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 탓, 남편 탓, 거짓말이 먹히는 세상… 책임지는 풍토 없어, 우리 사회 무너져
  • ▲ 김규나 작가.ⓒ제공=김규나 작가
    ▲ 김규나 작가.ⓒ제공=김규나 작가
    "나는 국민에게 거짓말을 했습니다."

    이 한마디를 고백할 수 있는 정치인은 없다. 내뱉는 순간, 정치적 생명이 끝날 거라는 공포심 때문이다. 왜 나만? 하는 억울함도 있을 것이고 함께 저지른 일인데, 변명하고 싶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국민들은 금세 다 잊을 거야, 분명 또 내게 표를 줄 거야, 하고 믿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이다.

    사소한 실수에 대해 사과하면 없던 죄까지 뒤집어 씌워 매장시켰고, 큰 죄를 짓고도 '나 몰라라' 버티면 금의환향 할 수 있었던 게 우리나라 정치 역사였다. 지금도 경제지표는 곤두박질치고 있는데 '괜찮다, 좋다, 성공하고 있다'며 기자회견을 열고, 비핵화 하겠다는 확답을 받은 적도 없으면서 "비핵화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천명했다"며 북한에 대해 온갖 지원방안을 모색하기도 한다. 죄 없는 대통령을 끌어내려 잡아가둔 세상인데 무슨 거짓말인들 통하지 않겠는가.

    꼭 정치인이 아니더라도 거짓말은 어디서나 유용하다. 야밤 한적한 공터의 승용차 안에서 노모랑 함께 있었다거나, 불법대출은 아내가 했다거나, 윤리강령에 위배되는 거액의 주식 투자는 남편이 한 일이라고 억울해 하면 얼렁뚱땅 넘어간다. 거짓말은 카멜레온의 변색처럼 생존에 필수적 능력이기도 하지만, 부를 축적하는 재능이자 출세의 지름길, 권력의 핵심요소이기도 하다.

    1994년 제작 상영된 영화 '퀴즈쇼(Quiz Show)'는 시청률을 올리기 위해 퀴즈 프로그램 참여자에게 문제와 답을 미리 알려줘 승패를 조작했던 NBC 방송국의 비리를 폭로한다. 강제 퇴출된 데 불만을 품은 출연자가 사건을 고발하며 문제가 커지자 국회가 조사에 나서고 청문회가 열린다. 방송사는 고발자를 정신병자로 모는 동시에 최종 승자였던 찰스에게 부정은 없었노라 증언하라고 압박한다.

    거짓말을 하자니 양심이 괴롭고 진실을 말하자니 당장 날아올 세간의 비난이 두렵다. 어쩌면 자신의 미래가 송두리째 날아가 버릴지도 모른다. 시청자를 즐겁게 해주자는 제작진의 설득에 동의했을 뿐이고 역대 출연자들이 똑같이 해온 짓인데 왜 나만 총알받이가 되어야 하나, 찰스는 혼란스럽다.

    "넌 마치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는 것처럼 말하는구나. 너는 돈을 받았어. 문제는 그거잖아."

    명망 있는 교수로 재직하다 퇴임을 앞둔 아버지는 부정을 저질렀다는 아들의 고백에 충격을 받지만 단호하게 상황을 정리한다. 찰스는 사실을 밝히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진실만 말하면 괜찮을 것’이라는 부자의 순진한 믿음과 달리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인만큼 결말은 냉정하다.

    “발언 이상의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일부 청문회 심의관들은 잘못을 시인하는 용기에 찬사를 보내기도 하지만, 최종적으로 찰스에게 요구하는 것은 한 가지, 책임지는 것이다. 반면, 조작을 주도했으나 조작한 적 없다고 끝까지 우긴 방송사와 광고주, 프로그램 제작자는 아무런 손실을 보지 않는다.

    “마음이 편합니다.”

