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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만 대통령이 1959년 3월 최인규에세 내무장관 임명장을 수여했다.
“오, 미스터 최, 유 디드 베리 웰” (Oh~ Mr. Choi, You did very well)
이승만 대통령은 최인규를 보자 금방 환해진 얼굴로 손을 잡아 흔들었다.
1956년 1월1일 경무대 신년 하례식, 뉴욕 UNKRA에서 1년간 근무하고 돌아온 37세 최인규는 하늘 같이 존경하는 대통령의 칭찬에 몸둘 바를 몰랐다. 둘러선 명사들 틈에서 몸을 굽히자 이승만은 한번 더 영어로 말했다. “You did very well.”
최인규는 대통령의 이 말을 평생 잊을 수 없었다고 한다. 이 순간부터 4년후 그가 3.15부정선거의 ‘원흉’이 될 줄은 최인규도 이승만도 아무도 몰랐다.
그리고 사흘 뒤 이승만은 최인규를 다시 경무대로 부른다. 그를 외자청장으로 임명하며 골치 앓던 ‘비료문제 해결’ 임무를 부여한다. 당시 미국비료의 수입 배분 과정은 그야말로 부패의 복마전, 너도나도 끼어들어 가격도 배급시기도 제멋대로인지라 농민의 원성이 하늘을 찔렀다.
“이제부터 농민이 불평하든지 비료 한가마니라도 없어지면 불문곡직 자네를 옥에 가두겠네” 농담을 잘하는 이승만의 농담 아닌 준엄한 훈시, 대통령의 각별한 신임에 감격한 최인규는 작심한다. 기존의 관행을 뒤엎고 미국의 까다로운 규정까지 불도저처럼 뚫으며 돌진하게 된다.
한해가 지나자 농민도 언론도 외자청장을 ‘비료청장’으로 불렀다. 이승만의 기대는 어긋나지 않았던 것이다.
최인규는 말한다. “나의 성격은 단순하다. 선악관(善惡觀)이 철저하며 옳은 일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고 목숨을 바쳐도 아깝지 않다”
경기도 광주군 미사리에서 3.1운동의 해 1919년 출생한 그는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교회까지 설립한 여장부 할머니의 신앙과 성격을 이어받았다고 회고한다.
당시 인재난에 한숨을 쉬던 이승만에게 최인규의 성실성과 강한 애국적 활약이 얼마나 반가웠을까. ‘신념의 사나이’ 두 명의 운명적 만남! 비극의 개막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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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5부정선거의 원흉'으로 사형판결을 받은 전 내무부장관 최인규(오른쪽)가 옥중에서 쓴 자서전 표지. (중앙일보사 발행,1984)
◆이승만 숭배자, ‘대통령 밀사’까지
3.15와 4.19—내무장관 최인규란 인물은 왜 그때 그토록 엄청난 국가적 범죄를 감행했던가. 여기서 최인규의 과거를 잠깐 훑어보자. 그가 4.19후 민주당 정권에서 1심재판 사형이 선고된 한달 후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난다. 혁명재판소에서도 사형이 확정되어 수감 중에 정보부에서 “자서전을 써보라”고 요구, 사형수 최인규는 자신의 이력서를 써내려가던 어느 날 끌려나가 처형되고 말았다. 그의 아내 강인화가 뒷날 이 미완의 기록을 책으로 냈다. 최인규의 [옥중자서전]이 그것이다. 생명도 포기한 마당에 사심없이 썼다는 기록은 자신의 범죄를 정당화시키려는 대목도 있지만 역사의 뒤안길 숨은 사연도 많아 간추려볼 의미가 있다. 더구나 3.15부정선거가 65년이 지난 지금도 부정선거는 AI시대 첨단기술로 국제적 정치음모와 뒤엉켜 딥페이크(deep fake) 등 지능적 전술이 기승을 부린다. 체제파괴의 위기를 깨달은 대통령의 비상계엄령까지 부르지 않았는가.
◉최인규는 누구? 영어 잘하는 경제학도=자작농의 아들로 태어난 최인규는 6살 때 ‘을축년 대홍수’에 알거지가 되자 집안은 기독교에 매달린다. 검정고시로 보성고보를 나와 의사가 되려고 세브란스 의전에 도전했으나 실패, 수학에 자신있는 그는 경성고등상업학교에 진학한다.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 등 근대 경제학에 심취한 그는 자본주의 모순을 탐구하며 ‘빈곤 박멸’의 사명감에 눈을 떠 공산주의에 끌렸으나 기독교 신앙이 이를 막아주었다. 조선생명보험회사에 취직한 뒤 좋아하는 스포츠와 광범한 독서에 빠진다. 히틀러의 ‘나의 투쟁’을 비롯, 정치혁명사와 외교사를 섭렵하고 톨스토이, 또스또엡스키등 문학작품도 닥치는대로 읽었다. 결혼후 해방이 되자 미군을 만나 영어에 달려든 최인규는 미국 유학을 강행한다. 뉴욕대학에서 2년간 고학하며 경제학도로 변신, 미국의 독립역사와 민주주의 정치체제에도 흠뻑 매료되었다. 이때 미국의 ‘절제있는 자유’(Liberty)와 한국의 ’절제없는 자유‘(Freedom)의 차이를 깨닫는다. 동시에 미국의 마샬이 주도한 국공합작으로 중국대륙이 공산화되었음을 알고 반공주의와 국가주체성 수호라는 정치지도력에도 깊이 기울어진다.
◉이승만 숭배자=해방후 귀국한 이승만이 남로당의 인민공화국 주석직을 거부하였을때 최인규는 이승만을 존경한다. 반탁운동을 보며 이승만의 ’광팬‘이 되고, 마침내 미국의 반대를 뚫고 대한민국을 건국하자 “믿고 따를 지도자는 이승만 뿐”임을 깨닫는다.1949년 유학에서 돌아와 대한교역공사에 취직, 한국물자 수출에 헌신하며 동남아 무역사절단이 되어 시장을 개척하는데 보람을 만끽하였다.
6.25가 터지자 피난을 못간 최인규는 적치하에서 다음과 같이 맹세한다.
