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956년 8월15일 남산에서 열린 이승만대통령 동상 제막식. 이 동상은 '이승만대통령 83회탄신축하위원회(회장 이기붕)가 1955년 개천절에 일제식민지배의 상징인 남산의 일본 신궁을 헐고, 그 자리에 건국대통령 동상 건립을 착공하여 이듬해 광복절에 완공, 제3대 대통령에 취임하는 이승만에게 바친 '독립의 상징'이었다. ⓒ연합뉴스
    ▲ 1956년 8월15일 남산에서 열린 이승만대통령 동상 제막식. 이 동상은 '이승만대통령 83회탄신축하위원회(회장 이기붕)가 1955년 개천절에 일제식민지배의 상징인 남산의 일본 신궁을 헐고, 그 자리에 건국대통령 동상 건립을 착공하여 이듬해 광복절에 완공, 제3대 대통령에 취임하는 이승만에게 바친 '독립의 상징'이었다. ⓒ연합뉴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오,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
    수천년 인류사에서 반복된 정치권력의 무상함을 이르는 말이다. 영속할 듯 막강한 권력도 길어야 십년을 못 가고, 만개한 꽃의 아름다움도 고작 열흘이면 시든다는 역사적 엘레지는 동서고금이 다를 바 있으랴. 혈통세습의 왕조체제에서도 그러하거늘, 민주공화정의 장기집권은 또 다른 것을! 현대사에 들어와 헌법에 임기가 제한된 민주국가에서 선거를 통한 장기집권 기록은 '민주 선진국' 미국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의  4기 연임이 유명하다. 
    이승만의 경우는 어떠한가. 그것은 1954년 ‘사사오입 개헌’을 강행하여 ‘계획된 장기집권’이었다. 이승만은 사양했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 조지 워싱턴도 2기 연임으로 끝났는데 나도 더 이상 안된다” 이 말이 진심이었다지만, ‘임기제한 철폐’에 동의하고 말았다. 
    왜 그랬을까. 개헌당시 총리 번영태가 “소련 국제공산주의가 이승만대통령의 은퇴를 막고 있다. 이대통령이 그만두면 공산주의자가 대통령 될 것"이라고 짚었듯이, 당시 국내외 상황이 ‘반공자유의 화신’ 이승만을 놓아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건국대통령 동상 건립=소련에 빼앗긴 북한땅을 되찾아 “민족통일을 이루고야 말겠다”며 3기 대통령에 당선된 이승만, 투표 석달 뒤 8월15일 광복절엔 남산 광장에서 ‘건국의 영웅’ 동상 제막식이 열렸다. 자유당정부가 서둘러 세운 동상은 북한에 주둔한 100만 중공군을 향하여 ‘물러가라’ 외치는 듯, 이승만이 평소 주장한 ‘자유 십자군’의 장수로서 ‘자유통일’의 불길을 한껏 뿜어낸다. 더구나 5.15선거 결과 나타난 공산당출신 조봉암의 대량득표가 ‘장기집권의 당위성’을 반증하는 것으로 인식되었기에, 자유당의 집권의지는 더 뜨겁게 불타올랐다.
    그러나 개헌으로 법적 정당성을 확보했다해도 장기집권이 초래하는 ‘권력의 속성’을 어찌하랴. 잃었던 나라를 40년만에 다시 찾은 건국자 이승만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는 법, 아니 그 ‘위대한 업적’의 영광이 크면 클수록 ‘우상화’의 독버섯이 더 크게 솟아나고, 반공자유체제를 수호하려는 의지가 강할수록 “나 아니면 안된다”는 ‘독선’의 곰팡이가 번식하게 마련이다. 더구나 5천년 민족사 최초의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너무나 미숙한 사회에선 말해 무엇하랴.
  • ▲ 82세 이승만 대통령이 1957년 3월 이기붕 국회의장의 장남 이강석을 입양한 뒤 두 가족이 기념사진을 찍었다. 왼쪽부터 이강석, 프란체스카 여사, 이승만 대통령, 이기붕. 부인 막마리아와 둘째아들.
    ▲ 82세 이승만 대통령이 1957년 3월 이기붕 국회의장의 장남 이강석을 입양한 뒤 두 가족이 기념사진을 찍었다. 왼쪽부터 이강석, 프란체스카 여사, 이승만 대통령, 이기붕. 부인 막마리아와 둘째아들.
    ◆국회의장 장남 이강석을 입양...“선형 돌볼 후손 찾았다”

    이승만이 집권 10년째를 맞는 1958년 1월1일 신문들은 이색적인 대형 사진을 일제히 게재하고 있다. 노대통령 부부의 뒤편 중앙에 서있는 20세 육사생도 청년 이강석(李康石, 1937~1960), 당시 국회의장 이기붕의 장남을 양자로서 처음 공개한 기념사진이다. 
    이 사진 한 장이 당시 권력구조는 물론, 이승만의 후계자가 누구인지 한눈에 말해주었다.
    자식 복이 없는 6대독자 이승만은 본처가 낳은 7대독자 태산을 미국 유학 중에 잃고나서 ‘대가 끊기는 아쉬움’에 툭하면 백인 후처 프란체스카에 말했다. 
    “마미는 다 좋은데 한 가지가 흠이야” 그 한 가지는 출산 불능, 이 말을 듣는 프란체스카의 심정이 어땠을까. 영어 잘하는 충실한 개인 비서 박마리아에게 호소한다. 
    박마리아(朴瑪利亞,1906~1960)가 누구인가. 이기붕의 처로 이승만의 영어저술 [Japan Inside-Out]의 번역본 [일본내막기]를 출판 보급하며 대통령 부부에게 헌신적인 봉사로써 남편의 출세를 돕던 참인지라 차남도 아닌 장남을 대통령의 아들로 선뜻 선물한 것이었다. 
    이강석 입양은 1957년 3월26일 벌어진 82세 탄신 잔치에서 이승만 스스로 발표하였고, 3부요인들의 축배에 이어 이강석이 술잔를 올리자 그 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즉흥시를 읊었다.  

