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하와이로 휴양여행을 떠나는 이승만 전대통령을 김포공항으로 배웅 나온 허정 과도정부 수반(왼쪽)
    ▲ 하와이로 휴양여행을 떠나는 이승만 전대통령을 김포공항으로 배웅 나온 허정 과도정부 수반(왼쪽)
    경무대를 나온 지 한달이 되는 5월29일 아침 7시, 이승만과 프란체스카는 이화장을 나서며 직원들에게 당부한다. 
    “늦어도 한 달쯤 지내고 올 테니 집 잘 봐주게.”
    이승만은 그동안 곁을 지켜준 경호원 우석근(禹石根)에겐 이런 말도 했다. 
    “내가 잠깐 떠나야 국내가 조용해져” (우석근의 증언 [중앙일보] 1986.3.8)
    이 노부부는 어디로 떠나는가. 
    의사와 측근들이 12년간 무리한 노구와 정신적 충격이 컸던 노대통령의 전지 휴양을 가끔 권했다. 그 무렵 허정 과도정부 수반은 하와이 오중정(吳重政) 총영사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이 박사님 부부가 3주가량 요양하실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달라"는 당부였다. 
    이승만의 제자 최백렬(하와이 한인동지회장), 윌버트 최, 그리고 오중정이 모여 “경비 일체를 부담한다”는 초청장을 보내고, 조경사업으로 성공한 윌버트 최의 조그만 빈집을 손질하여 스승이 당분간 지낼 수 있도록 준비하였다.

    한편, 6월19일로 다가온 미국대통령 아이젠하워(약칭 아이크)의 방한도 이승만을 움직이게 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난해 아이크의 방한을 초청한 이승만 대통령은 이제 부정선거 여파로 하야한 몸, 아이크는 지난 8년간 휴전반대 투쟁부터 내내 싸우고 만나고 또 싸워 길들인 한-미 동맹자인데, 만나기는커녕 ‘내가 잠시 떠나야 나라가 조용’해지는 처지로 변해버렸다. 떠나는 날 허정에겐 “아이크가 오기 전 돌아오겠다”고 말은 했지만 안 만나도 그만인 사이다.                                                                    
    이른 아침 김포공항엔 여행을 주선한 허정 내각수반과 이수영 외무차관이 배웅나왔다. 
    짐이라고는 부부 각자의 옷가지와 소지품을 넣은 큰 가방 두 개와, 이승만의 수십년 낡은 영문 타이프라이터와 여행용품을 넣은 손가방 두 개가 전부다. 간편한 옷차림 등 누가 봐도 장기 여행객의 행색은 아니다. 
    기내에 올라 간단한 짐 검사를 받고 대화하는 사이, 그러나 그 시간 서울 시내엔 [경향신문]의 ‘망명’ 호외와 [동아일보]의 ‘망명설’ 신문이 뿌려지고 있었다. 
    누군가의 제보를 받았는지 이승만 부부가 떠난 이화장 현장 사진들까지 찍어낸 시커먼 대문짝 제목은 ‘이승만 부부 하와이 망명’이다. 본인의 의사 확인도 없이 아예 “돌아오지 말고 망명하라”는 추방 의도를 한눈에 보여주는 듯 싶었다. 휴양을 겸하여 허정 정부의 안정화를 위해 잠시 몸을 피해주려는 이승만의 여행은 출발부터 야당 언론의 일방적 ’망명‘ 딱지가 먼저 붙여졌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승만 대통령은 4.19후 망명을 생각해 본 적도 망명한 적도 없다. 이미 독립전 33년 망명으로 충분하지 아니한가. 대한민국의 언론과 정부가 제멋대로 ’망명‘을 기정사실화하고 귀국을 막았으므로 단지 돌아올 수 없었을 뿐이다. 잃었던 조국를 천신만고 다시 찾아 세운 ’건국의 은인‘을 무참히 버리고 배반하는 나라가 나라인가. 

  • ▲ 1934년 결혼한 이승만과 프란체스카 부부가 하와이에 도착, 꽃목걸이를 걸고 환영받던 신혼시절의 행복한 모습이다. 그리고  85세-60세 노인이 되어 하와이에 휴양하러 왔다가 귀국을 금지당하여 5년을 중병으로 고생하고 사별한다.
    ▲ 1934년 결혼한 이승만과 프란체스카 부부가 하와이에 도착, 꽃목걸이를 걸고 환영받던 신혼시절의 행복한 모습이다. 그리고 85세-60세 노인이 되어 하와이에 휴양하러 왔다가 귀국을 금지당하여 5년을 중병으로 고생하고 사별한다.
    ◆돌아온 ’제2의 고향‘...지독한 검약...’제2의 독립운동‘ 생활