“나라가 무엇인가. 죽지않고 다시 대한민국에 살게 되면, 첫째 정부나 대통령이나 경찰에 대하여 불평불만을 참고 살 것. 둘째 자유와 민주주의 대한민국의 헌법을 수호할 강력한 대통령과 국군을 가진 나라를 세우기 위해 목숨을 내놓고 투쟁할 것. 셋째 공산당과 타협없는 투쟁을 해야 나라를 지킬 수 있겠구나.”
이런 결심 위에 “통일없는 휴전에 결사반대”하고 반공포로석방 감행에 이어 한미동맹까지 달성하는 것을 보자 ’이승만은 영원한 우상‘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이기붕과의 만남=휴전후 고향 광주(廣州)에서 출마, 자유당이 공천을 주어 신익희와 대결했으나 참패한다. 이때 국회의장 이기붕의 연락을 받고 자택으로 방문하자 경무대로 가라고 했다.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가보면 안다면서 대통령이 무슨 일을 맡기면 거절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꿈에서도 만나고 싶던 이승만 대통령이 격려하며 이런 당부를 한다.
“뉴욕에 가면 앉아있지만 말고 잘못된 일을 바로 잡도록 싸워야 하네”
유엔결의에 따라 한국에 설립된 운크라(UNKRA:국제연합한국재건단(United Nations Korean Reconstruction Agency)본부의 한국 파견원으로 자신을 천거해 준 이기붕에게 감사했다.
◉이승만의 개인밀사=원조물자 구매업무를 돕는 최인규는 당시 양대신문 뉴욕타임즈(NYT)와 뉴욕헤랄드 트리뷴을 열독하며 국제정세와 한국문제에 대한 미국의 여론 등을 꼼꼼히 살펴 보고서를 작성, 경무대로 보냈다. 그때 미국 덜레스 국무장관이 대외원조자금 10억달러를 인도(India)에 주어 동남아제국에 배분하고 “일본제품을 중점으로 구매”함으로써 ’일본을 원조공장‘으로 만든다는 기사가 보도되었다. 분노한 최인규는 즉각 NYT 편집인에게 항의편지를 보낸다. 인도는 중립국으로 행세하는 친공국가로 이승만이 중립국감시단에서도 축출하지 않았는가, “한국은 인도의 손으로 원조받는 것이 수치이므로 받을 수 없다”고 썼다. 이승만에게도 보냈다. 이 편지를 NYT가 보도하였고 이승만의 반응도 즉각 돌아왔다. “이러한 일에 관하여 귀관이외에는 나의 관심을 환기시켜준 사람이 없었다”
용기백배한 최인규의 보고활동은 더욱 다양화 되었다. 이어서 제네바에서 열리는 4대국정상회담에 가라는 훈령이 왔다. 기자로 위장하여 임병직 유엔대사를 수행, 한국문제 논의 과정을 지켜보고 한국입장을 반영하라는 사명이다. 이와같은 활약의 결과가 바로 이승만이 “You did very well”을 연발한 이유이다. 젊은 경제관료가 노대통령의 ’개인 밀사‘까지 되어 ’동지관계‘로 격상되어가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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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 잘못하면 공산당이 대통령 되겠구나”
최인규는 1956년 벌어진 5.15 정-부통령 선거를 지켜보며 중대 결심을 하게 된다.
“‘못살겠다, 갈아보자‘는 민주당의 선거구호부터가 문제였다. 마치 이승만 대통령 때문에 국민이 못산다는 식으로 기만하는 선전선동은 공산당의 그것과 다를 바 없었다. 게다가 신익희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유세중 급서한 뒤 나온 투표 결과는 어떤가. 민주당이 대통령 후보를 새로 내지 않고 ‘추모투표’ 전술을 밀어붙이는 것 자체가 진보당후보 조봉암과 짜고 공산당 출신이 대통령이 되어도 좋다는 식이다. 이승만은 노쇠하여 ”아랫목에서 밥 먹고 윗목에 X싼다‘는 거짓말을 방방곡곡에 써붙이고 유세에서 떠들어대니 국민들이 다 속을 지경이다. 이승만은 유세도 전혀 하지 않고 이기붕만 나갔지만 인기가 없다. 아니나 다를까 득표 상황은 상상을 넘는 ’가짜 선전‘의 결과를 보여주었다.“
▶이승만 5,464,870표
▶조봉암 2,163,808표
▶신익희 1,856,818표
신익희에 대한 ‘추모표’와 조봉암의 득표를 합치면 이승만 득표에 육박한다. 정상적인 선거라면 이럴 수가 있을까. 부통령은 이기붕이 아닌 장면이 당선되었다.
최인규는 이런 상황에 대한 ‘반성’을 조목조목 열거한다. *정부와 여당입장에서의 반성 *야당 입장에서의 반성 *언론기관의 반성 *국민입장에서의 반성을 정치적 열변처럼 써놓았다.
“국민 여러분이 5.15선거때 공산당 표를 2백126만표나 냈으니 이것은 죄가 아닙니까?
피 흘려 다시 찾은 나라를 여러분의 투표로 공산당에 넘겨줄 수 있습니까?
이에 대한 반성 없이는 한국의 자유와 민주주의 장래는 희망적이지 못합니다.
국민 여러분이 순간적으로 판단을 잘못하여 투표를 잘못하여 그 결과가 정권을 공산당에게 넘겨주는 것이 된다 하여도 그것은 당당한 투표권의 행사로 인정되고, 그것을 막기위해 내무
장관이나 경찰이 법규를 어기면 그것은 중죄(重罪)로 인정되어 극형에 처해져야 합니까?
나는 조금도 나의 죄과를 변명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국민의 각성 없이는 누가 정권의 책임을 져도 한국의 민주주의는 해 나갈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만약 8순의 이승만도 쓰러져 변을 당한다면 ‘조봉암이 자동당선’이란 상상에 미치자 그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최인규는 언론에 대하여 가감없는 분노의 격정을 뿜어낸다.
