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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 대통령(왼쪽앞)이 검은 정장에 두손을 잡고 이승만의 유해를 영접하기 위해 1965년 7월23일 김포공항에서 3부요인들과 함께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다.
무더위가 한창인 7월23일 김포공항 오후3시, 검은 정장의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두 손을 모아잡고 먼 하늘을 응시하고 있다. 그의 곁에는 이효상(李孝祥)국회의장, 조진만(趙鎭滿)대법원장, 정일권(丁一權)국무총리와 3부요인들 및 각계 인사들, 주한 외교사절들까지 늘어서서 말없이 활주로와 김포 들판을 둘러보며 누군가를 기다린다.
이윽고 태평양을 건너 온 미군용기가 나타나 맴돌더니 굉음과 함께 착륙하여 다가온다.
군악대가 ‘고향생각’을 연주하고 조포 21발이 발사되면서 3군의장대 10명이 기내로 올라가 관을 들고 내려온다. 대형 태극기에 덮인 영구(靈柩)가 단상에 놓이자 여인들의 울음소리가 터져나왔다.
이승만 건국대통령의 유해 봉영식(奉迎式), 살아서는 귀국을 막아서고 죽은 다음에야 영접하는 대한민국의 새로운 권력자 박정희의 이날 심정은 무엇일까. 그것은 뒤에 나오는 그의 조사(弔辭)에 잘 나타나있다.
만약에, 이승만의 유해가 박정희 정부가 아니고 민주당 정권 때 돌아왔다면 박정희와 같은 범국가적 영접을 받았을까? 아니 조국으로 돌아올 수나 있었을까?
역사의 전환은 아프다. 아픔이 없는 창조가 어디 있으랴. 우리가 이승만의 장례를 계기로 유념해야 할 것은 역사의 ‘창조적 전환’에 있다. ‘이승만 시대가’ 막을 내리고 ‘박정희 시대’가 막을 올린 역사의 회전무대, 그 변곡점의 동력이 ‘후퇴’가 아니고 ‘전진’일 때 비로소 “역사는 변진(變進)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 갈림길에서 가고 오는 ‘죽음과 탄생‘의 엄숙한 파노라마가 말해주는 그 시대적 역사성을 그때 누가 알아 보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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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포공항에서 거행된 이승만 유해 봉영식. 오른쪽 사진은 양자 이인수가 정부의 국민장 결정을 거부하고 가족장을 희망한다는 기사. ⓒ동아DB-조선DB
◆건국후 최초의 건국대통령 장례식...“국군 품에 안기다”
공항에서 한강 건너 이화장까지 연도에 몰려든 수십만 인파의 애도 속에서 이승만의 유해는 빈소에 안치되었다. 장사진을 친 조문객들은 새로운 화제로 수근거린다. 이박사가 별세하던 날, 모교 배재학교 담장가에 서 있던 고목이 쓰러졌다는 것, 임진왜란 전에 심어 수령 5백년이 넘는 거목이 쓰러진 것은 “세계적인 위인의 서거를 애도하는 하늘의 신비”라고들 했다. 또 한 가지는 이화장의 목련이 피어나는 것, “4월에 피고 지는 꽃이 왜 7월에 또 피겠느냐, 이박사의 애국충정”이라며 더 서럽게 통곡한다는 기사들이 신문에도 났다.
★“국장(國葬)을 못 한다고?...가족장(家族葬) 하겠다”
하와이에서 이승만 박사가 별세하자 즉시 장례의 격식문제가 먼저 쟁점으로 떠올랐다.
언론들은 일부에서 대두되는 ’국장‘(國葬) 논의에 대하여 극력 반대하고 나섰다. “아직도 자유당 천하인줄 아느냐”(조선일보), “정부는 이박사 장례문제에서 손을 떼라”(동아일보). 너도나도 신문들이 사설까지 써서 ’국장‘을 비난하였다.
4.19관련 단체들은 예상대로 “이박사 유해 못 들어온다“고 시위를 벌인다. 이박사의 유해가 도착한 날에도 4.19부상동지회 회원들 15명이 이화장에 몰려가 ”꽃다운 청년 2백명을 앗아간 자유당 원흉들은 나와서 국민앞에 사과하라. 사과없이는 유해도 들어올 수 없다“ ”살아서 충성이지 죽은 다음에 웬 야단이냐“며 장례 자체를 반대하고, 요구를 듣지않으면 화형식을 하겠다고 소리쳤다.