    망망대해 태평양의 파라다이스, 화창한 호놀룰루 공항에 비행기가 앉았다.
    수많은 교민들이 30여년간 동고동락한 ’영원한 지도자‘ 이승만을 영접하러 몰려나왔고, 대통령의 안전을 염려한 교민과 오중정 총영사는 미군당국에 경호를 부탁하여 공항청사 옥상에 기관포까지 설치했다고 한다. 
    “내가 여기 좀 쉬러 왔어. 한 3주일 쉬고 갈거야. 오영사” 
    기내 영접을 하는 오영사를 이승만이 반갑게 안았다. 역시 망명설은 거짓이다.
    만세를 부르는 교민들을 보자 ’귀향의 환희‘에 넘친 이승만은 수십년 만에 제2의 고향 사람들 속으로 뛰어들어 얼싸안고 환호한다. 경호에 신경쓰는 오영사는 조마조마했다.  
    그날 하와이 신문 [애드버타이저]는 한국의 언론보도를 인용하여 ’이승만이 망명했다‘는 것과  ’거금 유용설’까지 보도하였다. 다음날, 이승만이 전면 부정하며 “단지 쉬러 왔을뿐”이라고 확인했다는 기사로 해명해 주었지만 이승만은 화가 나고 어처구니가 없다. 
    이후로 그는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중엉거리며 분노를 새겼다고 한다.
    “천하에 못된 놈들...그 놈두...그 놈두, 웬 도적놈이 그리 많던지...뭐라고? 내가 도적놈이라? 돈을 어찌해?...기가 막혀...난 본시 가난뱅이야. 못된 놈들...”   (이동욱 [우리의 건국대통령은 이렇게 죽어갔다] 기파랑, 2011). 

    제자의 별장서 한달=첫 숙소는 독립운동시절의 제자 윌버트 최(崔)의 조그만 오두막집, 그는 아낌없이 은사를 보살폈다. 이승만은 연일 찾아오는 옛 동지들과 제자들과 어울리고 초대받아 돌아다녔으며, 일요일엔 그가 세운 교회에 나가 예배를 보며 옛날로 돌아가는 듯 활기를 되찾았다.
    이승만이 하와이에 남긴 ‘3대 보물’은 한인기독학원과, 한인동지회 및 한인기독교회이다. 
    사탕수수밭 노동자들과 함께 스스로 삽과 곡괭이로 부지를 조성하고 건축한 한인기독학원과 기숙사 등은 6.25때 인천에 인하대학을 설립하는 자금마련을 위해 처분하였고, 남은 건물 ‘광화문 모양 예배당’에서 옛동지나 후배들과 기도하고 찬송하며 또 나라 걱정이다. 그러는 사이 한 달이 훌쩍 지나갔다. 
    그만 귀국해야지...아이크도 한국을 다녀갔고 국내사정도 궁금한 이승만은 교민들과 상의한다.
    모두들 말렸다. 아직은 국내정세도 불안정하니 이왕 오신 김에 몇 달 더 휴양하시라는 제자들은 새로운 집까지 구해주었다. 
    호놀룰루 마키키(Makiki Street 2033)의 아담한 하얀 주택에 교민들이 쓰던 가구들과 전기밥솥, 남비, 식기 등 주방용품에 쌀과 김치까지 갖다주며 생활비도 걱정말라고 했다. 
    이렇게 하여 이승만 부부는 사실상 장기체류를 시작하게 된다. 예정에 없던 객지생활은 옷도 물품도 가져온 것이 없어 아쉬운 것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이때의 생활상을 프란체스카의 회고록에서 더듬어보자. 이 책은 뒷날 며느리 조혜자가 시어머니의 일기를 우리말로 정리하여 출간한 [이승만 대통령의 건강](도서출판 촛불, 2007)이다. 
  • ▲ 바느질 하는 퍼스트레이디, 이승만대통령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
    ▲ 바느질 하는 퍼스트레이디, 이승만대통령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
    ★‘근검절약’의 달인들...“저렇게 살려면 우린 대통령 안한다”

    ‘우리는 독립운동 시절로 돌아간 듯, 그때처럼 살았다’고 프란체스카는 쓰고 있다. 
    가난한 독립운동가 부부가 하와이에서 워싱턴에서 살던 식으로 평생 변함없는 근검절약의 청교도 생활을 이어갔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제2의 독립운동’ 부부로 부활한 셈이다. 
    일찍이 유학 때부터 망명까지 독신으로 자취생활에 이골이 난 이승만, 건국후 국가예산 100달러도 “대통령 결재를 받으라‘고 아끼면서도 유학생들에겐 거침없이 지원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대통령이 되어 경무대에 처음 들어갔을 때, 다다미 방을 보자 ”왜내 난다“며 질색읗 했다. ‘왜내’는 ‘일본 냄새’의 준말, 다다미를 걷어 내려하자 말렸다. ”집수리가 부패의 시작이야“ 손도 못 대게 하였으며. 연회장은 아예 문을 잠가버렸다. 
    부인 프란체스카는 어떤가, 오스트리아 중소기업의 막내딸인데도 유럽의 전통적 청교도 ‘숙녀교육’을 받아 이승만 못지않은 신앙과 인내심과 검약과 교양미 넘치는 퍼스트레이디였다. 
    부창부수(夫唱婦隨)의 타고난 검약(儉約) 커플! 이런 것이 천생연분이다. 
    이승만 부부의 지독하게 아끼는 습관을 보면 누구나 혀를 내둘렀다. 반찬도 나물 두 가지에 국 한그릇 뿐, ”통일될 때까지 이것도 호강“이라며 이승만은 ‘낮에 먹던 거 남았으면 가져와” 그릇을 다 비우는 먹성도 좋았다. 
    당시 경무대 내실 비서였던 방재옥(方在玉)의 말을 들어보자. 하루는 대통령이 “재옥아, 이렇게 궤맨 걸 또 입으란다”며 누덕누덕 기운 내복을 들어보였다. 내복뿐인가, 프란체스카는 양말도 새것은 아껴두고 구멍나면 기워서 남편에게 내놓았다. 이러니 자신의 옷을 기워입는 것은 기본이다. 오죽하면 직원들이 이렇게 수근거렸을까. “저렇게 살려면 우린 대통령 안한다”