“...나는 이 박사 집권기간은 ‘언론 횡포 시대’라고 지칭하고 싶다. 이의가 있는 사람은 5.15선거 당시의 동아일보와 경향신문을 다시 한번 읽어보기 바란다. 이박사 집권이래 언론 자유가 부족하여 민주주의가 발전하지 못했다는 견해에는 절대로 수긍할 수 없다....아무도 그런 신문을 그대로 두고 정부를 유지해 나갈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신문들을 발간한 장본인들에게 정권을 맡겨도 그런 신문을 두고는 정부유지를 해나갈수 없음을 스스로 느낄 것이다”
최인규는 무엇보다 정-부통령은 같은 정당 출신이어야할 것과 법적으로 제도화할 것을 다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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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업은행의 산업채권 43억을 자유당 선거자금으로 지원한 재무장관과 금융인들 및 채권을 구입한 기업인들을 일제 수사.동아일보 5월9일자ⓒ동아DB
◆‘신념의 불도저’ 최인규 ‘선거 장관’이 되다
앞서 소개하였듯이 외자청장의 임무를 성공적으로 해낸 최인규는 1958년 선거에 자유당 공천을 받아 고향에서 출마하여 큰 표차로 낙승한다. 상대는 작고한 거물 신익희의 장남 신하균(申河均,1918~1975)이었다. 대망의 국회의원이 된 그는 첫 발언에서 5.15선거의 문제점을 거침없이 토로하여 각광을 받았지만 6개월도 안돼 또 이기붕의 부름을 받는다. 이번엔 교통부장관이다. 국회의원도 장관으로 등용하는 내각제 실험같은 첫 케이스로 낙점되었다고 했다.
교통부를 맡은 최인규는 여기에서도 혁신 바람을 일으켜 철도의 현대화, 산업철도 신설, 강생회의 부정 일소, 전국관광호텔을 대대적으로 확충하고 열차사고에 대한 ‘재해보장제도’를 도입하였다. 이런 인재를 가만둘 이승만이 아니다.
재무장관을 꿈꾸는 그에게 난데없이 내무부 장관 발령이 떨어졌다.
놀란 최인규가 이기붕에게 알아보니 1년 앞으로 다가온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강경파-온건파가 ‘선거 장관’ 쟁탈전을 벌이다가 계파가 없는 ‘신념의 사나이’ 최인규로 낙점되었다는 말이었다. 평소 5.15선거에 대한 강력한 주장들이 그를 그 자리로 불렀다고 해야 할 것이다.
[옥중 자서전]에서 최인규의 부인 강인화는 남편이 내무장관에 임명되자 불안해했다고 썼다.
평소에도 기도를 많이 하는 남편이 어느 날 울면서 부르짖는 통성기도 소리를 들었다.
“주여, 저에게 내무장관직을 주셨습니다. 과연 제가 감당해 나갈 직분인지 아닌지 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순종하겠습니다. 그러나 진정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제 목숨을 빼앗아서라도 이 직분을 버리게 해주십시오”
통성기도(通聲祈禱)는 큰 소리로 ‘주여’를 반복하며 하나님께 호소하는 한국교회 특유의 통곡기도이다. 당시 최인규가 감당해야 할 일이 얼마나 무거운 것이기에 ‘죽음’까지 갈구하는 기도를 해야 했던가.
◆3인조 공개투표...“부정 예행연습”
선거의 해가 밝았다. 1960년 1월1일, 이승만 대통령은 신년사에서 말한다.
”...이북 형제자매들이 굶주리고 고통하는 것을 생각하면 기가 막히며, 어서 올라가서 우리 동포들을 구해서 다 같이 새해를 맞고 싶은 생각을 억제하기 어렵습니다. 하루 바삐 하나님의 도움으로 남북통일을 이루어 복락을 누리게 되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이미 대통령 후보로 확정된 이승만은 통일염원의 조바심을 숨김없이 토로하고 있다.
내무부장관 최인규는 벌써 1년동안 만반의 준비태세를 갖추었다. 취임사에서 보았듯이 전국을 누비며 이승만대통령에 대한 충성심을 역설하고 공무원과 경찰력의 조직화를 점검한다.
1월 23일엔 지방 두 곳에서 재선거가 실시되었다.
선거부정으로 무효화된 선거구는 영주(榮州)와 영일을구(迎日乙區), 3월15일로 공고된 정-부통령 선거의 전초전 같았다. 최인규의 첫 선거실험장이다. 기자들이 몰려들어 전에 없이 삼엄해진 투표현장 취재경쟁이 치열하다. 조선일보의 기사를 옮겨보자.
◉영주: 민주당 선거포기 선언 내용
[영주에서 본사 목사균 특파원발] 민주당측이 이날 ‘선거포기 선언’을 하였는데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1. 22일 오후부터 무장경찰관 수백명이 투입되고 인접 각군으로부터 정체불명의 청년 수천명이 수십대 트럭으로 투입되고, 일몰 후부터는 경찰과 완장부대가 거리거리 골목마다 배치되어 계엄을 방불케 하고 있으며,
2. 각부락에 있어서는 3인조 편성 정비에 몰두하는 등 투표당일의 현상은 전야의 공기로 보아 불문가지이고, 급기야 23일인즉 100미터 선을 투표소로부터 기점을 삼지 않고 학교정문을 기점 삼아 새끼줄 혹은 철조망 등을 쳐서 국회의원은 물론 신문기자의 출입마저 일체 금지하였으니 여타의 사실은 상상에 맡길 뿐이다.
3. 이어 새벽 4시반부터 동원된 정체불명 완장부대와 무장경찰관의 삼엄한 포위로 인하여 유권자라 할지라도 투표소에 접근하기 곤란하고 법적으로 보장된 투표 참관인의 신분마저 부인되어 그 출입이 제지되고, 투표 5분 전에야 입장이 허용되었으며 사복경찰관이 그 이전에 장내에 배치되었으며,
4. 또한 그들은 정각 7시를 기하여 소정의 번호표를 소지한 유권자라 할지라도 이미 일부 지상에 보도된 바와 같이 자유당 측에서 할당 배부한 시간제 투표일람표와 상이한 경우는 그 투표가 거부되어 찬바람을 맞으며 떨고 기다리지 않을 수 없었다.
