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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 6월28일 침략 사흘만에 서울로 진입한 북한군의 소련제 최신탱크들.
1950년 6월25일 일요일 아침, 이승만 대통령은 경복궁 경회루로 나갔다.
비가 올 듯 잔뜩 흐린 하늘 아래 일렁이는 연못 물결에 낚시대를 드리운 그는 눈을 감는다. 이승만의 낚시질은 반은 명상, 반은 기도였다. “주여, 이 나라를 구하소서. 적의 공습이 임박 하였나이다”
이승만은 6월 들어 부쩍 늘어난 북한의 평화공세가 공격직전의 허점 만드는 손자병법임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밤잠을 설치고 있다. 그것이 스탈린이 지령한 ‘3단계작전’의 시작임을 이승만인들 어찌 알겠는가.
김일성은 6월7일 남북 총선거를 논의하는 회담을 열자더니, 이를 거부하자 10일 조만식과 간첩 김삼룡-이주하를 교환하자고 평양방송으로 발표했다. 19일엔 또 남북한 국회가 평화통일 회담을 열자고 선전공세를 폈다. 이것도 거부하니 38선 아래 서해 옹진반도를 공격해왔다. 분노한 국군 월남청년부대가 해주를 보복 반격하자 다른 쪽 곳곳에서 산발적인 도발을 계속하고 있다.
‘미군이 주둔해 있다면 북한이 이럴 수는 없을 것을...’ 싸워야지, 맨주먹 돌멩이라도 들고 적을 물리치자고 얼마나 국민에게 호소했던가. 이승만은 눈을 감고 하나님께 해결책을 간구한다.
그때 비서가 뛰어왔다. “각하, 경무대서 국방장관이 급히 뵙자고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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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5발발 일주일전 한국을 방문한 미국무성 덜레스가 한국전선을 시찰하고 있다. 그 옆에 신성모 국방장관.(1950.6.18)
◆맥아더에 호통...“내 말 안 들어 전쟁 났으니 어서 이 나라를 구하라”
신성모 국방장관의 보고는 충격적이다. 일요일 첫 새벽 38선 전면 공격이 시작되고 벌써 개성이 함락되었으며 중부에선 춘천까지 북한 탱크가 몰려오고 있다는 것, 그러나 신장관은 국군이 물리칠 테니 ”각하께선 크게 염려하지 마시라“고 했다.
”탱크가 없는데 어떻게 물리쳐? 탱크가...비행기가...“ 이승만은 신음하듯 소리친다.
”무초 대사를 불러라“ 달려온 미국 대사에게 이승만은 말했다.
”이 전쟁이 제2의 사라예보의 총성이 되어서도 안되지만, 38선을 적이 없앴으니 이번에 미국이 한국문제를 영구적으로 해결할 기회가 되어야합니다“며 남북통일 의지를 밝힌다. (무초, 국무장관에 보고: The Ambassador in Korea(Muccio) to the Seretary of State, FRUS Ⅵ Korea, 1950. 남시욱, 앞의 책)
요컨대, 1차 세계대전처럼 확전되는 일은 막되 ”미국이 분단시킨 한반도를 미국이 통일시켜야 할 의무가 있다“고 평소 주장해온 이승만의 지론을 재확인하며, 스탈린이 시작한 침략전쟁을 숙원의 ’자유통일전쟁‘으로 바꾸겠다는 결의을 보여준 것이었다.
국무회의를 열어 비상계엄등 대책을 수립하는 이승만은 미국주재 장면 대사에게 전화, 백악관과 국회를 직접 방문하여 긴급지원을 요청하라고 일일이 지시했다.
”장대사, 트루먼을 만나 따지시오. 결재했다는 1천만 달러 무기는 어찌된 것이냐고...“
밤새 뒤척이던 이승만은 26일 새벽 도쿄의 맥아더 장군에게 전화를 건다.
전속부관이 받더니 장군을 깨울 수 없어 나중에 걸겠다고 한다. 이승만이 소리친다.
”지금 여기 미국인들이 공산군에게 죽어갈 터이니 장군을 잘 재우시오“
프란체스카는 놀라서 수화기를 막았다. 맥아더가 전화에 나오자 이승만은 침착하게 다구친다..
”장군, 이 사태가 누구의 책임이오? 내가 그렇게 경고했거늘, 미국이 내 말을 안 들어서 전쟁이 났소. 어서 와서 이 나라를 구하시오“
맥아더는 이승만이 요구하는 무기, 무스탕 전투기 10대, 곡사포 72문, 바주카포 등을 즉시 보내겠노라고 약속하고 극동군사령부 참모장 히키(Doyle O. Hicky) 소장에게 지시하였다. 맥아더는 본국의 참전결정이나 지시도 받기 전에 이승만에 대한 예전의 약속을 이행하였다.
”미국이 내말을 안 들어서 전쟁 났다“는 이승만의 말은 ’미군철수 반대‘와 ’한미 안보동맹 체결‘ 요구를 미국이 차버렸음을 비판한 것, 트루먼과 애치슨을 겨냥한 칼날이다.
이승만은 오후에 육군본부와 치안국 상황실에 나가 돌아보며 전황을 체크한다.