22일 정부측과 구 자유당계 장례준비위원회 및 유족들의 합동회의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호상(護喪)을 맡은 변영태 전 국무총리와 허정 전 내각수반은 ”건국대통령인 이승만 박사의 장례는 국장“이 마땅하고 “만일 국장으로 안한다면 개인장으로 하겠다”는 강경자세를 취했다.
정부측은 “국장으로 모시고 싶지만 4.19단체등 여론을 감안하여 국민장으로 모시자”고 간청하면서 “국민장이지만 국장 못지않게 치를 것이니 양해해달라”고 설득하는 것이었다.
이에 이인수, 우제하 등 유족들은 “국장 반대가 심한데 국민장도 반대할 것”이라 우려하며 “이승만 대통령의 평소 소신은 간소한 장례“였으므로 차라리 ”가족장으로 거행하겠다“고 결단을 내려야 했다. (우제하, 앞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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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만 대통령의 유해가 묻힌 60년전의 동작동 국군묘지 일대. 사진은 장례직후 1965년 7월29일 찍은 묘지봉분과 참배하는 사람들. 묘소에서 국군들의 묘역들이 한눈에 바라보인다.ⓒ서울기록원
★동작동 국군묘지 선정한 이승만 ”저기가 내가 묻힐 데야“
’국장‘에 맹렬히 반대했던 언론과 4.19단체들도 ’묘지‘ 문제에 관해서는 큰 반발이 없었다.
왜냐하면 동작동 국립묘지는 이승만 대통령이 발상하여 직접 선정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국립묘지 선정과정=1950년 9.28 수복 후부터 이승만은 전장의 이슬로 사라진 국군장병의 영혼을 달래 줄 성역으로서 ”워싱텅의 알링턴 국립묘지 같은 것을 우리도 만들어야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당시 ’국군묘지‘ 선정위원회를 구성, 후보지로 남산 일대, 우이동, 부여, 대구, 경주 등 30여 군데를 둘러보고 추천하였으나 이승만은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의 성격대로 자신이 직접 묘지 선정잡업에 앞장섰다.
당시 미8군사령관 테일러 장군과 함께 헬리콥터를 타고 전국의 요소를 공중 물색하는 비행을 세 차례나 거듭했다. 관악산과 남한산성 일대를 둘러보던 대통령은 마침내 동작동(銅雀洞) 야산 일대를 점찍었다. 그리고는 묘지 선정위원들을 데리고 나가서 “이곳이 어떤가?”고 자신있게 제시하였다. 묘지 선정에 참여한 풍수전문가 지관(地官)들까지 만장일치 찬성이다.
54년 3월 정지공사가 시작되자 이승만은 여러 차례 현장에 나와 직접 감독도 하였으며, 그때마다 발길을 멈추고 유심히 바라보는 곳이 있었다. 바로 국군묘역 가운데쯤 솟아있는 나지막한 언덕 공작봉(孔雀峰)이다.
이승만은 동행한 육군공병감 엄홍섭(嚴鴻燮)에게 말했다.
“저 자리엔 내가 들어갈 수 없겠나?” 뒷날 자신이 죽으면 그곳에 묻히겠다고 했다.
그리고는 갈 때마다 지관 등에게 "저기가 내가 묻힐 데야"라며 자신의 선택에 논평을 구하는 것이었다.
전체 43만평중 공작봉 허리 3백평, 이곳을 두고 지관 지창용(池昌龍=당시 44)씨는 “구름 속의 선인이 은하를 굽어보는 휴식처요, 항상 괴어있는 푸른 물을 내려다보는 명당”이라며 “이박사가 지관으로서도 식견이 높다”고 감탄했다고 한다. ([조선일보] 1965.7.27.)
그리하여 11년후 이승만의 임종 직전 7월2일 프란체스카는 남편의 묘역에 대하여 한국정부에 진정서를 냈다. 장지를 검토하던 정부가 프란체스카의 진정과 이종태 묘지 관리소장이 ’이박사 묘역은 공작봉’임을 알려줌으로써 이의 없이 정지공사에 들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호랑이도 죽을 때는 제굴을 찾는다”며 고국 땅을 그렸던 90세 늙은 호랑이는 그토록 아끼고 사랑했던 국군용사들의 품 속에 자신의 굴을 스스로 마련하여 함께 묻히는 기쁨을 누린다.
