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산 의거(3.15)에서 4.19 의거까지 35일간, 이승만 대통령은 과연 ‘부정선거’ 사실을 알았는가, 몰랐는가? 언론보도로만 보면 이승만은 그 기간에 발표한 담화나 성명에서 ‘부정선거’를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는다. 오히려 마산 시위발생 한달 되는 4월15일 이승만은 이런 담화를 발표한다. “공산당이 뒤에서 조종한 혐의가 있다 하니 국민들이 동요하면 공산당에게만 좋은 기회를 만들어주는 것”이라며 “정부도 국민도 심려(深慮)로써 대처하라”는 당부였다. ([조선일보] 4월16일자). 마산에서 김주열을 시체가 발견되자 잠잠해졌던 시위가 다시 확산되어서도 그의 정부에서는 ‘용공 혐의’만 보고하였기 때문이었다.
    ‘간첩 잡는 반공 검사’로 유명한 대공전문가 오제도는 마산사태 수사반을 가동, 김주열 학생의 검시결과 눈에 박힌 ‘최루탄의 의문점’과, 파괴를 수반한 시위 양상에 대하여 “난동 수법이 공산당과 흡사”하다며 “심상찮은 사태”라는 경고를 연발하고 있을 때였다.  
    야당측은 물론 ‘악의적 용공조작’이라며 펄펄 뛰었고, 더 흥분한 데모대는 ‘시위 한달기념 투쟁’을 강화하였으며, 특히 전국 대학 캠퍼스가 뜨겁게 달아오르게 된다.

    이승만 대통령은 정말 이때까지도 최인규의 ‘부정선거’ 범행을 몰라서 이러는가? 알면서 딴청을 부리고 있는 것일까. 여기 그 사실 여부를 엿보게 하는 기록 한 가지를 읽어보자.
    매주 화요일 경무대서 열리는 국무회의록, 4월12일 김주열 시체 발견 다음 날 아침이었다.

    이승만 발언 “선거가 잘못 된 것인가? 선거 때문에 이런 일 생겼다...어린애를 죽여 물에 던져놓고 무슨 소리...대통령이 그만둬야 해결 될 것”  

    제36회 국무회의 / 1960년 4월12일(화) 경무대.
    {필자 주: 당시 국무원 사무처장 신두영(申斗泳,1918~1990)은 1958년 1월부터 1960년 4월 4.19직전까지 국무회의의 모든 내용을 기록한 비망록을 남겼다. 국무회의록은 의결내용만 기록하는 관행과 달리 신두영은 유일하게 모든 발언을 빠짐없이 기록해 사료가치가 높다. 특히 이승만 대통령의 발언에 ‘분부’ ‘하문’(下聞:질문을 내리시다)이란 극존칭을 쓰는 등 당시 분위기를 반영하여 흥미롭기도 하다. ([대한민국 국무회의록 1958~60] 국학자료원, 2023).

    이승만 대통령 “정부가 잘못하는 것인지 민간에서 잘못하는 것인지 몰라도 아직도 그대로 싸우고 있으니, 본래 선거가 잘못 된 것인가” 하시는 하문(下聞).
    홍진기 내무 (마산사건의 진행상황과 경찰의 대비조치를 보고하고)
               “사건의 배후는 다음과 같이 추측하고 있다”고 보고.
               (1) 민주당이 타지방의 데모는 선동하고 있으나 금반 마산사건의 직접 배후라는 확증을 잡지 못하고 있으며,
               (2) 6.25 당시 좌익분자가 노출 소탕되지 않은 지역이니만큼 공산계열의 책동 가능성이 많다고 보며, 따라서 군-경-검의 합동수사반을 파견하여  두려고한다.
    이승만 대통령학생들을 동원하였다고 하는데 사실 여하?” 하시는 하문.
    김정렬 국방 “학생들이 주동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보고.
    최재유 문교 “배후에 공산당이 있어서 조종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며 학교에서 이같은 일을  단속하는 조례를 만들도록 추진 중”이라는 보고.
    이승만 대통령 “그것은 누가 하는 운동인가?” 하시는 하문에
    홍진기 내무 “민주당 신파가 극한투쟁이니 하며 하고 있는 일”이라는 보고.
    이승만 대통령 “그것이 정당 싸움이라고 할 수 있는가?” 하시는 하문에
    홍진기 내무 “소요가 거기에 있다고 본다”는 견해.
    이승만 대통령이번 선거 때문에 그런 일이 생겼다, 즉 선거가 없었으면 잘 되어 갔으리라고 생각할 수가 있을 것인가?” 하시는 하문에
    김정렬 국방 “민주당의 격렬분자의 작란(作亂)이지만 민주주의 발전 과정에 있는      우리나라 실정으로는 완전한 페어 플레이(fair play)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의견. 
    이승만 대통령 “나로서 말하기 부끄러운 일이지만 우리 국민은 아직 민주주의를 해나 가기까지 한참 더 있어야 할 것이며, 정당을 하여 갈 자격이 없다고 보며 정당을 내버리고  새로 XXXX(판독불가) 본다는 것도 생각을 할 수는 있는 일이지만 무슨 생명이  좀 보여야지 그렇지 않으면 마찬가지일 것이며, 어린 아이들을 죽여서 물에 던져  놓고 정당을 말하고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니, 무슨 방법이 있어야 할 것인데 이승만이  대통령을 내놓고 다시 자리를 마련하는 이외에는 도리가 없다고 보는데, 혹시 선거가 잘못되었다고 들은 일이 없는가?” 하시는 하문.
    김정렬 국방 “우리 형편은 안정 요소가 불안정 요소보다 많은 만치, 과히 염려하실 것은 없다고 보며 정부가 너무 유화책을 써온 것이 이같이 된 이유의 하나이기도 하니, 이제는 홍(진기) 내무가 지혜롭게 처리하여 가고 있으니 잘 될 것”이라는 의견.
    곽의영 체신 “국회를 열어놓고 자유당이 손들어서 하나씩 처리하여 가면 되고, 민주당의 데모도 이젠 문제가 안되며 다만 공산당의 책동을 막는 방책이 필요하다‘는 의견.
    송인상 재무 ”정부로서도 이 이상 후퇴할 수 없으니 대책을 강구해 가야 할 것“이라는 의견.
    이승만 대통령 ”가기이방(可欺以方)한 일이 있어야 하지, 지금 말들 하는 것을 들어서는 안정책이 못 된다고 보며, 이 대통령을 싫다고 한다면 여하히 할 것인가를 생각할 필요가 있는데 나로서는 지금 긴급히 또 좋다고 생각하는 것은, 내가 사면(辭免)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씀하시고 ”잘 연구하여 보라“고 분부. 
    (밑줄은 필자. '가기이방'이란 맹자(孟子)에 나오는 말로, 각료들의 의견들이 '이승만 자신의 마음이 솔깃해지는 그럴듯한 방책'이 없다는 표현이다).

