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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루먼 미국대통령과 마셜 국방장관(오른쪽). 가운데는 마셜의 한국전선 시찰을 보도한 조선일보 기사. 마셜은 당시 휴전을 반대하는 이승만 대통령을 만나지도 않고 한국을 떠나버렸다.
“대통령 재임시절 가장 유감스러운 것은 그 많은 희생를 치르고서도 한국을 통일시키지 못한 일이오. 의당히 마지막까지 싸워 한국 통일을 봤어야 했는데, 국제적인 반대여론이 적지 않아서 성취를 못했소. 이젠 노령이라 한국 통일을 보지 못하고 큰 짐을 지고 가게 될 것 같소” (중앙일보 [김종필 증언록 2] 미래엔, 2016)
이것은 은퇴노인 트루먼이 새파란 한국정치인 김종필에게 토로한 말이다.
1964년 6월 김종필은 한일국교정상화 협상의 주역으로 ‘한일회담’ 반대 시위사태에 휘말려 잠시 외유에 나섰던 길에, 트루먼의 고향 미국 미주리주 인디펜던스 시에 있는 트루먼기념도서관을 찾아가 대화를 나누었다.
‘한국 통일을 못 보고 큰 짐을 진채 간다’는 트루먼의 말은 이승만이 하와이에서 눈감는 순간까지 ‘남북통일은 어찌되느냐“며 날마다 눈물의 기도를 올리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두 대통령에게 ’한국통일‘은 차원이 다르다. “통일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던 한국인들의 피맺힌 절규보다 ’국제여론‘이 더 중요했던 트루먼, 약소민족의 통일을 가로막아 미국의 국가이익을 챙겼다지만, 이승만과 맥아더가 ’격멸‘을 원했던 중공-북한의 공산주의 세력을 살려주어 지금도 미국에 ’아시아의 큰 골치 덩이‘로 남겨놓았다.
이제 와서 ’유감‘이라고? 삶의 끝자락 80세 트루먼은 38세 김종필에게 그런 ’변명‘ 한마디로 역사의 죄를 털어버리려는 자기위안을 삼았던가.
그가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얼마나 달라질 수 있을까?
얼마든지 승리할 수 있는 6.25전쟁을 “영국이 휴전하라”니까 자진 포기하다시피 ’적과의 협상‘을 서둘렀던 유럽중심주의자 트루먼, 무엇이 ’진정한 승리’인지 공산주의도 냉전도 몰랐던 미국 우월주의자, 대한민국이란 약소국의 통일 따위는 백인강대국 소련 공산권과의 도박판에 조약돌만도 못한 걸림돌로 치부했던 인종주의적 패권주의자, 루즈벨트처럼 아시아 국가들의 땅을 스탈린에게 제 땅처럼 잘라주던 그 버릇이 어디 가랴. 그러므로 그토록 철저히 한국을 무시한 ’Korea Passing’--그 트루먼의 1951년 행태를 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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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공 격멸의 노래'를 공보처에서 제정 보급하도록 발표(동아일보 51.2.8)한 이승만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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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 가사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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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독립되려는 우리 조국에,
침략자 중공 오랑캐가
징치고 피리불며 밀려내려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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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대한의 아들 딸들아 일어나거라,
조국의 한치 땅도 더러운 발아래 짓밟힐가보냐,
무찌르자 쳐부시자 중공 오랑캐."
◆ 트루먼의 ‘코리아 패싱’...소련 상대 ‘휴전’ 물밑작업
모든 문제는 6.25전쟁 6개월째 12월초 트루먼-애틀리 회담에서 시작되었음을 앞에서 보았다. 인도등 영연방을 앞세워 강제적 휴전을 추진한 영국의 패권주의, 중공이 거부하자 주춤했던 트루먼의 ‘코리아 패싱’은 협상 상대를 소련으로 바꾸어 본격적인 물밑작업을 벌인다.
한국정부를 따돌린 일방적 휴전교섭, 그것을 처음 행동으로 보여준 것이 마셜 국방장관의 한국전선 방문이었다.
◉마셜의 이승만 무시=1951년 6월8일 갑자기 도쿄에 날아온 마셜은 상대하기 거북하던 맥아더 대신 임명한 유엔사령관 리지웨이를 동반, 한국전선 시찰에 나섰다. 겉으로는 미군을 독려하고 무력 증강을 위해서라고 했다. 그러나 당시 일본과 미국에서 나온 기사는 ‘엄청난 폭탄뉴스’를 예고해준다.
「...홀연 김포비행장에 도착한 마셜 장관은 제8군사령관 밴플리트 중장 안내로 자동차에 몸을 싣고 때마침 내리는 소낙비를 맞아가며 중서부전선 의정부 북방 깊숙이 38선 부근지대를 시찰하였다. 모 기지에서 그는 유엔군 장성들 및 한국군 제5816부대장 강문봉 소장으로부터 전황보고를 들은 다음 강소장에게 다음과 같은 격려사를 남기고 그곳을 떠났다.
“한국군이 용전감투하고 있는 상황은 워싱턴에서 잘 알고 있소. 앞으로도 더욱 분투하여 민주세계의 자유와 평화를 획득합시다...”