  • ▲ 애견가로 유명한 이승만 대통령, 경무대 뒷산에서 나무뿌리에 곡괭이질 할때에도 애견들이 주인 옆을 뛰놀고 있다. 오른쪽 사진은 애견 '해피'를 끌어안은 대통령.
    ▲ 애견가로 유명한 이승만 대통령, 경무대 뒷산에서 나무뿌리에 곡괭이질 할때에도 애견들이 주인 옆을 뛰놀고 있다. 오른쪽 사진은 애견 '해피'를 끌어안은 대통령.
    영물 ‘해피’ 하와이 수송작전
    이승만 대통령의 애견(愛犬) 사랑은 신문에 날 정도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자식이 없어 더 그랬는지 모른다. 그렇게 애지중지하던 세 마리를 이화장에 남겨둔채 하와이로 떠났으니, 이것만 봐도 이승만의 망명설은 거짓 선전이다. 개이름은 ‘해피’ ‘스마티’ ‘프리티’였다.
    문제는 이 발바리 개들이 주인이 사라진 뒤 도통 밥을 먹지 않고 낑낑거리는 것이었다. 이화장 뒤에 사는 비서 방재옥에게 돌봐달라 했지만 역시 밥을 안 먹는다고 도로 가져왔다.
    몇 달 뒤 프란체스카의 편지가 인편으로 날아든다. 의사가 ”대통령이 마음 붙일 곳이 필요하다“고 하니 애완견을 보내라는 부탁이다. 
    당시 이대통령과의 연락은 당국에서 빠짐없이 검열하므로 개를 보낼 방법이 막막하다.
    그때 개밥을 사다주곤 하던 미대사관 외교관 부인 스미스 여사와 ‘해피 수송작전’을 짰다.
    마침 본국에 귀환하는 운크라 소속 설계사가 있었다. ”이 개는 하와이 미국 선교사에게 기증하는 것“이라 둘러댔고, ‘해피’의 하얀 몸에 물감칠을 뒤집어씌워 위장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렇게 ‘해피’는 친구 둘을 남기고 혼자 배를 타야 했다.
    호놀룰루에 배가 도착한 뒤 이승만이 부두로 달려나와 ‘해피’를 끌어안았다. 미국에선 동물 반입 때 한달 이상 검역소에서 관리한다. 그동안 이승만은 자고 나면 ‘해피’를 보러 출근하였다고 한다. (우제하, 앞의 책)
  • ▲ 새로운 양자 이인수(가운데)를 맞이한 이승만과 프란체스카 부부.
    ▲ 새로운 양자 이인수(가운데)를 맞이한 이승만과 프란체스카 부부.
    새 양자 이인수...이승만 “너는 그 잘돼간다는 말 믿지 마라”

    새해가 되자 이승만의 ’불효 노이로제‘가 도졌다. 이제 어디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북한땅 황해도 평산의 선영을 돌볼 후손 걱정이 또 튀어나온 것이다. 
    마침 뉴욕에 사는 독립운동의 오랜 동지 이순용(李淳鎔,전내무장관)을 통하여 같은 양령대군파 후손을 물색하기로 했다. 이강석은 효령대군파라서 종친들의 불만이 일었었다. 
    적임자가 나타났다. 당시 경기도 양주군 교육감 이승용(李承用)의 장남 이인수(李仁秀, 1931~2023), 고려대를 마치고 대학원 공부할 때였다. 
    그가 호놀룰루에 온 것은 1961년 12월13일이다. 학수고대하던 이승만은 큰 절로 인사하는 새로운 양자를 보자 사람이 달라진 것 같았다. 잊었던 웃음을 터트리고 기력을 되찾은 노대통령은 어김없이 나라걱정부터 나온다.
    “지금 나라가 어찌 되어 가지?” 양아버지 물음에 이인수가 안심시키려는 대답을 한다.
    “많은 사람들이 열심히 일하니까 잘 되어 갈 것입니다. 염려 마십시오”
    “그래? 그래야지...” 잠시 지난날을 생각하는 듯 감았던 눈을 뜬 이승만이 한숨을 토했다.

