 증원군을 요청, 1사단은 산에서 싸우고 미군 27연대는 도로에서 탱크 대 탱크로 싸운다. 

    ◉‘볼링장 전차전’=그것이 6·25전쟁 최초의 전차전(戰車戰)이다. 쌍방 전차포에서 발사된 철갑탄이 5시간 동안이나 대낮처럼 눈부시게 교차하면서 불꽃을 튀겼다. 불덩이 철갑탄이 어둠을 뚫고 좁은 계곡에 메아리치며 날아가 순식간에 적의 탱크를 명중하는 모습에서, 미군병사들은 볼링공의 볼링핀 격파(Strike)를 떠올려 ”볼링장(Bowling Alley) 전투“라고 불렀다.

    적군은 18일부터 단말마(斷末魔的)가 되어 고지마다 육박전(肉迫戰)으로 달려들었다. 
    ”수류탄과 총검으로 결투를 벌이며 일진일퇴를 거듭했지요. 적의 포로와 부상병 입에서는 술 냄새가 났습니다. 술을 먹여 육탄전(肉彈戰)에 내보낸 것이죠,“ 백선엽의 회고다. 
    8월19일 미23연대도 증파되었다. 당시 국군사단에 미군이 두 겹으로 투입된 것은 다부동이 유일했다. 그날 밤 적군 중대가 1사단사령부(동명국민학교)를 기습, 백선엽을 사살하려했지만 전멸시켰다. 

    ◉그날 그 돌격=다음날 미27연대를 엄호하던 11연대 1대대가 고지를 빼앗겨 후퇴한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미8군사령부에서 지급전화가 걸려 왔다. 
    ”한국군은 도대체 싸울 의지가 있느냐 없느냐“고 소리치며 “마이켈리스 중령은 ‘나도 후퇴하겠다’고 통고 하더군요”. 
    백선엽은 “기다려라. 내가 가보겠다”며 지프를 몰아 달려갔다. 뿔뿔이 후퇴하고 있는 대대의 김재명(金在命) 대대장을 불러 추궁했다. “장병들이 주야격전으로 지친데다 고립된 고지에 급식이 끊겨 이틀째 물 한모금 못 마셨다”는 대답이다. 
    낭패한 백선엽은 병사들을 땅바닥에 앉히고서 입을 열었다.

      “우리에게는 이 이상 내려갈 곳이 없다. 여기가 격파되면 나라가 망하고, 우리에겐 죽음뿐이다. 대한민국이 멸망해서는 안 된다는 우리 마음은 모두 같다. 보라, 우리를 돕기 위해 지구 저쪽에서 온 미군이 저 아래 골짜기에서 싸우고 있지 않은가. 그들을 버리고 우리만 살겠다는 것은 대한의 남아로서 부끄러운 일이다. 내가 선두에 서겠다. 내가 물러서면 너희들이 나를 쏴라”
      백선엽은 돌격명령을 내리고 선두에서 달렸다. 병사들의 함성이 골짜기를 진동시키며 삽시간에 488고지를 재탈환했다. “적은 증원부대가 와서 공격하는 줄 알았을 겁니다”
    다부동 골짜기는 발사음과 작열음의 지옥이었다. 능선마다 고지마다 시체가 쌓이고 핏물이 흘렀다. 무제한 탄약을 퍼붓는 교전이 다섯 시간 넘게 산하(山河)를 흔들었다. 
     
    미8군 마이켈리스 중령이 말했다. 
    “사단장이 직접 돌격에 나서는 한국군은 신병(神兵)이다” 
    최초의 한미군 연합작전은 그렇게 상호신뢰의 믿음이 쌓여 공산군을 격퇴하는 성공을 거둔다.  

    다음날 아침에 보니 북한군의 탱크들을 비롯, 중장비, 차량 등이 줄줄이 버려져있었다. 그날에만 적의 전사자는 1300명을 넘었다고 미군이 집계하여 보고한다.
    8월 말까지 혈전을 벌인 1사단은 다부동 지역을 미군 1기병사단에 넘기고 팔공산 북쪽으로 이동했다. 1사단은 최종적으로 장교 56명 등 2,300명이 전사하고, 북한군은 2배 이상 5,690명이 죽었다.
    최후의 발악인 듯 북한군은 9월 초 ‘9월공세’를 시작하였으나 주력부대가 궤멸된 후인지라 전의가 꺾인 공산군 무리는 패주하고 말았다. 

    9월15일, 仁川상륙작전의 성공 소식이 낙동강 전선에 날아왔다. 
    9월18일, 1사단의 주력 12연대(연대장 김점곤金點坤 중령)은 무력화된 적의 저항을 뚫고, 비로소 북진의 돌파구를 열었다. 이번엔 한국군이 파죽지세로 서울을 향해 달려갔다.

