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에 관한 열정이 화면에 흘러 넘쳤다옥중학교, 여학교, 남녀공학, 공대육성, 문맹퇴치 ···원자력 강국 청사진도 그가 그렸다인하공대는 그의 관심·사랑의 결정판
  • ▲ 1954년 인하공과대학 개교식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교기를 전달하고 있다.ⓒ인하대총동창회 연합뉴스
    ▲ 1954년 인하공과대학 개교식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교기를 전달하고 있다.ⓒ인하대총동창회 연합뉴스
    ■ 교육자 이승만

    영화 <건국전쟁>에는 하와이에서의 활동에 대한 증언이 많이 나온다.
    하와이는 이승만의 건국을 위한 독립운동의 전초기지로서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교육입국을 실천하고, 건국 후에 무상교육과 대학 설립 등 국민을 계몽시킨 교육정책을 펼친 장으로서도 매우 중요한 곳이다.
    이승만 대통령을 정치외교적으로 지원한 로버트 올리버 정치고문은 [이승만은 교육대통령이다]라고 부를 정도였다.

    ■ 썩어 문드러진 조선왕조

    19세기 말 조선의 경제적 빈곤과 사회불안으로 한반도를 떠나 만주 등지로 이주하는 이주민이 늘었다.
    만주의 비옥한 농토와 자연조건은 농업과 수렵 등 경제활동의 기회를 제공하였는데, 이곳에 정착한 한국인들은 한반도의 조선인과 달랐다.

    영국의 지리학자 이사벨라 비숍(Isabella Bishop)은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 (Korea and Her Neighbours)>(1897) 저서에서 이를 간파하고 다음과 같이 썼다.

    “조선은 관료의 탐욕과 착취로 빈곤한 국가가 된 것이며, 조선인의 부지런함과 성실함을 발휘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발전할 가능성이 높다.”

    1902년에 미국 하와이에서 이민을 모집하자, 많은 조선인들이 하와이로 이주했다.
    1902년 12월 최초의 한인 노동 이민단 121명이 인천항을 출발한 이래 1905년까지 7415명이 하와이로 갔고, 초기의 열악한 노동 환경을 이겨내며 정착하기에 이른다.
    1910년경에 하와이에는 4천여 명의 한인이 거주하여 미국 최대의 이민 거주지로 부상했다.
    한국인의 이민 역사, 독립운동에서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 교육의 힘을 믿은 이승만

    그런데 여기에 1913년 이승만 박사가 <한인기숙학교> 교장으로 부임하여 교육을 완전히 탈바꿈시켰다.
    이승만은 이미 조선 말기에 민족 계몽과 독립운동에서 교육의 중요성을 그 누구보다도 깨달은 선각자였다.
    1899년 1월 역모죄로 종신형을 선고받고 수감되었던 한성감옥에서 집필한 <독립정신>(1904)에서 이미 신학문 교육을 강조하고 있다.

    “신학문을 힘써야 한다...
    농업, 상업, 광산학, 기술 등을 배워야 한다.
    물건 제조하는 것이 몹시 긴급한 일이니, 다만 의복 한 가지만 보더라도, 천을 손으로 짜는 것보다는 기계로 짜는 것이 물건도 정교하고 값도 싸다.”고 썼다.

    더욱이 감옥에서도 옥중학교를 설립하여 죄수 교육과 선교를 했다.
    이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는 교욱의 중요성에 대해 이렇게 역설했다.
    “나라가 잘 되려면 먼저 백성이 깨어야 한다.
    백성을 깨우치려면 교육을 시켜야 하고 교육을 시키려면 학교가 있어야 한다.
    즉 학교는 사람을 만드는 곳이며 또한 나라를 만드는 곳이다.”
       -  <신학일보> (1904.11월)

    ■ 하와이는 교육입국의 전초기지

    이승만
    자신도 미국으로 건너가 <조지워싱턴대>에사 학사, <하버드대>에서 석사, <프린스턴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아, 당시의 조선인으로서는 최고의 교육을 받은 신지식인이 되었다.
    그는 많은 조선 청년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그의 영향으로 더 넓은 세계에서 교육받고자 하는 모델이 되었다.

    1919년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개최된 제1차 <대한인대표자 총회> (The First Congress)에서 <건국종지> (Aims and Aspirations of the Koreans)를 발표했다.
    여기에서도 교육은 한국인의 목표에서 으뜸의 자리를 차지한다.

    “무릇 개명진보(開明進步)하는 길은 대략 네 가지가 있다.
    하나는 학교를 세워 학문을 일으키는 것이요, 하나는 민회(民會)를 열어 토론을 장려하는 것이요, 하나는 널리 신문사를 설치하는 것이요, 하나는 도서관을 세우는 것이다...
    학교와 학원을 설립하는 것은 한 나라의 근본이자 만 가지 일의 시초이기 때문에 단연코 늦출 수 없다.”

    이승만의 하와이 교육 활동은 바로 이러한 그의 교육입국 정신을 실천한 장이다.
    하와이의 <한인기숙학교> 교장으로 취임하자 학교 명칭을 <한인중앙학원> (Korea Central School)으로 개명했다.
    이는 [하와이 군도에 있는 모든 한인학교의 중앙이 될 것]을 의미하며, 다른 지역에도 계속 학교를 세우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그러나 이 학교가 미국 감리교의 영향으로 설립한 학교로 [미국의 공교육을 받아 미국 시민이 되어야 한다]는 교육 방침이 강해지자 독자적인 학교 설립을 구상하여, 1915년 <한인여학원>을 설립하게 된다.