    “그런데 말이다. 너는 남들이 잘된다 잘된다 하는 소리 아예 믿지 마라. 내가 그 말을 믿었다가 이렇게 결단이 난 걸...우리나라 일이 그리 쉬운 게 아니란다” 
    언젠간 또 이런 말도 했다고 이인수는 회고한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누가 남북통일을 하려 애쓰는 이가 있느냐?”
    “국민 모두의 소원이 통일이고 정부도 다 생각하고 있을 테니 염려 놓으세요“ 
    그러자 이승만의 목소리가 커진다.
    ”생각만 해서 뭘 해? 이 이승만이가 한바탕 했으면 누가 또 나서서 해야할 게 아니야. 내 소원은 백두산까지 걸어가는 게야!“
  • ▲ 4.19후 집권한 첫 내각책임제 민주당정권의 윤보선 대통령(왼쪽)과 장면 총리.
    ▲ 4.19후 집권한 첫 내각책임제 민주당정권의 윤보선 대통령(왼쪽)과 장면 총리.
    귀국 출발 직전 ”안됩니다“ 박정희 정부의 통고에 쓰러지다

    새로운 아들을 얻어 세 식구가 된 이승만 부부는 다시 한번 단란한 가족의 새출발로 행복에 젖은 나날을 보낸다. 양자 이인수는 부지런히 한국 소식을 전해드리고 신문도 읽어드렸다.
    고국으로부터 위문편지와 곶감이나 마른 반찬을 보내주는 국민들이 끊이지 않았고, 편지와 함께 10달러, 5달러 씩 현금을 넣은 봉투들도 드물지 않았다. 교민들도 그랬다.
    또한 하와이에 들러 위로해주고 편지해 주는 미국의 동지들과 미군 장성들에게 감사의 영문편지를 쓰는 일이 프란체스카의 몫이었다. 특히 맥아더, 밴플리트, 화이트(Isacc White), 렘니쩌 (Lyman Lemnitzer)등 이승만과 절친한 장성들과, 오랜 독립운동의 기둥이던 해리스 목사(미상원 원목) 등의 우정은 더욱 각별한 것이었다. 그럴수록 이승만의 가슴은 뜨거운 향수와 함께, 오만가지 회한의 격정이 차올라 북받치는 듯 편지를 움켜쥐고 눈물을 삼키곤 한다. 곁에서 양자 인수가 위로하면 ”그래, 그렇지. 다 지난 일이야“ 머리를 흔들었다.

    윤보선 대통령 ”가져간 물건 다 내놓으라“...이화장 쑥대밭

    허정 과도정부 때는 아무 말이 없던 ’경무대 재산‘ 문제에 대하여 새로 집권한 민주당 정부가 들고 일어났다. 윤보선 대통령은 ”경무대 물건 가져간 것들 다 내놓으라“고 다구쳤다.
    ”아닙니다. 국비로 산 것들은 모두 국무원 사무국에 인계하였고, 그동안 사비로 산 것들과 선물 받은 것들 중에 값싼 것들만 가져와 보관하고 있습니다.“
    황규면(黃圭冕) 비서는 극구 부인하였지만, 윤대통령은 막무가내였다고 한다. 국무회의에서 경무대 재산 회수를 결의하고 경무대 비서들과 직원들이 이화장에 들이닥쳤다.
    온 집안을 뒤지는 그들은 이승만 책상에서 부모 초상화를 끄집어내더니 욕설을 퍼부으며 마당에 집어던지기도 했다. 특히 이승만이 ”주의하라“고 당부했던 ’서류 캐비닛’을 통째로 실어갔다. 지금처럼 대통령 기록관(2007년 설립)도 없던 시절, 건국대통령의 극비 서류 등은 국가재산임에 분명했으나 당시엔 승자의 전리품처럼 닥치는대로 훑어가는 것이었다. 그후 그 귀중한 역사의 유물과 국가기록들이 어디에서 어떻게 취급되고 보관되었는지도 밝혀진 것이 하나도 없다. 참으로 안타까운 비극이 아닐 수 없는 일이다.
  • ▲ 이승만 전대통령의 위독상태를 보도한 조선일보 기사(왼쪽). 박정희 정부는 5.16때 선포한 정치정화법으로 이승만 정치활동을 금지한 것을 해제하기로 결정했다. 머리 기사에는 조인을 앞둔 한일수교협정을 야당이 극력반대한다는 내용.ⓒ조선DB
    ▲ 이승만 전대통령의 위독상태를 보도한 조선일보 기사(왼쪽). 박정희 정부는 5.16때 선포한 정치정화법으로 이승만 정치활동을 금지한 것을 해제하기로 결정했다. 머리 기사에는 조인을 앞둔 한일수교협정을 야당이 극력반대한다는 내용.ⓒ조선DB
    서울로 출발 직전 ‘귀국중지’ 통고...다시는 일어나지 못한 이승만