특히 이승만이 1955년 7월15일 ‘국군묘지관리소’로 조성한 이곳을, 10년후 박정희 정부는 1965년 3월 30일 ‘국립묘지’로 승격시킨다. 그것은 이승만 별세 4개월 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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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산인해를 이룬 이승만 전대통령의 장례식 영구행열과 추모 시민들..
◆해방후 최대 인파...만장 574개...장장 15㎞ 도보 행진
모든 것은 국민들이 증명하였다. 국장이냐 국민장이냐 시비조차 부질없다는 것을!
이화장에서 동작동 국립묘지까지 장장 15㎞ 서울 장안을 뒤덮은 수백만 인파가 이승만의 죽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통곡으로 웅변하고 있었다. 실로 국장보다 더 장엄한 가족장이다.
7월27일 그날 아침 8시, 이화장을 출발한 영구행렬은 도보로 종로를 지나 광화문으로, 서대문을 돌아 정동으로 꺾어져 이화학당을 지나 이승만의 배재학당 앞 정동교회로 들어간다.
◉정동교회 장례예배=오전 10시 40분 정동교회에서 베풀어진 ‘전 대통령 고 이승만 장노(長老) 장례식’은 김광우(金光祐)목사의 주례로, 유족을 비롯하여 정일권 국무총리와 3부요인들, 윤보선, 장면, 박순천, 허정, 변영태, 김활란, 이범석, 장택상, 전진한씨 등 제씨, 각군 참모총장, 주한외교사절, 교인들이 참석, 약 1시간 15분동안 엄숙히 거행되었다.
이 자리에서 김활란 박사는 조사에서 “이역 땅에서 외롭게 계시다가 쓸쓸히 세상을 떠나신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메어지는 것 같다”고 흐느끼면서 “이박사의 독립정신, 애국정신을 본받아 하루빨리 통일을 이룩하자”고 말했다. 제헌동지회 대표 이인의 조사가 이어지고, 소프라노 김천애, 이인숙 양의 특별 찬송이 이승만의 영혼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하늘길을 열었다.
◉시청앞 육성녹음 행사 취소=청년 이승만이 일본-러시아와 싸우던 정동길을 나온 영구 행렬은 시청 앞으로 향하였으나 나아갈 수가 없다. 광장을 꽉 메우고 건물마다 가로수마다 사람 열매가 주렁주렁 열린 연도를 뚫고 나왔으나 인파와 경찰의 몸싸움에 가로막힌다.
“나는 이승만입니다. 해내외 동포여 일어나라. 왜적과 싸우고 싸우라”
1942년 이승만의 VOA 육성방송을 틀었으나 준비했던 행사를 치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안됩니다. 압사사고 납니다” 경찰의 애원에 부득이 행사를 포기하고 행렬은 남대문으로 서울역으로 도보행진을 계속한다.
운구행렬만 1㎞, 박정희 대통령과 존슨 미국대통령, 장개석 자유중국총통 등이 보낸 조화를 앞세우고, 이박사 생전의 측근자 남녀 3백명이 관을 메고 행진한다. 그 뒤에는 상주, 복상인, 3부요인, 주한외교사절, 각계 대표들이 따랐다.
“만장의 숲”이라고 [동아일보]가 썼듯이 만장(輓章)이 무려 574개, 이승만의 갖가지 공적을 칭송하고 이역만리 서거를 애도하는 명문들이 적힌 비단 깃발을 높이 든 배재고교 학생들의 행진은 조선 제왕들의 그것보다 만장이 엄청 많고 장엄하기 그지없다고 국내외 기자들이 기사를 날린다.
차도를 꽉 메운채 영구행렬을 따라가는 국민들, 연신 울고 있는 남녀노소는 대부분 하얀 소복차림이다. 시민들은 전국민이 상복을 입고 상주들이 된 것처럼 애통해한다고 말했다.
글자 그대로 인산인해(人山人海), 경찰은 “해방후 최대의 인파”라고 발표, 사람 수를 계산할 엄두도 못 낸다며 땀을 훔쳤다. 그 틈에 소매치기 날치기 등도 1백여건이 넘는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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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작동 국군묘지로 향하는 이승만 영정과 574개의 만장 행열.ⓒ동아DB
◉국립묘지 마지막 영결식=오후 4시 장장 8시간 도보행진 끝에 드디어 국립묘지에 도착한 이승만의 유해는 용사문 앞에 마련된 안치소에 놓여졌다가 공작봉으로 향하였다.