한국을 떠난 마셜 장관은 동일 오후 10시55분 동경 하네다 비행장에 도착, “내가 한국전선을 시찰한 것은 한국화평문제나 대일 강화조약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또 나는 리지웨이 장군에게 한국전쟁에 대한 새로운 지령을 가져온 것도 아니다.”라고 말하였다.
한편 다른 소식통에 의하면 마셜 장관은 한국전쟁에 대한 새로운 지령을 가지고 간 것으로 보고 있으며 9일 동경에서 리지웨이 대장과 회담할 때 신지령(新指令)에 대해 의견을 교환할 것이라고 한다. 또 워싱턴 소식통에 의하면, 마샬 장관은 한국전선을 시찰하기 전에 이미 리지웨이 장군에게 신지령을 전달했을지도 모른다고 한다.」 ([조선일보] 1951.6.10.일자)
‘신지령’이란 말은 오래전부터 떠돌던 ‘38선 정전(停戰)설’--믿고 싶지 않은 ‘낭설’로 치부하던 때, 바로 마셜 장관이 전쟁당사국 대한민국의 대통령 이승만에게는 사전 연락도 없이 와서 전선을 사찰하고는 이승만을 만나지도 않고 한국을 떠나버린 행동이다.
한국정부는 분노와 충격에 휩싸였다. 국제예의는 둘째 치고 ‘일방적 정전’ 가능성 때문이다.
하지만 일단 부글거리는 국민들의 ‘정전설’을 진화하는 정부 담화를 내고 변영태 외무장관이 12일 담화를 발표해야 했으며, 이승만 대통령도 잇따라 14일 성명을 발표하였다.
“전쟁을 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화평문제가 일어날 수 없다. 거짓 화평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어떠한 정전 협상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국제공산주의와는 타협이 있을 수 없다. 만약 한국에서 국제연합이 승리하지 못하면 평화가 아니라 아시아는 물론 구라파에서도 전쟁이 일어날 것이다. 한국 국민은 정전을 결사적으로 반대하고 오직 싸워야만 자유를 얻을 수 있으며 진정한 평화를 찾을 것임을 천명한다.” ([조선일보] 6.1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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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련의 휴전 제의에 반대한 이승만 대통령 성명.ⓒ조선DB
◉소련 유엔대표 말리크의 정전협상 제의=6월23일 유엔주재 소련 대표 말리크(Malik)가 라디오로 ‘평화의 대가’라는 연설로써 ‘휴전 협상’을 제안한다. “소련은 조선전쟁의 평화적 해결을 원하며 그 첫 걸음으로 교전 쌍방이 회담을 열어 무력사용 중지, 즉 정전(cease-fire)을 하고 양측 군대를 38선으로 철수하는 것”이라며 “평화를 위해서는 이만한 대가를 치러야한다”고 했다. 이것은 5월초부터 소련과 미국이 은밀히 추진한 교섭을 스탈린이 ‘승인’했다는 신호이며 트루먼의 결단만 남았다는 보도가 이어졌다.
◉이승만, 국민총궐기 결사반대 천명=이승만 대통령은 6월25일 부산에서 열린 6.25침략전쟁 1주년 행사에서 “우리는 공산주의 밑에서 생명을 유비하는 것보다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여 싸우고 있다”며 “유화나 양보를 거부하고 총궐기하여 명예로운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태극기를 만주 국경선까지 휘날리기를 전국민이 필사적으로 원한다”고 강조하였다.
소련 말리크의 휴전제의에 대하여는 26일 긴급 국무회의를 열어 검토한 결과 “필사 반대‘를 만장일치로 결의하고 성명을 발표한다.
”한국의 자유와 평화를 가져오지 않는 국토양단의 소련 제안은 남한뿐만 아니라 전한국민이 반대한다. 이런 화평은 한국민에데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침략자를 한국내에 둔다는 것은 그 어떤 성질의 것이라도 우리민족을 모욕하는 것이다.“ ([조선일보] 6.27일자)
이승만은 6월25일 침략의 날을 ’국민총궐기의 날‘로 정하고 국민대회를 열어 결의하였다. 그리고 도쿄에서 날아온 리지웨이 사령관을 만나 한국의 통일전쟁 의지를 재확인 다짐한다.
