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부산에서 열린 6.25침략 2주년 행사에서 연설하던 이승만 대통령이 등뒤에서 총격을 받은 저격사건. 조선일보 6월27일자. 오른쪽은 배후등 범행관련자들이 민국당 소속으로 밝혀졌다는 기사.ⓒ조선DB
    ▲ 부산에서 열린 6.25침략 2주년 행사에서 연설하던 이승만 대통령이 등뒤에서 총격을 받은 저격사건. 조선일보 6월27일자. 오른쪽은 배후등 범행관련자들이 민국당 소속으로 밝혀졌다는 기사.ⓒ조선DB
    계엄령 선포 한달, 6월 25일 무더운 부산 충무로 광장에서 6.25침략 2주년을 맞아 ‘반공 총궐기’ 기념식이 열렸다. 이날 기어이 이승만 대통령 저격사건이 일어난다.
    조선일보의 보도: 「25일 오전 11시 부산 충무로광장에서 거행된 6.25 2주년 기념식에 임석하신 이대통령은 연설중 돌연 배후에서 정체불명인 괴한으로부터 저격을 받았으나 발사한 총탄의 불발로 신변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 현장에서 즉시 체포된 괴한은 수사당국에서 그 배후관계를 추격중이다.(호외 재록). 그런데 범인은 기자가 목격한 바, 엷은 회색 하복을 입은 약 60살 노인으로 확실치는 않으나, 탐문한 바에 의하면 전 의열단에 관계가 있던 대구사람 유시태라고 한다. 그때 이대통령은 육해군장병 및 민간인등 약 6천명을 앞에 놓고 연설하였는데 이 자리에는 외국 외교관들과 유엔 당국자들도 참석하였다.
    이대통령의 연설이 중간쯤 이르렀을 때 전기 범인 유는 연단 뒤로 나타나 권총으로 이대통령의 배후를 겨누었다. 목격자 담을 들으면 범인은 방아쇠를 두 세 번이나 당겼으나 그 무기는 발포되지 않았다 하는데, 그때 한국군 헌병과 다른 목격자들이 떠다밀어서 그는 무초 대사의 바로 뒤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대통령은 연설을 끝까지 마치었으며 그 뒤에 무초 대사의 연설을 포함하는 식순이 아무런 사고 없이 진행되었다.」