    유감 有感             
    십생구사순생인 十生九死筍生人 수없이 죽을 고비 겨우 산 인생
    육대이문독자신 六代李門獨子身 이씨가문 6대 독자의 몸인데
    고국청산도유몽 故國靑山徒有夢 꿈에서나 보았던 고국 청산에
    선형백골호무친 先瑩白骨護無親 선형의 백골 돌볼 자손이 없었네
    -------丁酉 春 (1957년 봄) 이강석군입양시작 李康石君入養時作

    이승만은 시인이다. 여섯 살때 천자문을 떼면서 어머니의 가르침을 받아 지은 첫 작품을 비롯, 평생 계기마다 남긴 수백수의 한시를 묶은 책이 [우남 이승만 한시집] (박기봉 편역, 비봉출판사, 2019)이다. 여기 수록된 시를 보면, 그토록 걱정했던 부모님의 선형을 돌볼 후손을 드디어 찾았다는 이승만의 감회가 새삼 연민을 자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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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부를 해롭게 하는 사람 장면부통령은 만날 필요없다'는 이승만 대통령의 편지. (조선일보 1959.1.15일자 1면 중간기사). 장면 측이 공개하여 언론에 보도되었다.ⓒ조선DB
    장기집권의 그림자 ‘인의 장막’...이승만 “그런 것 없다”

    5.15 선거직후 기자회견에서 이승만은 예상 밖의 선거결과에 대해 입을 열었다.
    ”이번 선거 결과로 보아 친일하는 사람과 용공주의자들을 지지하는 사람이 아직도 많은 것 같다“며 곤혹스런 내심을 드러낸 이승만은 ”장면씨가 애국성심으로 나라 일을 위해 힘쓸 것으로 믿는다“고 강조했다. 북한과 똑 같은 ‘평회통일’을 주장하는 조봉암의 216만표 인기와 민주당 출신 부통령 장면의 등장에 대하여 착잡한 우려를 토로한 말이다.
    이어 기자가 물었다. ”대통령께서는 ‘인(人)의 장막’에 싸여있기 때문에 민정을 잘 모르신다는 일부 여론이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승만은 즉각 ”그것은 반대파에서 선전자료로 사용하는 이야기고 그런 사실이 없으므로 대답할 것은 없다“고 잘랐다. 
    또한 ”각하는 국문으로 된 신문을 몇가지나 보십니까?“라는 질문에는 ”그런 것까지 쓸 필요가 있는가?“라면서 곧 ”신문을 그렇게 만들지 말고 좀더 가치있는 신문을 만들어 춘추필법으로써 공론을 이끌어 사회의 지침이 되어야만 한다“고 말하고, ”간혹 신문에는 사실도 아닌 말이 안되는 말들이 많다“고 꼬집는 것이었다. ([조선일보]1956년 5월27일자)

    대통령을 둘러싼 ‘인의 장막’? 이강석 자체가 '인의 장막' 아닌가. 입양 사진이 시사하듯이 언제부턴가 대통령을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이 저절로 제한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특히 경무대 비서진은 ‘문고리 권력’으로 변해갔다. 양자로 맺어진 실력자 이기붕 세력의 출입은 프리패스, 미국 외교를 전담한 이대통령을 상대하는 미국 대사관 측의 ‘보이지 않는 손’  정보 끈나풀(Agents)도 심어졌다. 그리하여 뒷날 이승만 하야후 그동안 위세를 떨쳤던 박모 비서의 횡포를 고발하는 증언들이 쏟아지기도 했다.
    게다가 ‘대통령 건강관리’ 차원에서 프란체스카 부인이 행한 면회객 선별과 함께, 자극적인 한국 신문보도를 이승만이 보지 못하게 차단한다는 소문들이 나돌기도 했다. 
    그때 대통령을 만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말했다. ”대통령 경무대 대신 ’서대문 경무대‘로 가자” 이기붕의 사저가 있는 서대문으로 몰려들었다. “양자를 만나자”고도 했다. 이강석은 ’귀하신 몸‘이란 비아냥과 ’가짜 이강석‘사건이 나올 만큼 화제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이런 사실만으론 진상과 거리가 있다. 왜냐하면 이승만 대통령 자신이 ‘불필요한 사람’은 안 만나는 ‘장막’을 스스로 쳤기 때문이다. 그 증거를 하나만 보자.

    이승만 “정부를 해롭게 하는 부통령은 만날 필요가 없다”