5. 3인조 편성부대는 10조 30명으로 편성된 2개소대 단위로 인솔되어 그 편대인즉 여잔만의 편대, 남자만의 편대, 혹은 혼성편대 등으로 인솔되어 투표소 문전에 이르러 역시 정체불명의 완장부대의 지휘를 받는 형편이며,
6. 투표소내 기표소의 상황인즉, 일개 투표구당 투표함 5개 기표소6개 등 소위 낭하식 기표소가 설치되어 비밀보장보다 서로 보이며 기표하고 반대로 접어서 투표함에 투입하는 동시에 일련번호표를 선거위원장에게 제출하면 위원장은 일련번호표를 자기 호주머니에 넣었다가 다시 특정 유권자에게 교부해주며, 후문에는 사찰형사가 모조리 대기하였다.
7. 한편 이러한 사실을 지적하고 시정을 요구하는 민주당의 참관인에게 시정은 고사하고 구타 출혈까지 하여 피가 낭자한 사태가 발생하였으니 이 사실을 만천하에 공표하며 선거를 포기하기로 선언한다.
◉영일 을구, 조직적인 공개투표 현장
[포항에서 본사 조세형 특파원발] 두 번이나 부정선거로 이름을 떨친 영일 을구의 23일 재선거는 또 다시 공공연한 공개투표로써 끝내 오명을 씻지 못하였다. 포항 경주 영덕 영천 등 각지에서 지난 밤새 투입된 약 6-7백명의 대한반공청년단원과 수없이 깔린 정사복 경찰관들로써 22개 투표소는 한 곳도 예외 없이 포위된 상태이다. 갓 쓴 할아버지와 할머니로부터 동내(洞內) 젊은이들에 이르기까지 자유당 완장을 두르지않은 사람은 거의 없다.
야당도 민주당 완장을 하고 나왔으나 그 수효는 거의 100대 1인 2-300명에 불과하다. 주민들이 미리 훈련된 3인조의 기본단위인 9인조에 짝을 맞추어 투표기계 노릇을 하고있는 이 광경은 오직 현지 목격자와 하늘만이 알 수 있는 기막힌 사실이다.
어떤 노파는 기자들이 보는 줄도 모르고 “내짝이 어디갔나?” 소리치다가 경찰관에게 경을 치기도 하였다. 선거는 벌써 끝났다는 말을 아무도 부인할 수 없게끔 되어있다. 민주당 현석호씨의 선거 포기설조차 성급히 떠돌고 있다.
이번 처음으로 반공청년단원을 대량투입해 본 것은 다가오는 정-부통령선거의 예비훈련이라는 해석도 있다. 기자는 지행면 제4투표소와 구룡포 제1투표소에서 직접 공개투표를 목격하였다.
그 밖에 전선거구에서 공개투표가 진행된다는 것이 민주당의 주장이요 다른 기자들의 말이다.
투표용지를 함에 넣을 때 어떤 이는 자유당 김장섭씨에게 찍은 것을 보이기도 했고, 어떤 이는 민주당 후보에게 찍지 않았다는 것을 보이기도 했으며, 또 어떤 이는 숫제 용지도 접지 않고 통째로 넣으려 했다. 번호표는 미리 나누어준 것이 아니라 이날 투표시간 뒤에야 자유당 완장과 함께 투표소 근처의 공작소에서 나누어주고 있었다.
자유당 완장에는 일일이 번호가 찍혀있는데 이것은 동내 단위의 투표순위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한 노인은 말하였다. 물론 겉 분위기는 큰 충돌사건 없이 대체로 조용한 편이다. 민주당조차 경찰과 완장부대와 반공쳥년단원에게 질렸음인지 산발적으로 공개투표를 항의하고 있을뿐 아직 맥빠진 상태였다. (이상 [조선일보] 1월2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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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옥 급서...최인규, 장면 득표 차단 비상
민주당 대통령 후보 조병옥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신병이 악화되어 워싱턴 월터리드 육군병원에 날아가 수술 후 회복하던중 졸도, 선거를 한달 앞둔 2월15일 눈을 감고 말았다.
민주당은 초상집이 되었고, 최인규도 그보다 못지않은 충격에 빠졌다. 대통령 이승만 후보의 당선은 걱정 없어졌지만, 부통령 이기붕 후보 당선이 새로운 위기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4년전 5.15선거 때 악몽—신익희후보가 급서하자 민주당 신파가 부통령 장면 당선에 집착, 진보당 조봉암과 연합하는 바람에 “공산당 출신 대통령‘이 탄생할 뻔하지 않았나.
이번에도 부통령 후보는 장면, 최인규는 5.15선거때의 소감을 이렇게 써놓고 있다.
“...나의 민주당 신파(장면)에 대한 불신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같은 민주당이라도 조병옥, 윤보선, 김준연씨 등을 중심으로하는 세력은 반공지도자로서 국가민족적인 문제에서는 당파를 초월하여 신임할 수 있다. 그러나 자파의 부통령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해서 용공세력과 단합하여 조봉암씨를 대통령에 당선시키려고 나서는 사람들은 신임할 수 없었다. ‘타도 이박사’에 혈안이 되어 조봉암씨가 대통령이 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모르는 사람들과는 국사를 논할 수 없다는 것이 나의 일관된 신조다”
조병옥이 사라진 3.15선거는 더더욱 ‘부통령 쟁탈전’으로 변신, 최인규는 조병옥의 추모표가 장면에게 가지 않도록 전방위 지휘에 총력을 기울인다.