    ◀백선엽 전공의 기록들=백선엽 회고록 「군과 나」(대륙연구소, 1990). [부산에서 판문점까지](영문판, 1992). [길고 긴 여름날 1950년 6월25일](지구촌,1999).  [젊은 장군의 조선전쟁朝鮮戰爭] (일본어판, 2000).  유광종 [백선엽을 말한다] 책밭, 2011). 남정옥 [백선엽](백년동안, 2015). [사진으로 보는 현대사: 군인 백선엽] 청미디어, 2024)외 다수▶
  • ▲ 경무대서 백선엽 모친 방효열 여사의 환갑잔치를 베풀고 악수하는 이승만 대통령. 방여사 양옆에 프란체스카 여사와 백선엽 장군.
    ▲ 경무대서 백선엽 모친 방효열 여사의 환갑잔치를 베풀고 악수하는 이승만 대통령. 방여사 양옆에 프란체스카 여사와 백선엽 장군.
    ★이승만의 ‘장군들 총애’...경무대서 백선엽 어머니 회갑잔치까지

    전쟁 중만 아니라 평시에도 이승만 대통령은 ‘아들 같은 장군들과 손자 같은 병사들’을 유난히 아끼며 사랑을 베풀었다. 더구나 전쟁 통에 부모를 잃었거나 노부모를 모시고 사는 장성들이나 지휘관들에게는 각별한 애정을 쏟았다. 특히 노쇠한 편모를 모시는 백선엽, 정일권 장군과 손원일(孫元一) 해군제독이 대표적이다. 휴전후 백선엽이 육군참모총장 시절, 이승만은 백장군의 노모 방효열(方孝烈)여사를 경무대(대통령관저)로 초청하여 직접 환갑잔치를 열어주었다. 6.25전쟁에 큰 공을 세운 두 장군 백선연-인엽 형제를 홀몸으로 키워낸 방여사의 공을 기리며 국가원수의 감사를 표함으로써 국군통수권자의 호국과 통일 의지를 다짐하고, 군부의 단결을 꾀하는 타고난 리더십이기도 하다.

    방효열 여사는 남편 백윤상(白潤相)이 일찍 세상을 떠나자 어린 3남매를 데리고 강서(江西)를 떠나 평양으로 이사하였다. 하지만 금방 돈이 바닥나 온갖 일을 했지만 살길이 막막해지자 생활고에 지쳐버린다. 방여사는 견디다 못한 나머지 딸과 두 아들을 데리고 대동강 다리로 향하였다. 눈치를 챈 13세 소녀 백복엽이 엄마에게 매달렸다. 
    “어머니, 나무도 뿌리를 내리려면 3년이 걸린다는데 우리는 평양에 온지 겨우 1년이야. 제발 3년만 버텨보자구요. 엄마...그래도 안되면 그때...흑흑” 가족들은 울음바다가 되었다. 백선엽 8세, 인엽 5세 때 일이다. 구한말 무장 방흥주의 딸 방효열은 무인기질을 타고 난 듯, 집단자살의 결심보다 새 출발의 결의는 몇 배나 강렬했다. 두 아들을 친정아버지보다 훨씬 훌륭한 최고의 장군으로 만들어낸 여장부, 모전자전(母傳子傳)이다. 다부동의 임전무퇴(任戰無退) 결의가 그 증거 아니랴.
  • ▲ 6.25발발 전에 집결한 학도호국단 대학생들. '지키자 3.1정신, 뭉치자 호국학도' 플래카드를 들었다.
    ▲ 6.25발발 전에 집결한 학도호국단 대학생들. '지키자 3.1정신, 뭉치자 호국학도' 플래카드를 들었다.
    ◆‘학도병’과 ‘지게 용사’들...빛도 없이 이름도 없이...

    당시 낙동강 방어선을 사수(死守)하려는 전투는 그야말로 ‘인간포탄’의 욕탄전을 거듭했다. 따라서 계곡마다 고지의 길목마다 시체가 쌓이고 그 썩는 냄새에 숨조차 쉴 수 없었다. 
    부대마다 신병이 도착하면 명단을 작성할 겨를도 없이 전선에 투입한다. 누가 전사하고 후송됐는지 파악할 겨를도 없다. 하룻밤 격전이 지나면 병력은 절반씩 줄었고 다음날 또 신병을 요구해 보충해야 했으며, 분대장이 분대원 얼굴과 이름도 모르는 지경이 되었다. 적과 아군을 구분하기 어려운 극한 상황이었기에 전사한 병사들은 ‘무명용사’로 사라져갔다.
    그 ‘신병’ 가운데 용맹을 날린 ‘학도병’들의 자취는 그래서 ‘무명용사’ 비석으로 남는다. 

