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휴전후 전후복구와 경제발전이란 양면작전을 동시에 펼친 이승만 대통령은 국민 정신교육용 담화를 계속 발표한다. 왼쪽=
    ▲ 휴전후 전후복구와 경제발전이란 양면작전을 동시에 펼친 이승만 대통령은 국민 정신교육용 담화를 계속 발표한다. 왼쪽="자급자족 정신으로 상공업 발전시키자"(조선일보 1954.3.12). 오른쪽="경제부흥에 사리사욕 버리자"(조선일보 1954.1.24)ⓒ조선DB

    ★풍부한 경제발전 자료들, 정치편향에 매장되었다

    건국대통령, 호국대통령, 교육대통령으로 불리는 이승만 대통령이 정작 경제대통령임을 아는 이는 드물다. 지금까지 우리는 한강의 기적이라면 박정희 대통령의 수출입국 성공부터 떠올린다. 이것은 그동안 국내학계에서 50년대 이승만정부의 경제를 미국 원조로 겨우 먹고 살던 극빈시대로 규정, 연구대상에서조차 무시하였으며, 좌익의 '이승만 지우기' 역사왜곡과 맞물려 정치적 편향에 기울어지면서 이승만시대의 풍부한 경제발전 자료들을 매장시켰기 때문이다.

    게다가 박정희의 산업화 혁명에 압도된 나머지 대한민국의 경제성장은 박정희 시대에 비로소 시작된 것으로 단정, 이승만시대를 외면한 연구들은 해바라기형 곡학아세’(曲學阿世)라고 해야할 것이다. 사실은 한국경제의 고도성장과 산업화는 이승만 시대부터 본격화 된 것이었움을 살펴보자.

  • ▲ 왼쪽=이승만정부가 발표한 '부흥백서'를 조선일보가 발췌 1958년6월14일부터 6회연재. 오른쪽=1953~58년 기간 '국민소득 분석'기사. 조선일보 1959년 8월24일부터 6회연재.ⓒ조선DB
    ▲ 왼쪽=이승만정부가 발표한 '부흥백서'를 조선일보가 발췌 1958년6월14일부터 6회연재. 오른쪽=1953~58년 기간 '국민소득 분석'기사. 조선일보 1959년 8월24일부터 6회연재.ⓒ조선DB

    이승만시대 경제성장과 산업화 본격화=건국직후 산업부흥5개년계획’ ‘물동5개년계획’ ‘농업증산3개년계획’ 등을 추진했던 이승만 정부는 6.25로 중단할 수 밖에 없었다그러나 휴전후 미국 원조에 힙입어 이승만 대통령은 전후복구-경제부흥 양면작전을 펼침으로써 휴전 1953년부터 예상밖의 경제성장을 기록, 1957년 8.7%, 1958년 7.9%로서 60년대 박정희시대에 못지않았다따라서 기업수도 급증하여 국민총생산이 54년과 55년 45.7%와 66.7%로 폭발하고국민소득 증가율은 1954: 9.5%, 1955: 5.6%, 1956: 0.6%(최악의 흉년), 1957: 9.4%, 1958: 6.6%, 1959: 5.6%로 고속성장을 계속산업화시대를 열었다이와같이 1958년 무렵이면 전전(戰前수준을 훌쩍 넘어섰고 본격적인 경제 개발단계로 올라선다
    1950년대 경제를 연구한 김두얼 교수(명지대)는 그의 저서에서 이승만 정권시대의 경제성장 및 산업화 등 지표들이 1960년대 박정희 시대의 그것에 못지않은 것이라고 상세한 결과를 각종 도표로 발표하고 있다. 
    (김두얼 [한국경제사의 재해석도서출판 해남, 2017).

  • ▲ 1957년 9월26일 문경시멘트 공장 준공식에서 점화봉을 들고 있는 이승만 대통령(왼쪽)과 송인상 부흥부장관 및 김일환 상공부장관(매일신문DB). 오른쪽 사진=1958년 1월20일 인천판유리 공장이 처음 생산한 유리를 경무대에 보내 이승만 대통령이 감개어린 표정으로 보고 있다.(대한뉴스 제147호. K-TV화면 캡처).
    ▲ 1957년 9월26일 문경시멘트 공장 준공식에서 점화봉을 들고 있는 이승만 대통령(왼쪽)과 송인상 부흥부장관 및 김일환 상공부장관(매일신문DB). 오른쪽 사진=1958년 1월20일 인천판유리 공장이 처음 생산한 유리를 경무대에 보내 이승만 대통령이 감개어린 표정으로 보고 있다.(대한뉴스 제147호. K-TV화면 캡처).