◉트루먼, 소련에 화답=미국도 한국참전 1년을 맞은 6월25일 오후2시(미국시간) 트루먼 대통령이 성명을 발표하였다. 그것은 소련의 휴전제의에 화답하는 내용이다. ”한국의 평화와 안전을 가져오는 화평안이라면 언제나 받아들일 용의가 있다. 세계 자유국가가 한국에서 싸우는 목적은 제3차대전의 방지에 있다. 말리크 소련 대표가 제안한 것이 세계와 한국의 평화를 위한 것이면 어떤 수단이라도 취하여 응할 것이다.“
23일 소련 말리크의 연설을 들은 트루먼은 소련주재 미국대사 커크(Alan G. Kirk)에게 소련 외무차관 그로미코(Andrei A. Gromiko)를 만나 ’야전사령관들의 정전토의‘를 제안하고 미국의 입장을 설명케한 뒤, 29일 안보회의 결정을 거쳐 리지웨이에게 휴전을 제의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한편 트리그브 리 유엔사무총장은 하루 전에 이미 유엔본부에 ’정전 교섭을 진행을 통고하였다. ”나는 유엔 사무총장으로서 한국의 유엔군을 지지하며 38선 정전을 희망하던 차에 소련 대표 말리크도 역시 같은 의견을 발표하였으니 이 기회에 조속한 군사적 정전과 정치적 협의가 가능해졌다“ ([조선일보]6.2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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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지웨이의 휴전회담 제의와 큰 충격을 받은 정부-국회 등 국내외 움직임을 보도한 동아일보.ⓒ동아DB
◆리지웨이 ‘정전협상’ 제의...이승만, 미국에 ‘선전포고’
대통령의 지시를 받은 리지웨이 유엔사령관은 30일 아침8시 라디오방송을 통해 미국이 오래 준비한 협상안을 공개적으로 공식 제의한다. 중공의 마오와 북한 김일성에게는 다음과 같은 전문을 발송했다. ”본인은 유엔군 총사령과 자격으로 명에 의하여 귀 군대에게 다음 사랑을 통고한다. 본인은 한국에서 적대행위와 일체의 무력행동을 중지할 것을 규정하는 정전(cease-fire)과 아울러 그 정전을 유지하는데 대한 적절한 보장을 논의할 회합을 가질 것을 귀측이 희망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런 회합을 원한다는 귀측의 화답을 접수하면 우리측 대표르 지명할 것이며 귀측 대표와 만나는 날짜를 제시하겠다. 본인은 이 회합이 원산항에 정박해있는 덴마크 병원선에서 이뤄지기를 제안한다.“
◉조지 케난의 역할=중공의 마오쩌둥 대신 소련의 스탈린을 협상상대로 바꾼 트루먼은 진작부터 소련통 비밀외교팀을 동원하였다, 그 중심인물이 당시 유명한 외교학자 프린스턴 대학교수 조지 케난(George Frost Kennan, 1904~ 2005)이다. 2차대전후 모스크바 미국대사관에 근무하던 시절, 소련 공산주의 확산을 정치·경제·외교적으로 막아야 한다는 구상을 장문의 전보로 보고서를 써서 워싱턴에 보냈던 케난은 뒷날 ‘미국 외교의 대부’로 불린다. 그의 별명처럼 붙은 ‘롱 텔레그램’(Long Telegram)에 제시된 대소련정책이 이듬해 1947년 3월 발표된 '트루먼 독트린'과 1950년 2월 ‘애치슨 선언’의 기초가 되었으며, 소련이 붕괴될 때까지 40여년간 미국의 ‘소련 봉쇄정책’을 이끄는 뼈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 케난은 남한에 대한 정책에서는 ‘코리아 패싱’ 미국 독주를 고수한다. 즉, 일단 남한을 '명목상 독립국'으로 유지시켜주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외교의 바둑돌’로서 소련의 공산주의 영향이 일본의 안전을 위협하지 않는 한, 한반도의 점진적 공산화라도 묵인할 수도 있다고 주장한 사람이다.
그런 그가 트루먼의 ‘휴전목적’ 달성의 임무를 받아 소련의 유엔대표 말리크와 본격 접촉을 시작한 것은 5월, 그 결과가 리지웨이의 제안 방송으로 전 세계에 공개된 것이다. 드디어 한국전쟁은 이승만과 맥아더의 ‘승공 통일전쟁’에서 트루먼과 애틀리의 ‘38선 휴전’이란 협상국면으로 일거에 전환되고 말았다. 한국이 미-소 흥정 테이블에 제물로 던져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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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만대통령이 제시한 휴전협상 전제조건 5개 원칙과 통일을 주장하는 국민총궐기대회를 크게 보도한 동아일보 1951년 7월1일자.ⓒ동아DB
◆이승만, 미국에 ‘5개조건’ 제시...대미투쟁 선언
”한국의 참여와 동의가 없는 어떠한 국제적 결정에도 반대한다“
이것은 이승만이 평생 목숨 걸고 지켜온 국가독립 수호의 철칙(鐵則)이다. 20세 배재학당부터 한성감옥의 명저 [독립정신], 하와이 독립운동시절에 쓴 세계최초 반공논문 ‘공산당의 당부당’과 일본-나치-소련의 독재고발 영문저서 [Japan Inside-Out], 73세 건국후 출간한 [건국과 이상], [일민주의 개설] 등, 언론인이자 저술가, 국제법학자 정치외교가 이승만 박사의 글로벌 역사관, 민주주의 자유철학을 응집하여 자유세계를 이끌었던 리더십, 대한민국 독립정신—건국정신-국가정신에 응축시켜놓은 원칙들 가운데 하나이다. 국가독립 유지의 필수사항이 강대국의 간섭과 사대주의를 배격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이 철칙을 손톱만큼도 양보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하물며 ‘일방적인 휴전협상’이란 ‘미국의 폭격’을 맞자 이승만의 ‘자유독립 원칙’들은 활화산처럼 대폭발을 일으킨다.
한국시간 6월30일 새벽 4시경 리지웨이 사령관의 깜짝 발표를 접한 이승만은 7월1일 날이 밝자 비상령을 발동, 긴급 각의와 긴급 국회가 열린다. 이런 경우를 수없이 예상 대비해온 이승만은 이미 마련해둔 문서를 꺼내 변영태 외무장관(수석각료)이 주재하는 회의에 제출, 각료들의 의견을 듣는 과정을 거친다. 국무회의는 다음과 같은 ‘휴전 5개 원칙’을 결정 발표하였다.