◆민주당, 경찰의 부정 선거방법 지령 전모 폭로
선거가 임박한 3월 3일 민주당은 경찰의 ‘부정선거 음모계획’을 입수했다며 다음과 같이 폭로한다. [동아일보]가 보도한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이번 정부통령 선거에 정부가 유령선거인 명부작성, 자연기권, 권육기권 분 등 총유권자의 4할을 미리 부정투표해 놓고, 나머지 6할을 3인조 내지 9인조로써 공개투표하여 자유당 후보가 8할5푼의 득표를 하기 위하여 일선 경찰-관청 및 각급선거위원회에 지시된 부정선거방법의 비밀지령을 중앙선거위원회에 제시하고 26개 항목의 부정선거방지조치를 취해줄 것을 공한으로 요청하였다. 민주당이 중앙선거위원회에 제시 일반에 공개 폭로한 부정선거방법의 정보내용은 실로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제1안으로서는 총유권자수의 4할을 미리 자유당후보에게 찍어놓았다가 투표당일 새벽3시경 반공청년단과 자유당원으로 투표장 100미터 주위를 경비케한 후, 투표시작전인 상오6시50분경에 일제히 자유당계 투표구위원만 입회한 가운데 투표함에 투입시킨 후, 7시부터 나머지를 공개투표하되, 경찰에서 조직해둔 9인조를 매수 또는 위협하여 자유당후보에게 찍도록 할 것.
▶만일 이 계획이 누설되면 제2안으로 투표함 운반중에 환표로써 보충할 것.
▶제1-2안이 좌절되면 미리 조작해둔 표로써 환표하여 보충할 것. 이 방법을 감행하는데 야당위원이나 참관인의 방지를 막기 위하여 유혈극까지도 실행.
▶사전포섭 요령으로는 전진보당원, 족청계열, 국군하사관, 언론기관, 각종 요시찰인 및 월북자가족을 포섭대상으로 하고, 금전 이권 위협 회유와 공직 및 기간단체 중요부서에 임명한다는 것으로 포섭.
▶경찰은 전경찰력을 선거에 투입하고 전직경찰관을 동원하여 선거반을 편성.
▶야당의 선거자금 유입을 방지하기 위하여 외국공관 및 외국정보기관원 동향을 사찰.
▶야당 운동원에 대한 행동억제를 위하여 경찰관의 근접감시정보원의 미행 감시.
▶투표소는 입구를 한 개로 하고 완장부대와 행동대로 투표소의 외인출입을 억제.
▶야당 선거위원과 참관인에게 술을 권하되 술과 물에 수면제를 넣어서 자게 할 것.
▶야당계 민의원 신문기자 외국인 감시단 등의 투표소 출입을 금지 또는 제한.
민주당은 이러한 부정투표의 사전방지를 위하여 예방조치를 취해줄 것을 중앙선거위원회에 요청하였는데 공한에서 “이러한 정보는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 인정되며 만일 이 정보내용대로 실시된다면 이 나라의 민주주의는 도살되고 말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최인규 “내가 감옥에 가든지 민주당 사람들이 가든지...”
이러한 보도에 대하여 최인규 내무장관은 이튿날 ‘6인위원회’를 소집 협의한다. 6인위원회는 최인규가 내무장관 취임 직후 조직한 6개부서 각료들 모임으로서 공무원들의 자유당 선거운동을 독려하는 지휘부서 격이다. 언론엔 ‘국무회의 간담회’라 했다. 회의가 끝난 뒤 최 장관은 기자들의 질문에 이렇게 답변한다.
“미확인된 정보에 의하면 민주당이 경찰에서 부정선거를 지시하였다고 발설한 것은 앞으로 선거전의 패배가 자명하여지면 민주당이 이번 선거를 포기하려는 저의를 가지고 허위공작한 것”이라며 “이번 선거가 끝나면 최인규가 감옥에 들어가든지 민주당 사람들이 가든지 결판이 날 것이다“라고 잘라 말하였다. 최장관은 이번 민주당 발설을 선거기간 중에는 법적으로 조치하지 않겠으며 이는 대구 학생시위사건이나 서울운동장 삐라사건이나 모두 불문에 붙인 것과 마찬가지로 ”오직 선거를 평온리에 끝내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동아일보] 3월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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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의거...첫 발포...청소년들 희생
드디어 투표일 3월15일, 분노는 마산에서 먼저 폭발한다. 이날 이른 아침 장군동 제1투표소에서 자유당원과 시비를 벌이던 민주당 참관인이 투표함을 엎어버렸다. 이게 웬일인가. 투표가 시작도 되지 않았는데 투표함에서 투표지가 쏟아졌다. 사전투표 뭉치였다. 이것이 발단이다.
“부정선거다. 선거 무효”를 외친 마산 민주당은 선거포기를 선언하였고 서울 민주당 본부에서도 ‘선거포기’를 선언한다. 마산시내는 시위 인파로 덮인다. 투표가 끝나고 개표가 시작되자 만여명으로 불어난 시위대가 투석전을 벌이며 진압 경찰과 소방차의 물대포에 맞서 싸운다.
소방차가 전신주를 들이받아 시내는 정전으로 암흑천지, 성난 시위대는 닥치는 대로 관공서로 몰려가고 파출소를 부수고 돌진한다. 열세에 몰린 경찰이 발포하였다. 사망자가 8명, 백여명이 중경상이다. 희생자들의 나이가 12세에서 20대가 주류,, 구두닦이, 식당 종업원 등 청소년들이 앞장선 것이었다. 건국 이래 최초로 경찰이 국민에게 사격한 사건, 국회 등 조사단들이 몰려들었지만 정치싸움이 먼저였다. 게다가 선거 무효 선언을 한 민주당은 투쟁 방침을 싸고 신-구파로 갈린 내분을 일으켜 계속 회의만 거듭하는 형편이었다.
3월23일 최인규 내무장관이 사퇴한다. 발포 책임 경찰 간부들이 구속되고 다음주엔 내무차관 이성우와 치안국장 이강학도 해임된다. 후임 내무장관은 법무장관 홍진기가 맡아 수습에 나서면서 마산은 잠잠해졌으나 부산 등 다른 도시에서 시위가 끊이지 않았다.
◆자유당 뒤늦은 후회 “최인규가 공 세우려 경찰 의존”
엄청난 유혈사태로 충격에 싸인 자유당 내부에서는 지도부의 인책론이 대두하였다.