    ★전국 ‘학도호국단’ 학생들의 자진 참전

    이승만 대통령이 ‘학도호국단’을 설립한 것은 1949년 4월 22일, 미군 철수에 대한 자위책의 하나였다. 중-고등학교부터 대학생 전원을 대상으로 자유민주 사상교육과 유사시 국토방위를 위해서 조직한 학생단체이다. 
    ‘학도병’의 시작은 서울 함락에 피난 길에 오른 학생들 중에 학도호국단 간부들 200여명이 수원에서 자발덕으로 ‘비상학도대’를 결성하면서였다. 이들의 첫 전투는 한강방어선, 일부는 교복차림 그대로 소총과 실탄을 지급받아 1950년 6월 29일부터 한강변 국군부대로 들어가 싸웠다. 이승만 대통령에게 배운대로 젊은 애국심을 발휘한 것이다. 국방부는 이들을 피난민 구호나 가두선전 등 주로 후방 선무공작을 맡도록 배치하였으나, 학생들은 ‘학도 전투부대’를 구성해 일선에 투입해달라고 요구한다. 대전에 집결한 학생들은 7월1일 ‘대한학도의용대’를 스스로 조직, 전선으로 달려간다. 
    ◉국군 제1사단 15연대와 제3사단 22연대와 26연대는 7월 중순부터 여러 차례 보충병을 학도병으로 채웠고, 8월 대구에서 새로 편성된 25연대도 사실상 학도병 부대가 된다. 이들은 포항, 기계(杞溪), 안강(安康), 다부동(多富洞) 등 낙동강 전전에서 결사적으로 싸웠다.
    밀양의 학도기간대 1,500여명의 유격전, 인천상륙작전의 양동작전인 영덕(盈德)지구 상륙작전, 태백산 유격전, 호남지구 잔당소탕 등, 학도호국단의 뜨거운 젊은 피를 흘린 전투는 부지기수였다. 이들이 아니었다면 다부동의 승리도 장담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학도병들의 희생적인 애국투쟁은 고립된 요충지 ‘포항 공방전’의 신화를 낳는다. 북한 제5사단 및 766유격대에 맞서 포항시가를 두고 혈전을 벌인 학도병은 48명이 전사하면서 끝까지 포항을 지켜냈다.
    6.25전쟁 전 기간 참전한 학도병은 2만7700여명, 후방 선무활동에 참가까지 무려 20만명이넘는다. 여학생들은 자발적으로 간호병이 되어 전선을 가리지않고 누비기도 하였다. 

    일부 학생들은 유엔군에 편입, 일본에서 훈련을 받고 9월15일 인천상륙작전에 정규군으로 투입되었다. 또 포술훈련을 받은 학도병들은 ‘북진포병대’를 조직하여 개성, 평양, 순천을 거쳐 덕천(德川)까지 진격, 북한군을 추격하여 한만(韓滿) 국경까지 밀고 올라갔다.
    수복지역의 북한 학생들도 스스로 학도호국단, 학도의용대 등을 조직하여 남한 학도의용군을 지원하고 나섰다. 중5공군 참전후 남하한 그들 4천여명은 정규 국군으로 입대하였다. 
    1951년 3월 국군과 유엔군이 중공군을 38선 이북으로 밀어올리고 전쟁의 균형을 회복하자, 이승만 대통령은 “학도들의 학원 복귀령”을 발표한다. 
    이에 학도의용군은 3월 16일 강원도 홍천에서 무기를 내려놓고 학원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북한 출신 학도병들은 물론, 끝까지 싸우겠다는 학도병들은 재입대하여 계급과 군번을 받아 “통일될 때까지 목숨을 바치겠다”는 목표를 향해 뛰어들었다.
  • ▲ 무거운 포탄을 지게에 지고 고지로 올라가는 한국노무단.
    ▲ 무거운 포탄을 지게에 지고 고지로 올라가는 한국노무단.
    ★총탄을 뚫고 고지로 물품 나른 ‘지게부대’ 용사들