    다음날 정부는 대통령 암살음모사건의 전모를 발표했다. 
    권총을 쏜 범인은 자칭 의열단원 유시태(柳時泰), 배후에서 교사한 사람은 민국당 국회의원 김시현이라고 밝히고, 범인의 자백에 따라 관련자로 민국당 의원 서상일(徐相日), 백남훈(白南薰) 등 4명을 비롯, 뜻밖의 인물 서울 고검 검사장 김익진(金翼鎭)등 12명을 구속하여 수사 중이라고 했다. 민국당에서는 즉각 ‘조작’이라고 반발, 김시현 등이 매수되어 벌인 연극이라고 주장하고, 김시현은 법정에서 ‘장택상으로부터 돈을 받았다’고 억지를 쓰기도 했다. 
    국회는 진상조사를 결의하고 9명의 특별위원회를 구성하려 하였으나 어느 당도 조사위원을 내놓지 않아 흐지부지 되었다. 법원은 김시현의 주장을 전형적인 좌익 수법으로 보았고, 9월 주범 유시태와 김시현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다. 그후 감형된 그들은 복역 8년 후 4.19를 맞아 풀려나게 된다. 
    과연 조작이었을까? 김시현(金始顯, 1883~1966)은 한때 김원봉과 사상을 같이하는 의열단원 출신이고, 레닌이 지원한 상하이 고려공산당, 조선공산당의 비밀조직 멤버였다. 고려공산당 설립자 이동휘 세력의 ‘이승만 임정대통령 탄핵’ 공세에도 동조한 인물로 전해진다. 
    그가 장택상에게 매수되어 저지른 범행이었다면 사형선고와 장기복역을 감내하였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 실패한 암살사건은 배후에 외국 공산당이나 미국 정보기관의 관련여부도 뜬소문뿐 밝혀지지는 않았다. 
  • ▲ 이승만 저격사건의 범인 유시태가 현장에서 체포되고있다.ⓒ조선DB
    ▲ 이승만 저격사건의 범인 유시태가 현장에서 체포되고있다.ⓒ조선DB
    영국 장관들 “이승만은 누구보다 자질을 갖춘 인물” 평가
    참전국들 가운데 한국정치상황에 가장 민감한 관심을 가진 나라가 영국이다. 6.25 그해 중공군 참전후 12월부터 휴전안를 먼저 들고 나온 것이 영국인지라, 휴전을 반대하는 이승만이 눈에 가시인 것은 미국보다 더 할 정도였다. 따라서 이번 계엄 사태에 영연방국들과 더불어 이승만 압박에 미국과 연합전선을 펼치고 있는 중이다. 
    런던 의회와 수상 이든(Anthony Eden)도 이미 “이승만이 유엔 역할을 망치고 있다”고 공격하면서 국방장관 알렉산더(William Alexander)와 외교담당 국무장관 로이드(Selwyn Lloyd)를 한국에 파견하여 현장점검을 맡겼다.
    6월 13일 동경의 클라크 사령관과 함께 한국에 들어온 두 영국장관은 이승만 대통령과 면담을 가졌다. 영국 장관의 방한은 한국역사상 처음이라며 반갑게 맞이한 이승만은 특유의 역사강의부터 꺼냈다. 구한말 거문도점령 등 한영관계의 시작부터 한국전 참전까지 양국의 역사관계를 비롯하여 대한민국 건국과 헌법제정의 배경, 이번 개헌파동의 전후 사정에 대한 시사해설을 끈기있게 설명해 나갔다. 동시에 “국회가 그들만의 권력을 추구하여 민중의 뜻에 맞는 헌법을 만들지 못하고 있다”고 강조하며 “구속 국회의원 재판도 곧 열릴 것이며 비상계엄도 개헌이 끝나면 해제할 것”이라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회담을 마치고 나온 알렉산더 장관은 기자들의 질문에 “긴 설교를 들었다. 우리가 한 말은 ‘인내하라’는 당부가 전부였다”고 대답하며 웃었다. (Parliamentary Question in the House of Commons, June 10. 1952. U.K.)
    두 장관은 그러나 본국에 보낸 보고서에서 이승만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이승만 대통령은 확실히 빈틈이 없었고 그 나이에도 불구하고 내가 만난 한국의 어느 정치인경쟁자들 보다도 자질을 갖춘 인물이었다.” 
    그들은 귀국길 기자회견에서도 그동안 영국의회가 미국과 한국을 비난해 왔던 것은 “영국인이 한국의 현실을 몰랐기 때문”이라는 확인까지 강조하였다. 
    영국언론들은 한국의 해방 후부터 미국 언론과 함께 이승만을 ‘고집불통’이라 비난해 왔고  휴전반대에 대하여 ‘이승만이 장애물’이라 공격해왔다. 유명한 [옵서버](Observer)나 [데일리 메일](Daily Mail)등은 ‘늙은 부부의 절대권력 욕심’ 또는 ‘이승만을 비난하면 감옥행’ 등 언커크나 대사관의 말들을 가감 없이 인용, 이승만 비난 보도를 계속해 왔다.
    그러나 이승만과 직접 대화를 나눈 영국장관들은 한 번의 만남을 통하여 종전의 선입감을 완전이 정반대로 뒤바꾼 인식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한국의 어느 정치인보다도 자질을 갖춘 인물”이란 평가는 이승만의 능수능란한 화술에 넘어간 것일까. 아니다. 미국이 진작부터 한국에 ‘이승만을 대체할만한 지도자는 없다’는 인식을 이제는 영국도 공유하는 수준까지 이승만이 반전시켜버린 상황으로 변했다.  
  • ▲ 밴클리트 미8권사령관과 이승만 대통령.
    ▲ 밴클리트 미8권사령관과 이승만 대통령.
    밴플리트 “클라크와 나는 이승만의 해결책에 의견 일치”
    일본의 클라크를 대신하여 이승만을 만나는 사람은 밴플리트 8군사령관이다. 미국무부의 강경책과 의견을 달리하는 한국전쟁사령관들, 클라크는 ‘성급히 움직여선 안된다’는 신중파, 오히려 “이승만의 전쟁 리더십’을 훼손시켜선 곤란하다”는 말까지 했다.
    클라크와 차원을 달리하는 밴플리트의 이승만에 대한 호의는 6.25기념식 전날 이승만과 단독 회담을 가졌을 때 직설적으로 표현하기에 이른다.
    국제공산당 자금사건을 되풀이 설명하는 이승만의 말을 듣고 난 밴플리트는 “그 사건과 관련한 외국 정보를 수집하는데 협조하겠다”며 중요한 한마디를 다짐하듯 던진다. 
    “클라크 장군과 나는 각하의 정치위기 해결에 대하여 완전히 의견일치를 보았다는 것을 알아 두시기 바랍니다.”
    밴플리트는 클라크에게 보낸 이날 회담 보고서 끝에 “결국 이승만 대통령이 이길 것이라는 게 이곳의 일반적인 견해”라고 덧붙였다.
  • ▲ 1952년 6월24일 대전발 열차가 정읍을 지나 목포를 향해 달릴 때, 무장공비 400여명이 습격, 일제히 객차들을 탈선시키고 불을 지르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승객과 승무원 46명을 살해하고 80명을 납치, 산악으로 도주했다.ⓒ조선DB
    ▲ 1952년 6월24일 대전발 열차가 정읍을 지나 목포를 향해 달릴 때, 무장공비 400여명이 습격, 일제히 객차들을 탈선시키고 불을 지르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승객과 승무원 46명을 살해하고 80명을 납치, 산악으로 도주했다.ⓒ조선DB
    야당의원들도 ‘발췌개헌안’에 동조 시작
     ‘대통령 선거 6.23 시한’에 쫓기던 야당 의원들은 ‘8.15 임기안’이 국회에서 통과된 뒤엔 시간을 벌었다는 듯 국회 근처엔 그림자도 비치지 않았다. 이승만을 지지하는 삼우장파와 신라회를 제외한 민국당 등 야당의원들은 벌써부터 국회 등원을 보이콧한 상태였다.
    ‘미국이 군정을 편다던데...’ 은밀하게 번지는 정보를 수군거리며 새로운 기회를 기다리는 그들은 ‘미군정 시대’가 다시 오면 대통령 선거도 개헌도 무용지물일뿐 아니라, 미국이 지원하는 ‘야당 시대’로 변하리라는 꿈에 부풀었는지도 모른다. 조선일보는 이때 ‘주목할 야당측 성원미달 지연술’이란 제목으로 비난하는 기사를 1면 머리에 올렸다.
    「야당측의 성원미달 전술은 아직 그 선거일이 결정되지 않은 대통령 선거에도 불구하고 현하 혼돈 정국은 문자 그대로 예측을 불허하고 있다. 자유합동파 신라회의 출석을 얻어 과반수이상의 성원으로 본회의의 성립은 될 수 있을 것이나 정국혼란의 원인으로 개헌안과 대통령선거의 2대중요안건의 결정은 못 보게 될 것이 오늘의 국회동향일 것이다.」