  • 이승만, 4.19 일주일 전에 ‘자진 사퇴’를 결심하다

    이승만의 발언이 말해주는 것
    1) 최초의 의문 제기=마산의 유혈사태가 일어난 이후 매주 개최된 국무회의록을 전부 검토해보아도 ’선거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 발언은 없다. 이날 이승만 대통령이 최초로 ’잘못된 선거‘ 여부를 묻고 있다. 그것도 두 번 씩이나 ”선거가 잘못되었다는 말을 들은 일도 없느냐“고까지 추궁하고 있다. 
    2) 김주열의 죽음에 대해서는 이승만이 알고 있다. 그러나 선거부정에 대해서는 모른다는 것은 신문을 보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신문을 보았다면 ’부정‘을 금방 알았을 것인데, 아마도 누군가의 말을 들은 모양이다. 
    3) 장관들이 대통령을 속이고 있다. 최인규의 ’선거계획‘에 동참하고 적극 지원해준 그들은 사실상 ‘부정선거의 장본인’들, 수습책을 묻는 이승만에게 ‘부정’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민주당과 공산당에 책임을 돌린다. (최인규는 3월23일 사퇴로 불참)
    4) 이승만은 ‘어린 아이의 죽음’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긴급하고 가장 좋은 수습책이 대통령의 사퇴“임을 두 번이나 연거푸 제시한다. 이런 이승만이 뒷날 전국적인 부정선거 사실을 알았을 때, 또 경찰 발포로 국민 수백명의 사상자가 나왔을 때 어떤 결심을 하겠는가. 특히 발언 중에 ”이 대통령을 싫다고 한다면“이란 대목이 눈길을 끈다. 이때 이미 ”국민이 원하면 하야“라는 사퇴서의 그 문장이 이승만의 머리 속에 자리잡은 것으로 보인다. 

  • ◆4.19 폭발...”저 사람들이 나를 나가라고 하는 것 같아“

    일찍이 청년 이승만은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거리투쟁에서, 그리고 23세 국회의원이 되어 중추원 회의에서, 입헌군주제를 부르짖으며 왕정개혁과 근대화 정부 설립을 줄곧 요구하였다. 진작부터 ”나보다 무능한 고종황제“에 대한 경멸과 퇴진을 갈구했던 이승만은 연일 연좌농성 투쟁을 벌이면서도 차마 ‘고종 물러가라’는 말은 외치지 못했다. 대안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후 60여년이 흐른 지금 자유당 말기, 이승만은 비로소 자신의 거취에 눈을 뜬 것이었다.

    「이승만박사는 4월초까지도 데모의 진상을 알지 못했다. 경무대에 허위보고만 올라갔으니 당연한 것이었다. 데모는 ‘공산당 짓’이니 ‘북진통일 궐기대회’라느니 기가막힌 허워조작들이었다...김주열군 시체가 떠올라 시위가 격화 확산되는데도 진실을 감추기만 했다...」 (우제하 [경무대 사계]-[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중앙일보사, 1977).
    그리고 일주일후 4월19일 화요일 아침 경무대 소회의실에서 국무회의가 다시 열렸다. 침통한 얼굴로 들어선 이승만 대통령이 자리에 앉으며 입술을 뗀다.
    ”오늘은 내가 무슨 난중(亂中)에 있는 것 같아. 저 사람들이 나를 나가라고 하는 것 같아. 좋게 이 자리를 내놓으려 해. 내가 알고자 하는 것은 무슨 이유인지 무슨 까닭인지 알아야겠다는 거야, 그래야 해결할 것이 아닌가...“ 
    입다문 장관들은 누구 하나 발언할 엄무를 못 내는 것 같았다. 각의는 10시40분쯤 끝났다. 
    이승만은 말미에 다시 각료들을 둘러보며 말한다.
    ”정부를 이렇게 만들어놓은 책임은 누구를 막론하고 그냥 두어서는 안돼. 심상히 넘어가선 안되고 결단을 내려야 해.“ 잠시 각료들을 둘러본 이승만은 부언한다.
    ”무슨 대책을 가져온 것이 있소? 아니지, 당신들과 앉아서 긴 말로 낭비할 시간이 없는 것 같으니, 내가 알아서 해야지.“ 혼잣말로 중얼거린 이승만 대통령은 회의실을 나와버렸다고 한다. 이것이 마지막 국무회의였다. 

  • ◆”뭐? 부정, 부정선거? 후보가 나 혼잔데 왜 부정을 해?“

    마침내 진실의 순간이 왔다. 김정렬 국방장관이 이승만 대통령에게 이실직고하게 된다.
    김정렬 회고록 [항공의 경종] (대희 출판, 2010)에서 그의 증언을 들어본다.
    19일 오전 각의를 마친 김장관은 결재 받을 일이 있어 대통령을 만나고 나와 중앙청 사무실로 가려다가 포기한다. 경무대 경찰 말로는 데모대가 중앙청을 포위하여 들어갈 수 없으니 기다리라고 말렸다. 경무대 대기실에 앉아있던 오후 1시쯤 갑자기 요란한 총소리가 들려왔다.  어? 이건 공포탄 아닌 실탄사격인데? 군출신 그가 놀라 물어보니 시위군중이 경무대 담을 넘으려 해서 반사적으로 실탄를 발포하게 됐다는 말이었다. 곳곳에서 파출소가 불타고 반공연맹 건물이 불타고 경찰의 중앙무기고까지 습격중이라 경찰로선 역부족이라고, 홍진기 내무장관이 “비상계엄령 선포”를 꺼냈다. 망설이던 김장관은 결심하고 대통령 집무실로 들어갔다.
    입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대략 보고한다. 지금 서울 전역에서 데모가 일어났고 방금 경찰이 발포하여 1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것 같다고 보고하자 이승만이 소리쳤다.

    이승만 “비상게엄령 선포? 학생들이 적이란 말인가?”