    이승만이 50년 절친 보스윅(William Borthwick)의 저택을 찾았다. 아픈 부인을 문병하러 간 것, 장의사로 큰 돈을 번 보스윅도 이제 90세 노인이다, 1920년 현상 걸린 이승만 임시정부대통령이 상하이에 밀항할 때 이승만을 화물선 시체창고에 숨겨준 이래 ’위대한 인물’(Great Man)로 존경한다며 독립운동을 적극 지원해준 동지가 되었다. 
    문병이 끝나자 이승만이 말했다. ”나는 곧 한국으로 돌아가려네“ 
    놀란 보스윅이 ”이 파라다이스를 두고 노인이 어디를 가느냐“고 말렸지만 이승만은 대꾸도 않고 결의에 찬 얼굴로 돌아섰다. 보스윅은 그날도 프란체스카의 핸드백에 돈을 넣어주며 흐르는 눈물을 훔쳤다고 한다. 
    이승만은 만나는 사람들마다 ”나는 한국 간다“라는 말을 노래를 부르듯 반복한다. 
    ”괘씸한 놈! 내가 못 갈 줄 아느냐. 걸어서 갈 테다“ 신발을 찾는 소동도 한두번이 아니다. 
    프란체스카는 주치의에게 물었다. ”지금 시기가 지나면 비행기 여행도 어렵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급해진 프란체스카는 부랴부랴 교민들과 의논 끝에 출국 날짜를 잡았다. 
    그것이 1962년 3월17일! 본국에선 박정희가 쿠데타로 집권한지 1년도 안된 무렵이다.

    이승만이 가장 사랑하는 제자들 최백렬과 윌버트 최 등이 여행준비를 마쳤고 교민들이 환송인사까지 다녀갔다. 이승만은 너무 기뻐서 충격을 받았는지 걷는게 불편해져 휠체어를 타야 했다. 
    드디어 고국으로 떠나는 그날 아침, 일찌감치 여행차림을 마치고 어린아이처럼 들뜬 이승만이  ”서울서 만나세“ 교민들과 손을 흔든다.
    프란체스카는 그러나 그때 알았다. 최백렬의 전화 ”박정희 정부가 귀국을 반대“한다는 것을.
    최백렬이 침통한 얼굴로 들어선 얼마후 9시 반쯤 김세원(金世源) 총영사가 나타났다.
    의아한 얼굴로 인사를 나눈 이승만 앞에 둘러앉는 일행들에게 최백렬이 먼저 운을 뗐다.
    ”지금 김세원 총영사가 말씀드리는 것을 바다와 같이 넓으신 마음으로 들으시고...나라를 위해 한 번 더 결심하셔야겠습니다...“
    갑자기 이승만의 얼굴이 실룩이고 눈이 충혈되기 시작한다. 이미 눈치를 챈 것이다. 
    ”지금은 아직 때가 아닙니다. 정부에서도 모시고 싶지만, 당분간 더 기다려주신다면 저희가 그때엔 각하를 잘 모실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김세원이 본국정부의 ‘귀국 만류’ 사유를 간단히 전달하며 고개를 숙인다.
    한마디 말도 없이 응시하던 이승만의 떨리는 입술이 약한 소리를 달싹거린다.
    ”내가 가는 것이 나라를 위하여 나쁜 일이라면.....가고싶어 못 견디는 이 마음을 참아야지....누가 정부 일을 하든지 잘 하기만 바라오...“
    그리고는 가냘프게 ”나라....나라....“ 신음하 듯 휠체어에 쓰러지며 눈물을 글썽이는 87세 노대통령! 놀란 프란체스카와 인수가 휠체어를 밀고 침실로 들어긴다. 영문 모르는 애완견 ‘해피’가 휭하니 따라 들어가 주인의 침대 곁을 졸랑졸랑 맴돌고 있었다.
    이 순간 이후, 한 번 쓰러진 이승만은 두 번 다시 혼자서 일어나지 못하였다.
  • ▲ 하와이 마우나라니 요양원에서 침대에 누운 환자 이승만과 간호하는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
    ▲ 하와이 마우나라니 요양원에서 침대에 누운 환자 이승만과 간호하는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
    강요된 ‘귀양살이’ 요양원서 중환자 90세 건국대통령의 최후

    뇌혈관 출혈로 수족 마비! 비행기 티켓까지 손에 쥐고 공항으로 떠나려는 순간 사형선고처럼 내려진 ‘귀국 중지’ 통고가 지치고 지친 노구를 직격한 탓이었다.
    제자들을 비롯한 하와이 교민들은 본국정부를 원망하며 새로운 대책을 세워 중환자를 마우나라니(Maunalani) 요양원으로 옮기기로 서두른다. 윌버트 최의 마키키 별장은 머물 필요가 없어 비워주었는데, 그 경황에도 이승만은 교민들이 가져다준 가구 등 생활용품을 원주인들에게 일일이 돌려주고서야 이사를 허락하는 것이었다. 
    고맙게도 요양원 원장 존슨 여사는 무료입원 치료를 자청하였고, 프란체스카에게 간호보조원 직책을 주어 이승만의 병상을 지키도록 배려하였다. 독립운동의 동지 민찬호(閔燦鎬)목사의 아들 토마스 민 박사가 주치의를 자원하여 산꼭대기 요양원을 매일 오르내린다.