    두 개헌안이 상정된 지 일주일 만에 27일 국회는 가까스로 성원이 되어 본회의가 열렸다.장관들까지 의원자격으로 나와 본회의를 성립시킨 국회에서는 마침내 개헌안 심의가 시작되었다. 한 두 달씩 묵혔던 두 개헌안 심의에 앞서 임영신(任永信) 의원이 등원을 거부한 의원들을 비난하고 나섰다. “기한을 정해서 나오라거나 아니면 국회를 해산하든지 해야 할 것 아니냐‘고 목청을 높이자. 이날도 방청석을 차지한 지방의원 대표들은 호응하는 박수를 쳤다.
    직선제를 지지하는 삼우장파 이충환(李忠煥) 의원이 등단하더니 의미심장한 질의를 꺼냈다.
    “정반대의 두 개헌안을 동시에 심의하는 중이니 만일 두 안중에서 필요조항만을 살려서 하나의 개헌안으로 만든다면 대통령은 이 헌법을 즉시 공포할 용의가 있는가?”
    정부측 답변을 맡은 조주영(趙柱泳, 체신장관) 의원이 화답하듯 말했다.
    “두 개헌안을 적당히 발췌해서 만드는 일은 국회가 다수결로 결정할 문제라고 해석된다.”
    야당의 내각제 개헌안 설명을 맡은 이종형(李鍾馨, 본명: 이종영 李鍾榮, 1895~1954) 의원은 혼자 북치고 장고치고 답변까지 하면서 제풀에 화가 난다는 듯 국회에 안 나오는 야당 의원들에게 화풀이 화살을 쏘아댄다. 
    ‘며칠 뒤 월말이면 회기도 끝나고, 내각제는 가망도 없어지고, 뭘 바라고 등원도 안하느냐. 죽어도 나와서 죽어야지, 왜 뒷방구석에 쳐박혀 있느냐. 대구로 도망가면 계엄령이 없어 좋으냐. 외세 의존이라고 욕을 먹는데 극소수 정신 나간 의원들 때문에 국회 다 망신시키고...회기 끝난 뒤에 임기국회 열면 뭐하나. 여기서 나는 수정안을 내겠어요“  
    언론인출신 답게 입담을 과시하던 이종형은 뜻밖에도 ’발췌 개헌안‘을 들이미는 게 아닌가. 장택상의 개헌 로비가 이 정도까지 진척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이처럼 법정 성원을 채우지도 못하는 나날이 이어지자 ’국회 무용론‘까지 언론에 등장한다.
    ”이러한 국회일진대 차라리 없는 것이 마땅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겠다“([조선일보] 1952년 6월27일자).
  • ▲ 비상계엄령 한달만에 6월27일 이승만대통령은 언론보도에 검열을 폐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오른쪽은
    ▲ 비상계엄령 한달만에 6월27일 이승만대통령은 언론보도에 검열을 폐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오른쪽은 "국회해산의 전례를 남기고싶지 않다"는 이승만이 직선제 개헌안 통과를 촉구한 기사.ⓒ조선DB
    이승만, ”언론자유 지켜라“ 보도검열 전면 해제 발표
    그 무렵 이승만 대통령은 비상계엄령에도 불구하고 언론 검열을 전면 해제하고 언론자유의 보장을 담보하는 성명을 발표한다.
    “최근 일부 외국 간행물과 국내신문이 차별특혜 혹은 검열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만일 그러한 폐단이 있다면 즉시 폐지되어야 할 것이다. 한국은 자유민주국가인만큼 언론자유는 완전히 보장되어야 한다. 그런고로 주요군사기밀에 직접 관계되지 않는 한 모든 검열은 즉시 해제되어야한다. 동시에 이후 검열실시가 필요하다고 인정될 때에는 사전에 본인 대통령 혹은 공보처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한국은 외국 친구들에게나 국민들에게 숨길 것은 하나도 없다. 우리는 솔직한 비판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언론자유는 대한민국이 수립된 기본정신의 하나인 동시에 본인이 특히 존중하는 원칙이다.” ([동아일보]1952년 6월29일자)