1. 중공군은 한국으로부터 국경을 넘어 만주로 완전히 철퇴하되 북한 비전투원의 생명과 재산에 손상을 가해서는 아니된다.
2. 북한괴로군은 무장을 완전히 해제해야 한다.
3. 국제연합은 제3국이 북한공산당에게 군사적 재정적 기타 형식으로 원조치 못하도록 방지할 것을 동의해야한다.
4. 대한민국의 정식대표가 한국문제의 전부 혹은 일부를 토의하거나 고려하는 어떠한 국제적 회의 혹은 회합에도 반드시 참가해야한다.
5. 한국의 주권이나 영토를 침범하는 어떠한 안이나 행동은 국제법적 효력이 있는 줄로 인정 치 않을 것이다.
이 원칙들은 즉시 비상 국회에 보내지고 단 한표의 반대나 기권도 없이 만장일치로 지지, 채택하였다.
같은 시간 7월1일 오전10시 부산 중심가 충무로 광장에는 수십만 국민이 노도와 같이 운집하여 ‘국토통일국민총궐기대회’를 개최하고, 한국민주당 주요한(朱耀翰, 1900~1979) 의원의 사회로 다음과 같은 결의문과 참전국들 수뇌들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채택하였다. ([동아일보] 7월2일자)
▶결의문=우리는 공산침략자를 격퇴하고 국토를 통일하여 자유대한을 건설함으로써 세계평화에 부응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결의함.
1. 38선 정전은 또다시 국토를 분단하고 국제적 분쟁을 초래하므로 이를 절대 반대한다.
2. 중공군은 압록강 이북으로 철퇴하고 북한 괴뢰군은 즉시 무장을 해제하라.
3. 침략군을 원조하는 국가는 국제연합이 이를 제재하라.
4. 한국문제의 토의에는 우리 대표가 참가해야하며 우리의 주권과 통일을 침해하는 일체의 결정은 결사 반대한다. 단기4284년7월1일 정전반대 국토통일국민총궐기대회
이때부터 국민궐기대회는 전국으로 확대되고, 휴전협상기간 2년 내내 ‘결사반대’하는 각종시위를 벌이게 된다. 청년단체, 사회단체, 각급학교 남녀 학생들은 일하며 공부하며 거리를 누비며 남북통일을 부르짖었다. 국민외교의 베테랑 이승만의 ”피 흘리지 않는 전투“는 전세계 언론이 대서특필하는 ‘한국의 명물’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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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이 휴전협상 준비 과정에서 한국의 이승만 대통령을 완전히 패싱시킨 것과 대조적으로, 스탈린은 마오쩌둥과 김일성을 처음부터 막후에서 총지휘하였다.
◆스탈린, 처음부터 협상 총지휘...마오-김일성 실시간 대응
트루먼의 미국정부가 처음부터 이승만을 철저히 소외시킨 가운데 휴전협상 시나리오를 진행시키는 동안, 소련-중공의 공산진영은 어떻게 돌아갔는가. 이쯤에서 중공의 베이징으로 마오쩌둥을 찾아가보자.
화천호(파로호) 전투에서 3개 사단을 궤멸당한 펑더화이는 기진맥진이다. 부사령관 덩화(鄧華)를 대신 본국에 보내 마오의 기색도 살펴보고 병력증강도 건의하기로 했다.
6월17일 덩화는 중난하이(中南海:구황실정원, 중공정권 최고집무소)에 들어가 국향(菊香)실에서 마오쩌둥을 만난다. 마오는 예상했던 질책 대신에 뜻밖의 중대발언을 꺼내는 것이었다.
“지난 5월 말에 미국이 소련 외교관 말리크를 접촉하여 전쟁을 끝내는 문제를 토의하자 했고, 며칠전 김일성이 여기 와서 저우언라이와 내가 조선 문제 해결에 지침을 말해주었소. 우리 군대가 적을 북조선에서 축출하는데 성공했으므로 남북조선이 다시 38선을 경계로 하고, 한편으로 싸우면서 다른 한편으로 대화를 하는 것이 체면을 잃지 않는 일이라는데 동지들이 모두 동의하였소.”
덩화는 놀랐다. 남조선 공격때 잠시의 휴식도 허락하지 않던 마오가 이젠 ‘정전’을 말하고 있으며 미국과 교섭이 진행 중이라는 이야기가 아닌가. (박실, 앞의 책)
마오는 오래전 국공합작 때 말했다. “협상도 혁명이다” 즉 혁명이 곧 타협이오, 타협이 곧 혁명이다(革命不忘妥協, 妥協不忘革命). 협상에는 우호적 협상과 대결적 협상이 있는데, 대결적 협상은 파국을 잠시 모면하려는 방편이므로 곧 파기된다. 어느 쪽이든 중국공산당에게 ‘연합과 투쟁’은 동전의 양면인 것으로 6.25 무력전쟁에서도 이것은 마찬가지란 설명이다.
중공군의 5차공세가 끝난 6월초, 마오는 김일성을 베이징으로 불러 6-7월 두 달 동안은 정전 협상 준비를 위해 적극공세 대신 군대를 휴식시켜 정비 보강하기로 합의 하였다.