”젠장, 비행기가 없으니 적의 탱크를 뭘로 막나...전투기...탱크...탱크 말이야...“
이승만은 그날로 국회에서 미국원조를 촉구하는 결의안을 채택케 하여 장면대사에게 보내고 트루먼을 빨리 만나라 지시했다. (프란체스카 [프란체스카의 난중일기] 기파랑,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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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말휴가중 북한군의 침략을 보고받은 트루먼 미국대통령(중앙)이 급거 위성턴으로 귀환하는 모습, 오른쪽은 애치슨 국무장관.
★”개자식들” 분노한 트루먼, 참전 결정에 “38선고수’ 조건
트루먼 미국 대통령이 전쟁 급보를 받은 것도 밤10시, 토요일 주말이라 워싱턴 근교 매릴랜드의 자기 소유 헤어우드 농장(Harewood Farm)에서 쉴 때였다, 애치슨이 ”북한국의 전변 침략인데 소련이 조종하고 있다“고 말하자 트루먼의 분노가 터져 나왔다.
”개자식들(son of bitch), 무슨 일이 있어도 그들의 남진을 막아야 하오“
그 순간 트루먼의 머리는 돌았다. ’트루먼 독트린‘ 선언 후에도 동유럽을 다 먹어버린 스탈린, ’중국대륙을 잃은 대통령‘이란 미국민들의 무서운 목소리, 이렇게 뒷걸음질만 하다가 남한마저 빼앗기면 일본도 태평양도 위험하다. 뒤늦게 국제현실에 대한 눈이 떠진 것이다.
트루먼이 웬일인가? 소련과 북한의 침략 정보들을 2년이나 그토록 무시하더니 왜 이제야 욕설까지 하게 변했는가? 그는 뒷날 회고록에 이렇게 적었다. 「당시 나는 과거 히틀러, 무소리니, 일본인들이 하던 행동을 소련이 한국에서 벌이고 있다고 판단했다. 북한의 침략을 방관한다면 소련의 지시를 받는 공산국가들의 또 다른 침략행위를 고무하여 3차대전으로 확대될 것을 우려했다.」 (트루먼 회고록: [Harry S. Truman, Memoirs Ⅱ, 1946~52]. Time, 1955)
트루먼은 변한 게 아니라 ’판단‘이 너무 늦어버린 것이다. 충격을 받아야 두뇌가 깨나는 것은 일반적인 일, 이승만은 물론 자기참모들의 경고마저 외면해 온 것은 미국 지도자가 아니었다.
애치슨 국무장관은 트루먼에게 첫 보고를 끝낸 뒤 참모회의를 열었다. 유엔담당 차관보 히커슨(John Hickerson)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를 소집해 무력침공 중지를 결의하도록 건의, 애치슨이 이를 따랐다. 전화를 받은 유엔 사무총장 트뤼그베 리(노르웨이어: Trygve Halvdan Lie)가 외쳤다. ”오 마이 갓, 이건 유엔에 대한 전쟁이야!“
안보리는 그날 오후 2시에 열려 미국무부가 만든 「북한은 침략자, 38선 이북으로 즉각 철군」 결의안을 상정, 오후 6시에 9대0으로 채택한다. 한국시간 26일 아침7시, 전쟁난지 27시간 만이다. 소련은 중공의 유엔 가입을 요구하며 계속 결석 중이었다.
워싱턴에 돌아온 트루먼은 안보리 결의안 보고를 듣는 자리에서 ”유엔을 망칠 수 없어“를 반복했다. 이때 이승만은 장면에게 전화로 거듭 지시하고 재촉한다. 장면은 백악관에 들어와 트루먼을 만나 ”지금 이승만 대통령 전화를 세 차례나 받았다“면서 대포, 탱크, 항공기 원조를 요청한다. 트루먼은 무기를 최대한 빨리 한국에 보내도록 지시하였다.
그러나 뒤늦게 한국원조를 서두는 트루먼의 의식세계는 ’미국 우선‘의 미국 대통령이다. 그는 참전에 앞서 중요한 원칙을 정한다. 미국이 참전하는 것이 아니라 유엔이 참전하는 형식을 취해야 한다. 그것이 미국의 국가이익을 지키는 최선의 길이기 때문이다.
첫째, 미국의 참전은 어디까지나 ’유엔의 이름‘으로 파병해야 한다. 미군이 아니라 유엔군의 일원이 되어야 다. 의회의 선전포고는 시간이 걸리므로 신속한 지원이 가능하고, 특히 파병의 정당성 확보와 전쟁책임을 분산 회피하는 결정인 것이다.
여기서 트루먼의 의도와 무관하게 이승만의 ’건국외교전략‘이 빛을 발한다. 유엔 사무총장의 ”유엔에 대한 전쟁“이란 분노와, 트루먼의 ”유엔을 망칠수 없어“란 결의에 그 뜻이 담겨있다.
유엔 결의를 통하여 유엔이 세운 나라 대한민국, 그 한국에 대한 도발과 파괴는 곧 유엔에 대한 도전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유엔 창설 때부터 유엔회원국이 되려고 뛰었던 이승만의 외교적 노림수였다. 아시아 붉은 대륙 끝자락에 조그만 섬 같은 자유민주국을 누가 유엔 말고 누가 지켜줄수 있으랴. 그 유엔은 바로 이승만이 붙잡은 미국이 기둥이다.