    자신이 되찾은 나라 조국 대한민국이 버린 건국대통령 이승만, 독립정신으로 뭉쳤던 하와이 한국인들은 버리지 않았다. 죽음이 임박한 노대통령에게 태평양 한가운데 ‘고도(孤島)의 귀양살이’를 강요한 그들은 어느 나라 국민인가? 
  • ▲ 김인서 목사가 발간한 책 [망명노인 리승만박사를 변호함] 표지.
    ▲ 김인서 목사가 발간한 책 [망명노인 리승만박사를 변호함] 표지.
    뜻밖의 선물 [망명노인 리승만박사를 변호함] 책이 날아오다

    하와이로 떠나 온 뒤 온갖 낭설과 중상모략이 판을 치던 한국에서 어느 날 반가운 ‘선물’이 하와이로 날아들었다. 김인서(金麟瑞, 1894~1964) 목사가 저술한 책 [망명노인 리승만 박사를 변호함](독학출판사, 1963)이 그것이다. 이 책은 그후 2016년 비봉출판사가 다시 출판, 시판되고 있다. 김인서는 이 책을 낸 다음해 세상을 떠난다.
    이승만을 한번 만난 적도 없는 독실한 기독교인 김인서는, 중화민국 국립도서관이 ‘한국의 대표적 한학자’로 뽑은 4인(최남선, 양주동, 김인서, 윤영춘)의 한사람으로 학문에 조예 깊은 지식인이다. 함경남도 출생으로 독립운동을 하다가 3년 반동안 복역한 독립투사로서 1932년부터 월간지 [신앙생활]을 월 3~4천부 규모로 총 129권을 발간, 당시 기독교 독립운동에 큰 영향력을 미치기도 했다. 그런 그가 4.19이후 이승만을 ‘저주’하는 언론에 반기를 든 것이었다.
    그의 주장은 첫째 ‘이승만 대통령의 4대 공로와 4대 무죄를 내세우고 있다.
    4대공로는 ⓵독립운동에 국궁진력(鞠躬盡力), ②대한민국 건국 공로, ⓷6.25에 적군 격퇴, ⓸한미동맹 체결이며, 4대 무죄는 ⓵국토 상실죄 없다. ②패전죄 없다. ⓷국체변혁죄 없다. ⓸항일-반공에 변절죄 없다, 등이다. 그는 특히 언론들이 ”독재 원흉, 매국노, 깡패“란 매도를 퍼붓고, 이승만에겐 ’씨, 선생, 대통령, 박사”등의 칭호를 쓰지말자고 주장하며 심지어 “똥”이란 욕설까지 남발하자 분기탱천 역공을 폈던것이다. 그가 지적한 사례들은 지금 읽기에도 얼굴이 뜨겁고 울분이 끓어오르게 한다. 김인서는 4.19데모학생들에게 호소한다.
    “이대통령이 ‘통일 아니면 죽음’을 부르짖으며 이루어놓은 한미동맹이야말로 한국의 만리장성이다. 이것이 아니면 겨레의 생명은 풍전등화이다. 이박사에게 죄가 있다손치더라도 이승만이 아니면 불가능한 4대 공로를 말살하는 것은 민족적 양심이 아니다. 여러분세대에도 절대적인 공로자가 절대적인 원흉이 되고 만다면 이 나라가 어찌되겠는가. 학생들의 세대에는 공로자를 죄인으로 만드는 민족적 비극이 없이 민족애(民族愛)의 나라가 되어야 한다”
    병상의 이승만도 이 책을 읽었음이 분명하다. 프란체스카는 부부가 감사했다고 적었다.
  • ▲ 이승만 별세를 보도한 조선일보 머리기사. '망명'으로 단정한 제목과 기사는  '별세'란 말도 쓰지않고 '운명'이라 표기했다. 자유당 정권시절엔 이승만 대통령에게 극존칭를 사용하던 신문들은 이승만 하야후 존칭사용을 꺼렸다. 특히 경향신문-동아일보 등 야당계 신문들이 심했다. ⓒ조선DB
    ▲ 이승만 별세를 보도한 조선일보 머리기사. '망명'으로 단정한 제목과 기사는 '별세'란 말도 쓰지않고 '운명'이라 표기했다. 자유당 정권시절엔 이승만 대통령에게 극존칭를 사용하던 신문들은 이승만 하야후 존칭사용을 꺼렸다. 특히 경향신문-동아일보 등 야당계 신문들이 심했다. ⓒ조선DB
    기도와 유언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기약없는 중풍환자의 요양원 생활 3년, 혼자 힘으로 일어날 수 없는 남편을 돌보는 프란체스카의 간병에 교민들은 ”그런 열녀가 없었다“고 입을 모은다. 
    병원 음식에 질력이 난 이승만에게 프란체스카는 남편이 늘 그리는 한국음식을 만들 수는 없었기에 ‘음식 노래’로 지어 불러주기도 한다.

    날마다 날마다 김치찌개 김치국
    날마다 날마다 콩나물국 콩나물
    날마다 날마다 두부찌개 두부국
    날마다 날마다 된장찌개 된장국

    빙긋이 웃으며 따라 부른 이승만은 그가 독립운동시절 아내를 위해 지어 불렀던 노래를 흥얼거린다. 남편의 얼굴을 감싼 프란체스카도 눈물에 젖은 목소리로 리듬을 맞춘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오다가다 만난 님이지만
    살아서나 죽어서나 못잊겠네...