    “국민 수준이 뭐 어째?” 시위대, 야당 발언에 폭발

    다음날 국회는 큰 봉변을 당하였다. 28일 토요일, 상반기 정기국회의 사실상 마지막 날이다. 월요일 30일엔 폐회식 밖에 없기 때문이다. 시위대의 분노가 한꺼번에 폭발한 것 같았다. 건장한 청년들 수백명이 정문을 겹겹이 막아섰다.
    “직선제 헌법을 즉시 통과시켜라. 아니면 국회는 오늘로서 해산하라”
    의사당 안에서는 이날도 성원이 안 되어 점심때까지 기다리다가 겨우 정족수를 채워서 김성수 부통령의 사임서를 회기 내에 수리하는 절차를 밟았을 뿐이다. 
    의사당을 둘러싼 시위대는 각도 지방의회대표 완장을 두르고 ‘국회 해산’ 결의안을 통과시킬 때까지 아무도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며 출입문을 아예 잠가버리는 것이었다.
    조금전 의사당 안에서는 직선제를 지지하는 이갑성(李甲成) 의원등 60여명이 연명으로 ‘국회를 자율적으로 해산하자’는 긴급동의를 낸 참이었기 때문이다.
    이갑성은 “현역군인을 살해한 서민호나 국체변혁을 기도한 의원들의 석방을 결의한 국회는 국민의 분노를 격동케 하였으며 국민들의 국회해산 요구는 거족적 민의”라면서 “그동안 야당이 벌인 정부공격에 책임져야 할 것“이고 ”현 국회는 더 이상 긴박한 국정을 처리할 능력과 자격을 상실하였으므로 스스로 해산할 길 밖에 없다“고 주장하였다.
    ‘국회 자폭론’을 둘러싸고 옥신각신하던 중에 의외의 폭탄이 터져버렸다. 야당의 박모 의원이 ”민중 수준이 직선제를 당장 실시하기에는 미흡하지 않느냐?“고 발언한 목소리가 시위대의 귀에 잡힌 것이다. 
    ”야, 이 새끼야. 뭐? 우리 수준이 어쨌다구? 그래, 네놈들은 수준이 얼마나 높길래 귓구멍에 말뚝을 박았단 말이냐?“ 문을 박차고 뛰어든 청년들이 박의원을 덮치고 멱살을 잡아 매질을 가하려는데 이때 말리려던 장택상 총리마저 붙잡혀 봉변을 당한다. 흥분한 청년들 눈에 총리가 누구인지 보일 리가 없다. 
    ”자폭 결의를 안하면 아무도 나오지 못할 줄 알아라“
    의원들은 꼼짝없이 연금상태가 된다. 몇시간쯤 지난 뒤 내무장관 이범석이 나타나 의원들에게 사과하고 시위대에게 해산을 종용했으나 장관의 명령에도 불응하므로 경찰대를 출동시켜야 했다.
  • ▲ 부산 피난국회 앞에서 국회해산을 요구하며 연좌농성하는 지방대표들과 청년단체들.
    ▲ 부산 피난국회 앞에서 국회해산을 요구하며 연좌농성하는 지방대표들과 청년단체들.
    쪽지 돌리기...”끝까지 버텨라. 미국이 이승만 처리한다“ 
    국회는 어수선한 일요일을 지내고 30일 월요일 정기국회 폐회식을 가졌다. 무초 대사와 언커크 대표들이 참석한 이날 행사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장택상 총리가 대독한 치사에서 국민단체들이 요구하는 국회해산에 대하여 응답을 보냈다.
    “정부가 내놓은 대통령 직선과 국회 양원제 헌법은 전민족의 동일한 요구이므로 이것만 통과되면 다른 문제들은 점차로 해결될 것이다. 지방의원들에게 당분간 기다려 달라고 요청해서 벌써 1주일 이상 인내하여 왔으나 아직 국회가 개헌안을 통과시키지 않아서 민중대표들은 대통령에게 국회 해산을 청하기에 이르러 민심이 날로 격앙되고 있다. 지금은 더 기다릴 수 없어서 민의를 따라 국회 해산을 단행하는 것이 대통령의 직무로 각오하고 수일 내로 공포하려고 한다.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집행할지는 아직 확정하지 못했으나 더 인내할 수 없다는 사실은 분명하다.“7월1일, 자유당의 이재학(李在鶴) 의원등 60여명의 요청으로 임시국회가 열렸다.
    부의장 김동성(金東成)이 개회사를 짤막하게 끝낸 뒤 77명의 국회의원들은 간담회를 가졌다. 이날은 모처럼 나오지 않던 민국당 의원 10명이 등원하여 즉흥 ‘환영사’까지 나와 박수를 보냈고, 장택상 국무총리는 “앞으로 지방의원들의 집단행동은 없을 것”이라 장담하며 “정부가 국회의원 여러분의 신변을 보장할 터이니 안심하시고 국회에 나와서 발췌개헌안을 통과시키도록 협조해 달라”고 공개적으로 당부하며 머리를 90도로 숙이는 것이었다.
    그러나 자취를 감춘 야당의원 수십명은 행방도 찾을 수 없었다. 미리 작정한 ‘지연전술’ 때문이다. 이 지연작전을 말해주는 ‘은밀한 쪽지’가 나돌았다. 
    “머지않아 미국이 이승만을 체포하고 군정을 실시할 계획임. 끝까지 버텨라”이 메모는 민국당 사무총장 조병옥이 체포되었다가 풀려나온 서범석(徐範錫)의원에게 전해준 쪽지였다고 한다. (부산일보사 [비화-임시수도 천일] 1984)