    ‘국가보안법 파동’이 일어났던 1958년의 일이다. 장면 부통령이 편지를 보내 면담을 요청하였을 때 이승만은 다음과 같은 답장을 보낸다.
    “귀한(貴翰)은 잘 받아보았습니다. 지금 우리 민국(대한민국)을 우리의 원수들이 4면으로 침입하고 있는 이 때에 우리 국군과 민족이 우방의 도움을 받아 애쓰고 있는 가운데, 부통령의 책임을 가지고 앉으신 분이 백가지로 정부를 반대하고 인심을 이반시키고 있으니, 나로서는 정부를 보호하는 책임자로서 그 정부를 해롭게 하는 사람과는 합동할 수가 없는 고로, 그리 알아주기 바랍니다.
    정부에서 잘못하는 일이 있으면 부통령도 정부에 있는 분으로서 친히 당국에 책망도 할 수 있고 권고도 할 수 있을 터인데 이런 일은 아니하고, 정부를 반대하는 편이 되어서 신문상으로나 혹은 다른 행동으로 시비하고나 있으니 지금도 전에 하던 예에 따라서 공개로 선언하는 것이 편할 것이요, 나를 보는 것은 필요치 않을 걸로 아는 바입니다. 과거로부터 내가 극히 노력해서 성취하려는 목적은 우리 민국정부를 보호해서 모든 국민이 동서남북과 정당관계를 막론하고 합심하여 공산당을 제압하고 국토를 통일해서 우리 전민족이 살 수 있게 만들자는 것이니, 여기 대해서 말로나 글로나 혹은 행동으로 반대만 하는 사람은 내가 자리를 같이 할 필요를 느끼지 않으니 이 점을 철저히 알아두기 바랍니다.”([조선일보] 1959.1.15)

    이런 대통령의 편지를 장부통령 측이 공개하였다. 분노한 자유당은 장부통령이 이대통령 면담을 요청한 사실 자체를 비난하고 나섰다. “무슨 면목으로 면담 요청인가”라는 제목의 성명에서 자유당은 “부통령으로서든지, 민주당 최고위원으로서든지 ‘양자 택일’을 할지언정 부통령 직을 오용(誤用)하지 말라”고 정면으로 공격, “정국이 이토록 긴장된 것은 모두 ‘순화동 거부’에 근원이 있다”고 열을 올렸다. ‘순화동’(巡和洞)은 서소문의 장면 부통령 관저이고, ‘거부’란 민주당 간부들이 날마다 부통령관저에서 회동하여 정부의 제안들을 거부하고 반격했던 사실을 말한다. 즉 장면 부통령은 “부통령이 아니라 야당 대변인 노릇”만 해왔다“고 열거하였다. 
    이에 장면은 기자회견을 열고 “면담 거절은 유감”이라며 ”24파동 후의 사태가 강경 일변도로 되어가고 있어 민주대한의 앞길이 우려된다“면서 ”이대통령은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의 의견도 듣는 것이 옳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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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 보안법 파동...조봉암 사건으로 ‘이적행위 처벌’ 강화

    ‘24파동’이란 무엇인가? 자유당이 새로운 ‘보안법’ 개정안을 만들어 1958년 12월 24일 국회에서 단독 통과시킨 사건이다. 경호권을 발동하여 완강히 반대하는 야당의원들을 경찰들이 완력으로 들어내고 일사천리로 처리한 국가보안법, 그 개정 작업은 진보당의 간첩사건을 적발하면서 당시 이근식 내무장관이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1957년 11월 22일 이장관은 “우리나라 헌법과 주권을 무시한 평화통일론자들을 처단하려면 국가보안법을 개정해야 하며 그 정당을 내사 중”이라고 공표, 국내외 간첩단과의 내통사실이 드러난 진보당 조봉암과 간부들을 1958년 일제히 검거했던 것이다. 
    보안법의 무엇을 개정하였나. 그 요점은 다음과 같다. ① 보안법 적용대상의 확대. ② 이적행위 개념의 확대. ③ 정부를 참칭하거나 국가 변란을 목적으로 구성된 결사 또는 집단의 지령을 받고 그 목적 사항의 실행을 협의, 선전, 선동하는 행위의 처벌규정 신설, ④ 군인 및 공무원의 반항-선동행위 처벌규정 신설, ⑤ 헌법상 기관의 명예훼손행위에 대한 처벌규정 신설, ⑥ 사법경찰관의 조서를 증거능력으로 인정하여 구속기간 연장을 가능하게 하고, ⑦ 국가보안법 피고인이 보석될 경우 즉시 항고할 수 있게 하고, ⑧ 군정보기관의 간첩수사 법적 근거 마련, ⑨ 보안법 관련자의 교육기관 및 보도기관 취업 자격 박탈 등이다.
    민주당은 즉각 반대한다. 법안의 문제점으로 ◈모든 정치비판의 봉쇄, ◈국민생활의 거의 전 영역을 처벌 대상화, ◈자백을 받기 위한 고문 남발 우려, ◈즉시 항고 등으로 국민의 신체자유권 침해, ◈언론탄압의 수단으로 남용될 소지 등을 내걸고 전면투쟁에 나선다. 
    한국신문편집인협회도 언론관계 조항이 언론의 자유와 인권보장을 침해할 것이라고 반대하였으며, 대한변호사협회도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할 우려가 있는 요소들을 지적하였으며, 일본 총독부의 ‘치안유지법’보다 독소조항이 많다는 소리까지 나왔다.
    우여곡절 끝에 자유당은 ‘신국가보안법’을 비롯하여 신년도예산안, 지방자치법 개정안 등 10여 개 법안, 12개의 각종 세법과 27개의 의안을 2시간 만에 통과시켜 버렸다. 지방자치법은 지자체기관장의 선출을 임명제로 바꾼 것이다. 야당과 학생들의 시위가 벌어졌으나 1959년 1월15일 신보안법이 발효되자 잠잠해졌다.
  • ▲ 경향신문의 폐간조치를 발표한 공보실장 전성천이
    ▲ 경향신문의 폐간조치를 발표한 공보실장 전성천이 "경향은 자살한 것"이라 말했다.ⓒ조선DB
    ◆경향신문 폐간...이승만 “법대로 되었으면 되었다”