그때 난데없이 비가 한차례 내렸다. 국립묘지를 뒤덮은 시민들은 “하늘의 슬픔이요, 묘지에 누워있는 용사들의 눈물이라, 국군의 아버지 이승만 대통령을 맞이하는 아들들의 눈물”이라고들 말했다.
이윽고 공작봉 중턱 묘역에서 수만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간소한 영결식이 엄수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 이효상 국회의장, 변영태 전국무총리의 조사가 이어졌고 주한외교사절들도 추모의 꽃을 바쳤다. 호상 변영태는 “그렇게 그리던 고국땅에 돌아온 이박사, 잠깐이라도 눈을 떠 우리를 보아주시고 잠드소서”라며 격하게 흐느꼈다.
숭의여고생들의 조가(弔歌) 합창에 이어 21발의 조포가 동작 산허리를 울리자 놀란 비둘기떼가 묘지를 감돌았다.
드디어 하관(下棺)이다. 5색 만기(輓旗)가 공작봉 유택을 둥글게 감싼 가운데, 미리 파놓은 황토색 광중(壙中)에는 노란 국화로 만들어진 황십자가의 꽃밭이 펼쳐지고 애국가 연주가 울려퍼진다. 그 흙 속으로 대형 태극기에 덮인 이승만의 영구가 천천히 내려가고 있다.
지상에서 영원히 사라지는 거인의 마지막 모습! 상주 이인수부터 하토(下土)를 시작한다.
한 삽...두 삽...붉은 황토가 이승만의 관 위에 떨어진다. 각계 대표들의 흙이 관을 완전히 덮어 버릴 때 진혼의 나팔 소리가 영원한 평화의 멜로디를 길게 길게 부르짖는다.
1965년 7월27일 오후5시45분, 건국대통령 90년 4개월의 인생이 이렇게 흙으로 돌아갔다.
‘통일 미치광이’ 이승만이 끝내 통일을 못 보고 지하에 묻힌 이날은 얄궂게도 판문점 휴전협정 체결 12주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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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청앞 광장을 메운 추모 국민들. 경찰은 "해방후 최대인파"라고 발표했다.
★허정의 조사 “자진 하야는 선생만이 가능한 결단”
이승만 대통령의 영결식에 올린 추도사 중에 허정의 추도사가 핵심을 잘 표현하여 요점만 읽어보자. 평생 독립운동과 국정운영을 함께 했던 동지의 사심없는 평가로 돋보인다.
"선생은 이 나라 민주주의의 확립자이십니다. 비록 몇몇 사람들의 불민한 과오로 인하여, 국부로서 만민의 추앙을 받는데 흠을 끼치기는 했을망정, 일제의 질곡에서 광복된 조국을 반공·반탁·자유·민주의 독립 국가로 창건하여 국기(國基)를 공고한 반석 위에 세우신 그 위대한 업적은 한국의 근대사를 길이 빛낼 것입니다…(중략)
선생은 민의를 존중하는 정치인이었습니다. 부정선거에 항거하는 4·19의 노도가 장안을 휩쓸 때, 비로소 민의의 소재를 정확히 파악한 선생은 ‘부정을 보고 일어서지 않는 백성은 죽은 것’이라고 하시면서 깨끗이 권부(權府)를 물러나시지 않았습니까. 젊은 학생들의 애국 기상을 가상히 여기시고 ‘국민이 원한다면 사퇴하겠다’면서 자진해서 대통령직을 내던지시고 하야하심은 선생이 아니고서는 하지 못할 결단이었습니다." (한국일보, 1965년 7월 20일, 특별부록).
◆박정희 조사 “건국대통령 이승만은 조국 근대화의 상징”
한 시대의 태양이 저물고 새로운 시대의 해가 솟아오른 대한민국!
‘이승만 시대’가 가고 ‘박정희 시대’가 궤도에 올라 맹렬한 기세로 달리고 있는 날이다.
그 두 시대 사이 ‘이승만을 저주’하던 민주당 시대는 박정희 쿠데타에 찍혀 9개월 단명으로 끝나버렸다. 그런 민주당 지도층 윤보선, 장면도 이승만 장례식에 참석하여 고개를 숙였다. 이승만 대통령이 서울시장-상공부장관을 시킨 윤보선이오, 국무총리로 기용했던 장면인데, 추도사는 한 마디도 하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이에 비해 박정희는 후배 대통령으로서 건국대통령 이승만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다만 조사(弔辭)를 써서 정일권 총리에게 대신 읽으라 했는데, 그 내용을 보면 박정희의 이승만 관(觀)이 어떻게 변했는지 한눈에 드러나므로 다시 읽어볼 가치가 크다.