    어느 날 병실을 돌던 존슨 원장이 이승만에게 물었다. ”닥터 리, 소원이 뭐지요?“
    이승만은 자동적으로 답한다. ”여비요, 한국갈 여비 말이오“
    한국정부가 귀국을 늦춰달라 했으니 언젠가는 갈 수 있을 것이다. 마키키 살 때 ”여비 모으자“며 이발도 안하고, 일주일치 반찬거리를 사들고 오면 ”너무 많이 샀다“며 구박하던 이승만의 귀국열망은 수족을 못쓰는 중풍의 몸으로도 식을 줄을 모른다. 아니 생애 마지막 삶을 지탱해주는 희망의 끈이 아니랴.  
    ”호랑이도 죽을 때는 제 굴을 찾아간다는데...“ 
    혈압이 올라 뒤척이는 그는 ”어머니...어머니...“를 잠꼬대처럼 웅얼거리며 신음하다가 잠이 들기도 했다.  
    ”남북통일을 못보고는 눈을 감을 수 없다“는 노대통령을 위해 문병하는 제자들이나 교민들은 이승만의 애창 찬송가를 불러주었다.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찬송가371징)이나 ‘십자가 군병들아’(찬송가352장) 등을 부르고 나서, 신약성경 ‘갈라디아서’ 5장1절을 봉독하고 기도하였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이 성경구절은 이승만이 청년시절부터 독립운동 내내 설교하고 건국후에도 날마다 기도한 독립의 맹서와 같은 하나님의 명령이요, 또 다시 외적의 노예가 되어선 안될 대한민국의 ‘존재이유’ 그것이다. 교민들이 통성기도로 이승만 박사를 생명의 빛으로 구원해달라고 통성기도를 부르짖을때, 이승만도 혼신의 힘으로 하나님께 기원한다.

    "주여, 당신의 종이 이제는 늙고 병들어 주님의 사명을 완수할 힘을 잃었습니다. 저의 나라와 국민을 주님께 맡겼사오니 굽어 살피사 부디 민족의 통일을 이루어주소서. 당신의 어린 양 3천만 자유의 생명들이 다시는 종이 않도록 구원의 성령을 내리소서..."
    ‘다시는 남의 종이 되지 말라’--평생 기도할 때마다 조국의 국민들에게 당부하는 이 말이 유언이 되고 말았다.
  • ▲ 이승만 전대통령의 영결식을 거행한 하와이 호놀루루 소재 '한인기독교회' 모습. 1938년에 이승만이 직접 건축, 성대한 축하식(사진)을 올린 예배당은 경복궁 광화문 문루를 본떠 지었다. 멸망한 조선왕국을 기도교로 환골탈태시켜 대한민국으로 부흥시킨다는 의미였다.
    ▲ 이승만 전대통령의 영결식을 거행한 하와이 호놀루루 소재 '한인기독교회' 모습. 1938년에 이승만이 직접 건축, 성대한 축하식(사진)을 올린 예배당은 경복궁 광화문 문루를 본떠 지었다. 멸망한 조선왕국을 기도교로 환골탈태시켜 대한민국으로 부흥시킨다는 의미였다.
    ◆거인의 임종...“내가 자네를 안다네, 자네를 알아!” 

    6월20일 이승만이 피를 토하기 시작한다. 위에서 내출혈이 점점 심해지자 프란체스카는 한국에 간 이인수를 급히 부른다. 달려온 젊은 아들은 양아버지 곁에 누워 자기 피로 수혈을 이어간다.  그런 식으로 얼마나 오래 지탱할 수 있으랴. 이인수의 얼굴이 점점 핼쓱해졌다.
    이 소식이 전해진 한국에서는 ‘이승만 위독’ 뉴스가 퍼져 나가고 한국 정부도 이승만의 최후에 대비한다. 
    한일수교의 걸림돌=그때, 지난 2년간 대통령 박정희는 경제개발 자금 확보를 위하여 물밑교섭을 통한 ‘한일국교정상화’ 협상을 끝내고 ‘한일 기본조약’을 비롯한 문안들의 마지막 손질에 여념이 없었다. 
    김세원 총영사가 말한 ‘귀국 만류’의 사유는 바로 박정희의 오랜 ‘한일협상’ 구상에 있었다. 당시 4.19단체의 이승만 귀국반대는 물론이고, 야당과 학생들의 ‘한일수교 반대’가 격화되는 경우, ‘반일의 상징’ 이승만이 등장한다면 ‘불난 데 부채질‘이 될 염려가 크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결국 1964년 ’6.3사태‘가 폭발하였고 박정희는 비상계엄령으로 제압, 1965년 6월22일 한일수교 협정을 관철시킨다. 이승만이 각혈을 시작한 이틀 뒤의 일이다. 
      