첫째, 이번 선거에서 무리한 일을 하지 않아도 무난히 승리를 할 수 있었는데도, 최인규 내무장관과 한희석 부의장을 중심한 몇몇 간부들이 선거운동에 있어서 당조직을 무시활 정도로 지나치게 경찰의존으로 나갔으며, 심지어 교육공무원까지 일선 득표공작에 내세움으로써 역효과를 초래하여 민심이 극도로 이탈되었고, 둘째 대통령 득표에 92%, 부통령 78%라는 기적적 기록을 냄으로써 일반국민은 물론, 외국에까지 그 득표율을 의심케 하였다는 점을 공공연하게 들고 나왔다. 이재학, 임철호, 장경근, 박용익, 정존수 등 간부들은 최내무장관의 사표는 마땅히 수리되어야하며 이번 선거에는 논공행상이 있을 수 없다고 주장, 당간부들이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다. 선거를 끝내고 상경한 의원들도 자기출신구에서 진행된 ’강압적인 선거 태풍‘으로 입은 피해 때문에 앞으고 치를 지방의원 선거와 제5대 민의원선거 등에 악영향이 미치는 처지에 놓인지라 강경파 지도부 인책론에 적극 가담하였다. ([조선일보] 3.20)
한편, 수습을 책임진 후임 내무장관 홍진기도 뒷날 회고에서 ’최인규의 1인 플레이‘를 강조하고 있다.
★최인규 ’선거 살인‘ 참극에 사표...이대통령 ”잘 알았다“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걷잡을 수 없이 폭발하는 민심의 분노에 놀란 최인규는
마산의거 사흘 뒤 18일 오후 경무대로 이승만 대통령을 찾아간다.
사표를 제출한 그는 ”선거 치안을 책임진 내무장관으로서 질서있게 한사람의 희생자도 내지 않으려 노력하였으나 결과적으로 투표일에 마산 소요사건이 발생하여 사상자를 낸 종체적 책임을 지고 물러나겠다“고 말했다. ”현재 민심이 격분되어 있기 때문에 정국을 수습하고 사회혼란을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것이 좋을 것이므로 사임하는 것이 옳다“고 설명하자 이승만 대통령은 ”잘 알았다“고 했다는 것이다. ([조선일보] 3.19)
그 자리에서도 최인규는 자신의 ’선거 부정‘에 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당초 목표대로 이기붕이 부통령에 당선된 것만을 안도하였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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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무대 '인의 장막'의 총수령격인 박찬일 비서 수사 착수.(동아일보 5.12)
◆김주열 시체 발견...”살인 정권 물러가라“ 반정부 구호
시위가 잠잠해진 마산 앞바다, 4월11일 시체가 떠올랐다. 실종자로 발표되었던 학생 김주열(金朱㤠=17세)이 총탄이 박힌 몸으로 나타난 것이다.
마산은 다시 폭발했다. 군중들은 군가를 부르며 경찰서로 몰려가 마구 부수며 구호를 외친다. 군가를 부르며 “살인 정권 물러가라”는 반정부 구호가 처음 등장하였다. 통금도 아랑곳 않고 해산시키려는 경찰과 몸싸움을 벌였다.
김주열의 시체는 부산지검 한옥신, 허형구 검사 입회로 해부가 진행된다.
흉탄 확인을 위해 미군 39사단의 병기장교 등을 불러 감식한 결과 미제 최루탄이었다. 의사의 말에 의하면 최루탄은 김군의 오른쪽 눈으로부터 왼쪽 아래 후두를 뚫어 길이가 약 20센치, 직경 약 5센치 폭탄형, 공교롭게도 손으로도 능히 밀어 넣을 수 있는 가장 연약한 부분에 박혀있다고 했다. 이런 설명을 듣자 수사당국은 본능적으로 ’공산당 공작‘을 의심한다.
경찰의 발사로는 아무리 정조준했다 해도 최루탄 직경이 커서 눈에 박힐 수가 없잖은가. 누군가 일부러 손으로 박았다는 주장이 나왔다.
따라서 검찰은 “배후에 적색 마수가 개재된 혐의도 있어 수사중”이라고 발표한다.
불타는 불길에 기름 붓는 말, 시위군중은 “시체 내놔라” 달려들고 경찰서의 무기고까지 몰려간다.
마산 뿐이랴. 이날부터 전국으로 확산되는 시위는 급기야 서울을 점령하게 되었다. 1주일후 4.18 고려대학생 시위는 정치폭력배의 급습을 당하며 4.19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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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난 ’4월의 젊은 사자‘들 “부정선거 다시 하라”
그해 그날 맨손으로 경찰과 싸우며 시위에 나섰던 대학생들이 ’4.19세대‘이다.
종로구 동숭동 낙산 자락 마로니에 캠퍼스를 뛰쳐나와 “부정선거 다시 하라’는 플래카드를 따라 데모했던 대학2년생 필자도 4.19세대가 된다. 정치과 3학년 이수정 선배(5공 문화부장관)가 쓴 ‘혁명 선언문’을 읽고 라일락 흐드러진 향내를 맡으며 경찰봉에 두들겨 맞으며 종로로, 태평로 국회의사당(현 시의회)앞에서 연좌했다가 중앙청(철거된 옛총독부건물) 광장에서 농성에 돌입하였다. 점심때가 지나 도시락을 먹던 중에 별안간 콩복는 총성이 울렸다. 경무대 앞에서 군중들에게 곽영주(경호실장격 겸우관)이 발포를 명령한 것이었다. 우리는 경무대로 가려던 목표를 수정, ‘ 서대문 경무대’로 향했다. 이기붕 국회의장 사택 앞엔 시위대가 돌을 던지며 ”불질러라“ 소리치고 있었다. 비상계엄령 발동...이튿날 신문을 보니 경무대 앞에서만 130명이 사망했다.
맙소사, 친하던 선배 한명도 갔다. 가족들 말로는 병원에서 고교생에게 치료를 양보하다가 눈을 감았다고 했다. 우리는 다시 모였다. 하지만 탱크가 앞을 가로막았다.
서울 문리대신문 기자였던 필자는 캠퍼스 편집실을 들락이며 신문과 방송을 체크한다.