▶박정희 대통령의 조사 전문◀
조국독립운동의 원훈이요, 초대 건국대통령이신 고(故) 우남 이승만 박사 영전에
정성껏 분향하고 엄숙한 마음으로 삼가 조사를 드립니다.
돌아보건대 한마디로 끊어 파란만장의 기구한 일생이었습니다.
과연 역사를 헤치고 나타나, 몸소 역사를 짓고 역사 위에 숱한 교훈을 남기고 가신
조국 근대화의 상징적 존재로서의 박사께서는
이제 모든 영욕(榮辱)의 진세인연(塵世因緣)을 끓어버리고 영원한 고향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생전의 일동일정(一動一靜)이 범인용부(凡人庸夫)와 같지 아니하여
실로 조국의 명암과 민족의 안위에 직접적으로 연결되었던 세기적(世紀的) 인물이었으므로
박사의 최후조차 우리들에게 주는 충격이 이같이 심대한 것임을 외면할 길이 없습니다.
일찍이 대한제국의 국운이 기울어가는 것을 보고 용감히 뛰쳐 나서
조국의 개화와 반제국주의 투쟁을 감행하던 날,
몸을 철쇄로 묶이고 발길을 형극(荊棘)으로 가로막던 것은
오히려 선구자만이 누릴 수 있는 영광의 특전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일제의 침략에 쫓겨 해외의 망명생활 30여 성상에
문자 그대로 혹은 바람을 씹고 이슬 위에 잠자면서 동분서주로 쉴 날이 없었고
또 혹은 섶 위에 누워 쓸개를 씹으면서 조국광복을 맹서하고 원했던 것도
그 또한 혁명아만이 맛볼 수 있는 명예로운 향연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마침내 70노구로 광복된 조국에 돌아와 그나마 분단된 국토위에서
안으로는 사상의 혼란과 밖으로는 국제의 알력 속에서도
만난(萬難)을 헤치고 새 나라를 세워 민족과 국가의 방향을 제시하여
민주한국독립사의 제1장을 장식한 것이야말로
오직 건국인(建國人)만이 기록할 수 있는 불후의 금문자(金文字)였던 것입니다.
이같이 박사께서는 선구자로, 혁명아로, 건국인으로
다만 조국의 개화, 조국의 독립, 또 조국의 발전만을 위하여 노역(勞役)을 즐거움으로 여겼고
또 헌신의 성과를 스스로 거두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평생 견지하신 민족정기에 입각하여
항일반공(抗日反共)의 뚜렷한 정치노선을 신조로 부동자세를 취해왔거니와,
그것은 어디까지나 박사의 국가적 경륜이었고 또 그중에서도
평화선의 설정, 반공포로의 석방 등은 세계를 놀라게 한 정치적 과단력(果斷力)의 역사적 발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집권 12년의 종말에 이르러 이미 세상이 다 아는 이른바 정치적 과오로 인하여
살아서 역사의 심판을 받었던 그 쓰라린 기록이야말로
박사의 현명을 어지럽게 한 간신배들의 가증한 소치였을망정
구경(究竟)에는 박사의 일생에 씻지 못할 오점이 되었던 것을 통탄해 마지 못하는 바입니다.
하지만 오늘 이 자리에서 다시 한번 헤아려보면,
그것이 결코 박사의 민족을 위한 생애 중의 어느 일부분일망정 전체가 아닌 것이요.