    “만일 한국노무단이 없었다면 미군은 최소한 10만명 이상의 추가병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는 6.25전쟁에서 군수물자를 지게로 나른 노무자들에 대해 美8군 사령관 밴플리트(James A. Van Fleet) 장군이 토로한 말이다.
    ‘한국노무단’(勞務團), 미군은 그들을 “A-Frame Army“라 불렀다. 등에 진 ‘지게’ 모양이 A자를 닮아서다. 
    6.25발발 한달 후 7월26일 이승만 대통령은 ‘징발에 관한 특별조치령’을 공포한다.
    ”한국전선은 온통 산악지대“인지라 차량 보급이 불가능하였으므로 워커 사령관이 이를 해결해달라고 이승만에게 요청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지게 부대’가 탄생한다.
    대통령의 비상령에 따라 미군은 8월부터 한국민간인 노동자들을 동원하였다. 통칭 ‘보국대’로 알려진 노무단, 근무단이다. 이들이 지게로 운반한 것은 박격포, 곡사포, 포탄, 총알, 연료 등 위험하고 무거운 무기들이다. 그뿐인가, 밥솥, 식량, 반찬꺼리와 전사한 병사의 시체들과 많은 부상자들도 지고 내려와야 했다.
    철모는커녕 밀집모를 쓰고 허름한 옷차림으로 지게를 지고 높은 산을 누비는 ‘보국대’는 35~45세 남성으로 제한되었으나 10대 소년부터 노인층까지 ”밥 얻어먹으려“ 몰려들었다. 
    ”가장 맹렬한 결전을 벌인 다부동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이들 역시 ‘지게부대’였다.
    사방에서 콩 튀듯 날아드는 총알을 피하려 기다시피 산을 올랐다. 탄약통 2상자를 왕복 3~4시간 걸려 고지에 날라주면 굶고 있는 어머니와 동생들이 먹을 수 있는 주먹밥을 얻을 수 있었다”(지게부대 참전용사의 증언, 국방부 [6.25전쟁사] 앞의 책)
    다부동 혈전 55일 동안 군수물자와 주먹밥을 날랐던 지게부대원들은 매일 40~50명씩 전사했는데 이곳에서만 2800여명이 희생되었다. 중공군 참전후부터 휴전까지 동원된 노무단은 약 30만명, 확인된 희생자만 8794명이다.
    밴플리트 장군의 말처럼 최전선에서 전투병력이 해야 할 행정-기술 부분까지 분담해 병력을 최대한 절약해준 한국노무단, 군번도 계급장도 없이 목숨을 바친 그들은 “빛도 없이 이름도 없이 사라져간 숨은 영웅들”임에 틀림없다. 
  • ▲ 국군 1사단을 방문한 이승만 대통령. 오른쪽 백선엽 사단장.
    ▲ 국군 1사단을 방문한 이승만 대통령. 오른쪽 백선엽 사단장.
    이승만 대통령 부부, 밤새워 37통 편지를 쓰다

    날마다 부산 임시관저를 나와 민정시찰과 군부대 격려 비행을 다니는 이승만이 말했다.
    “병원 부상병들이 거적을 깔고 누워있어요, 덮을 담요조차 없는 군인들이 많던데...”
    시내 병원들을 돌아보고 와서 한숨을 토하는 이승만 대통령을 보자 프란체스카는 화가 치밀었다. 국제적십자사와 미군 당국의 처사가 아무래도 공정하지 않은데 대한 분노였다.
    「적군 공산 포로들에게는 담요를 지급하고 국군에겐 주지 않으면서, 급식량도 피난민 식량보다 많이 주었다. 담요 한 장 못 덮기는 싸움터의 우리 병사들도 마찬가지다. 전쟁포로는 이쪽의 일반병사들과 평등하게 대우하도록 되어있다는데, 그렇다면 그들에게 굳이 담요를 줄 필요도 없는 것 아닌가. 사실 우리는 제네바 협정을 지키기 위해 우리 형편 이상으로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우리에겐 포로들보다는 우리 국군 부상병들이 더 중요하다. 이런 생각을 누가 탓할 수 있으랴.」 (프란체스카, 앞의 책)

    이승만은 직원들을 시켜 덮을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찾아내었고, 자신이 덮는 삼베 홋이불까지 싸고 싸서 병원으로 보내는 것이었다.
    그날 밤, 이승만과 프란체스카는 편지를 쓰기 시작한다. 
    “우리 국군이 공산군과 싸우다가 많이 다쳐 쓰러졌는데 덮을 담요도 없으니 시트라도 보내주십시오” 한글 편지와 영문 편지들을 써서 하와이와 미국 본토 동포와 미국인 친지들에게 보냈다. 하와이부인구제회, 동지회, 릴리하 한인교회, 그리고 최백린, 최성대, 김창수, 거투르투 김, 노디 김, 살로메 한, 해나 류 등 목사들과 교인들에게 주로 썼다. 
    미주본토에는 송철, 송영한, 전인수, 최용진, 제인 남궁, 김세선 등에게 이승만대통령이 쓰고, 미국인 친지들은 프란체스카가 맡았다. 오스트리아 비엔나 친정의 가족들에게도 썼다.
    편지를 다 썼을 때 창문이 훤하게 밝았다. 편지는 모두 37통이었다.
    뒷날 들으니 편지를 본 동포들은 모두 울었고, 구호품을 모으려 돌아다니면서도 울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프란체스카, 앞의 책)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