    하지만 지치고 압박감에 쫓기던 민국당의 분위기는 이제 체념상태로 바뀌고 있었다.
    믿었던 미국의 태도는 갈수록 ‘타협 촉구’로 일관하였으며, 믿었던 의원들이 하나 둘씩 이탈하여 나간 것이다. 서상덕, 조병문, 조순에 이어 최고위원 지청천과 구을회 의원까지 탈당을 선언한 판이다. 24명 의원중 중진을 포함하여 6명이 떨어져나갔으니 민국당의 분열은 물론, 내각제 개헌안에 서명했던 무소속이나 원내자유당 의원들마저 ‘절충안’ 찬성으로 돌아서면서 직선제 반대 전선은 사실상 붕괴되는 판세가 되어버렸다.

    이승만, 치안국장에게 “국민투표 할테니 준비하시오”
    당시 치안국장 윤우경(尹宇景)은 회고록 [만성록](晩省錄. 서울프레스, 1992)에 이런 기록을 남겼다. 국회의 새로운 회기가 시작된 7월3일 밤 늦게 이승만 대통령이 불러 관저로 달려가보니반갑게 맞이한 대통령이 곁에 앉히고 다음과 같이 말하더란 것이다.
    “윤국장, 7월5일까지 직선제 개헌안이 통과되지 않으면 나는 국회해산 여부를 국민투표에 올릴 것이오. 국민이 가결해주면 국회를 해산할 것이고, 부결되면 나는 물러나겠소. 그러니 은연중에 국민투표를 실시할 준비를 해주시오.”
    장택상 총리는 윤우경 국장을 불러 다른 지시를 내렸다. 
    “경찰을 풀어서 은신중인 국회의원들을 찾아내고 국회로 데려오라“
    개헌 찬성파들은 전원 국회에서 합숙하게 될 터이니 최대한 많은 의원들을 참석시켜 개헌선을 이룬 뒤에 발췌개언한을 통과시켜서 국내외적으로 민주주의 원칙을 준수하는 모습을 보여야 될 것이라고 장총리는 강조했다. ”경찰이 국회의원들을 데려오는 이것은 불법이 아니오. 미국 의회에서도 긴급상황 때면 이용하는 방법이니 외국의 비난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신신당부하는 것이었다. 윤우경은 총리지시에 따라 여관방, 판자촌까지 뒤져야 했다고 썼다.

    이때쯤, 계엄령 전후로 끌려가 조사 받던 국회의원들 10여명이 석방된다. 일부는 불기소, 또는 ”국사참여를 위한 가석방“이다. 이들이 국회에 나타나자 환호성과 악수와 포옹이 엉긴다.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소?“ 손을 흔드는 동료의원들에게 풀려난 의원들은 씁쓸하게 웃었다.
    ”고생은 뭘...그동안 아무런 조사도 받지 않았고 기소도 안하고...참, 이런 걸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 ▲ 상하이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과 신익희 법무처장(1921년3월 상하이 사진관). 오른쪽은 김성수와 함께 야당 민국당을 이끌던 조병옥.
    ▲ 상하이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과 신익희 법무처장(1921년3월 상하이 사진관). 오른쪽은 김성수와 함께 야당 민국당을 이끌던 조병옥.
    ‘7.4파티의 반전’...”미국은 한국국회를 더 이상 지지하지 않소“