6월30일 미국의 제안에 접한 마오쩌둥은 6.25전쟁을 시작하고 휴전협상을 지휘하는 스탈린에게 또 전문을 보낸다. “말리크의 선제안으로 주도권을 쥔 우리는 이제 협상대표를 파견할 준비를 하고 있으므로 ‘필리포프’ 동무(스탈린의 암호명)의 견해를 따를 것이니 모든 책임을 직접 지고 지도해주기를 바란다.” 김일성도 비슷한 전문을 스탈린에게 보냈다.
◉스탈린, 개성까지 지정=스탈린은 즉시 마오에게 회답을 보낸다.
“리지웨이의 제의에 대해서는 김일성과 펑더화이 두 사람 명의로 방송을 통해 회답해야 한다. 김일성만 서명하면 미국이 믿지 못할 터이니 중공의용군 대표가 같이 서명하라. 회담 장소는 38선상의 개성을 고집하여 우리가 회담의 주도자임을 과시해야 할 것이므로 미국의 양보를 받아내도록 해야 한다.”
스탈린은 이렇게 회담 장소까지 지정해주었다. 당시 개성을 점령한 유엔군을 몰아내는데 휴전회담을 이용하라는 것, 평화적 대화를 위한 ‘중립지대’로 설정하면 미군도 응할 것이라고 훈수까지 두었다. 그리고 스탈린은 회담의 책임을 마오에게 떠맡긴다.
“동무는 모스크바에서 회담에 대해 지시해야 한다고 말하나, 두말 할 것 없이 협상을 지시할 사람은 마오쩌둥 당신이다. 우리는 김일성과 접촉하기도 힘들며 마오 동무가 그동안 가까이 해왔으니 직접 지휘하는 게 좋을 것이다.”
마오는 스탈린의 속셈을 빤히 알고 있다. 말로는 협상을 위임한다고 했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사사건건 스탈린의 지시를 받는 것이 편하다는 것을 그동안 실감하였고 앞으로도 그대로 빠짐없이 ‘멘토의 의견’을 들어 행하기로 작정한다. (에프게니 바자노프 지음, 김광린 옮김 [한국전쟁의 전말] 도서출판 열림, 1998. 박실, 앞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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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휴전회담이 시작되었던 '내봉장'의 겉모습. 개성 고려동에 위치했던 일제때 고급요정으로 기와집들이 연결된 99칸짜리 한옥이다.
★미-중 회담준비 합의...장소는? 스탈린이 지정한 개성(開城)
한사코 휴전을 반대하는 이승만을 철저히 따돌린 미국은 공산측과 정전회담 절차를 합의한다.
유엔군측은 수석대표로 미해군 제독 조이(Charles Turner Joy)중장과 알레이 버크(Arleigh Albert Burke) 해군소장, 로렌스 크레이기(Laurence Carbee Craigie ) 공군소장, 헨리 호데스(Henry Hodes), 그리고 한국군소장 백선엽이 참석했다.
이승만은 이미 제시한 ‘휴전 전제조건 5개원칙’에 따라 영어 잘하는 백선엽을 참관시켰고, 협상 진행을 지켜보면서 차후대책을 강구하기로 정해놓았다.
공산측에서는 수석대표를 북한 남일(南日)로 하고, 이상조 소장, 장평산 소장, 중공군 덩화(鄧華) 상장, 셰팡(解方) 소장이 참석한다. 그러나 공산측 대표단을 막후에서 지도한 사람은 중공의 협상달인이자 마오의 측근 리커농(李克農)이었다.
회담장소는 공산측이 주장하는 개성에 미국이 동의했다. 앞에서 말했듯이 개성은 스탈린이 지정해준 곳, 중공군이 장악하기 쉬운 도시이므로 ‘주도권을 잡으라’는 전술이다. 스탈린은 협상을 마오쩌둥이 주도해야 한다면서도 실제로는 리지웨이에게 보내는 회답문안까지 만들어주었다. 한마디로 한국전쟁을 일으킨 스탈린은 정전협상까지 막후에서 지휘하는 ‘총감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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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휴전회담 유엔대표들이 공산측과 합의한대로 중립지대로 결정된 내봉장에 왕래할때 지프차에 백기를 달았다.
◆공산측의 심리전...“유엔군이 백기 들고 항복하러 왔다”
7월8일 예비접촉을 끝낸 정전회담의 본회담은 10일 오전10시 개성에서 개막된다.
건물은 개성시 고려동 송악산 기슭에 자리한 99칸짜리 거대한 한옥 내봉장(來鳳莊), 여러개의 기와집을 연결한 일제때 고급 요정, 그 넓은 대청마루에서 양측은 마주앉았다.
공산측은 스탈린의 지령대로 회담개막전부터 ‘주도권 장악’을 위한 이벤트를 벌인다. 양측 합의에 따라 중립지대 출입시 백기(白旗)를 달도록 하였는데, 북한은 백기를 단 유엔대표단 지프차들이 개성에 들어오자 회담장으로 바로 안내하지 않고 개성 시내를 한 바퀴 돌았다. 그러면서 “양놈들이 백기 들고 항복하러 왔다‘고 선전한다.
회담 테이블 의자도 공산측이 남향, 유엔측을 북향으로 잡고, 유엔측 의자를 10센치쯤 낮게 만들어 공산측을 올려다보게 해놓았다. 개막식이 끝나자 탁상엔 북한 인공기도 세워놓는 것이었다. ”처음부터 기를 죽이는 심리전”으로 기선을 잡는 공산당의 전형적 수법이다.