둘째, 트루먼은 미군 참전 조건으로 또 하나의 ’경계선 말뚝‘을 박는다. 다름 아닌 ’원상회복‘이다. 29일 백악관 안보회의에서 트루먼은 거듭 강조한다. ”우리는 소련과 전쟁하는 듯한 약간의 암시도 불허한다. 북한군을 38선 이북으로 철수시키는 모든 조치를 해야하지 다른 상황을 걱정할 정도로 한국에 깊이 개입해선 안된다. 우리 작전은 어디까지나 ’국경선‘(38선)을 회복하는 것임을 명확히 하라“ 육군 작전 범위는 극히 제한하고 해-공군만 군사목표를 공격할 것, 38선 이북을 공격할 때도 만주나 시베리아 국경은 절대로 피할 것 등이었다. 중공군과 소련군의 참전을 막기 위해서다. 38선 원상회복...이때 이승만이 이런 사실을 알았다면 뭐라고 말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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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폭파된 한강 인도교(왼쪽) 아래 설치된 부교를 건너는 사람들. 이 부교는 9.28서울탈환때 가설된 것으로 판명됨. 오른쪽 사진은 폭파된 한강 철교 아래에 임시잔교를 만들어 건너는 모습. 촬영시기 불명. (사진출처: 신기철 지음 [국민은 적이 아니다] 2014)
◆”서울 사수“ 이승만...피난길 기차에서 ’기관차를 서울로 돌려라”
프란체스카는 밤낮으로 안절부절이다. 이승만이 피난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각하, 서울을 떠나셔야 합니다” 신성모 국방이 말하자 “안돼, 서울을 사수해! 난 떠날 수 없어!” 이승만은 방문을 쾅 닫고 들어가 버렸다.
“전쟁 중에 국가원수에게 불행한 일이 생기면 더 큰 혼란이 생긴다고 걱정들 합니다. 그렇게 되면 국가의 존속 문제가...” 따라 들어간 프란체스카의 말에 이승만의 얼굴이 경련한다.
“뭐야? 누가 그따위 소리를 해? 조병옥? 이기붕? 나는 안 떠난다구!” 대통령을 설득할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그때 경찰간부 한명이 들어와 ‘적의 탱크부대가 청량리까지 들어왔다’는 메모를 전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은 대통령을 설득하기 위한 꾀였다.
27일 새벽 3시30분, 드디어 남행열차를 타기로 결정되었다. 비서들이 짐을 꾸린다. 금고를 탈탈 털어도 5만원이 전부다. 돈은 황규면 비서에게 맡기고 경호관들과 4명이 서울역에서 기차를 탔다. 차창이 깨지고 좌석의 스프링이 튀어나온 객차 2량을 연결한 3등열차였다.
“아니, 여기가 어디야?” 말없이 침통하던 이승만이 벌떡 일어났다. 11시40분 대구역이다.
“여기까지 오는게 아니었는데...내 평생 처음 판단을 잘못했어. 기관차를 돌려라. 서울로 돌아가자” 이승만이 쏘아보는 눈길이 원망하는 것 같아 프란체스카는 보리차를 권했으나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간밤을 뜬 눈으로 새우고 아침식사도 제대로 못한 76세 대통령, “수원까지만 가면 자동차로 서울 들어갈 수 있겠지” 중얼거리는 얼굴은 창밖에 모를 심은 푸른 들판을 응시하고 있었다. 대전역에 도착했다. 승강장에 윤치영과 허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각하, 내리십시오. 서울은 빨갱이 수중에 들었습니다.”
이승만은 또 수원까지 가자고 했지만 내려야 했다.
충남도지사 관사에 들어갔을 때, 미 대사관의 드럼라이트 참사관이 달려왔다.
“대통령 각하, 좋은 뉴스가 왔습니다. 유엔 안보리가 북한 제재를 결의했고 트루먼 대통령이 해군-공군 출동과 무기원조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거 보십시오”
침통하던 이승만과 일행의 얼굴이 반가운 소식을 전하자 활짝 피어났다.
“이 기쁜 소식을 국민들에게 알려야지, 내가 방송을 해야겠어”
대전방송국 유병은 방송국장 대리를 불러 서울중앙방송국과 연결 시설을 마친 27일 저녁 9시, 이승만이 들뜬 음성으로 짧은 연설을 시작했다.
“지난 몇 달간 나는 미군의 군사 원조가 곧 올 것임을 단언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민주주의 국가가 그러한 원조 실현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립니다. 적군은 탱크, 전투기와 전함으로 서울에 다가오고 있는데, 우리 국군은 맞서 싸울 수단이 없다시피 합니다. 이 암울한 상황에 나는 도쿄와 워싱턴에 전화하여 상황을 설명했습니다. 마침내 맥아더 장군의 전보를 받게 되었습니다. 맥아더 장군은 우리에게 수많은 유능한 장교들과 군수 물자를 보내는 중입니다. 빠른 시일 내 도착할 것입니다. 나는 이 좋은 소식을 국민에게 전하고자 오늘 밤 이렇게 방송을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공산주의와 싸우기 위한 우리의 용기와 투지를 증명해 보였습니다. 모든 우방이 우리를 지지하고 있습니다. 나는 전선에서 싸우고 있는 모든 용감한 군경들에게 감사를 표합니다. 나는 공산주의자들이 과거의 실수를 바로잡고 대한민국에 대한 충성을 맹세한다면 용서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일깨워주고자 말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머지않아 처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 국민 모두가 그들을 민국(民國)의 충성스러운 시민이 되도록 가르치고 이끌어야 할 것입니다.” (Daily Report, No.125, Korea, June 28 1950, Records of the Central Intelligence Agency, Foreign Broadcast Information Service Daily Reports, 1941-1959, Box 330)
이와 같은 연설내용은 KBS에 남아있지 않다. 다만, 미국 CIA가 당시 운영하던 비밀조직 ‘해외방송감청부’ (Foreign Broadcast Information Service: FBIS)의 일일보고 리스트에 그 전문이 기록되어있다. 일본 오키나와 소재 FBIS는 당시 남북한과 중국-소련 방송을 24시간 모니터링하여 CIA에 보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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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강인도교의 폭파 닷새후, 옆의 한강철교(왼쪽다리)가 맥아더의 지시에 따라 미폭격기에 폭파되는 순간(1950.7.3).