    자신이 세운 교회당에서 영결식=흐르는 세월을 누가 막을 수 있으랴. 최후의 순간이 다가온다. “더 이상 방법이 없습니다” 요양원 주치의 말에 비상이 걸렸다. 7월18일 토요일이라 연락되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 
    최백렬이 달려왔다. “오늘 밤이 고비”라는 선고, 세명이서 막막한 눈물을 흘리며 임종을 기다리는 순간이다. 
    깊어가는 밤, 호스를 문 이승만의 호흡이 거칠어지면서 “후우우...“ 크게 한숨을 토하더니 잠잠해진다. 
    맥박을 체크하는 간호원이 잠시 후 말했다.
    ”7월19일 0시35분, 운명하셨습니다” 파란만장 90세 거인은 그렇게 떠났다.

    이승만 건국대통령의 영결식은 21일 저녁 호놀룰루 한인기독교회에서 열렸다. 이 교회는 이승만 하와이 독립운동을 한눈에 보여주는 상징물, 망명 5년후 43세 이승만은 미국감리교회에서 탈퇴하여 한인기독교회를 독립시키고 독립교회당을 지을 때, 전면에 경복궁 광화문을 본뜬 문루를 세운다. 무능으로 자멸한 조선을 상징하는 왕궁건물에다 십자가와 종탑을 높이 세워 ‘기독교공화국’으로 환골탈태하는 꿈을 건축함으로써 자유민주공화국 대한민국 건국을 현실화하려는 것, 당시 미국에 유일한 2층 한국기와집이었다. 
    이날 태평양의 황혼이 잦아들 무렵, 교회의 종탑에서 옛주인을 추모하는 종소리가 울려 퍼지고, 하와이의 방송들도 애도방송을 시작한다. 
    하얀 소복을 한 프란체스카 여사가 각계의 조화(弔花)와 안팎의 추도객들 속으로 나타났다. 홀 중앙에 놓인 관 뚜껑이 반쯤 열려 이승만의 유해는 마지막 작별을 고하고 있었다. 
    그때 사람들을 헤치며 들어선 90대 노인 보스윅이 관 앞에 섰다. 
    먼저 간 친구의 얼굴에서 베일을 걷은 그는 잠시 뚫어질 듯 내려다보더니 이마에 손을 짚으며 울부짖는다.

    ”내가 자네를 안다네! 내가 자네를 알아! (I Know You! I Know You!)
    자네가 얼마나 조국을 사랑하고 있는지
    자네가 얼마나 억울한지를 내가 잘 안다네!!
    친구여,
    그것 때문에 자네가 얼마나 고생을 해왔는지
    바로 그 애국심 때문에 자네가 그토록 비난받고 살아온 것을
    내가 잘 안다네, 내 소중한 친구여.....“ 
                                (이인수의 회고—이동욱, 앞의 책)
  • ▲ 이승만 영결식에 참석한 프란체스카 여사(오른쪽 사진)은 두번 졸도하여 입원하였다.ⓒ조선DB
    ▲ 이승만 영결식에 참석한 프란체스카 여사(오른쪽 사진)은 두번 졸도하여 입원하였다.ⓒ조선DB
    프란체스카 두 번 졸도=반세기나 동고동락한 친구의 애통한 절규와 함께 진행된 조촐한 영결식, 남편의 평화로운 얼굴을 보고 또 보던 프란체스카는 두 번이나 졸도하여 쓰러진다. 
    박정희 대통령은 카네이션 조화를 보냈으며, 미국 장성들과 미국 월남 일본 파키스탄 등 각국 정부대표들의 조전이 낭독된 영결 예배가 끝나고, 영구는 진주만 히캄 공군기지로 향하였다. 
    일찍이 이승만이 ‘일본의 기습’을 예언했던 그 진주만 그곳! 
    미육해공군 의장대가 이승만의 영구를 사열하고서 마지막 이별의 조포를 발사한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여 드디어 한국을 해방시켜준 일본패망의 바다, 추모의 나팔소리가 길게  메아리치며 검푸른 파도가 말없이 넘실거린다. 
    이어서 이승만을 존경하고 아버지처럼 여기던 미군 장성들의 추모사가 이어졌다. 

    무언의 귀국=공군기지 활주로에 대기중인 C-118 미군특별기에 영구가 실린다. 유족들과 최백렬, 윌버트 최, 밴플리트 장군 등 16명이 동승하였고, 프란체스카는 병원에 남아있다. 
    밤 11시 굉음을 내지르며 날아오른 공군기는 아시아의 대륙을 향하여 별이 총총한 밤하늘을 가로지른다. 
    거기 누가 기다리는가? 붉은 대륙에 붙은 작은 섬 대한민국!
    “저기가 서쪽이야, 우리 한인들이 사는 데야. 내 땅에 발 뻗고 죽는 게 소원이란 말야...” 
    그토록 달려가서 죽고 싶었던 내 조국 내 땅을 죽고 나서야 막는 손이 없어 날아가는 이승만!
    알로하 오에! 안녕 여러분! 
    일제에 쫓겨 망명 33년, 다시 우리 정부에 강요된 망명 5년 2개월을 지낸 제2의 고향에 이승만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Aloha ‘0e! 그대여 안녕!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