    “뭐라고? 무슨 데모야? 사상자는 또 왜?” 깜짝 놀란 대통령 앞에서 김장관은 사실대로 말한다. 3.15 선거때 부정이 많았대서 마산을 비롯한 각지에서 시위가 계속된 과정을 설명하자 상기된 대통령의 얼굴에서 경련이 일어난다.
    “뭐? 부정? 부정선거? 아니...후보가 나 혼잔데 무슨 부정선거야? 어엉?”
    “사실은 부통령 선거 때문에 경찰이 잘못 생각해서 그만...죄송, 죄송합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부정선거를 처음 알게된 이날 오후 2시쯤, 경악과 충격에 싸인 이승만은 의자에 주저앉아 무서운 눈길로 쏘아보며 깊은 생각에 잠긴 듯 했다. 대통령의 떨리는 입술이 중얼거린다.
    “국민의 정신이 아직 살아있구먼” 
    김정렬은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었다. 
    “죄송합니다. 사태가 위급하므로 비상계엄령을 허락해 주셔야겠습니다.”
    “이봐, 자네들 비상계엄령이 뭔지나 알고 있나?” 대통령이 어이없는 듯 힐문한다.
    “네, 알고있습니다” 홍진기 내무가 법률가답게 설명을 이어가자 대통령이 말을 잘랐다.
    “아니, 학생들이 적군이란 말인가?” 벼락치는 호통에 홍 내무가 “아닙니다” 고개를 떨군다.
    “그런데 무슨 비상계엄이야? 비상계엄령은 그런데 쓰는 게 아니란 말일세!”
    대통령은 한사코 계엄령 선포를 반대하였다. 경무대 밖의 소란은 더욱 커지기만 한다. 
    두 장관은 되풀이 애원한 끝에 한 시간쯤 지난 뒤 겨우 응락을 받아낸다. 이승만인들 어쩌랴. 계엄사령관은 서울주재 헌병사령관 원용덕, 그리고 얼마후 전국 주요도시로 비상계엄령을 확대하며 육군참모총장 송요찬으로 바뀐다.

  • ◆장관들이 저지른 국가범죄, 대통령이 수습하다

    사태의 진상을 확인하자 이승만은 서두른다. 풍비박산 직전의 나라를 지켜야 할 임무는 대통령 이승만 밖에 없었다. 엄청난 범죄를 감행하고도 수습책조차 못 찾는 오합지졸들을 다구쳐서 어쩌겠는가. 일주일전 각의에서 제시한 ‘대통령 사임’의 결심을 굳힌 이승만은 차근차근 수습의 절차를 시작한다. 
    이박사는 원래 자신의 계획을 남에게 말하거나 의논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고집이 센 반면에 옳은 말이라면 깨끗이 받아들이는 담백함을 겸비한 이박사는 상황을 파악하면 주저없이 특유의 전략전술로 해결해 내는 지도자였다.(허정 회고록 [내일을위한 증언] 샘터사, 1979)

    “한인이 한인을 살해하는 참혹-악독한 사태 통곡할 일”

    다음날 이승만은 ‘심대한 충격’과 계엄 수습과 대미관계에도 신경 쓴 담화를 연속 발표힌다.
    ◉“나의 전생애를 바쳐온 애국적인 한국인으로서 그러한 행동을 취할 수 있었다니 믿지 못할 일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 원인을 논하거나 책임을 묻고자 할 때가 아니다. 급선무는 법과 질서를 회복하여 계엄령의 필요성이 없어지게 하는 것이다...질서가 회복되면 정부는 이번 소요 사건의 조사에 최대의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 죄가 있는 사람들은 벌을 받을 것이며 불평의 원인이 있으면 다 시정될 것이다.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고 부상을 당하고 피를 흘렸으며 많은 손해를 입게된 것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는 바이다. 부상자들 가운데 두 사람의 미국인이 끼어있음을 심히 유감으로 여기는 바이다. 이 쓰라린 경험을 통해서 우리 국민이 큰 교훈을 얻게 되었으며 정의의 원칙에 충실한 일치단결된 국민으로서 전진할 수 있게 되기를 오직 바라는 바이다.” (20일 담화)
    ◉“이번에 내가 처음으로 놀랍게 본 것은 지난 19일에 한인이 한인을 살해하며 한국을 결단내려는 악독하고 참혹한 광경이었으니 나로서는 통곡을 아니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여기에 대해서는 종차 이야기하게 될 것이며 지금은 아직도 죽은 사람들을 다 묻지도 못하고 있는 형편이니 사랑하는 동포들에게 무슨 말로 위로와 도움을 줄 수 있을지 모르는 것이다. 우리가 급히 해야 할 것은 죽은 사람이나 산 사람들을 생각해서라도 계엄령을 하루 속히 해제해서 사람들이 살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므로...”(21일 담화)

  • 변영태-허정에게 입각 요구, 후계내각을 만들다

    동시에 이승만은 21일 뒷수습과 정권 인계를 논의하기 위하여 재야 동지들을 경무대로 불렀다. 김병로(전 대법원장), 이범석(초대 총리), 변영태(전 외무장관-총리), 허정(전 서울시장) 등이다. 밤까지도 연락이 닿지 않던 허정과 변영태가 다음 날에야 나타났다.
    “미스터 허와 미스터 변 두 사람이 다 들어와서 나와 함께 시국을 수습해야겠어.”
    경무대 뜨락 조그만 정자에 둘러앉은 이승만이 재촉한다. 이미 수습책을 작정해놓은 대통령은 오랜 동지 후배들에게 “좋은 의견”을 말해달라고 했다. 의견들은 이심전심(以心傳心) 대동소이였다. 허정은 *이기붕의 부통령 당선을 즉시 무효화하고 재선거를 실시할 것. *대통령이 자유당총재직을 버리고 초당적 위치에서 수습할 것. *거국내각을 수립하여 민심을 단합할 것 등을 건의한다.(허정 회고록, 앞의 책).
    변영태는 “이기붕의 즉각 사퇴없이는 국민을 진정시킬 수 없다”고 강조하였다. 이승만은 “나의 의견과 대체로 일치한다”고 동의했다고 했다. 
    경무대를 나온 변영태는 기자들에게 “대통령은 이번 사태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으며, 공산당이 선동했다고 믿지않고 있다”고 전하면서 “이박사는 어떤 중요한 결정에 도달”한 것 같았으며 조금도 동요하는 빛이 없고 “오히려 냉정하고 침착한 태도였다”고 전했다. 변영태는 입각을 사양하고 허정은 대통령이 자신의 요구조건을 수용하면 입각하겠다고 말하고 경무대를 나왔다. ([조선일보] 4.22).

    이기붕 “사퇴고려” 성명...이승만 “그만둔다면 그만둬야지 ‘고려’는 뭐야?”