▶이른바 ‘런승만’ 비난 막전막후▶
“서울 시민들을 버리고 대통령이 저 혼자 살기 위해 먼저 도망갔다“
”피난민이 다리를 건너는데 한강 인도교를 폭파하여 8백명 넘게 죽었다“
”국민 여러분 안심하라는 방송을 하여 피난 안간 시민들이 공산군에게 당했다“
언제부터인가 이런 말들이 만들어져 이승만을 공격해 왔고, 인터넷의 보급과 함께 ‘런승만’이란 밈(meme)까지 유행하고 있다. ‘런’은 영어 ‘run’(도망치다), 특히 SNS를 애용하는 젊은이들 사이에 ‘기만’과 ‘정신승리’를 풍자하는 메타포(metaphor:은유:隱喩)처럼 동영상, 숏폼 등 갖가지 형태로 사용되어왔다. 당시의 상황이나 역사적 진실에는 눈감는 대중(mass) 특유의 집단심리, 왜곡된 역사를 교육받은 대중문화 현상이랄까. 그렇게 이승만의 역사는 해방 후부터 남북한에서 이런저런 ‘누명’을 씌워 조롱거리로 농락당하였다.
왜 그랬을까? 이승만이기 때문이다. 이승만을 격하 매장시켜야 대한민국의 정체성-정통성이 파괴되고, 소련의 위성국이던 북한의 정통성을 ‘민주국’으로 위장, 살려야하기 때문이다.
북한만이 아니었다. 사실은 남한의 야당들이나 언론과 지식인들, 즉 이승만 비판세력이 한국국민들에게 더더욱 강력한 영향력과 호소력을 발휘하였고, 좌익에 장악된 교실과 방송들에서 지금도 ‘부동의 교과서‘처럼 입시문제까지 지배하고 있는 판이다.
◉죽느냐 잡히느냐=전쟁에서 승리의 목표를 달성하는 데에 가장 효과적인 전과가 상대국 ‘지도자의 죽음’ 또는 ‘포로’로 잡는 일이다. 세계전쟁사가 보여주는 지도자의 안전확보가 전쟁지도의 핵심이다. 평화시에도 적국의 지도자를 중상모략 선전하여 무력화시키는 것이 전략의 상식 아닌가.
스탈린과 김일성의 남한 공산화작전에서 ”이승만을 죽이고 김구를 이용“하는 작업은 해방 이듬해 북한 단독정권이 수립된 1946년의 ‘민족통일전선’ 공작부터였다. 여기서 긴 역사를 설명할 겨를은 없다. 대표적 사례가 김구를 포섭한 김일성이 남북연석회의를 열고 김구-김규식과 함께 ‘민족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하고, 이를 들고 온 김구가 대한민국 건국을 반대하고 건국후까지 김일성과 남북통일정부를 세우자며 투쟁한 사실이다.
당시 북한과 친북세력의 선전선동이 이승만은 매국노, 친일파, 미국의 앞잡이였다.
6.25 무력통일 침공을 감행한 그들은 전쟁 중에도 이승만은 ”서울시민을 버리고 혼자 도망친 비겁한 미제국주의 앞잡이”로 매도하였다. 이승만을 잡지 못한 좌익의 선전술이다.
◉이승만의 ‘서울 72시간’ 전쟁지도=당시 대통령관저 경무대는 너무나 허술하게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국방부에서 장갑차 2대를 배치하였으나 이것마저 전선으로 보내야 할 정도였다. 경찰 몇 명이 지키는 경무대, 고개 넘어 서대문 형무소와 마포 형무소엔 공산당 죄수들이 3천여명이나 갇혀있었다. 이들이 탈옥하여 습격한다면 막을 길이 없다. 또한 북한 전투기는 서울 상공에 출몰 폭격을 감행하는 중이다. 그런데도 이승만은 경호문제에 관한 말은 한마디도 없이 ‘서울 사수’를 외치며 전쟁초기에 반드시 해야 할 일들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27일 새벽 피난 기차를 탈 때가지 72시간동안 이승만 대통령은 전쟁목표 수립, 미국과 유엔참전을 위한 전시외교, 국군에 시급한 무기 및 탄약요청, 전시 치안·사법·경제·교통 등에 대한 제반조치, 육군본부와 치안국을 순방하며 전황 파악 등 전쟁지도를 태연하게 수행하였다. 이승만 만이 할 수 있는 일들을 다 하고서야 각료들의 피난 독촉에 응했던 대통령이다. (남정옥 [이승만대통령과 6.25전쟁] 이담북스, 2910)
이런 사실을 외면한채 “임진왜란때 도망간 선조”에 빗대는 좌익들은 국군이 38선을 넘자 압록강을 넘어 만주 통화(通化)까지 도망친 김일성을 ‘런일성’이라 하지 않는다. 김일성은 38선에서 200㎞나 떨어진 평양도 무서워서 버렸고, 아들 김정일과 가족을 일찌감치 만주 심양(瀋陽)으로 피신시켰다.