    찰스는 청문회장을 나설 때 기분이 어떠냐고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답했지만 실제로 그가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법적 책임을 지진 않았지만, 대학교수였던 그는 다시는 강단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진실을 밝힌 것을 평생 후회했을지도 모르겠다.

    혹자는 이 영화가 개인에 대한 자본주의와 거대 기업의 횡포를 꼬집은 거라고 평한다. 어느 세상이나 힘없고 백 없는 사람이 손해를 본다. 진실을 말하는 사람은 영웅이 되기보단 사회적 사망선고를 받는 일이 더 많은 것도 사실이다. 세계 역사조차 진실과 선(善)의 승리를 증명하지 않는다. 오히려 악이 언제나 이기고, 이기는 것이 진실이 되며, 강한 것이 선이 되는 것 같다. 거짓을 고백한 뒤 느끼는 편한 마음이 밥 먹여 주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왜 진실을 말해야 하는 것일까. 온갖 비난을 무릅쓰고 거짓을 인정한 용기에 대한 보상은 무엇이란 말인가.

    잘못을 했으면 책임을 지고 그에 합당한 벌을 감당하는 것이 당연할 뿐, 죄를 시인했다고 상을 받아야 하는 게 아니다. 거대 자본은 늘 이기고 힘없는 개인만 짓밟힌다는 단순 이분법으로 문제의 본질을 희석시키는 것도 적당하지 않다. 공산전체주의 사회가 아닌 이상 할 것이냐 말 것이냐, 선택의 기회와 그 책임은 언제나 개인에게 있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아버지는 사기극에 가담했다고 말하면서도 이런 저런 자기 합리화를 늘어놓던 찰스에게 따끔하게 호통 친다.

    "넌 마치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는 듯 말하는구나!"

    우리 사회는 타인에 대해서는 혹독하면서도 내 편에 대해서는 한없이 너그럽다. 사람이 그럴 수도 있지, 기죽지 말라며 눈 감아주는 데 급급하다. 내 가족, 내 사람이 성공하면 찬사를 보내지만, 과오에 대한 개인의 책임은 가르치지 않았다. 그 결과, 잘못이 발각되면 재수가 없었다고 생각할 뿐, 누구도 책임지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인권이라는 모호한 개념까지 비집고 들어서면서 잘못과 죄에 대한 경각심은 완전히 사라졌다. 사기를 쳐도, 횡령을 해도, 추행을 해도, 도둑질을 하거나 살인을 해도 그런 적 없다 발뺌하고, 남 탓 하며 사람들의 기억에서 지워지기를 기다리는 것으로 만사 오케이. 정치·언론·기업·교육·문화·역사 등등, 오랜 시간 쌓여온 과오들을 하나도 바로잡지 못한 채 책임지는 사람 하나 없이, 우리나라는 그렇게 차근차근 무너져가고 있다.

    다행스럽게도 '포스트 코리아'가 열릴 수 있다면, 우리는 기본부터 다시 배우고 가르쳐야 한다. 누구나 마음대로 말하고 행동할 수 있지만 자유와 선택에는 반드시 결과가 따른다는 것을. 사과하고 반성해도 이미 저지른 과오에 대한 책임은 반드시 져야 한다는 것을. 용서는 책임진 뒤에 올 수도 있는 행운일 뿐, 잘못을 시인했다고 주어지는 포상이 아니라는 것을. 무엇보다 선택의 책임은 온전히 개인, 그 자신이 감당해야 할 몫이라는 것을.

    깨어나라, 개인이여! 일어나라,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이여!

    TMTU. Trust Me. Trust You.

    *‘TMTU. Trust Me. Trust You’는 김규나 작가가 ‘개인의 각성’을 위해 TMTU문화운동을 전개하며 ‘개인이여, 깨어나라!’는 의미를 담아 외치는 캐치프레이즈입니다.
    *소설가 김규나(장편소설 <트러스트미> <체리 레몬 칵테일>, 산문집 <대한민국의 시계는 거꾸로 간다>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