이승만대통령이 자유당 총재직을 사임하고 선거를 다시 할 것이며 이기붕도 당선을 사퇴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우리는 만세를 불렀다. 그런데 이기붕이 ”사퇴를 고려할 것“이라는 발표가 나왔다. 장면 부통령도 사퇴했는데 ’사퇴 고려?“ 우리는 다시 일어섰다. 25일엔 대학교수들이 ”젊은 피값에 보답하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에 나섰다. 우리도 뒤를 따랐다. 그제야 이기붕이 ‘고려’는 잘못된 것이며 즉각 사퇴한다고 했다.
◆이승만 대통령 하야...”민권은 이겼다“ 승리의 도가니
마침내 이승만 대통령이 4월26일 사퇴성명서를 발표했다. 세상이 뒤집어졌다.
”우리가 이겼다“ 대학생들과 시민들이 몰려나와 만세를 부른다. 언론에선 호외를 뿌리고 전지면을 ‘혁명’바람으로 뒤덮는다. 대학생들은 하루아침에 ‘4월 혁명가’로 대접받는다. 다방에선 커피도 공짜, 식당 설렁탕도 공짜, 시내버스도 물론 공짜였다.
이승만 대통령이 경무대를 나와 이화장 사저로 옮긴다. 문리대신문 ‘새세대’ 기자인 필자는 카메라를 빌려 들고 이화장으로 달려갔다. 수많은 인파가 몰려와 구경하는데 뜻밖에도 눈물을 훔치는 사람들이 많아 놀랐다. 그들이 소리쳤다. ”나쁜 놈들, 자유당 놈들이 우리 대통령을 다 망쳐놨어“ 일부는 이화장 담벽에 ”만수무강“ ”여생을 평안히!!“라고 쓴 벽보를 붙이고 있었다. 그때까지도 분노가 가시지 않은 필자는 어리둥절 하면서도 이런 민심도 있구나 싶었다.
대통령이 아닌 이승만 노인이 나와 담장 밖으로 손을 흔들었다. ”놀러들 오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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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붕 일가 집단자살...이강석이 ”죽음으로 사죄하자“
지난 25일 이래 행방을 감췄다는 이기붕(65세) 국회의장이 놀랍게도 일가족 집단자살을 감행하였다. 경무대 구내 대통령 여비서의 집에 숨어있다가 28일 새벽 죽음의 길을 택한 것이다.
며칠간 미군기지등 그의 은신처를 수색하던 정보당국이 발견한 현장은 참혹하였다. 검시에 입회한 수사기관원의 말에 따르면 그들은 침실의 소파에 각각 쓰러져있고 방바닥엔 피가 흥건히 흘렀다고 보도되었다. 이기붕과 박마리아(55세), 차남 강욱은 각각 머리에 1발씩, 장남 이강석 소위는 머리와 배에 한발씩 쏘았고 침실 문쪽에 넘어져 있었다. 권총은 미제 호신용 두자루였다. 이강석은 며칠 전부터 ”죽음으로써 사죄하자“고 말한 것으로 미루어 이강석이 부모와 동생을 차례로 쏘고 자살한 것으로 일단 단정했다고 한다.
뒷날 일부에서 경무대서장 곽영주가 일가족을 사살했다는 이견도 나왔다. 이강석이 스스로 자기 몸에 두 발씩 쏠수는 없다는 논리였다. 하지만 이강석이 배를 먼저 쏘고 이어 머리에 쏠수도 있다는 반론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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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규 자진 출두 ”남자가 책임을 져야지“
사표를 낸 이후 틀어 박혀있던 최인규도 드디어 집을 나와 서울지검에 자진 출두한다.
이기붕 일가족이 자살한 다음 날이다. 부정선거의 두목들이 한명은 자살하고 한명은 법의 심판대 앞으로 걸어간 것이다.
부인 강인화는 도피중의 남편에 대하여 이런 에피소드를 전한다. 데모가 한창이던 4.19 그날 밤, 전 내무차관과 치안국장이 찾아와서 은밀히 이런 말을 했다. ”장관께 말씀드려 보지지요. 동해안 쪽으로 배 한 척을 준비하여 해외로 가시도록 하는게 어떨까요“
눈이 번쩍 뜨인 부인이 한참 망설이다가 남편에게 이 말을 꺼내보았다. ”이대로 있다가 무슨 일이 나고야 말 것 같으니 치안국장 말대로 해보는게...“ 말이 끝나기도 전에 빰에서 불이났다. 별안간 뺨을 후려갈긴 남편이 시근거린다.
”남자가 자진이 저질러놓은 일에 책임을 져야 할 마당에 어디로 도망가란 말이냐?“
단단히 각오한 듯 남편은 아이들도 친척 집으로 보내고 텅빈 집에 운전사만 남았다.
며칠후 시누이가 달려와 서둘렀다. 이기붕 집을 불태운 데모대가 이리로 몰려오고 있다고, 죽을땐 죽더라도 개죽음할 수는 없지 않느냐고...버티는 남편을 운전사와 함께 억지로 차에 태워 집을 나선다. 그리고서 얼마후 장충동 집에 몰려온 시위대가 불을 질러버렸다.
★법정서도 이승만 찬양...”내가 다 했으니 재판 그만“
8월에 집권한 민주당 정권은 부정선거의 원흉들을 차례로 잡아들이고 ‘특별법’을 만들어 특별재판을 이어간다. 3.15선거의 ‘6인위원회’ 장관 6명과 치안국장 등 발포 책임자들은 물론, 자유당의 한희석, 이재학 등 실권자들과 자금을 지원했던 산업은행 총재 등 모두 30명이나 되는 피고인들이 줄지어 앉았다. 죄목도 많고 인원도 많은지라 지루한 재판이 해를 넘기며 이어졌다.
「...부정선거 원흉들에 대한 특별재판 제2회공판이 열리는 6일 10시가 되기 전에 4백개의 방청석은 공무원 학생 가정부인들로 가득 찼고 철조망 밖과 특재로 들어가는 입구에도 수십명이 혁명의 뒤처리를 보려고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방청석 중간 줄에는 최인규 부인 강인화씨와 그 딸이 앉아 있었는데 카메라의 후랏슈를 들이대어도 담담한 표정이었고, 방청석 앞줄에는 고문치사 당한 4.19데모학생 이근형군의 어머니 가 그 아들의 사진을 가슴에 품어안고 슬픔에 북받쳐 눈물을 흘리며 앉아있었다.