◉한강인도교 폭파=당시 국방장관 채병덕 주도로 실행한 후퇴작전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소련제 최신 탱크부대를 막을 길 없는 국군, 탱크는커녕 총알조차 부족한 군대가 서울에 진입한 북한 탱크부대를 무슨 수로 막겠는가. 한강다리 끊어서 ‘괴물 탱크부대’의 남진을 지연시킨 극히 상식적인 조치였다.
문제는 ‘성급한 폭파’ 시비다. 국방부 전사를 보면 인도교에 피난민이 없는 시간, 즉 6월28일 새벽 2시반을 택하였고 폭파에 앞서 피난민들에게도 ‘폭파’를 예고하며 다리 진입을 막았다고 한다. 시민들의 희생보다 군경 77명 전사가 전부라는 주장이 전쟁사에 기록되어 있다.
당시 폭파 대원이었던 이창복 중위의 증언은 이렇다. “28일 새벽 2시경 칠흑 같은 밤이었고 비가 내렸어요. 폭파 당시 교량 양측에 1개 분대 정도의 공병대를 배치, 인마(人馬)와 차량의 통행을 저지시키려 했으나 당시 동원한 병력이 부족해 공포까지 쏘았으나 저지하기 어려웠어요.”
그래서 800여명 사망설이 나왔다. 그는 이에 대해 말한다. “다리가 끊어지고 수도관이 터져 물이 콸콸 쏟아졌고, 통신선로에 불이 붙었습니다. 사람이 얼마나 죽었는지 알 수 없고, 그날 새벽 다리 밑에 시체가 둥둥 떠 있거나 하는 광경은 없었어요.” ([월간조선] 2023, 7월호).
800여명 사망설의 근거는 찾을 길 없다. 사망자가 그렇게 많다면 부상자는 더 많을 수 밖에 없는데 한강폭파 부상자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당시에도 지금까지도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쟁점은 공산군에 의한 납북자중 국회의원 12명의 유가족이 국가보상을 청구한 소송이다. 한강교를 예고 없이 일찍 폭파해 피납되었으니 국가가 책임지라는 것, 그러나 판결은 ‘전원 청구 기각’ 패소로 끝났다.
한강대교 폭파의 군사적 효과를 강조하는 평가를 들어보자.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남정옥(南廷屋, 현 박정희대통령기념관 도서연구실장)은 “전쟁은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영역이다. 북한군 전차가 서울 시내로 들어온 뒤에 폭파했어야 한다는 주장은 군사작전을 모르는 말”이라 단언한다. “한강 방어선의 최대 공로자는 인도교 절단이다. 북한군의 도강전 방어선을 6일간이나 지탱해 주었고, 그 사이 6월 29일 맥아더의 한강전선 시찰이 이뤄졌으며 7월 1일 미지상군 참전이 가능했다. 그만큼 시간을 벌어준 성공적 작전이다.” 시민 개개인의 형편을 살필 겨를이 없는 전쟁은 군에 맡길 수밖에 없다는 지극히 당연한 종합적 관찰이다.
끊어진 한강 인도교 옆의 기차용 철교는 맥아더의 한강전선 시찰 뒤 7월3일 미공군 폭격기가 폭파시켜 적의 기차이용 진로를 완전 차단시킨다.
◉외국 기자들의 증언=그날 새벽 한강 인도교 폭파 현장에서 직접 파편을 맞고 지켜본 미국 종군기자 3명은 생생한 증언을 신문기사로 남겨놓았다. 그들은 [뉴욕타임즈] 특파원 버튼 크레인(Burton Crane, 1901-1963), [타임]지와 [라이프] 특파원 프랑크 기브니(Frank Gibney, 1924-2006), [시카고데일리뉴스]의 카이스 비치(Keyes Beech, 1913-1990). 이들은 한강교폭파의 생생한 체엄자들로서 자기들의 미디어에 '특종' 르포 기사를 썼고 뒷날 저서에도 남긴다.
그들의 기사를 요약하면, 한강교 폭파 예고에 짚차를 함께타고 달려갔다가 다리 중간 중지도에서 엄청난 폭음과 함께 몸이 솟구쳐 파편에 안경이 깨지고 얼굴에 부상을 당했지만 목숨은 무사하였다. 왜냐하면 장병들을 실은 군트럭 바로 뒤에 있었기 때문이다.
폭파된 다리부분은 중지도 남단 두개의 상판이었다. 엄청난 피란민 인파도 중지도에서 헌병들이 통행을 제지시켜 더 가지 못한 채였던 것이다.
따라서 폭파의 피해자들은 다리를 건널 수 있었던 군인, 또는 경찰수송차였고, 그 차량이 미처 건너기 전에 다리가 폭파되었으므로 사상자들은 군인 또는 경찰들 뿐이었다는 이야기이다. (송재윤 [슬픈 중국] 한강다리 폭파사건의 진실, [조선일보] 2024.3.23~4.6까지 3회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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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시가지로 진입하는 북한인민군. (1950.6.28)
◉이승만의 방송 시비=“국민여러분 안심하십시오. 서울을 사수할 것이니 피난가지 마십시오” 이승만을 중상모략하는 이런 말은 이승만의 연설에 분명히 나오지 않는다. 피난지 대전에서 이런 말로 서울시민을 속여 죽게 만들 대통령이 어디 있겠는가.