    집권 11년째 1959년 4월30일 경향신문이 폐간되었다. 
    이날 전성천(全聖天,1913~2007) 공보실장은 다음과 같이 정부성명을 발표한다.
    “신문은 사회의 공기로서 공공의 이익에 충실해야하며 그 보도는 어디까지나 사실에 근거한 진실한 것임을 요하는 것이다. 따라서 신문의 자유도 이와같은 입장에서 주장되고 보장되어야할 것임은 물론이다. 이러함에도 경향신문은 그와 같은 신문의 사명을 자각함이 없이,
    첫째, 단기 4292(1959)년 1월11일자 사설에서 ‘정부와 여당의 지리멸렬상’이라는 제목하에
    ”이기붕 의장은 병구를 끌고 스코필드 박사를 친히 방문하여 본국으로 돌아가라고 권고하였다  하거니와 그 동기는 아마도 스박사가 기고한 극히 격렬한 비판문 때문이었으리라는 것도 상상되는 것이며, 동 박사가 의장의 ‘권고’를 격분한 어조로 거부한 데 대하여 어떠한 양심의 찔림을 받았는지 알고 싶은 일“이라고 날조, 전혀 허위의 사실을 보도함으로써 개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동시에 정계의 혼란을 조장하였으며,
    둘째, 2월4일자 조간 ‘여적’란(餘滴欄)을 통하여 외국 교수의 ‘다수의 폭정’이란 논문을 인용함에 있어 이를 견강부회하여 폭력으로 된 혁명에 의할지라도 다수의 의사가 반영되어야 할 것이라고 역설함으로써 헌법에 규정한 선거제도를 부정하는 동시에 폭동할 것을 선동하였으며,
    셋째, 2월16일자 동지3면에서 ”사단장은 ‘기름’ 팔아먹고“라는 제목하에 ”당지(洪川) 사단에서 지난해 12월 중순경 사단장 박모 준장은 군수참모와 합의하에 휘발유 4백여드럼(싯가 5백여만환)을 인제 제1주차장 및 원통 속초 홍천 등지에다 1드럼에 1만2천환씩 매각한 사실이 있어 예하 장병들의 비난을 받고 있다“는 허위의 기사를 보도하였으며,
    넷째, 4월3일자 조간 3면에 ”간첩 하(河)를 체포“라는 제목으로 ”성북서에서는 2일 대남간첩 하모(河某=45)를 체포하는 동시 미화 1천불을 압수하였다고 한다. 하는 수일전 군사기밀 평화통일 지하운동의 밀명을 띠고 밀파된 괴뢰간첩이라고 하는데 구체적인 공작상황과 접선인들을 계속 추궁중에 있다“라는 기사를 당국의 게재금지 요청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고의로 게재함으로써 간첩 하모와 앞으로 접선하기로 되어있는 간첩들의 도피를 용의하게 하였으며, 
    다섯째, 4월15일자 석간에 이대통령 기자회견 내용을 보도함에 있어 국가보안법 개정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보안법 개정도 반대“라는 제목으로 국가원수의 발언을 허위로 보도하는 등, 수차에 걸친 중대한 위반사실을 범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폐해를 더욱 조장하는 듯한 행동으로 나오고 있음은 사회의 안녕과 공공의 복리에 중대한 관심을 갖는 국가와 정부가 묵과할 수 없는 일인 것이다. 
    더욱이 경향신문은 재단법인 천주교 서울교구 유지재단에 의하여 운영되는 것으로서 불행히도 그 논조가 천주교 본래의 교지와 입장을 달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민주정치체제하에서는 종교와 정치는 엄연히 구별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혼동하여 절제없는 정부비난과 허위보도를 계속 해오고 있음은 실로 유감된 일이 아닐수 없는 것이다.
    정부에서는 이러한 일이 있을 때마다 그 반성을 촉구하고 시정의 언약을 받았으나 개과의 빛이 조금도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도를 가하여 언론의 정도에서 더욱 이탈되어가고 있음은 실로 한탄할 일이 아닐수 없는 것이다.
    더욱이 지난 3월2일에는 경향신문의 경영책임자인 재단법인 천주교 서울교구 유지재단이사장
    노기남 주교로부터 ”발행인을 교체하는 동시에 편집진용을 개편하여 건설적인 언론창달에 이바지할 것을“ 공약까지 받은 바 있었으나 노주교의 사회적 신분과 그 인격을 신뢰하여 그의 각서는 즉일로 반환하고 완전한 신사협정으로 금일에 이르렀던 바, 이런 불행한 일을 초래하고보니 정부로서는 이 이상 방치할 수 없어 국가의 안전과 보다 참된 언론의 발전을 위하여 부득이 경향신문을 법령 제88호에 의거 단기 4292년 4월30일자로 그 발행허가를 취소하는 바이다. 
    국가 없이 국민의 자유가 보장될 수 없고 법을 무시한 곳에 자유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국가의 안전과 국민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하여 우리나라 언론계가 본연의 위치에서 앞으로 그 사명 완수에 더욱 큰 노력이 있기를 바라는 바이다.” ([조선일보] 1959년5월1일자)
    정부 성명문을 길게 인용한 것은 당시 상황을 돌아보기 위함이다. 
    다음날 진해(鎭海)에서 상경한 이승만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경향신문 폐간’ 전모를 보고받는다. 말없이 듣고 있던 이승만은 “법대로 잘 되었다면 되었다”는 한마디로 넘어갔다.
    그 석달 후 7월31일 조봉암의 사형집행을 보고 받았을 때에도 이승만은 “법대로 처리했다니 나는 더 할 말이 없다”고 했다. 
    ‘법치주의자’ 이승만, 스무살 때 배재학당에 들어가 미국의 법치주의를 발견하고 경탄했던 그는 감옥에서도 ‘국제법’ 영문서적을 번역하였고, 미국 유학서 국제법 박사를 땄다. 근대적 법치가 뭔지 모르고 5천년을 짐승처럼 노예처럼 살아온 한국인을 현대적 법치국가 국민으로 양성하는 일이 이승만에겐 가장 급한 일이 되었다. 법의 생명은 정의와 진리, 감옥에서 쓴 책 [독립정신]에는 ‘거짓말 천국’ 중국을 따르더니 “한국전체가 거짓말 챔피언이 되었다”고 개탄한다. 
    이승만은 경향신문 뿐만 아니라 ‘반정부 중상모략’를 일삼는 한국언론의 습관적 고질을 참고 참다가 결국 법으로 거짓을 타격한 것이었다. 초점은 수사당국의 엠바고(embargo:한시적 보도금지 요청)을 비웃듯이 무시하고 “간첩 검거”를 보도한 것이 결정적이다. 한창 조봉암 간첩사건을 수사중인 정부로 하여금 “간첩을 다 놓치게 만든” 경향신문은 언론 이전에 진보당사건을 도우려는 반국가세력이 침투한 언론으로 여겨졌을 터이다. ‘폭동을 선동했다’는 경향신문 칼럼 ‘여적’(餘滴:붓글씨 먹물방울)의 필자는 민주당 의원 주요한(朱曜翰, 1900~1979)이다. 젊은 시절 시인이 된 그는 상하이 임정에도 참여했고 귀국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간부로서 왕성한 문학활동를 펼쳤다. 일제의 태평양전쟁이 나자 ‘전쟁 찬양’에 동원되었으며, 건국 후엔 야당에 참여하여 자유당 정권의 횡포를 비난하는 '사이다 독설'을 과시하여 인기를 끌었다. 뒷날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친일인명사전’에 올랐다. 