    7월4일 아침나절, 신익희 국회의장 방에 외국 손님이 찾아왔다. 부의장 조봉암과 장택상 총리도 합석하였다. 그 외국인은 유엔의 언커크(UNCURK:한국통일부흥위원단: United Nations Commission for the Unification and Rehabilitation of Korea) 대표인 네덜란드 귀족 브란디트 남작이다. 마지막으로 유엔의 입장을 전하러 왔다며 입을 열었다.
    ”당신네 나라 한국은 유엔이 신탁통치를 하는 것이 어떻겠소? 전쟁하는 나라가 날마다 소동을 일삼으니 참전국들은 구경만 할 수 없단 말이오. 우리가 신탁통치안을 제기할 터이니 곧 결정해주시오. 싸움을 계속하든지 신탁통치를 받는지 알아서 하시기 바라오. 여기 계신 세분이 나서서 해결해야 되지 않겠소?“
    말을 마친 그는 대답도 들을 필요 없다는 듯 휭하니 나가버렸다. 
    놀란 세 사삼이 어리둥절해 있을 때 조봉암이 침묵을 깼다고 한다.
    ”신탁통치보다야 싫으나 좋으나 이승만 치하가 낫지 않겠소? 창랑, 당신은 총리이니 빨리 무슨 대책을 세워야지요?“ (장병혜 [상록의 자유혼: 창랑 장택상 일대기] 창랑 장택상기념사업회, 1992)

    장택상의 대책은 이미 실행중이다. 경찰 수색도 모자라서 중앙방송(KBS전신) 라디오를 통해 숨어있는 국회의원들을 나오라고 방송까지 했다. ”연락만 주시면 차량을 보낼 테니 빠짐없이 등원해달라.“ 방송뿐인가, 유인물을 시민들에게 돌렸으며, 수감중 의원들도 모두 풀어 등원시켰다.
    이제 개헌선을 넘어 걱정은 없었으나 ‘국회의원 전원 참석’이란 모양새를 갖추는 일이 바람직하다. 여야 의원 전원이 개헌 투표에 참여해야 직선제 개헌이 성공작이 되지 않겠는가.

    충격의 ‘최후통첩’...미국 손 떼자 야당 혼비백산
    그해 7월4일은 미국 독립 176주년 기념일, 미국 대사관에선 오후 6시 독립기념 파티가 열린다. 민국당 사무총장 조병옥은 조바심에 서성인다. 오늘같이 역사적인 날 미국이 미뤄왔던 행동을 개시하면 얼마나 좋을까. 의사당 앞엔 여전히 시위대가 농성중이고, 국회 안에서는 바둑두며 잡담하는 의원들 가운데 몇몇 핵심의원들이 무언가 재촉하는 눈빛을 아프게 던진다.. 
    시계는 오후 4시를 지나는데 미국 대사관 쪽에선 감감 소식이다. 조병옥은 6시까지 기다릴 수가 없어졌다. 황급히 문을 나선 그는 멀지 않은 대사관으로 걸음을 재촉한다.
    ”시간이 이르지만 말씀을 듣고 싶어 미리 왔소“ 조병옥은 무초 대사의 팔을 끌었다.
    ”오늘 아침 클라크 장군이 발표한 성명은 이승만에게 더 이상 기대하지 않는다는 뜻이오?“
    무초가 대답했다. ”미국은 할 말을 분명히 하므로 그런 추측은 필요 없습니다. 정세는 이미 끝난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클라크의 성명 내용이 무엇인지는 보도된 바도 없다.
    조병옥은 큰 눈이 더 커졌다. 뭐라고? 정세가 끝났다고? 
    ”알았소“ 신음처럼 응답한 조병옥은 대사관을 허둥지둥 나선다. 끝났구나, 다 끝났어...
    같은 시각, 국회에서 조병옥을 기다리는 서범석 의원에게 친숙한 미국대사관 참사관이 다가와 일본어로 속삭이듯 말했다. ”기적은 없습니다.“ 서범석도 얼굴이 하얘졌다.
    얼마 후, 미대사관 파티장에 나타난 신익희 국회의장도 충격에 빠진다. 이승만 제거를 장담하던 라이트너 대사대리가 신익희와 이종찬 육군참모총장 앞에 다가오더니 조용히 말했다.
    ”미국정부는 더 이상 한국 국회를 지지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무초와 라이트너의 1973년 인터뷰 증언. 조용중, 앞의 책)
  • ▲ 1952년 7월4일밤 9시 발췌개헌안의 통과상황을 보도한 조선일보 7월6일자.ⓒ조선DB
    ▲ 1952년 7월4일밤 9시 발췌개헌안의 통과상황을 보도한 조선일보 7월6일자.ⓒ조선DB
    ◆ ‘멘붕 야당’ 무릎...‘직선제 개헌’ 일사천리 ”찬성“

    무슨 정당이 이렇게도 허약할까. 민국당 등 야권은 글자그대로 멘붕(멘탈 붕괴) 상태! 벼랑에서 엄마 손을 놓친 아이처럼 곤두박질, 천길만길 절망의 늪에 떨어지고 말았다.
    무슨 정당이 이렇게도 지조가 없을까. 그제야 현실에 눈을 뜬 양, 야당은 변신도 빨랐다.
    정신 차린 순간, 허겁지겁 전체회의를 열고 ‘항복’하기로 ‘만장일치 찬성’을 결정한다.