    중앙청 회의실에서 침식을 같이 하는 장관들은 이기붕 부통령 당선자를 사퇴시키는 방안을 두고 설왕설래하다가 김정렬과 홍진기 두 장관을 서대문으로 떠밀었다. 두 사람이 의장공관에 달려가 이기붕을 만났다. 대통령의 뜻이 ‘당선 사퇴’임을 전하자 이기붕이 소파에 쓰러진다.
    “아이고 살았네, 살았어. 내가 그런 재목이 못되지 않나. 자네들 덕분에 살았네”
    병약한 이기붕은 그렇게 말한 다음날 경무대로 달려가 대통령의 뜻을 확인한 뒤에 다음과 같은 짧은 성명을 발표하였다.
    “본인은 현사태의 수습과 정국의 안정을 기하기 위하여 보수세력의 합동으로써 정당을 개편하고 내각책임제를 기조로한 정치제도의 개혁을 고려한다. 이점에 있어서는 우리 당의 총재인 이대통령과도 합의을 본 바 있다. 본인은 부통령의 당선을 사퇴할 것도 고려한다”([조선일보] 4.23)
    신문들은 ‘이기붕 사퇴’ 뉴스를 호외로 찍어 뿌리고 시위대는 만세를 불렀지만 다음 순간, ‘사퇴’가 아니라 ‘사퇴 고려’란 단어에 금방 시위가 격화되어 버린다. 장면은 같은 날 ”부통령직 사퇴’를 발표하였기에 이기붕의 성명이 더욱 민심의 분노를 불지른 것이었다. 

    이승만은 “그만 둔다면 그만 둬야지 ‘고려’는 또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 격노하였다.
    이기붕의 변명에 의하면, 사퇴성명을 만들라고 비서실장 한갑수에게 지시하였는데, 그때 서대문에 모여있던 강경파 한희석 등이 읽어보고 “수습하고 사퇴해야 한다‘며 수정했다고 한다. ([조선일보] 4.24). 
    이대통령은 다음날도 변영태와 허정을 불러들여 약 3시간동안 ’대통령 사퇴후의 대책‘을 논의하면서도 자신의 ’자진 하야‘에 대한 의사는 한마디도 비추지 않았다고 한다. 이기붕은 결국 24일에야 ’부통령 당선‘과 국회의장직까지 모든 공직 사퇴를 발표한다.

  • ◆“장하다...내가 맞을 총알을 학생들이 맞았어...내가 그만두면 더 안다치겠지”

    4월23일 이승만 대통령은 서울대 병원으로 부상자들을 찾아갔다.
    「이대통령은 23일 하오 5시35분 송요찬 계엄사령관과 박찬일 비서관 및 곽영주 경무관을 대동하고 아무런 에고도 없이 서울대학교 부속병원을 방문, 입원가료종인 4.19사건 부상자들을 위문하였다. 이동식 의사와 간호과장 유순한씨의 안내를 받은 이대통령은 먼저 수술환자들의 회복실에 들어가 부상환자들의 상처를 일일이 돌보고 이마를 짚어보면서 ”하루 속히 낫도록 하라“고 위로하였다. 입원실을 돌아보는 이대통령의 이날 모습은 시종 침통해보였으며 ”환자들이 무엇을 먹든가 모든 것을 잘들 해주어“ 하면서 유 간호과장에게 당부하였다.」 ([조선일보] 4.23)
    부상자들의 손을 잡아주며 눈물을 흘린 이승만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장하다. 젊은이들이 불의를 보고 일어서지 않으면 젊은이가 아니지. 나도 젊을 때 그랬으니까...장하다, 참으로 장하다“ 연신 중얼거린 이승만은 경무대로 돌아오자 부인 프란체스카에게 푸념처럼 쏟아놓는다.
    ”마미, 내가 맞을 총알을 젊은이들이 맞았어, 내가 맞을 총알을 학생들이 맞았단 말이야. 내가 그만두면 청년들이 더 다치지 않겠지. 서둘러야 해. 내가 그만둬야지.“ 

    자유당과 절연=이튿날 24일 이승만은 “자유당에서 완전히 손을 떼겠다”고 선언한다. 이미 제출한 국무위원들의 사표를 수리하고, 자유당 간부들을 불러 총재직 사퇴 통고하였다. 담화 요지는 “모든 정당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해나가기 위해 전심을 다하기 바라며 행정부는 완전히 정당활동으로부터 분리되기 바란다”로 말하고 “국민의 신뢰와 존경을 받는 사람들만이 정부에 들어와 일하게 될 것”이라고 다짐하는 담화를 낸다. ([조선일보] 4.25)
    “지난 4월19일에 일어난 놀라운 사태는 우리 국민들의 가슴에 깊은 성처를 남겨주었으며 나라가 뒤흔들려 우리의 명예도 많이 상한 것이니, 특히 고귀한 인명이 많이 희생된데 대하여는 말로 다 할수 없이 슬퍼하는 바이다. 죽은 사람들이 한조상으로부터 내려온 동족이며 그들의 죽음을 슬퍼하는 존친들의 슬픔은 곧 우리 모든 동포들의 슬픔인 것이다. 우리는 특히 생명을잃은 젊은 사람들의 부모와 형제자매들에게 무한한 동정을 금할 수 없는 바이며 둥시에 부상자들이 하루 빨리 회복되기를 기도하며 이런 쓰라리고 명예롭지 못한 일이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기를 하나님께 기도하는 바이다...(중략)...이번 사태에 관계된 범법자들을 처벌하는데 있어서도 공정히 처리할 것이며 아무런 보복행위도 원치 않으나 살인한 자와 파괴한 자는 엄중히 처벌해서 모든 국민들의 신망을 받는 정부를 이루어야 할 것이니...자유와 민주주의 원칙으로 국토통일을 위하여 확고한 기반을 닦고 정부안에 질서를 바로 잡으면 국민의 사기를 높여서 국력을 발전시킬 것으로 믿는 바이다...”
    허정 수반 과도내각 발표=허정이 드디어 입각을 수락하였다. 이승만은 허정을 외무장관으로 하는 새로운 정부를 구성한다. 대통령이 없는 정부의 수반은 수석국무위원 외무장관이므로 평생 믿어온 ’독립운동의 동지‘이자 후배인 허정을 ’과도내각의 수반‘으로 앉힌 것이었다.
    뒷날 허정은 회고한다. “이승만 대통령 하에서 외무장관인 줄 알았더니 다음날 대통령이 ’자진 사퇴‘를 발표하여 큰 충격을 받아 사퇴하려 하였지만 이미 늦었다” (허정, 앞의 책)
    대학교수들 데모=같은 날 25일 오후3시 대학교수들이 시위에 나섰다. 서울대학교 교수회관에 모여든 교수 258명은 “장래의 일꾼 학생들이 흘린 피를 헛되이 해서는 안된다”는 시국선언문을 낭독 결의한뒤 태극기와 플래카드를 들고 계엄령이 삼엄한 거리를 행진하였다. “학생의 피에 보답하자’는 플래카드를 보자 학생들과 시민들이 몰려들어 함께 시위를 했다. 단장을 짚은 노교수를 따르는 교수들은 국회의사당 앞에서 구호를 외치고 만세를 부른 뒤 해산했다.