악수도 없이 인사말만 나눈 첫 회담이 끝나자 유엔대표단은 헬리콥터로, 기자들은 트럭으로 복귀했다. 이튿날 11일부터 열린 본격적인 회담은 출발부터 정면충돌이다. 리지웨이가 진작 제시한 ’군사적 문제만 다루자‘는 유엔 측과 달리 공산측은 “한반도로부터 외국 군대의 철수”를 우선 합의하자고 덤볐다. 합의한 의제를 깬 공산측이 ’철군‘이란 정치선동을 계속함에 따라 양측이 의제와 협의순서에 가까스로 합의한 것은 보름이나 지난 26일이었다.
확정된 5개항은 *회담 의제 확정, *비무장지대 설정을 위한 군사분계선 선정. *휴전 감독기관 구성, *포로에 관한 협의, *쌍방 관계국에 대한 건의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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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휴정회담 취재 기자들의 편의를 위해 제공된 '유엔하우스' 건물, 개성 내봉장 근처에 있었다.
★남일 “당신네가 총격에 폭격까지 하다니...” 회담 중단 선언
말이 ’중립지대‘였지 개성 회담장은 공산군 경비대가 밀착 감시하고 유엔 기자단의 자유로운 출입을 멋대로 통제하는 등 갈수록 횡포가 잦아지자 유엔 측과 기자들의 항의가 잇따랐다.
그러던 8월23일 공산 측에서 느닷없이 회담을 일방적으로 중단시킨다고 했다.
남일이 미군 비행기가 회담장 부근을 폭격했다고 소리치며 백선엽을 노려보며 거품을 물었다.
“개성 중립지대에서 요전에도 당신네가 회담장 근처에 총기를 사격하는 등 중립을 위반하더니 이번엔 폭격까지 하다니...” 벌떡 일어나 삿대질을 한다. 유엔측 총격으로 공산군 1명이 죽고 1명이 부상했다는 주장이었다.
유엔군 측은 진상조사결과 ‘허위 날조’라고 맞섰다. 리지웨이 사령관까지 나서 반박성명을 발표한다. “거짓을 조작하지 말라. 근거 없는 폭격설 주장은 1막의 기만극이다. 파편을 조사해본 결과 유엔군이 사용하는 폭탄이 아니다”라는 증거까지 제시하였다. 하지만 공산측은 막무가내로 일방적 거부, 회담은 결국 무기휴회로 접어들고 말았다.
남일이 주장하는 총격사건이나 폭격설은 어디까지 사실일까. 사실이라면 누가 그랬을까.
여기서 오래 숨겨져 아무도 몰랐던 휴전회담의 막후 비사(秘史)를 열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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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만의 비밀지령을 받아 휴전회담장 파괴공작을 폈던 육군첩보부대원들. 뒷줄 맨오른쪽이 김진수 소위. 한사람 건너 이강석도 보인다.ⓒ조선DB
◆이승만의 휴전 저지작전...“회담장을 폭파하라” 특공대 동원
결론부터 말하면, 사건들은 이승만 대통령이 비밀 지령을 내린 ‘휴전회담 저지작전’이었다. 유엔군이 알면 절대로 안 되는 극비중의 극비, 단 하나의 메모도 남기지 못하게 진행하였던지라 사건기록은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휴전 회담장 공격은 이승만 대통령의 극비 지시로 당시 육군첩보부대장 이극성(李極星)중령과 김진수(金晋洙)소위가 주도했음이 밝혀졌다. [월간조선]이 2015년 회담장 습격을 직접 지휘했던 김진수(86·육군본부 공작처장 출신 예비역대령)을 만나 진상을 낱낱이 밝히는 증언을 듣고 그 사건 전모를 공개한 것이다. 육군 보병학교 갑종간부 제2기로 입교, 한국전쟁에 참전한 김진수는 1951년 3월부터 HID에 복무하면서 모두 250여 차례 북한에 침투, 공작활동을 벌여 20여 개의 무공훈장을 받았다. 특히 적진에 침투해 인민군 부사단장 이영희 대좌를 생포해 귀환시킨 역전의 특공대 출신이다. ([월간조선] 2015년 8월호). 요지를 추려 전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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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군대표 남일이 휴정회담 재개 조건으로 회담장 파괴를 시도한 '개성사건'의 재조사를 요구, 리지웨이 사령관이 도쿄에서 날아왔다.ⓒ조선DB
“1951년 7월 12일쯤 이극성 첩보부대장이 저를 불러서 갔더니 ‘내일 경무대에 들어가자’는 겁니다. 그땐 이승만 대통령을 만나리라 생각도 못 했어요. 이튿날 새벽 대구에서 출발, 경무대에 오전 11시쯤 도착했어요. 그 시절엔 요즘 같은 고속도로도 없었고 포장구간마저 적었지만 무척 긴장하며 서둘러 지프를 몰았어요.”
가슴에 묻어둔 비밀을 죽기 전에 털어놓고 싶다는 노병은 생생한 기억을 하나씩 꺼낸다.
경무대 대통령 집무실엔 4명이 둘러앉았다. 이승만대통령과 비서실장, 김진수와 이극성이다.
76세 노대통령 이승만이 입을 열었다.