    이 학교를 통해, 특히 여성 교육에 선구적인 역할을 한 것이 놀랍다.
    당시 하와이의 이민 사회도 조선의 유교 전통을 여전히 따르며 여성을 차별하는 문화가 지배적일 때, 하와이의 여러 섬을 돌며 여성 교육을 역설하고 여학생을 모집했던 것이다.
    1918년에는 <한인여학원>을 남녀공학으로 확대하고 시설을 확장해 <한인기독학원>을 설립했다.
    <한인기독학원>은 교육과 종교활동을 통합하고, 한국인의 주체성을 학보하는 방침을 실천하였다.

    나중에 하와이 교육법이 개정되어, 공립학교 졸업만을 정식 학력으로 인정하게 되어 위기를 맞아 학생 수가 감소하는 어려움 속에서도 하와이 한인 사회의 지지로 1947년까지 유지되었다.
    그리고는 폐쇄 후 남은 부지조차 과학기술 교육을 전문적으로 하는 대학을 한국에 설립할 때 기금으로 활용된다.

    ■ 조선 말기 문맹률 99%, 그래서 망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어 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본격적인 교육입국 정책을 추진했다.
    가난한 국가 예산의 10% 이상을 교육에 투자하여 어려운 환경에서도 교육을 최우선으로 추진한 것은 2차 세계대전후 독립한 어느 나라에서도 보기 어려운 것이었다.

    1949년 <교육법>을 제정하여, 초등학생 의무교육을 실시했다.
    그리고 성인 대상의 문맹 퇴치운동을 전국적으로 실시하여, 1910년 99%, 1945년 78%였던 문맹률을 1959년에는 22%로 떨어뜨린 성과를 보였다.

    고등교육에도 힘써 대학 설립을 늘렸고, 특히 과학기술 교육을 중시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 기념사에서 이렇게 자신의 교육정책을 설명했다

    “이 정부에 결심하는 바는 국제통상과 공업발전을 우리 나라의 필요에 따라 발전시킬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민족의 생활정도를 상당히 향상시키려면, 모든 공업에 발전을 실시하여 우리 농장과 공장 소출을 외국에 수출하고 우리의 없는 물건은 수입해야 될 것입니다.
    그런즉 공장과 상업과 노동은 서로 떠날 수 없이 함께 병행불패(竝行不悖)해야만 될 것입니다.”

    ■ 6.25 전쟁중 원자력에 눈돌린 이승만

    과학기술 교육의 대표 사례로는 <인하공과대학> 설립과 서울대학교의 <미네소타 프로젝트>를 들 수 있다.
    <미네소타 프로젝트>는 1954년부터 3년간 농학, 공학, 의학 분야 교환교수 프로그램, 시설복구, 장비지원 등의 사업에 총 545만 1,000달러 지원받은 것이었다.

    또한 산업 발전과 경제 활동에 필수적인 에너지 확보를 위해 원자력 기술 도입을 추진하였다.
    1955년 <한미원자력협정>에 가조인하고, 1956년 <IAEA 헌장>에 서명하여 창립 회원국이 되었다.
    1958년에는 <인하공대>, <한양공대>에 국내 최초로 원자력공학과를 설치하였다.
    1959년 3월 <원자력연구소>를 설립하여, 지금 한국이 세계적인 원자력 강국이 되게 하는 초석을 마련하였다.

    ■ MIT 꿈꾸며 인하공대 설립, 전쟁중에

    특히 <인하공과대학> 설립은 이승만의 <독립협회> 운동부터 하와이 교육 계몽 운동, 과학기술 중시를 관통하는 교육입국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다.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전쟁이 여전히 진행중인 1952년에 대학 설립을 추진하였다.

    1953년 6월 <인하대학의 설립에 관하여> 특별담화문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공과대학 설립에 관한 자신의 의지를 이렇게 강하게 피력했다.

    <인하대학> 설립은 하와이 이민 50주년을 기념하고, 공과대학을 만들어 미국의 MIT와 같은 공과대학으로 발전시켜 자급자족한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대학의 명칭을 하와이 이민자가 출발한 인천의 <인>과 하와이의 <하>를 합쳐서 <인하대학>으로 정하고, 하와이 <한인기독학원> 부지를 매각한 13만 8,500달러를 종자돈으로 하여 인천시의 부지 제공 등으로 대학을 설립하였다.

    또한 빠듯한 국가 예산을 쪼개 과학기술 유학생을 선발하고, 군인들을 유학시켜 엘리트를 양성하였다.
    1954년 11월 기계학 기술 전공 유학생 100여명 선발하여 미국 유학을 보내면서, 이승만 대통령은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한다.

    “지금은 기계시대요 우리나라를 잘 건설해서 세계에 자랑할 만한 나라를 만들려면 기계학과 과학 배운 사람이 많이 생겨서 배운 것을 공헌해야만 할 것이니, 부지런히 연구 공부해서 시급히 돌아와 공헌하게 되기를 바라는 바이다”

    이승만교육 대통령이다.
  • ▲ 1979년 인하대 교내에 이승만 대통령 동상이 설치됐다.(왼쪽) 1984년 학생들이 강제로 동상을 철거했다. 이 동상은 현재 경기도 파주에 있는 (주)한진 자재창고에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인하대 연합뉴스
    ▲ 1979년 인하대 교내에 이승만 대통령 동상이 설치됐다.(왼쪽) 1984년 학생들이 강제로 동상을 철거했다. 이 동상은 현재 경기도 파주에 있는 (주)한진 자재창고에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인하대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