  • ◆“국민이 원하면 사퇴한다”...하야성명이 나오기까지

    새로운 역사를 쓴 그날 26일, 새 정부의 외무장관이 된 허정은 날이 밝자 경무대로 달려갔다. 
    이른 아침 어수선한 경무대에서 밤잠을 설친 듯 충혈된 눈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비서에게 무언가 구술하고 있었다. 바로 대통령 사퇴성명서를 작성하는 중이었다. 곁에는 김정렬 국방장관도 있었다. 밤새 각료 인선을 모두 마친 이승만이 비서관에게 국민을 향한 마지막 성명서를 부르고 있었던 장면이다. 이 과정은 김정렬 회고록 [항공의 경종]에 비교적 상세히 나온다.
    성명서 작성과정=중앙청 국무회의실에서 침식을 해온 김장관은 잠이 깨어 경무대로 가려고 나설 때 매카나기 미대사의 전화를 받았다. 
    “대통령을 뵙고자 하니 장관께서 주선해주시기 바랍니다”
    “아니, 대사께서 직접 경무대로 연락하면 되지 않습니까?”
    ”수석비서에게 연락해두었는데 아직도 승낙의 전언(傳言)이 없습니다“
    ”내가 지금 바쁘니 기회를 봐서 말씀드리고 전언해 드리지요“
    김장관은 서둘러 경무대로 올라갔다. 이승만 대통령에게 ”오늘은 평온합니다“ 보고한다. 
    ”그래, 오늘은 한사람도 다치게 해서는 안되네“ 이승만이 다짐하듯 힘주어 말했다.
    김정렬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가슴이 아프다. 왜냐하면 이승만이 서울대 병원을 다녀온 뒤로 볼 때마다 되풀이한 말이기 때문이다. 그날 부상학생들을 만나고 돌아온 이승만은 실성한 사람 같았다.
    ”학생들이 왜 이렇게 되었어? 부정을 왜 한거야? 암! 부정을 보고 일어서지 않는 백성은 죽은 
    백성이지. 젊은 학생들은 참으로 장하고 장하다” 그러면서 “앞으로 한사람도 더 다치면 안되네”를 지시처럼 다짐처럼 반복했던 대통령이었다. 
    그 대통령이 말 없는 김정렬의 어깨를 꽉 잡더니 결심한 듯 이렇게 물었다.
    “자네 생각은 어떤가? 내가 그만두면 아무도 더 안다치겠지?” .
    김정렬이 대답을 찾는 동안 이승만은 어깨를 흔들었다. 김정렬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게 하지...이것을 속히 알리려면 어떻게 하지?”
    “성명서를 만드셔서 방송을 시키시면...” 국방장관도 목이 메인다.
    “그럼, 그렇게 해야지. 자네들이 만들어봐” 이승만은 박찬일 비서를 불렀다.
    박비서의 요청에 따라 김정렬이 성명서 골자를 더듬더듬 불러줄 때 이승만이 나섰다.
    “자네들 그렇게 하면 안돼, 내가 부를 테니 받아쓰게.” 

    여기서 ’국민이 원하면 하야‘라는 특별성명의 전문을 읽어보자.([조선일보] 4월26일자)
    「나는 해방후 본국에 돌아와서 우리 여러 애국애족하는 동포들과 더불어 잘 지내왔으니 이제는 세상을 떠나도 한이 없으나, 나는 무엇이든지 국민이 원하는 것만 있다면 민의를 따라서 하고자 하는 것이며 또 그렇게 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보고를 들으면 우리 사랑하는 청소년 학도들을 위시해서 우리 애국애족하는 동포들이 내게 몇가지 결심을 요구하고 있다 하니, 내가 아래에서 말하는 바대로 할 것이며,
    한가지 내가 부탁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 동포들이 지금도 38선 이북에서 우리를 침입코자 공산군이 호시탐탐하게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그들에게 기회를 주지 않도록 힘써주기 바라는 바이다.
    1. 국민이 원하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
    2. 3.15 정부통령 선거에 많은 부정이 있었다 하니 선거를 다시하도록 지시하였다.
    3. 선거로 인연한 모든 불미스러운 것을 없게하기 위하여 이미 이기붕 의장에게 공직에서 완전히 물러나도록 하였다.
    4. 내가 이미 합의를 준 것이지만 만일 국민이 원한다면 내각책임제 개헌을 하겠다.」
                                                             
    4개 항목으로 된 특별성명서의 정서를 마치고 박찬일이 대통령에게 낭독한다.  
    “그래 발표하게” 승낙을 받고나서 중앙청에 있는 최치환(崔致煥) 공보실장에게 연락하였고, 26일 아침 10시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 성명’은 전파를 타고 전국에 울려 퍼졌다.