최인규는 한복을 말쑥하게 차려입고 이날도 이승만 박사의 찬양론부터 열을 올렸다.
최 피고인은 사실 심리에서 “위대한 애국자이신 이박사를 대통령으로 계속 당선시켜야 하므로 경찰행정에 유능한 이강학을 기용하여 자유당 후보의 당선을 위해 3인조 공개투표, 4할 사전투표, 완장 착용, 민주당참관인의 매수 등 선거대비 기본요강을 마련하고 경찰의 조직력을 3.15에 총동원했다” 조금도 망설임 없이 공소사실을 전부 시인하는 것이었다.
이성우 이강학 최병환 피고들은 ’공무원친목회‘ 및 ’공무원가족친목회‘ 조직에 의한 선거운동 실행의 지령을 최인규 피고인으로부터 받았으나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고 진술하였다.
최인규 피고인은 “공무원 친목회’조직에 관한 지령을 내렸음을 시인하고 6인위원회에서 공무원친목회 조직원칙을 세웠다고 실토하였다.
이날 사실심리에 앞서 최인규 피고인은 ”일반법원에서 부정선거 실행에 관한 공소사실을 모두 시인했으니 이 재판을 빨리 끝내줬으면 좋겠다“고 재판부에 진술함으로써 체념한 태도를 보였다. 이성우 피고인은 ”공소사실이 너무 많은데 사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고 진술했다...」
한편, 이재학(전 국회부의장) 피고인은 자신의 입장을 해명하기 위하여 당시의 자유당의 내막을 처음으로 공개한 진정서를 제출하면서 ”3.15부정선거는 이기붕씨가 병으로 말미암아 건전한 판단력을 상실한 틈을 타서 철없는 자가 공명심에 날 뛴 결과“라고 최인규를 겨냥했다. ([조선일보] 1961년 4월 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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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쿠데타...혁명재판소로 넘어가 사형 확정
민주당 장면 정권의 특별재판소에서 사형판결(4.17)을 받은 한달 뒤, 소문만 무성하던 군사쿠데타가 결국 터지고 말았다. 이번에는 혁명재판소의 재판이 이어진다.
쿠데타 두달 후 발족한 혁명재판소는 1961년 7월 15일 최영규(崔英圭) 혁명재판소장의 취임과 심판관들이 임명되었는데 모두 현역 장성 등 군복의 장교들이다.
혁명재판은 1961년 7월 29일부터 ① 전 내무부장관 최인규 피고인 외 3명, ② 전 자유당기획위원회위원장 한희석 피고인 외 11명, ③ 전 국무위원 송인상(宋仁相)피고인 외 7명, ④ 전 서울특별시장 임흥순(任興淳)피고인 외 9명, ⑤ 전 대한반공청년단장 신도환(辛道煥)피고인 외 17명(고려대생 시위대 습격사건) 등에 관한 재판부터 시작하였다. 혁명재판은 다음해 1962년 4월 27일을 끝으로 9개월 반 만에 폐정, 이 기간 총 205건에 697명의 재판을 완료하고 영구미제 3건 14명은 미결로 넘겼다.
‘4.19 혁명재판’에 이어 군사혁명재판까지 받은 최인규는 1961년 12월 20일 여기서도 당연히 사형수로 확정된다. 경무대 발포 곽영주, 정치폭력배 등 5명이 함께였다.
이때 막다른 골목에서 강인화는 마지막으로 남편을 구하려 애쓴다. 최인규를 존경한다는 형무관의 도움을 받아 남편을 탈옥(脫獄)시키려는 계획, 면회할 때 쪽지를 몰래 넣어주었다. 다음 날 만난 남편은 대뜸 벼락치는 소리를 질렀다.
“왜 당신은 내 마음도 모르고 이런 바보짓을 벌이느냐? 이 세상에서 당신만은 나를 이해할줄 것으로 믿고 든든히 생각하고 있는데, 내 얼굴에 똥칠을 할 셈이냐?”
그리고서 자서전을 쓰다가 말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아내를 다시 보지 못한 채였다.
◆‘3.15와 4.19의 역사정치학◆
이승만의 장기집권에 대한 염증과 자유당의 독재적 횡포에 떠나간 민심 파워가 마침내 정권을 무너트렸다. 그것은 최인규의 부정선거를 지렛대로 삼은 역사의 대반전, 한 시대를 가르는 현대사의 분수령이었다. 3.15-4.19를 다룸에 있어서 하필 ‘최인규’를 집중조명한 필자에게 부정선거의 원흉을 미화(美化) 정당화하려는 의도는 추호도 없다. 다만 그 시대착오적 행태를 거울 삼아 오늘의 퇴행적 정치판을 전진시켜 보고픈 연구자로서의 시각일 뿐이다.
당시 쟁쟁한 엘리트 정치인과 관료들이 왜 법을 알면서 법을 무시하고 악법을 만들어 부정을 감행할 수 있었던가? 이승만의 종신집권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 자신들의 권력욕을 위하여 감히 정부 차원의 범죄를 저지른다? 그것만으론 설명이 부족하다.
“선거를 잘못하면 공산당이 대통령 되겠구나” 최인규의 이 말은 무엇을 말하는가.
공산세력과 절체절명의 전쟁이 끝난지 불과 5년, ‘반공’이 곧 ‘생명의 자유’였던 그 시대적DNA를 간과해선 안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몰랐다. 이승만이 건국이래 10년간 자유민주주의를 교육시킨 국민과 새 세대가 반민주적인 반공지상주의에 반기를 들만큼 성장한 줄을 이승만도 미처 몰랐던 것이다.
3.15와 4.19를 다시 연구해보자. 그동안 단순히 “독재 타도”로만 치부했던 정치적 편의주의는 ‘살아있는 역사’로 수정돼야 한다. 지금 이 순간 대한민국도 “선거 잘못하면 공산독재화 될것”이란 공포에 떨고있기 때문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