또 외부적인 실정(失政) 책임으로써 박사의 내면적인 애국정신을 말살하지는 못할 것이라 생각하며,
또 일찍이 말씀하신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귀국 제일성은
오늘도 오히려 이 나라 국민들에게 들려주시는 최후의 유언(遺言)과 같이 받아들여
민족 사활(死活)의 잠언(箴言)으로 삼으려는 것입니다,
어쨌든 박사께서는 개인적으로나 민족적으로나 세기적 비극의 주인공이었던 것을 헤아리면
충심으로 뜨거운 눈물을 같이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마는,
그보다는 조국의 헌정사상에 최후의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어린 양(羊)의 존재가 되심으로써
개인적으로는 ‘한국의 위인’이란 거룩한 명예를 되살리시고
민족적으로는 다시 이 땅에 4.19나 5.16 같은 역사적 고민이 나타나지 않도록 보살피시어
자주독립의 정신과 반공투쟁을 위한 선구자로서 길이 길잡이가 되어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다만 여기 여러가지 사정으로 말미암아, 박사로 하여금 그토록 오매불망하시던 고국 땅에서 임종하실 수 있는 최선의 기회를 드리지 못하고,
이역만리의 쓸쓸한 해빈(海濱)에서 고독하게 최후를 마치게 한 것을 마음 아프게 생각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또 박사에 대한 경의(敬意)로 그 유택을 국립묘지에서도 가장 길지(吉地)를 택하여 유해를 안장해 드리고자 합니다.
생전에 손수 창군(創軍)하시고 또 그들로써 공산침략을 격파하여 세계에 이름을 날렸던
바로 그 국군장병들의 영령들과 함께 길이 이 나라의 호국신(護國神)이 되셔서
민족의 다난한 앞길을 열어주시는 힘이 되실 것을 믿고, 삼가 두 손을 모아 명복을 비는 동시에
유가족 위에도 신의 가호가 같이 하시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1965년 7월27일 대통령 박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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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19 데모의 주동자 등 4.19세대 50여명이 2023년 3월26일 이승만 전대통령의 생일을 맞아 동작동 현충원 이승만 묘소를 참배하고 "화해와 통합'의 기념식을 거행하였다. ⓒ뉴데일리DB
★박정희 “이승만 건국대통령은 선구자, 혁명아, 건국인”...과오도 지적
알려진 바 당대의 시인 이은상(李殷相)에게 의뢰했다는 조사는, 그 내용에 있어서 군인대통령 박정희 특유의 언어들이 펄펄 살아 숨쉬고 있다.
박정희의 구술을 받아 작성했기 때문일 것이다. 한마디로 ‘영웅이 영웅을 알아본다’는 옛문헌 ‘同明相見 同音相聞 同志相從’ 그대로이다.
현명함이 같기에 서로가 한눈에 다 알아보고, 주장이 서로 통하고 뜻이 같아 따르는 동지들끼리만이 가능한 대화! 죽은 영웅에게 산 영웅이 바치는 헌사들이다.
◉명쾌한 평가=이승만 집권 12년간의 공과(功過)를 아울러 분명한 평가를 내리고 있다. 박정희는 이승만을 ‘선구자, 혁명아, 건국인’으로 규정, 독립운동과 건국 및 호국과 안보의 공훈을 아낌없이 기리면서, 말년의 ‘씻을 수 없는 과오‘를 지적하여 국가를 위한 긍정적 자산으로 소화시키려 했다. 즉, 4.19이후 민주당시대 중상모략으로 왜곡되었던 이승만의 진면목을 새로 불러내 공정한 역사적 가치부여를 함으로써, 한시대를 객관적으로 정리하려 시도하였다.
첫째, 선구적 혁명아 이승만을 ’조국근대화의 상징적 존재‘로 내세운다. 박정희 자신이 ’조국 근대화‘의 깃발을 들고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그 국가적 목표를 동일시 일체화함으로써 ’세기적 인물‘ 이승만의 유업을 계승하겠다는 의지를 박정희는 천명한 것이다.
둘째, 강대국에 대한 반제국주의 투쟁과 ’항일반공‘의 초지일관 민주화 원칙을 고수하겠다고 선언, ’반공을 국시‘로 내건 군사혁명 노선을 재확인한다.
셋째,. 이승만의 유명한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민족생존의 통합정신을 새로운 국가건설의 ’잠언‘으로 삼아 성공시키겠다는 결의를 다짐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병상의 이승만을 제때에 환국시키지 못한 안타까움을 다시 한번 토로하고 있다. 이와 관련 당시 비화를 김종필(金鐘泌)이 그의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알려진 것과 달리 박정희는 이승만을 귀국시키려 노력했다는 이야기이다.