    데모대 대표 면담=방송이 나간지 얼마 후, 송요찬 계엄사령관이 전화로 물었다. 학생대표들이 대통령을 만나고 싶다는 것, 이승만이 허락하여 겸무대로 시위대 대표 3명이 들어왔다.
    그들은 건국대 한규철, 경희대 김효영 및 시민대표 구경석, 경무대 후원으로 들어가 대통령을 만나자 5개항의 요구를 말한다. *3.15선거는 부정선거다. *이대통령은 하야할 것 *악정자는 지체없이 처단할 것 *.치안을 빨리 확보할 것. *학생들에게 빨리 교문을 열어줄 것 등이었다. 누군가 다음 정권은 송요찬 장군에게 물려달라는 말도 했다고 한다. 
    이승만 대통령은 청년들을 보자 대견한 듯 환한 미소로 대답하고 격려하였다.
    “참으로 훌륭한 젊은이들일세. 걱정 말게, 방금 방송으로 다 발표하였으니 들어보면 알 것이네. 돌아가서 용기를 잃지말고 정의를 위해 싸워주게, 나도 자네들처럼 젊었을 때 그랬다네”
    매카나기의 ‘잠꼬대’=송요찬의 학생대표 면담 요청 전화를 받은 김정렬은 문득 매카나기 대사의 요청이 떠올라 대통령에게 문의하고 오케이 싸인이 떨어지자 사람을 키셔 매카니기에게 연락했다. 이승만이 후원으로 나간 얼마후 매카나기와 매그루더 미8군사령관이 겸무대에 나타났다. 매카나기는 대사관 출발 전에 이승만 대통령 하야성명 방송을 들었노라고 호들갑이다.
    이윽고 이승만이 응접실에 들어오자 매카나기는 기분이 좋은 듯 악수를 하며 떠벌린다.
    “대통령 각하께서는 한국의 조지 워싱턴이십니다” 이에 말없이 의자에 앉은 이승만은 천장을 쳐다보며 우리말로 “저 사람 무슨 잠꼬대야” 혼잣말로 중얼거렸다고 한다. ([김정렬 회고록-항공의 경종] 도서출판 대희, 2010)

    미국의 압력=흔히 이승만의 하야 결정이 미국정부의 압력 효과라는 말이 지금도 떠돌고 있다. 당시 민주당이나 지식층에선 미국이 경제원조나 군사압력을 행사하여 이승만을 물러나게 해주기를 은근히 기대하며 미대사관에 전갈하는 움직임이 없지 않았다. 
    그날 이승만의 하야방송이 나가고나서 환호하는 데모군중이 매카나기 승용차가 지나가자 ‘미국 만세’를 연호하고, 매카나기가 손을 흔들어 화답한 것이 그런 분위기를 말해준다.
    미국 정부로서는 이승만이 갈수록 골치덩어리였다. 미국의 원조정책을 거부하며 독자적 경제자립 계획을 추진하고, 남북통일 노력을 채찍질하는 약소국 대통령을 누가 계속 지원하고 싶겠는가. 외교가에선 ‘약소국 친미정권 만들기’ 전문가라는 매카나기를 주한대사로 임명한 것부터가 그렇다고 수근거려 왔다. 이런 배경을 ‘외교 귀신’ 이승만이 모를 리 있겠는가.
    매카나기가 서울에 부임한 것은 1959년 이승만-이기붕의 정부통령 후보가 결정된 6개월후 12월이다. 그는 부임 5개월 만에 3.15부정선거라는 ‘기회’를 잡았던 것이다. 
    4.19 그날 밤 9시, 매카나기는 경무대로 달려와 이승만을 만난다. 같은 무렵, 미국무장관 허터(Christian A. Herter)는 주미한국대사 양유찬을 불러 각서를 전달하였다. “유혈사태를 막고 민주적으로 해결”하라는 각서였다. 허터는 57년부터 한국을 방문하고 한미관계를 조정한 한국통이다. 매카나기는 사흘 연속 경무대를 방문, 각서를 설명하고 수습책을 요구하였다고 보도되었다. 이런 것들이 이승만 대통령을 사퇴시켰다고 야당이 환호한 근거들이다.

    ★4.19 일주일전 4월12일 사퇴결심 공식화
    앞에서 보았듯이 이승만 대통령 사퇴는 4.19 일주일전 4월12일 국무회의에서 이승만 스스로 내놓은 결단이다. 기록상 분명한 것은 미국의 압력에 굴복한 것도 아니고 학생대표들의 요구에 응한 결과도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시차가 말해주지 않는가.
    그 무렵, 이승만의 미국에 대한 감정도 최악의 골목에 쌓여 있었다.
    마산 소요사태 다음 주에 열린 국무회의에서 미국의 군사원조문제를 논의하였을 때, 이승만은 “무기를 우리 손으로 만들 수 있도록 연구해야한다. 잠수정까지도...”라며 ’자주국방‘을 강조하고 있다. (제29회 국무회의, 3월22일)
    또한 4.19직후 21일 매카나기 대사가 경무대로 두번째 찾아와 국무장관의 ’각서‘를 낭독하였을 때 이승만은 즉석에서 반론을 편다. 그 각서가 “진실과 매우 동떨어진 것”이며 “허터 장관도 그동안 너무 친일적이었다“고 노골적인 불만을 토로하였다.
    미국이 이승만을 제거하려는 음모는 오래전 1952년 부산정치파동과 휴전반대 때부터 한시도 멈추지 않은 강대국의 노골적인 패권주의 아니던가. ”너희가 원하는 그것을 내가 해 주마“ 억장이 무너지는 이승만은 그러나 이번에 미국의 꼭두각시 정부로 전락하는 사태만은 반드시 막아놓고 그만두어야 한다. 그것이 뜻을 같이하는 ’허정 내각‘ 출범이었다.

  • ◆”내가 창피해, 내가 창피해, 내가 창피해...“ 사퇴만류 뿌리치다

    ’대통령 하야‘ 방송이 나가자 사람들이 경무대로 몰려들어 사퇴를 만류했다. 초대 총리 이범석은 헐레벌떡 달려와 대통령 손을 잡고 ”지금 하야하는 것이 현명한 수습책이 아니라“면서 진정하시라고 했다. 그러자 이승만은 ”아니야. 내가 창피해, 내가 창피해, 내가 창피해“를 세 번이나 연발하면서 돌아섰다고 한다.  
    그때 데모대가 대통령 목소리로 직접 사퇴한다는 말을 듣기전엔 ”못믿겠다”고 성화를 부렸다. 비서진은 다시 이대통령의 육성 녹음을 해야했다. 아나운서의 사퇴성명 방송이 나간지 한시간 만에 이번엔 이승만 특유의 목소리가 방송 전파를 탄다. (우제하 [경무대 사계] 앞의 책)