앞에서 본대로 미CIA 기록엔 오직 “맥아더와 미국이 도와준다니 국군은 잘 싸우라”는 말과, 공산당은 자수하라는 권유뿐이었다.
문제는 아직 서울이 함락되기 전인지라 국방부가 전공(戰功)을 과시하려는 내용들이 이승만의 연설 앞뒤에 붙어 방송됨으로써 전체적으로 ‘국민 안심’이란 느낌이 형성된 착시현상이다. 게다가 미국 참전 소식에 신이 난 국방부는 이승만 대통령의 연설을 미국 원조의 증거물로 몇 번이고 되풀이 방송했던 게 문제였다. 하지만 북한군이 방송국을 점령할 때 방송책임자가 녹음을 끄지 않고 피신해서 반복 방송되었다는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니었다.
◉이승만, 무초에게 권총 뽑다=‘런승만’을 조작한 좌익들은 다음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까. 8월14일 대구가 공산군에게 함락될 위기에 빠졌을 때 무초 미국대사가 달려와 이승만에게 “제주도나 괌(Guam)으로 피신하여 망명정부를 세워야한다”고 주장할 때 이승만 대통령은 권총을 뽑아들었다. “나는 한 발짝도 한반도에서 떠나지 않겠다” 얼굴이 창백해진 무초에게 권총을 흔들면서 단호하게 버티는 이승만, 이 장면 설명은 다음 장으로 미룬다.
이렇게 ‘비겁한 도망자 이승만’을 조작하기 위해 한강대교 폭파와 미국원조 뉴스 방송까지 한세트로 묶어 허위선전선동의 설득력을 높인 좌익의 대중조작 기법은 아직까지 그 교묘한 심리적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교육자나 학자들이라면 역사의 팩트(fact)를 연구하여 국민과 미래세대의 잘못된 인식을 바로 잡아주진 못할망정 그들이 역사조작에 앞장서 왔던게 한국의 풍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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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만 대통령이 도쿄에서 날아온 맥아더 장군을 영접하는 모습.
◆맥아더, 한강전선 시찰...병사와의 대화...미육군 긴급파견 요구
6월29일 이름 아침 6시 비가 내리는 수원 비행장에 맥아더의 전용기 바탄(Bataan)호가 내려앉았다. 맥아더 일행은 전방지휘소 수원 농대 농업시험장로 달려갔다. 기다리고 있던 이승만이 기쁨에 넘친 얼굴로 얼싸안았다. 다음 순간, 이승만이 말했다.
“장군, 장군 구두가 자라나는 모를 밟고 있소” 못자리를 밟고 서 있던 맥아더가 놀란다.
“몰랐습니다. 미안합니다” 맥아더가 웃으며 이승만과 함께 브리핑실로 향했다.
미국과 한국군의 보고를 받은 맥아더는 한강 전선으로 차를 몰았다. 나지막한 고지에 오르니 북한군이 점령한 강북 서울과 폭파된 한강교가 한눈에 들어왔다. 혼성 수도사단 제8연대 제1대대 진지로 간 맥아더는 잠시 깊은 생각에 잠겼다.
한강 변에선 무장도 없는 한국 병사들이 제방을 따라 적기의 공습을 무릅쓰고 열심히 호를 파고 있었다. 서울을 사수하라는 명을 받고 수도 방어선을 구축하는 참이었다.
이때 맥아더가 한국군 병사와 대화를 나누었다는 기록이 맥아더의 회고록에 전해진다. 다음은 당시 실제 대화했던 한국군 병사 신동수의 증언을 직접 채취한 장순휘(전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연구위원)이 정리한 문답 요약이다. (장순휘 [6.25 이야기]. 천지일보, 2020.6.25.)
맥아더 “자네는 언제까지 그 호 속에 있을 것인가?”
국군 “옛! 군인은 명령에 따를 뿐입니다. 철수 명령이 있을 때까지 이곳을 지킬 것입니다”
맥아더 “그 명령이 없을 경우엔 어떻게 할 것인가?”
국군 “죽는 순간까지 여기를 지키며 싸우겠습니다”
맥아더 “오, 장하네! 다른 병사들도 그런 생각인가?”
국군 “그렇습니다. 장군님!”
맥아더 “훌륭하다! 여기서 자네 같은 병사를 만날 줄 몰랐네. 지금 소원이 무엇인가?”
군군 “우리는 지금 맨주먹입니다. 탱크와 대포를 까부술 무기와 탄약을 주십시오”
맥아더 “통역장교, 이 용감한 병사에게 전하시오. 내가 도쿄로 돌아가는 즉시 지원군을 보낼 것이라고, 그때까지 용기를 잃지 말고 잘 싸우라고.”
맥아더는 한국군 병사의 죽음을 초월한 전투정신과 애국심을 보자 이런 나라는 망하지 않는다며 감명을 받았다고 적어놓았다. 그때 한강변에서 ‘인천상륙작전’을 구상했다고 회상한다.([맥아더 회고록] 1964)
도쿄로 돌아간 맥아더는 30일 본국 합참에 “지상군 절대필요”를 보고했다. 동시에 육참총장 콜린스 대장에게 “시간이 중요하다”며 미군의 긴급투입을 재촉하였다. 이에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가 요청한 1개연대 출동을 승인하고, 추가로 2개 사단의 투입과 북한 해상봉쇄를 결재하면서 세계에 미 지상군 참전 사실을 공식 발표했다.