"62년 11월 중앙정보부장이던 나는 미국무부와 중앙정보국(CIA) 초청으로 방미할 때 하와이에 들렀다. 호놀룰루 공항에 내리자마자 요양원에 입원하고 있는 이승만 전 대통령을 찾아갔다. 이 대통령은 내 가슴께까지 닿는 높은 철침대에 누워서 눈을 감은 채 신음하였다. 양팔은 깁스를 한 채 끈으로 묶여 천장에 매달려 있었다. 평소 검소했던 프란체스카 여사는 10~20달러만 주면 살 만한 원피스를 입고 눈물을 글썽이며 옆에 서 있었다. ‘대통령께서 왜 이렇게 되셨느냐’고 물으니 이 대통령이 바로 전날 ‘내가 여기 왜 있어, 서울 가, 서울에 갈 거야’라면서 침대에서 일어나려다 낙상(落傷)했다는 것이다.
나는 한참을 서 있다가, 호주머니에서 현금 2만 달러를 꺼냈다.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이 챙겨준 돈이었다. 그는 ‘이거 열 배를 해드려도 모자랄 텐데 아쉬우나마 프란체스카 여사에게 드리라’고 지시했다. 돈을 받아 든 프란체스카 여사가 울먹이더니 눈물을 터뜨렸다.
박 의장은 출국 전 나에게 ‘하와이에 가서 우남의 환국을 추진해 보라’는 특명과 함께 돈을 주었고, ‘이 박사가 돌아오시겠다고 하면 정중히 모시라’고 말했다. 나는 미국인 요양원장에게 ‘서울로 모셨으면 좋겠다. 본인도 가고 싶어 하시고 한국의 지도자도 이 대통령을 모시길 원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요양원장은 난색을 표했다. ‘지금 비행기를 타면 그 자리에서 돌아가신다. 상당 기간 여기 누워 있어야 한다.’
숙소에 돌아와 박 의장에게 내가 본 상황을 전하니 한참동안 아무 말도 않고 계셨다. 박 의장은 ‘그렇게 위독한가, 내가 이 박사를 꼭 환국하게 해드리겠다고 전하라’고 당부했다...“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笑而不答)] 중앙일보사, 2016).
살피건대, 박정희 대통령의 조사는 먼저 가는 ’한국의 위인‘에게 바치는 겉치레 말잔치가 아니다.
“헌정사상에 최후의 십자가를 지고 가신 어린 양”이란 기독교적 언사에서, 박정희 내면에 다진 조국 근대화에 대한 ’십자가적 헌신’이란 사명의식이 그대로 엿보이지 않는가.
아마도 박정희도 김인서 목사의 책 [망명노인 이승만박사를 변호함]을 읽었음이 분명해 보인다. 김인서는 결론 부분에서 이승만 대통령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속죄제(贖罪祭)에서는 양 두 마리를 택하여, 하나는 신에게 제물로 드리고, 다른 하나에는 전민족의 각가지 죄액(罪厄)을 다 지워서 광야로 쫓아 보내는데, 이 양을 아사셀(Azazel)이라 이른다. 아사셀은 세상의 죄를 다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의 상징이다. 이승만도 한민족의 죄액을 걸머지고 가는 한국의 아사셀 ‘액막이’라 할 수 있다. 이승만은 자유당이 저지른 죄를 뒤집어쓰고, 민주당이 씌운 저주의 사슬에 칭칭 감긴 채, 언론이 날마다 휘갈긴 채찍질의 피를 흘리며, 국민들의 죄까지 몽땅 한 몸에 짊어지고 갔다....이 사람을 보라! 그 흰머리에 가시관을 쓰고 늙은 몸에 십자가를 메고 가는 대한민국의 건국대통령을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는 유대인들이 ‘죽여달라’ 요구해서 처형되었다.
강도와 예수를 두고 로마 총독이 “누구를 십자가에 매달까?” 물었들 때 유대인들은 ”예수“를 소리쳤던 것이다.
동족들의 ‘저주’로 젊은 생명을 버린 예수는 그러나 사흘 만에 ‘영생의 생명’으로 부활한다. 그가 피 흘려 세상에 뿌린 ‘영원한 구원의 신앙‘은 그 순간부터 서구세계를 구원하게 되는 기적의 새 역사를 창조해 나아간다. 죽음이 두려워 스승을 모른다고 배신했던 베드로 등 제자들이 예수의 ’십자가 신앙‘을 본받아 ’순교의 사도행진‘을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숭만은 어떤가? 자유와 생명의 기독교 신앙으로 대한민국을 부활시키고서도 버림받은 희생양 ’한국의 아사셀‘ 이승만, 그 제자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박정희의 헌사(獻辭)에서 반짝이는 그 희망의 불꽃을 바라본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