    ★언론 탄압? 언론횡포 전성시대!...“이승만 대통령이 오래 참았다”

    장기집권 체제에서 무엇보다 민감한 언론자유 제한, 경향신문 폐간소동은 즉각 ‘언론탄압’ 규탄 폭풍을 일으킨다. 특히 법령 제55조는 미군정이 남로당 등 공산세력의 선전선동을 막으려던 규정인지라 민주당은 위헌이라며 집중공격한다. 미국 대사 다울링도 이의를 제기하며 중재에 나선다. 모두 예상했던 일이다. 하지만 그동안 언론들의 ‘가짜뉴스’와 무차별 선동에 질렸던 사람들은 “이승만 대통령이 참 오래 참았다”며 “속 시원하다”는 반응도 적지 않았다.

    이승만은 언론인 출신이다. 독립협회에서 [독립신문]을 만들던 23살때 주간지로는 성에 안찬다며 한국인 최초의 일간지 [매일신문]과 [제국신문]을 잇따라 창간하고 일본, 러시아 등과 싸웠던 청년 언론인, 독립운동때도 [태평양잡지]등 미디어를 무기로 싸우고 싸웠다.
    건국이후엔 어떤가. 앞에서 소개하였듯이 언론이 먼저 이승만 비판의 깃발을 들었다. 바로 건국내각에서 소외된 한민당 인촌(仁村)의 신문 [동아일보]가 그 선두주자, 6.25때 피난간 대통령을 ‘런승만’(Run承晩)이라 낙인 찍은 것부터 그러했다. 
    이승만은 그러나 언론자유가 자유독립국의 기둥임을 주장하며 부산정치파동때 비상계엄에도 “언론 검열은 취소“시켰는데, 그런 이승만이 왜 뒤늦게 ‘경향신문 폐간’은 허용하였을까.

    ◉반(反)이승만 우파세력 트리오=독립운동시절부터 이승만에 날을 세운 매체는 도산 안창호계열이었다. 여기에 건국정부 참여를 거부당한 한민당 계열, 그리고 개신교 이승만에게 등돌린 가톨릭 계열, 이들 3자를 대표하는 매체가 흥사단 주도 월간지 [사상계], 한민당 기관지격인 [동아일보], 천주교 재단의 [경향신문]과 대구 [매일신문]이다. 
    그동안 이들 매체들의 보도 태도가 어떠했는지 당시 어느 지식인의 ‘언론 비판’을 원문 그대로 인용해 본다. 
  • ▲ 경향신문의 폐간조치를 발표한 공보실장 전성천이
    김인서 지음 [망명노인 이승만을 변호함]의 일부

    「...대한민국 건국대통령 이승만 박사는 3.15 부정선거의 죄에 의하여 심판대 앞에 서게 되었다....대한민국의 무서운 원고(原告)들은 흥사단, 민주당, 공산당, 동아일보, 사상계, 고 조봉암, 장면씨, 매카나기...제씨들이다. 
    ◈도산계의 소장(訴狀)
    ”이승만은 민주반역의 원흉“ 
    ”자칭 거물연하는 가짜 지도자”
    “독립운동도 자기가 대통령 해먹으려고 했고 건국도 자기가 대통령 하려고 했다”
    “사기꾼 협잡꾼 이승만에게 애국심이 무엇이냐”
    “정치적 악한 이승만, 인간이하 비겁한 노인” ([사상계]에서 인용)
    ◈인촌계의 소장(訴狀)
    동아일보에서는, 이승만은 독재자, 폭군, 깡패 정치가 운운하면서 이승만 정권 12년간 공격했고, 4.19후에도 절기따라 욕하고 있다. 
    이승만에게는 씨, 선생, 전 대통령, 박사 등의 호칭을 쓰지 말자고 했다.
    가톨릭 문인 모씨는 “똥은 비단보에 싸서 하와이에 보내고 이승만의 부하 똥 구더기들만 재판하느냐”고 했다. 자기 대통령에게 똥칠하는 민족 대변지에서 대변 냄새가 난다....3.1절이 이승만 욕하는 날인 줄 아는 민족지는 민족혼이 빠진 신문이다....」