    수출 5개년계획’ 드라이브...경부고속도로 건설도 추진

    이승만은 ”10년내로 자립경제 이루자며 수입대체 추진과 수출진흥 정책을 동시에 펼쳤다그동안 국내학계에서는 이승만의 경제정책을 수입대체로만 보고 수출진흥은 그 결과가 박정희때보다 빈약했다는 이유로 묵살해 왔다그러나 박정희가 실시한 각종 수출부양 정책들은 그 원조가 이승만 대통령이다당시 언론에 보도된 내용만 간추려보자.

    *1956=‘수출5개년계획’ 확정 발표농산물과 중석 등 광물김 등 해산물 증산.
    *1957년 1=‘무역진흥법 개정수출불 링크제 등 각종 인센티브 실시수출기금 금융지원.

     *1957년 7=교통 및 물류 인프라 확대부산항만 확장경부고속도로 건설 추진.
    *1958년 3=해외시장 개척 외교적 지원주요수출국과 무역협정 체결.
    *1958년 5=수출장려금 지급세금 인센티브 확대조세 특례조치 입법.
    *1960년 1=수출 5개년계획 완료 평가새해 당면목표 5개항 발표. *소득세 법인세 면제, *원료에 대한 물품세 반려, *영업세-교육세 면제, *수출입은행 설립수출보험 실시. *해외 세일즈맨 앙성. *수출진흥공사 설립해외 한국관 운영외국기업의 투자 유치,

    휴전직후 부흥부‘(復興部)를 설치한 이승만은 6.25침략에 폐허화된 국가재건에 총력전을 벌여 1958년엔 전후복구가 마무리되었음을 확인한다. 그리고 1958년 3월 산업개발위원회를 발족시킨 이승만은 경제개발3개년계획을 마련, 1960년 집행에 들어간다

    그러나 4.19로 중지되고 장면 정권이 이어받았다가 몰락하고, 곧 박정희가 5개년계획으로 본격 활용하여 중화학공업 성공으로 경제혁명을 이루게 된 것이다.

  • ▲ 이승만 집권기 휴전후 1953~1958년 기간 세계 각국의 경공업-중공업 산업 생산 증가율. 유엔 자료--. 한국은 타국보다 월등한 20%선에 육박하고 있음을 보여준다.(오른쪽 맨위 원내).
    ▲ 이승만 집권기 휴전후 1953~1958년 기간 세계 각국의 경공업-중공업 산업 생산 증가율. 유엔 자료--<김두얼 지음 [한국경제사의 재해석] p119>. 한국은 타국보다 월등한 20%선에 육박하고 있음을 보여준다.(오른쪽 맨위 원내).

    박정희보다 60년 앞선 수출입국=한마디로 이승만은 준비된 경제대통령이었다. 20대청년시절 농자(農者대신 상자천하지대본’(商者天下之大本이론을 발표하고 한성감옥에서 몰래 쓴 명저 [독립정신](1904)에서 농경사회 구한말에 자유통상 입국론을 선창한다그때 이미 이승만은 박정희보다 60여년 앞서 수출입국을 부르짖은 자유시장경제 선구자요자본주의 신봉자였던 것이다.

    건국직후 농지개혁과 귀속재산 불하를 서둘러 농민 해방을 단행경제자유권을 가진 국민으로 통합시켰으며일본이 남긴 적산(敵産약 23억달러(당시 평가북한엔 29억달러)를 국회의 국유화’ 요구를 물리치고 민간에게 모두 불하함으로써경제발전의 동력으로 삼았다남한보다 많은 귀속재산을 떠안은 북한은 공산화의 전쟁으로 탕진하고 말았다.

    휴전 직후 은행법부터 제정하여 한국은행 외에 산업은행을 설립비료·시멘트·판유리 등 3대 산업의 건설을 비롯하여 6·25전쟁으로 박살난 발전·배전시설과 탄광의 보수-증강을 중점지원한다일찌감치 수출5개년계획을 밀어붙이며 수출입은행을 따로 세우고 수출진흥공사까지 만들어 세계시장을 개척해나갔던 이승만대통령정경(政經)일체의 글로벌 지도자였다.

    이승만이 개척한 경제성장-산업화-수출진흥’ 3박자 구조가 없었다면 박정희의 기적도 불가능했거나 한참 늦었을 것이라는 것은 역사의 초보적 상식이다. ‘박정희 시대를 부각시키느라 이승만 경제시대 기록을 깡그리 외면한 학자들은 이제라도 정치편견을 버리고 대한민국 신화의 거대한 뿌리를 원상복구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