“자네들을 부른 것은 휴전회담을 어떻게든 깨버렸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다. 휴전이 성립되면 군사분계선이 그어지게 되지만, 휴전이 깨지면 전진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길지 모른다. 휴전이 되고 분단이 되면 민족통일이 어렵다. 어떻게 해서든 휴전을 반대해서, 아니 못 하게 막아서 북진통일을 이뤄야 한다. 한번 휴전이 되면 영원히 통일을 못할 것이다.”
김진수는 너무나 놀라웠지만 답답했던 마음이 뻥 뚫리고 뜨거운 피가 끓어올랐다.
“회담장소를 야간에 침투해 파괴하라. 할 수 있겠느냐고 물으시더군요. 저는 ‘문제없습니다. 그대로 하겠습니다’ 대답했죠. 그랬더니 ‘그럼 부탁하네. 가까운 시일 내에 휴전회담을 못 하게 했으면 좋겠다’고 지시하셨습니다.”
그는 경무대 한 인사가 ‘사단장에게 보고도 하지 말고 대통령과 우리 세 사람만 아는 비밀로 하자’고 다짐했다”고 회고했다.
▶휴전회담장 파괴공작◀
개성 회담장 무장공격은 1951년 초 창설된 육군 4863부대(육군첩보부대 HID)가 주도했으며 그해 7월부터 9월까지 여러 차례 진행했다.
◉7월16일 새벽=민간인 복장의 대원 10명을 이끌고 철조망을 절단기로 끊고 회담장으로 진입. 회담장은 텅텅 비었고 초소엔 아무도 없다. 주차된 공산군 지프를 미제 칼빈 총으로 쏴 전소시키다. 회담장 주변엔 4~5개의 천막이 있었는데 총을 난사해 회담장 천막을 모두 쓰러뜨리고 탁자니 의자니 기물도 부쉈다. 당시 김진수 소위와 함께 파괴공작에 참여한 대원들은 HID 문산파견대(제2파견대) 장단분견대 소속으로 이들은 현역 군인 신분이 아니었다. 판문점 근처 장단군(長湍郡)과 대성동(大城洞) 마을 청년들이 대부분이었다.
국방부 편찬 전쟁사에 보면, 전날인 7월 15일은 유엔군과 공산군 간 휴전회담장 통제규칙을 두고 합의가 성사된 날이었다. 양측은 ‘개성 중심으로 반경 5마일 중립지대를 설정하고 회담장 주변에 무장병력도 두지 않기로’ 의견을 모았다. 바로 이 합의를 깨뜨리려 7월16일을 택했던 작전이다.
◉8월의 공격사례=8월 4일 중공군 1개 중대가 휴전회담 지역을 침범, 유엔군 측이 항의하는 일이 벌어졌다. 8월 13일에는 공산군 측이 “판문점 교량 부근에서 40명의 유엔군 부대가 교량을 봉쇄하고 비무장 공산군에게 사격을 가했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유엔군 측은 조사에 착수했으나 관련 사실을 확인할 수 없어 “그때 그곳에 유엔군 부대는 없었다”고 반박했다.
8월19일 중립 지역인 송곡리(판문점 서쪽 1km 지점)에서 순찰중이던 중공군 헌병소대가 습격을 받아 소대장이 사망하고 소대원 1명이 부상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공산군 측은 즉각 유엔군 측이 중립협정을 위반했다고 비난하였다. 하지만 유엔군 측의 조사결과 그 시간에 송곡리 근처에 유엔군 부대는 없었다고 했다. .
하지만 민간인 목격자들이 나타나 “중공군을 기습한 사람들은 민간복장을 하고 있었고, 전에도 이곳에 나타난 적이 있다”고 증언했다. 유엔군 측에서는 대한민국의 어느 유격대가 독자적인 행동을 한 것으로 판단하였다.(국방부 [6·25 전쟁사] 9권)
◉9월 중공군 장병 8명 납치=김진수 소위와 HID 장단분견대는 또 다시 회담장에 접근했다. 이번에는 외곽 경비를 맡고 있던 공산군 장교와 병사 8명과 마주쳤다. 수적으로 우세한 HID 부대원들은 즉각 이들을 덮쳐 모두 생포했다.
“제 기억으로 성이 위(偉)가인 중공군 소위가 기억납니다. 모두 납치해 아군(육군 1사단)에 넘기고 우리도 이들을 심문한 기억이 납니다. 이들은 나중 포로수용소로 보낸 것으로 알고 있어요.” 김진수는 덧붙였다. “모두 우리가 한일입니다. 국군이나 유엔군의 지시 없이 독자적으로 실천한 것이고 구체적 날짜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김진수 소위는 그 후 다시 경무대를 찾아갔다. 한 인사가 설명을 듣고 격려했다고 한다.
“이젠 더는 할 필요가 없다고 하더군요. 이 대통령께서 ‘그 정도 했는데도 휴전회담이 계속되니 할 수 없다’고 하셨답니다. 저도 안타까웠지만 그게 민족의 운명이라 생각했어요.”
오랜 세월이 흐른 이제 와서야 진상을 공개하는 이유를 묻자 김진수는 단숨에 토로한다.