    이 글은 4.19직후 하외이로 떠난 이승만을 집중 공격하는 매체들을 보다 못해 펜을 든 함경도출신 목사 김인서((金麟瑞,1894~1964)가 써놓고도 출간을 못한채 눈을 감은 책에 나온다. (2016년 출간됨). 일제때 3.1운동과 독립운동을 하고 월간지 [신앙생활]을 1932년부터 1956년까지 발행한 기독교 문필가 김인서는 중화민국 국립도서관이 선정한 한국의 대표적 한학자 4인(최남선, 양주동, 김인서, 윤영춘)의 한명이었다. 
    이승만과 “만난 적도 없다”는 그는 이승만을 “12년간 달달 볶은 언론횡포”를 서슴없이 특유의 독설과 비유의 해학으로써 날카로운 필봉을 휘두른다. 
    “4.19 이후의 책임은 이승만에게 지우지 못한다. 이 민족적 비극의 책임은 도산계와 인촌계가 져야한다”고 여러 사례를 제시하는 그의 펜 끝은 일본의 ‘요괴’ 기시(岸) 수상의 심장도 겨눈다. 1957년 집권한 A급 전범 기시는 ‘재일한인교포 강제북송’카드로 김일성과 손잡고 북한을 지원, 한반도 분열정책을 구사한 이야기는 앞에서 본 바와 같다. 
    “일본 기시내각은 대미외교의 중점을 이승만 타도에 두었다. 한국의 식자들도 이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일본이 60년래 숙적을 없애려는 복수심은 섬사람 근성이다. 둘째, 이승만 박사를 그대로 두고는 평화선에서 고기도 못잡고 한국을 일본 시장으로 만들 수도 없다. 그러니 기시내각은 수만금을 미국 조야에 뿌려서 반이(反李) 여론으로 미국무성을 움직였다. 그 결과 남의 나라 대통령을 갈아치우는데 능수(能手)라는 매카나기(McCanaughy)씨가 주한 미국대사로 오게 되었다. 매일같이 ‘이승만 폭정’이란 기사를 주먹같은 활자로 찍어낸 신문들은 ‘기시 외교’를 뒷받침...(중략)...마침내 ‘항일괴수’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기에 이르렀으니 기시의 대성공이자 한일 양국의 기쁨이오. 손하나 대지않고 ‘반공괴수‘ 이승만을 잡아치운 북경과 크렘린의 기쁨은 그 이상이었다....” (김인서, 앞의 책).
    예리한 분석과 풍부한 지식과 뼈아픈 시니시즘에 넘치는 김인서의 ’이승만 변론‘은 ’좌파 상업주의‘에 빠져 부화뇌동하는 오늘의 언론계가 읽어야할 지성의 소금, 그 맛이 무척이나 짜다.  
  • ▲ 경향신문의 폐간조치를 발표한 공보실장 전성천이
    ◆너무 건강한 노대통령...“통일 될때까지 일하겠다”

    이승만의 장기집권과 불의의 4.19 하야를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은 흔히 이승만이 “물러갈 때를 놓쳤다” “너무 건강했던 게 탈”이라는 식으로 개탄한다. 일리 있는 말이지만 그 시대의 역사적 상황이 ’통일 미치광이‘ 이승만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것을 인력으로 어쩌겠는가. ’멸공주의자‘ 이승만이 남북으로 일본과 중공의 새로운 공세를 보면서 도망겠는가. 

    이승만이 밝히는 장수 비결=“나는 어릴 때부터 있는 힘을 너무 쓰느니보다는 덜 씀으로써 체력을 약화시키지 말라고 가르쳐주신 가친(家親:아버지)의 교훈을 따르려고 노력하여왔다.
    신체의 힘이란 한정되어 있어서 한정된 힘을 과도하게 쓴다는 것은 정력을 곧 탕진해버린다고 믿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그러나 창조주는 우리들에게 굉장한 정력원(精力源)을 부여하였기 때문에 인간은 정력을 쓰면 쓸수록 보다 더 많은 정력이 부여되는 것이다.
    나의 가친의 이론은 쉬고싶을 때 힘을 더 써서 피곤을 극복하라는 것이었는데, 이 방법이 내가 일생동안 실천해 온 습성이다. 의사들은 오후에 낮잠을 자라고 하지만 나는 듣지 않는다. 그 이유는 할 일이 하도 많고 인생은 짧지 않은가.  노경에 든 지금에도 나는 피로와 쉬고 싶은 의욕을 극복하고 있으며 엄친의 양생법(養生法)이 나의 일생을 두고 이로웠다고 믿는다. 내가 가친의 체력유지 방법을 실천에 옮김으로써 나의 생명을 얼마나 연장시킬 수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내가 겪은 여러 가지 위험과 고단한 일생을 통하여 나를 보호하여주신 창조주에게 감사를 드린다. 내 일생을 통하여 내가 죽었다고 보도된 것도 한 두번이 아니었으나 내가 거듭하여 온 여러 가지 성공 외에도 나는 83세의 장수를 누리고 적어도 이 나라 한반도 절반이 자주독립을 회복하는 것을 나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기회가 허용되었다. 
    지금까지 나의 생명을 연장시켜 온 하나님께서 한반도 전체가 통일되고 주를 공경하는 모든 사람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평화와 자유를 누리는 것을 내가 볼 수 있도록 나의 생명을 좀더 연장하여 주시옵기를 바라마지않는다.” ([조선일보] 1959년 3월25일자)