    ”걸어서 가겠다“ 몸부림...’관1호‘ 번호판 가리고 경무대 출발

    「...국회는 이승만 박사의 사임, 이기붕씨 일가의 자살, 그리고 ’관제의원들은 즉각 물러가라‘는 일부 여론 등으로 말미암아 걷잡을 수 없는 혼란상태에 빠지고 있는 만큼 자유당 소속의원들의 동향 여하에 따라서 정국은 새로운 위기에 직면할 가능성이 보여지고 있다.
    28일 아침 의사일정을 논의하기 위해서 개최된 국회운영위원회에서는 국회의 마지막 부의장 이재학 부의장이 완고하게 그의 사임을 주장함으로써 심각한 양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재학부의장은 ”본인이 이박사를 지지한 것은 그분과 더불어 남북통일을 하려는데 있었다. 그간 이박사에게 과오가 있었다 할지라도 자기가 국회의 사회봉을 잡고 이박사의 대통령 당선을 선언한 이상 이제 자기의 손으로 그의 사임을 선언할 수는 없는 형편“이라는 이유를 들어 부의장직의 사표를 수리하도록 요청했다. 그러나 민주당 의원들이 ”국회마저 공백화 시킬 수는 없다“는 점을 들어 만류했으나 끝까지 이부의장은 의사를 굽히지 않았다.
    그때 이승만 박사가 걸어서 이화장으로 간다는 설이 국회에 전해지자 자유당 의원들은 즉시 울음바다 속에서 의원총회를 열고 ”이박사를 모시고 이화장까지 가자“는 점에 합의, 국회를 박차고 경무대로 달려갔다. 한편, 민주당도 김도연 오위영 등 의원들이 즉시 경무대로 향하였다. 경무대 앞으로 달려간 자유당 의원들은 ”이박사를 걸어가시게 할 수 없다. 굳이 걸어가신다면 우리들이 모시고 가자“는 자세로써 이박사가 나오시기만 기다리다가 경무대 앞에 세워놓은 바리케이드 수비 장교의 허가를 얻어 집단적으로 경무대로 들어갔다....장면 대표최고위원도 나타나 ”공적이 아니라 사적으로 인사하러 왔다. 노인께서 걸어서 가시게 할 수는 없다“며 경무대로 들어갔다. 곽상훈 백남훈 등 민주당 의원 10여명도 따라 들어가며 ”이박사를 걸어 가시게 해서는 안된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동아일보] 4월29일자)

    ”하야했으니 관용차 안타겠다“=그날 아침 이기붕 일가의 집단자살 뉴스는 이승만을 더욱 격동시킨다. 한시라도 빨리 경무대를 떠나야 한다고 재촉이 성화 같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공직을 떠난 사람이 국가 건물에서 살 수는 없어. 내 집이 있으니 그리로 어서 가야해.“ 허정과 매카나기까지 이사를 말렸지만 허사였다. 슬픔과 허탈속에 이삿집 싸느라 어수선한 경무대, 이승만은 떠나야 할 정원과 나무들을 둘러보았다. 날마다 점심 먹고 프란체스카와 30분씩 산책하던 정든 곳에 이별을 고하는 마지막 산책이다. 
    옷을 갈아입고 모자를 쓴 이승만이 나섰다. 모자는 두 개였다. 하와이 독립운동때부터 쓰던 고물 모자와 큰 구멍 뚫린 낡은 모자는 낚시용이다. 이승만은 서둘러 걸어 나간다.
    ”나는 하야 했으니 관용차는 타면 안돼, 이화장까지 다 같이 걸어서 가자“
    깜짝 놀란 사람들이 달려들어 차에 태우려 애쓴다. 몸부림치는 노인 대통령의 몸은 가볍다. 결국 비서들이 ’관1호‘ 번호판을 천으로 가리고서야 차는 출발할 수 있었다.
    효자동에서 중앙청을 거쳐 돈화문으로 가는 차는 연신 멈춰야 했다. 연도에 몰려든 사람들로 인산인해, ”이박사 만세’를 부르는 사람들과 눈물을 훔치는 시민들이 손을 흔든다.
    침통한 얼굴로 입을 꽉 다문 이승만도 눈물을 줄줄 흘리며 창밖으로 손을 흔들었다. 이화장도 진작부터 인파로 덮였다. 대문 옆 담벼락엔 “평안하시라, 여생!!” ‘할아버지 만세!!“ 벽보들이 이승만 부부를 맞이한다. 이승만은 ”놀러들 오시오“ 미소지었다.

  • ”부정에 생명을 걸고 항거하는 국민 있으니 무한히 기쁩니다“

    건국대통령 이승만 평생의 꿈, 그 국내적 목표는 실현되었고 국제적 목표는 실패하였다. 
    국내적 목표는 ’똑똑한 국민‘ 만들어 자유민주공화체제의 ’현대적 국민국가‘를 형성하는 일이다. 국제적 목표는 미-소가 갈라놓은 조국을 미국의 힘을 이용하여 통일하겠다는 갈망이다.
    그 숙원의 ’똑똑한 국민‘을 만들어놓으니 국민들이 일어나 이승만을 끌어내리고 말았다. 
    언젠가 이승만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정부는 바다를 항해하는 배와 같다. 순풍일 때는 정부를 밀어주는 파도가 국민이요, 태풍이 일면 정부를 뒤엎는 거친 파도 역시 국민이다“
    그렇다. 순풍인 줄만 알았던 국민이 어느새 불의에 분노한 태풍이 되어 정부를 전복시켰다. 그것도 이승만이 늘 말하던 ’내부의 적‘이 저지른 소행, 믿었던 관료가 진짜 범인이었다니...
    이승만은 또 젊은 시절 옥중에서 쓴 [독립정신]에선 이런 말도 했었다. 
    “우리 대한 삼천리 강산은 곧 2천만 생명을 싣고 세찬 바람과 험한 물결이 몰아치는 큰 바다를 외로이 나가는 배와 같다. 우리는 지금 당장 물에 빠져가는 배 안에 앉아있으니 정신을 차리고 지켜보아야 한다.”
    그 국제사회의 거친 풍파 속에서 고군분투했던 독립 회복, 건국은 성공하였으되 강대국들이 키를 쥔 통일의 꿈은 끝내 물거품이 되어버린 것, 자신을 과신한 실패였다.
    이제는 모든 번민 다 버리고 이화장에 파묻힌 ’평민 이승만‘은 날마다 정원을 가꾸며 주마등처럼 오고가는 집권12년의 성패에 대하여 심장을 찢는 고통에 일희일비하였으리라. 
    장제스의 편지애 답장=갑자기 대통령직을 사퇴한 이승만에게 우방의 원수들이 위로의 서한을 줄줄이 보내왔다. 태평양 안보동맹의 꿈을 나누었던 대만의 장제스(蔣介石) 총통은 특별히 주한대사를 이화장에 보내 오랜 우정을 담은 서한을 전해주었다. 감회 깊은 이승만은 붓을 들어 답장을 쓴다. “나를 위로하지 마시오. 한없이 행복합니다” 눈물이 절로 나온다.
    “...각하의 따뜻한 우정에 넘치는 말씀에 깊이 감사합니다. 
    본인은 대통령직을 사임한 것에 조금도 괴롭거나 섭섭하게 생각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의 젊은 학도나 국민들이 부정한 것을 보고 그냥 덮어두지 않고 생명을 걸고 피를 흘리면서까지 부정에 항거했다는 것을 본인은 높이 평가하며 무한히 기쁘게 생각합니다. 이런 국민들이 있는 한, 대한민국은 훌륭하게 발전할 것이며, 큰 희망이 가득한 국가로서 우리 국민은 더욱 크게 될 국민임을 이번 사태를 통하여 더욱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본인은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그 무렵 이승만은 자신의 하야 후에도 시위가 끊이지 않으므로 ’국민에게 보내는 담화‘를 써서 공보실에 보내달라고 했다. 아직도 착각에 빠진 전대통령의 국민에 대한 애정을 어찌하랴. 측근 비서 우제하 등이 이를 말렸다고 한다. 