    조병옥은 미 대사관에서 ‘최후통첩’ 날벼락을 맞은 즉시 국회 쪽에 연락했다. 
    기다리던 동지 의원들이 허둥지둥 김동성(金東成,1890~1969) 국회부의장 방에 모였다. 처음 123명이던 내각제 개헌서명자들은 그동안 반 토막이 나서 60여명을 헤아렸다.
    그야말로 넋이 나간 듯, 분노와 좌절과 침통 속에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장마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저녁나절, 문밖에는 기자들이 몰려와 수군거리며 기다린다.
    드디어 두 시간쯤 지난 6시 반경 문이 열리고 의원들이 몰려나와 도망치듯 흩어진다.

    ”우리는 책임정치를 관철하기 위해 오늘까지 버텼으나, 급박한 상황에 도달하여 다른 도리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우리는 통곡 속에서 이런 결정을 내렸다“ 
    간단히 발표하는 대변자는 눈이 벌개져 숨을 삼킨다. 
    ”발췌개헌안에 찬성하기로 했다. 기왕 찬성하기로 한 이상 아무 조건 없이 모두가 참여하기로 했다“ (조용중, 앞의 책)
    이것이 당시 한국 정당의 실체인가? ‘호헌’은 어디로 가고 ‘독재타도’는 벌써 잊었는가?
    철석 같이 믿었던 ‘대국=미국’이 손을 떼는 순간, 날개 잃은 철새처럼 추락하여 그토록 반대하던 ‘직선제 개헌’을 통째로 받아들이기로 돌아선 ‘돌변’을 정당론으로 설명하기는 힘들다. 한마디로 기본적 정당정신도 지도자도 부재한 오합지졸의 패배주의 그것이었다고나 할까.

    그날 저녁식사 시간이 지난 뒤 밤 8시경, 마침내 개헌안 심의를 위한 본회의가 열렸다.
    지난 이틀 동안 전반적인 심의를 거치기는 하였으나 남아있는 법적 절차를 간략히 처리하고 전체 표결에 붙이기까지 불과 1시간 반밖에 걸리지 않았다,
    결론부터 말하면 5월부터 7월까지 험악하고 피곤했던 ‘40일간의 개헌투쟁’이 90분 만에 종지부를 찍은 ‘백지 항복’ 그것이다. 
  • ▲ 부산 피난 국회에서 국회의원들이 기립투표로 '대통령 직선제' 발췌개헌안에 찬성을 표시하고 있다.
    ▲ 부산 피난 국회에서 국회의원들이 기립투표로 '대통령 직선제' 발췌개헌안에 찬성을 표시하고 있다.
    ◆ 기립투표...한국최초의 ‘대통령 직선제’ 헌법 탄생

    개헌 심의를 맡았던 국회 전원위원회 지청천 위원장이 짤막한 심의결과를 보고하고, 발췌개헌안은 ”이미 충분히 토론했으므로 가부(可否)는 기립으로써 만천하에 알리도록 하자”는 동의가 나와 이를 통과시킨다. 그리고 신익희 의장은 기립표결을 진행하였다.

    ”표결 결과를 보고하겠습니다. 재적의원 3분의2 이상, 즉 166명 출석으로 가(可)에 163명, 부(否)에는 한 표도 없이 찬성이 되었으므로 헌법 제98조 제3항의 규정에 따라 이 개헌안은 가결된 것을 선포해 드립니다.“ 
    신익희 의장은 이 선포에서 ‘실수’를 저질렀다. 재석 166명중에 찬성이 163명이면 나머지 3명은 무엇인가? 미리 모두 찬성하기로 정했던지라 ‘반대’를 묻지도 않는 착각에 빠졌던 것이다. 
    ”모두 허탈감과 패배의식에 지쳐서 누가 일어서지 않았는지 살필 만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예정된 대로 다 일어선 것처럼 보였으니 그렇게 된 것 같다.“(조용중, 송방용 의원 면담기록)
    이런 상황이었으므로 ‘앉아있는 3명’의 이름도 제각각으로 전해진다. 
    본인들이 말을 안 하고 목격자의 말에 의존하다보니 누구인지 아직도 확인된 바가 없으며, 그 3명이 ‘반대’인지 ‘기권’인지도 밝혀진 기록이 없다. 