    당시 UP 통신이 83세 생일을 맞아 보낸 질문서에 대한 답변에서 이승만은 “생전에 통일을 보고싶다”는 욕심을 거침없이 드러낸 것이다. 이어 다음날 보도된 INS통신과의 인터뷰에서도 공산주의에 대한 더욱 강한 증오심과 반공통일의 집념을 숨기지 않았다.
    “나는 한시도 신념을 위한 정의의 투쟁을 쉬지 않았기 때문에 나의 생애는 성공으로 점철되었다...이것은 내 일생의 지도원리였으며 이 신조를 따르는 동안 실망해 본 일이 없다. 나는 공산주의자들이 한반도의 북반부를 무제한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피에 굶주린 공산주의자들이 완전히 자취를 감추기 전에는 세계의 항구적 평화는 바랄 수가 없다. 우리가 그들을 멸하지 못하면 그들이 우리를 멸할 것이다...자유세계의 단결이 늦어지면 우리는 싸워 볼 기회조차 갖지 못한다. 내가 거둔 기적같은 성공들은 전능하신 신의 은총이 늘 함께 하신다.”
    ([조선일보] 58년 3월26일자)

    이 뿐이랴. 다음해 1959년 신년 기자회견에서는 드디어 ’4선 출마‘ 의지를 공개하였다. 
    “만약 한국을 민주독립국으로 통일 하려는 목표가 달성된다면 그때 은퇴할 것이다. 그러나 위험이 존속하는 한 나는 한국의 생존 및 구제를 위하여 이 위험을 나누며 인민들과 더불어 일해 나가고 싶다”
    내년 대통령 선거에 재출마하겠느냐는 질문에 대해서 주저없이 토해낸 대답이다. 
    “국민이 나를 원한다면 그렇게 할 것이다. 나의 전생애는 통일된 한국독립을 위해 바친 것이다. 이 목표를 달성하고 안심할 수 있는 평화가 온다면 언제라도 물러나서 은퇴생활을 즐기겠지만 위험이 존속되는 한 국민과 함께 할 생각이다” ([조선일보]1959년1월26일자)
  • ▲ 경향신문의 폐간조치를 발표한 공보실장 전성천이
    “정-부통령 ’동일티켓‘ 개헌하자” 이승만 제의...4선후보 출마

    1958년 5월 제4대 국회의원 총선에서 자유당 125석, 민주당 79석, 무소속 28석이 나온 뒤, 이승만 대통령은 ’정-부통령의 동일티켓 당선‘을 위한 헌법개정을 제의하였다. 
    지난 제3대선거에서 99명이나 나왔던 무소속이 급감한 결과를 보자 이승만은 ’민주주의 발전‘이라며 좋아하였다. “이제 우리도 영미에서와 같은 양당정치(兩黨政治)제도가 형성되었다”고 환영한 그는 “정-부통령이 동일정당에서 선출되도록 헌법부터 고치자”고 주장한다. 
    “한 당에서 대통령이 나오고 다른 당에서 부통령이 나온다는 것은 근본적인 당착(撞着)이고 정치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은 내각책임제나 대통령 책임제나 마찬가지이다. 만약 대통령 유고시에 다른 정당 부통령이 계승한다는 이 민주주의 모순은 양당정치를 선택한 국민들이 원하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이 불합리의 결함을 교정하는 것이 국민을 위한 길임을 확신하고 있다”고 강조하였다.
    장면 부통령은 즉각 ’부통령의 기득권 발탈“이라며 임기중 개헌을 강력이 반대하였고, 민주당에서도 ‘무슨 정략적 음모냐”고 거부하였다.

    해가 바뀌어 1959년 진보당사건을 마무리하는 중에 한반도 주변 정세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한다. 일본 기시정권이 재일교포 강제북송 등을 들고나와 북한 김일성과 연대하여 덤비고, 중공은 대만 금문도를 포격하는 침략공세를 계속함으로써 이승만 대통령은 4면초가의 긴박한 위기상황에 빠져들었다.
    이때 민주당이 격렬하게 반대하는 신(新)국가보안법을 일방 통과시킨 이승만은 다시 한번 ’동일티켓‘ 개헌을 재촉하였다. 그리고 6월에는 자유당 전당대회를 열어 일찌감치 ’정-부통령 후보를 ‘이승만-이기붕 티켓’으로 확정하기에 이른다. 
  • ▲ 경향신문의 폐간조치를 발표한 공보실장 전성천이
    ◆민주당 신-구파 격돌...미묘한 ‘대통령-부통령’ 자리 싸움