같은 날 오후엔 유엔안보리에 미국참전을 보고했고, 유엔 회원국 59개국 가운데 33개국이 안보리 결의안을 지지하고 나서, 유엔 연합군이 결성되기에 이른다.
맥아더는 트루먼의 승인이 나자 즉각 미 제8군사령관 워커(Richard L. Walker) 중장에게 제24사단 파견을 명령했고, 24사단장 딘(William F. Dean) 소장은 스미스(Charles B. Smith) 중령의 ‘스미스 특수부대’(TF Smith)를 편성했다. 스미스부대는 일본 기지를 떠나 7월 1일 아침 8시 부산에 도착하여 부산시민의 환영을 받았다.
그리고 7월5일 오산 북쪽에서 북한군과 최초의 전투를 벌인 전쟁이 유명한 ‘죽미령전투’이다.
그러나 어쩌랴. 북한군에 대해 무지했던 미군은 돌진하는 소련제 T-34전차들에 속수무책, 병력 440명중 150명이 전사 실종, 모든 무기를 적에게 내준 채 후퇴하고 말았다.
한국에 긴급 파견된 미군은 초년병들이 많았다. 2차대전 참전병력은 대폭 감축하였고 신병들은 훈련도 부족하고 한국에 대한 교육도 전혀 안된 상태로 투입된 것이었다. 이승만은 그래서 한국 땅을 잘 알고 애국심 넘치는 군군에게 미군과 똑같은 무기를 제공하면 승리할 수 있다고 되풀이 애원하였는데 트루먼 정부는 대답만 할뿐 행동이 느리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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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5전쟁중 틈만 나면 군부대를 찾아 위로와 용기를 북돋아준 이승만 대통령.
◆대구 이승만, 미국에 “총을 달라” 수없이 간청...밤마다 권총 놓고 기도
수원 오산 지역을 뚫고 대전으로 몰려오는 북한군에 쫓긴 이승만 일행은 목포로 피신하여 배를 타고 부산에 상륙한다. “황비서, 대구로 가겠네. 기차를 준비하게” 이승만은 황규면 비서에게 지시하여 유리창에 총알구멍이 숭숭 뚫린 상처투성이 열차를 타고 북상, 대구에 도착하여 조재천(曺在千,1912~1970) 경북도지사 관사에 자리를 잡았다.
대구의 더위는 지독하다. 이승만은 뒷마당의 펌프를 틀더니 지하수를 벌컥벌컥 들이키는 것이었다. 프란체스카는 마침내 몸살이 나버렸다.
임시 경무대가 된 도지사 관저에는 날마다 70여명이 북적거린다. 대통령 부부를 비롯, 각료들, 국회의원들, 경호원들, 군 장성들, 미 대사관 직원들, 가족들과 헤어진 정부 관료들....조 지사 부인은 대식구를 먹여 살리느라 눈 코 뜰 새가 없다.
“우리 계란은 날로 먹읍시다” 이승만이 프란체스카에게 속삭였다. 그때부터 대통령 부부가 날계란을 먹자 다른 사람들도 알아채고 따라왔다.
한술 더 떠서 이승만은 매끼니 반찬을 3가지로 줄이라 제한시켰다. 전시 피난생활의 검소화는 물론, 도지사 부인의 일손을 덜어준 자상한 남자 대통령이다.
만75세 이승만은 식욕이 왕성했다. 피난길에도 뭐든지 언제든지 잘 먹었다. 끼니마다 밥도 반찬도 남김없이 싹 비워버렸다. 이승만은 어느 날 식량을 아끼자며 점심을 삶은 감자나 수제비로 바꾸라고 지시하였다.
오랜 망명생활에 객지를 떠돌던 가난한 독립운동가는 사과 한 알로 끼니를 때우거나 생일에 굶은 적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 시절에 단련된 탓만은 아니다. 독실한 개신교의 신앙과 불굴의 자유신념으로 뭉쳐진 개척자의 용기와 지혜, 고난을 이길 줄 알고 곤경의 나라와 국민을 격려하며 이끌고 나갈 줄 아는 전쟁 리더십, 날마다 나가는 군부대 시찰과 민정시찰 길에 떨이 복숭아를 한보따리 사와서 나누어 먹으며 ‘맛있다’를 연발하는 노대통령, 건빵으로 식사를 대신할 때도 금방 봉지를 비우며 “마미, 맛있지?”를 되묻곤 했다. (프란체스카, 앞의 책)
◉장제스의 파병제의 거부=7월11일 자유중국(대만) 대사가 이승만을 찾아와 “중국군 2만 내지 2만5천명을 파병”하여 돕겠다는 장제스 총통의 참전의사를 전하였다. 이승만은 주저없이 그 자리에서 정중하게 거절하는 것이었다. 놀란 프란체스카가 왜 그랬냐고 묻자 이승만이 퉁명스럽게 대답하였다. “중국 공산군을 내손으로 불러들일 수는 없잖소!”
중공군 참전 위험! 무르익은 본능적 국제정치 통찰력이 정답을 툭툭 뱉는 세계전략가의 두뇌회전이다. 그러나 언젠가 중공군이 참전할지 모른다. 그 전에 대규모 미군이 빨리 들어와 국군과 함께 남북통일을 완성해야 할 터인데 이승만은 입술이 타고 잠이 오지 않았다.