    ▶역사적인 직선제 헌법 탄생! 간선제헌법을 고수하려던 야당은 한순간에 ‘직선제지지’로 돌아서 ‘만장일치 찬성”표를 던지면서 ‘개헌의 참 뜻’을 알았을까, 몰랐을까? 알았을 리가 없다. 이것은 그 후 야당이 벌인 행태가 증명하고 있으니까.
    ”이승만 지가 대통령 해먹으려고 직선제로 바꿨다“
    ”국회 선거로 이길 수 없으니 계엄령 내리고 의원들 잡아갔다“ 
    ”장기집권 하려고 독재적 수법으로 헌법을 맘대로 고쳤다“
    자기 손으로 ‘찬성표’를 넣고서도 야당정치인들은 금방 돌아서선 이런 말들을 남발하였다. 권력을 놓친 분풀이, 그들의 눈엔 직선제도 헌법도 국민도 안보이고 권력만 보인 모양이다. 
    이때 김성수가 시작한 ‘독재 타도’ 운동은 그로부터 4.19까지 8년간 갈수록 맹렬해진다. 민국당 대변지 신문들과 가톨릭, 흥사단 등 이승만 반대세력들과 그 출신 지식인들이 모든 기회를 활용한 결과, 자유당의 자기보신과 이념대결이 겹치면서 ‘극과 극’으로 질주한다. 
    마침내 3.15부정선거에 일어난 학생들의 의거로 이승만이 자진하야 함으로써 권력은 야당 품에 ‘굴러온 수박’이다. 이를 보자 그들의 쟁탈전이 클라이막스를 찍는다. 소원이던 내각제로 바꿔 이른 바 ‘구파-신파’ 세력다툼으로 날을 지새우다가 집권 1년도 안된 10개월 만에 군사쿠데타의 철퇴를 맞고 말았다. 
    자, 그러면 이승만의 ‘직선제 개헌의 참뜻’은 무엇이었던가? 한 달 뒤 8월5일 직선제 선거로 한국 최초의 ‘직선 대통령’이 되었을때 이승만의 당선 소감에서 들어보자.
  • ▲ 이범석 내무장관과 이승만 대통령.
    ▲ 이범석 내무장관과 이승만 대통령.
    이범석, 라이트너의 뺨을 후려치다

    ‘민의 관철’을 위하여 고난의 투쟁 끝에 ‘직선제 개헌’을 성공시킨 1등 공로자들이 대통령 관저에 몰려왔다. 다음날 7월5일 아침, 전국지방의원투쟁위원회와 민중자결 시도군대표자 일행 100여명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축하인사를 겸하여 ”계속 투쟁“을 다짐하는 결의문을 전했다.
    이승만은 이들에게 노고를 치하하고 ‘민중의 동지애’로써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동안 여러분이 끊임없이 노력한 보람이 크다. 각자 지역에 돌아가서도 정부나 국회에서 잘못하는 일이 있거든 지체하지 말고 자신의 일처럼 알아서 시정하도록 애써주기 바란다“

    그날 저녁, 동래 온천장의 요정 송해관에도 정부쪽 축하 모임이 시작되었다.
    국무총리 장택상, 내무장관 이범석, 재무장관 백두진, 상공장관 이교선, 그리고 국회의원 임영신 을 비롯한 정치인 몇 명과 고관들이 40일간의 진통과 성공의 결과를 화제로 나눈다. 
    ”이승만 대통령과 대한민국의 발전을 위하여!“ 이범석의 선창으로 건배를 올렸다. 
    그 자리에 유일한 외국인은 백두진이 초청한 미국 대사대리 라이트너, 장총리와 이내무 맞은  편에 앉아있다. 술잔이 돌고 거나해지자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라이트너의 입이 점점 거칠어지더니 급기야 이승만을 비난하는 말이 터지는 것이었다. 날마다 싸웠으니 할 말도 많을 터, 다들 침묵 속에 아슬아슬한 순간, 이범석이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이것들 봐요. 당신들이 뭐라고 말 좀 해야 될 거 아니오? 여기가 어디라고 대통령을 욕하는 말을 듣고도 못 들은 체 하는가? 나야 당신들처럼 영어를 못해서 대꾸를 못하지만 이런 무례한 말을 듣고만 있을 거요?“
    그 순간, 라이트너의 얼굴에서 철썩 소리가 났다. 이범석의 손이 후려치는 소리였다.
    라이트너의 발언내용은 물론, 이날의 모든 상황은 비밀이 되었다. 단단히 입단속을 했기 때문이다. 다만 뒷날 1991년 나온 ‘철기 이법석 자서전 [우둥불] 후편’에 이범석이 후일담을 남겼다. ”이 박사와 대한민국 정부에 대해 입에 담지 못할 더러운 욕을 해서 나한테 맞았다“
    이승만의 반응은 어땠을까? 비서의 보고를 받은 대통령은 싱긋이 웃으며 ”그 친구, 철기를 건드렸으니 혼 좀 났겠구먼“ 혼자 중얼거렸다고 한다. 다음날 이범석을 보자 이승만이 물었다. ”장군, 장군이 정말 라이트너를 때렸단 말이오?“ 고개 숙인 이범석은 시인할 수밖에 없었다.
    이승만이 평소 호칭 ‘철기’ 대신 ‘장군’이라 부르는 것은 ‘정색’을 할 때라고 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