    민주당은 두 파로 갈라져 우왕좌왕이다. 대한민국 건국이후 김성수의 한민당과 신익희의 대한국민당이 통합한 민국당, 그리고 자유당의 ‘사사오입 개헌파동’ 이후 이합집산을 거듭하다가 새로운 통합야당 ‘민주당’을 만들어 1956년 선거를 치르고나서 3년간 신구파의 세력다툼은 갈수록 치열해졌다. 
    한민당의 인촌계열이 구파(舊派)로서 대표적 인물이 조병옥, 신익희를 비롯한 도산파(島山派)가 신파(新派)로서 신익희의 사후 간판은 부통령에 당선된 장면이다.
    이제 1959년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양파는 ‘대통령 후보’를 놓고 한판 대결에 돌입하였다.
    ‘대통령 후보냐, 부통령 후보냐’ 이것을 나눠갖느냐 독점하느냐는 문제는 파벌의 생명을 건 싸움이다. 예컨대, 부산에서 열린 경남도당대회는 괴청년들의 난입 폭력사태로 계속 무기연기되고 신파-구파는 서로 폭력배 동원 책임을 전가하며 당권장악을 놓고 헤게모니 전쟁이다. 이런 정쟁의 한가운데서 이승만 대통령의 ‘동일티켓’ 개헌 제의가 분열의 불길을 부채질한다. 이에 대한 이해득실을 따지는 신-구파는 찬반으로 갈등을 거듭하였다. 
    다음해 선거때 85세가 되는 이승만이 대통령에 당선되고서 임기 중에 죽는다면 그 대권을 물려받는 것은 부통령이 되지 않는가. 따라서 민주당은 낙선이 예상되는 대통령 후보보다 당선가능성이 높은 부통령 후보가 더 좋은 자리, 만약 지금 개헌을 하면 이승만-이기붕 티켓이 당선될 것이 뻔하므로 현행대로 정-부통령 “따로따로” 선거가 훨씬 실속있기 때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민주당은 11월26일 전당대회를 열고 ‘대통령후보 구파 조병옥, 부통령 후보 신파 장면’을 지명한다. 대신 장면은 대표최고위원자리를 겸임하고, 최고위원도 양파가 3대3으로 나누어 가졌다. 
    이리하여 결국 새해 정-부통령 선거는 개헌 없이 진행되는 것으로 결말이 났다. 부통령 장면의 신파에게 ‘대권의 꿈’이 바싹 다가오는 듯, 민주당의 분위기는 묘하게 엇갈리고 있었다. 
  • ▲ 84세 생일 인터뷰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남북통일의 날이 다가온다면서 통일해서 국방비를 줄이면'경제자립까지 가능하다는 희망에 부풀었다. ⓒ조선DB
    ▲ 84세 생일 인터뷰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남북통일의 날이 다가온다면서 통일해서 국방비를 줄이면'경제자립까지 가능하다는 희망에 부풀었다. ⓒ조선DB
    ◆자유당의 ‘강경파’ 득세...최인규의 ‘충성 서약’

    ‘사사오입개헌’(1954)을 통하여 이승만 건국대통령의 종신집권을 공식화한 자유당은 제4대 국회의원 선거(1956)에서 본질적인 변화를 일으켰다.
    첫째, 당선된 국회의원들은 모두 당의 ‘공천’을 받았으므로 자부심과 책임감이 강해졌다.
    사실 ‘공천제’는 휴전후 처음 실시되는 1954년 제3대 총선때 이승만 대통령이 최초로 도입한 셈이다. 자유시장경제를 도입하려는 “경제 개헌‘을 제안했지만 야당이 반발함으로써 선거 뒤로 미루고, 5.20총선에 출마하는 후보들에게 ’개헌 찬성‘ 조건부로 공천을 주었던 것이다.
    이후 제4대 총선에서는 아예 처음부터 심사를 통해 ’공천‘을 줌으로써 정착된 제도가 되었다.
    둘째, 진보당의 득세와 야당의 무자비한 좌우투쟁을 경험한 의원들은 제4대 국회에서는 ’숭배하는 이승만 체제‘의 수호를 위해 야당을 이길 강경태세의 방어선을 구축한 것이었다. 그 결과가 야당을 경찰력으로 봉쇄하고 국가보안법, 지자체법개정 등을 통과시킨 일이다. 특히 무소불위로 자유당 정권을 공격하는 야당신문들를 규제하고자 [경향신문]을 폐간시키는데 앞장섰던 이기붕 국회의장 지지세력 한희석, 임철호, 장경근, 손도심등이 그들이다. 여기에 가세한 것이 정부내 소장파 최인규 내무장관, 홍진기 법무장관 등 젊은 충성파 엘리트들이었다.  
    최인규 장관 취임사 파동=국회에서 민주당은 신임 최인규 장관를 불러내 공무원들의 ’정당가입‘문제를 추궁하였다. 지방자치법 개정에 의해 임명제로 바뀐 지방기관장들이 자유당에 입당하는 사례가 이어졌고 이에 대한 대정부질의에 최인규 장관은 초지일관 맞섰기 때문이다.
    ”장관으로서 공무원의 자유당 입당을 강요한 적은 없다. 여당의 정치활동을 간섭할 수 없으며 민주당도 집권하면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응답했다. 그러자 민주당은 최장관의 취임사 대목까지 추궁한다. 최장관은 ”대통령을 지키는 일이 공무원의 충성 의무“라고 맞섰다. 
    야당은 최내무장관의 불신임 결의안을 제출하였으나 과반수에 10표가 모자라 부결된다. 자유당의 일부 의원도 불신임에 동조하였다. ([조선일보] 1959.7.3.)
    최인규는 1959년 3월 내무장관 취임사에서 이렇게 말한다. 
    ”...공산당과 야당의 선동에 현혹된 국민은 그 어른 때문에 못사는 것 같이 오해하고 있다....나는 여러분에게 우리나라 원수이신 이대통령에게 충성을 다하라고 요청하는 바이다. 이대통령에게 충성하는 길이 국가와 국민에게 봉사하는 최선의 길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지난 제3대 정-부통령 선거(5.15)에서는 공무원들이 전혀 이런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면종복배하였는데 다음 선거에서는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될 것이다...“
    이런 인식에 함몰된 내무장관이 취임 1년 뒤 기어코 3.15부정선거를 조직적으로 감행하여 자신도 정부도 ’존경하는 우상‘ 이승만 대통령도 한순간에 쓰러지는 역사적 범죄를 거침없이 연출하게 될 줄이야. 최인규 자신도 이때는 미처 몰랐을 일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