“휴전회담 당시 이 대통령께서 어떤 심정이었는지 밝히고 싶었죠. 그분은 휴전으로 분단이 되면 통일이 어렵다고 예감했던 겁니다. 통일을 위해 휴전회담을 망치고 싶었던 것이죠. 당시의 절절하고 급박했던 대통령의 고뇌를 국민들이 알아야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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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공군 철퇴, 북한 선거"를 휴전회담 조건으로 내세운 이승만 성명.(조선일보 51.9.23일자)ⓒ조선DB
◆이승만, “질질 끌지 말고 중공군 철수시켜라” 미국에 최후통첩
8월24일부터 한달이 되도록 휴전협상이 개점휴업 상태인지라 이승만은 또 칼을 빼들었다. 리지웨이도 트루먼도 공산측의 협상술을 상대할 줄 모르고 초보적 비난만 주고받으며 국지전을 간간이 계속하고 있으니 피해는 대한민국 강토파괴와 피 흘리는 젊은 용사들뿐이다.
9월21일 성명을 발표하고 회담재개 조건을 다시금 강조하였다.
“지금 개성은 38선 이남에 있으며 정전회담이 시작되기 전에는 동시내에 공산군이 없었다. 그런데 공산군은 정전회담을 구실로 삼아서 개성 시내에 진입한 것이므로 결코 그들이 개성을 점령하게 놓아두어서는 안된다. 뿐만 아니라 공산측은 정전회담을 기회 삼아 가지네들 공산세계 인민의 눈앞에서 유엔에 모욕을 주어 유엔의 위신을 떨어트리려고 하는 짓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따라서 만약에 정전회담을 재개한다면 마땅히 몇 가지 확고한 안전책이 있어야 할 것이다. 한국정부로서는 다음 항목들로 최소한의 조건하에서 회담이 재개되기를 바란다.
1. 중공군의 한국철퇴.
2. 북한괴뢰군의 무장 해제.
3. 북한은 유엔감시하에 실시되는 선거를 통하여 대한민국 국회에 안전하고 동등한 대표를 파견할 권리의 보장.
4. 유엔총사령부는 일정한 시간적 제한을 두어 (예를 들면 10일간이라든지) 그동안에 공산측이 이 조건들에 동의하는가 안하는가를 회답하게 하여 만약 회답이 없을 시에는 회담을 폐해야 할 것이다.”
요약하면, 이승만 대통령은 회담을 무작정 질질 끌지 말고 “한국의 요구조건이 달성되지 않는 정전회담은 하지 말라”고 최후통첩, 그것은 사실상 대미투쟁의 선전포고였다.
한반도내 중공군을 모두 철수시키고 북한에 자유선거를 실시하자는 조건은 남북통일을 위해 양보할 수 없는 최소한의 필수조건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미국을 압박하는 이승만이다.
특공대에 명령한 회담장 파괴 테러를 감행하는 대통령, 그 효과로 공산측이 회담을 거부하고 있는 지금이 결정적 담판을 벌여야 할 기회이며, 공산측이 불응하면 즉시 북진 통일을 이루겠다는 대한민국 전쟁 사령관의 전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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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문점 들판에 차려진 휴전회담 천막들.
★‘개성 사건‘ 일단락...회담장을 판문점으로 이동
“개성은 회담 방해자들이 득실거리는 무대”인고로 개성을 벗어나려는 유엔군 측은 진작부터 장소를 변경하자고 제안했다. 리지웨이는 9월6일부터 장소변경을 위한 연락장교 회의를 요구해 왔는데 24일 공산측에 각서를 보내고, 공산측은 “개성 총격사건 등 모든 기습사건들을 신속히 처리해주면 수락한다’고 회답한다. 총격사건이나 폭격사태 등에 응분의 처리를 해달라는 조건을 붙인 것이다.
25일 회담재개를 위한 예비접촉을 시작, 유엔군 측은 ”모든 사건을 인정하고 마무리할 것“이라며 수긍 양보하였다. 새로운 장소는 판문점으로 합의한다.
판문점(板門痁)의 유래는 임진왜란 때 백성들이 피난을 위해 임진강에 집대문 널빤지로 다리를 만들었대서 ‘널문리’로 불리던 이름을 한자로 바꾼 것이다. 처음 정전회담이 속개된 곳은 현재의 판문점보다 북쪽 1.5㎞ 떨어진 개성시 관할지역이었다.
무기한 중단 두 달 지나 10월25일 재개된 정전협상은 휴전이 급했던 양측이 일사천리로 진행한다. 가장 중요한 ‘비무장지대 설정을 위한 군사분계선’을 긋기 위해 ”38선이냐, 현재 점령위치냐“를 두고 설전을 벌이다가 양측 모두 ‘양보할 수 없는 양보’를 할 수 밖에 없는 군사적 이익 때문에 ‘현위치’로 합의한다. 그리하여 관망하던 전쟁은 ‘한 치라도 더 빼앗기’ 쟁탈전이 어느 때보다 맹렬하게 폭발한다.
유명한 ‘철의 삼각지’(Iron Triangle)도 이때 생긴 말, 평강(平康)을 정점으로 철원(鐵原)과 금화(金華)가 삼각형 밑받침을 만든 그 곳은 원산에서 추가령지대를 타고 서울로 이어진 철도 경원선(京元線)의 요충인지라 중공군 최대의 후방 보급기지, 양측은 그래서 끝없는 공방전과 필사적인 혈전을 2년간 계속하였다. 파일 드라이버(Pile Driver)작전, 백마고지 전투, 저격능선전투 등의 승리는 최후의 승자 한국군의 전설로 살아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