  • 이승만의 마지막 성공 4.19—자진사퇴=’민주화 유산‘

    4.19 데모를 하여 소위 ’4.19세대‘가 된 필자는 전부터 “4.19는 이승만의 마지막 성공 작품’임을 주장하고 있다. 이승만의 말 대로 ”불의를 보고 일어나 생명까지 바친 젊은 세대‘는 이승만의 교육열정이 키워낸 당시 MZ세대이다. 즉 건국이래 10여년간 의무교육을 통해 줄기차게 민주주의 교육을 실시함으로써 그들은 어느새 “민주화 세대’로 급성장한 ‘이승만의 아이들’(Syngman’s Kids)인 까닭이다. ‘주권재민’의 자유민주주의를 성경(Bible)처럼 믿었던 청년학생들이 부정선거를 알게되자 ”왜 가르쳐준대로 하지 않느냐‘며 귈기, “민주주의를 지키자’며 ‘독재적 정권’ 타도에 앞장서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이승만은 ‘무한히 기쁘다’고 장제스에게 고백한다.
    뒤늦은 ‘국민 발견’의 기쁨, 마산사태 때만 해도 각의에서 ”우리 국민은 민주주의를 하기엔 아직 멀었다“고 말했던 이승만은 이제 비로소 ‘똑똑한 국민’의 등장를 확인하게 된 것이었다.
    ‘새 정신 새 국민’ 만들기=20대청년 죄수 이승만은 구한말 한성감옥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정지제도는 백성의 수준에 달려있다“ 그 이유를 [독립정신] 저서에 ‘입헌군주제’를 주장하며 설파한 논문에서 일부만 읽어보자.
    「...이상에서 말한 것은 각국의 흥망성쇠가 다 그 정치제도를 따라서 되는 이유를 설명한 것이며...모든 정치제도는 언제나 그 나라 백성의 수준에 달려있는 줄을 먼저 알아야 한다. 만일 백성의 수준을 보지 않고 다만 남의 정치제도와의 구별만 보고 망령되이 헤아린다면...동양천지에서 용납될 수 없는 죄인이 될 것이다.
    몇 천년을 내려오면서 심화된 모든 악습 속에서 우리는 사지(四肢)와 백체(百體)가 낱낱이 병 들어 손끝 발끝을 까딱할 수 없는 전신불수(全身不隨)가 되었기 때문에 졸지에 남이 백여년 연구 진보시킨 새 법을 억지로 행하려 한다면 어찌 변고가 없겠는가...
    그러므로 마땅히 헌법제도에 대한 연구를 시급히 시작하여 조금씩 채택해 나간다면 황실과 백성이 다 같이 영원무궁 태산반석의 평안을 얻으리라. 내가 이 글을 써서 헌법의 채용을 주장한다는 이유로 나에게 중벌을 가한다면 비록 내몸이 가루가 될지라도 두렵지 아니하고 사양하지 않을 것이다. 이 단방약(單方藥:헌법)을 급히 시행하지 않으면 화타(華佗)와 편작(扁鵲)이 와도 회춘할 길이 아득할 것이다.」 화타와 편작은 중국의 옛 명의(名醫)들이다.

    러일전쟁이 일어나 인천 앞바다의 대포소리가 뻥뻥 울리는 감방에서 이런 글을 쓰는 29세 이승만은 이미 옥중연구를 통하여 서구식 입헌 민주주의에 통달한 민주주의자가 되어있었다.
    ”노예 백성을 자유화(해방)시켜 똑똑한 백성으로 교육시켜야 민주국민이 될 수 있다“는 그의 지론은, 일찍이 [국가론]에서 ‘정치와 교육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고 주장한 플라톤의 정치철학과 직결된다. 문맹퇴치와 민주화 교육은 동시에 해야 한다는 이론이다. 
    평생을 독립운동가, 언론인, 계몽가, 기독교지도자, 저술가, 교사, 학자, 외교가, 정치인, 대통령 등등 수많은 얼굴을 가진 전략가 이승만의 일관된 모습은 그가 당대에 가장 열심히 공부하며 행동하는 진보적이고 전략적인 현대 민주주의 지도자였음을 웅변한다. 그의 삶에서 국가는 학교요 국민은 학생이요, 자신은 교장이었던 것이다.
    특히 이승만이 독립운동시절부터 만든 한국의 건국헌법은 미국의 영향만이 아니라 한국적 풍토를 근대화하려는 한국적 헌법혁명(Korean Constitutional Revolution) 그것이다. 그래서 ‘건국혁명’이다. *국민 각자의 발달을 위한 국가의 의무 *전체 사회발달을 위한 국가의 역할, 이 두가지 사명을 동시에 부여한 헌법은 선진국들에도 유례가 없는 규정이었다. (유진오 [헌법기초 회고록] 1984).
    이승만은 독립운동 시절에도 ‘국민’ ‘시민’이란 단어를 입에 달고 살았다.
    그 교육이 마침내 대한민국의 ‘똑똑한 국민’으로, 정의를 위해 목숨바치는 ‘시민’으로 이승만의 눈앞에 증명되었다. 
    필생의 과업 '민주화 국민의 탄생' 확인--자신의 성공을 알자 지체없이 자진하야를 선언한 것은 그 민주국민 역량으로 자유민주주의를 지켜달라는 또 하나의 교육이며 요구였다. 
    결국 이승만의 하야는 자신이 만든 민주공화국 헌법체제 수호를 위한 새로운 교훈이요, 새로운 전통의 탄생으로 지켜져야 할 귀중한 ‘민주화 유산’ 그것이다. 어찌 4.19가 이승만의 ‘마지막 성공’이 아닐 수 있으랴.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