◉미군의 패전 거듭=대구에 도착하자 무초 대사의 첫 보고는 미군의 ‘대전 포기’였다. 이승만은 버럭 화를 냈다. “미군은 왜 후퇴만 하는 것이오? 우리에게 무기를 주시오, 무기를!”
무초는 작전상 불가피하다는 변명을 늘어놓았다. 이승만은 “그놈의 작전상, 작전상, 당신들은 그 말밖에 할 말이 없는 거요? 어서 빨리 우리 국군에게 무기를 달란 말이오!” 소리소리 치며 얼굴 근육을 실룩이는 것이었다. 흥분하면 떨리는 얼굴, 청년시절 한성감옥에서 잔혹한 고문을 당한 후유증이다.
날이 갈수록 미군의 후퇴 소식은 사방에서 들려왔다. 김천에서 남원에서 목포에서, 그리고 동해안에서 미군을 밀고 들어오는 북한군은 낙동강에 육박하고 있다. 밤이면 곳곳에서 공산게릴라들이 출몰하여 국군을 기습하는 일이 늘어났다. 유엔군이 우세한 것은 공군뿐인데 장마철 날씨마저 제공권을 도와주지 않았다.
◉대구를 지키는 이유=미 대사관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빨리 부산으로 내려가는 것이 좋겠다는 말을 자꾸 내놓는다. 그때마다 이승만은 국민이 동요할까봐 안내려간다고 답변했지만, 미군이 대구 이남으로 후퇴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 속마음이었다.
“마미, 내가 부산으로 안가는 이유는 밀리기만 하는 미군을 믿을 수 없어서야. 내가 대구에 버티고 있으니까 싸우는 거지, 내가 떠나면 언제 대구를 내놓을지 모르는 사람들이거든. 낙동강이 우리 최후의 방어선이자 생명선이야.” 이승만은 발을 굴렀다.
◉권총과 기도=대전에 머물 때부터 이승만은 침실 머리맡에 모젤 권총 한 자루를 놓고 기도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최후의 순간 공산당 서너 놈을 쏜 뒤에 우리 둘을 하나님 곁으로 데려다 줄 티켓이야” 이승만은 프란체스카의 손목을 꼭 잡으며 기도를 한다. 그때부터 프란체스카는 “우리 천국행 티켓은 잘 있지요?” 물었고 이승만은 “그럼 잘 있지” 크게 웃었다. 오늘 밤에도 이승만은 자기 전에 차가운 권총을 어루만지며 간절한 기도를 올린다.
“오, 하나님! 우리 아이들(국군)을 적의 무자비한 포탄 속에서 보고해 주시고 죽음의 고통을 덜어 주소서. 총이 없는 아이들은 오직 나라를 지키겠다는 신념 만으로 싸우고 있습니다. 당신의 아이들은 장하지만 희생이 너무 크옵니다. 하나님! 저는 지금 당신의 기적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대통령의 목소리는 울음소리로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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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비행장에 나온 무초대사, 이승만 대통령, 드럼라이트 참사관, 맥아더 참모 처치 장군(오른쪽부터)이 맥아더 장군의 도착을 기다리며 즉석회의를 하고 있다.
◆이승만, 트루먼에 보내는 편지로 무초와 이틀간 언쟁
다음은 [프란체스카의 난중일기] 7월18일자에 나오는 대목이다.
「대통령과 무초 대사는 어제에 이어 오늘도 언쟁을 벌였다. 이승만 대통령이 트루먼 대통령에게 보내는 서한 중에서 ‘우리 한국 국민은 공산군을 우리 본래의 국경선인 압록강과 두만강 이북으로 완전히 몰아낼 때까지 싸울 것을 다짐하고 있다’고 밝힌 부분을 무초 대사가 빼자고 요구하여 두 사람의 목소리가 높아진 것이다.
미국 대사관은 소련의 전쟁 개입이나 38선 문제에 대하여 한국 측이 언급하는 것을 꺼렸다. 그러나 미군 장성들은 한결같이 대통령의 압록강 이북 철퇴설을 지지하고 있었다.
트루먼 대통령에게 보내는 서한은 19일 사인되었다,. 무초 대사는 편지 내용을 전문으로 보내겠다고 했다, 우편은 시간이 너무 걸린다는 것이다. 대통령은 무초 대사의 말을 받아들이는 대신 편지 사본을 건네주고, 오리지널은 파우치 편으로 워싱턴 장면 대사에게 보냈다.」
여기서 보듯이 언쟁의 초점은 ‘공산군을 압록강 이북으로 철퇴’시키는 문제이다.
한국대통령과 미국 대사의 언쟁, 그것은 대한민국과 미국의 언쟁이다. 바로 위에서 설명한 트루먼의 참전 조건이자 목표 ‘유엔군은 38선을 회복하는 선에서 전쟁을 끝낸다’는 현상유지 방침, 그것이 이승만의 오래된 ‘남북통일 목표’와 정면충돌한 것이었다.
이것이 6.25전쟁 내내 이승만이 공산군과 싸우면서 ‘미국과의 전쟁’을 벌이게 되는 출발점이 된 것이었다. 그러면 그 편지 내용이 무엇이기에 그렇게 뜨거운지 읽어보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