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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면 아래 있던 인공지능(AI) 거품 붕괴론이 글로벌 증시를 강타했다. 미국 증시를 이끌던 팔란티어· 엔비디아·알파벳 등 AI관련주들이 폭락했고, 5일 우리 증시에서도 삼성전자와 SK 하이닉스 등 대형주 주가가 급락하면서 장중 3900선이 붕괴했다. 비록 개미들의 방어 덕에 4000선은 사수했지만 ‘사천피’, ‘십일만전자’, ‘62만전자’ 등 ‘불장’을 상징했던 숫자가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될 위기에 처한 것이다.
최근 AI 거품과 증시 과열에 대한 경고음이 여기저기서 울렸지만 정부와 투자자는 이를 애써 무시해 왔다.
지난 8월 미국 매사추세츠공과대(MIT)의 난다(NANDA) 이니셔티브는 "AI 파일럿 프로그램 가운데 5%만 수백만달러의 가치를 창출했고, 나머지 95%는 아무런 수익을 내지 못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샘 알트만 오픈AI 최고경영자(CEO)도 AI 산업이 과도한 투자 속 '거품'일 수 있다고 인정하기도 했다.
더구나 글로벌 증시 상승의 동력이었던 미국의 기준금리 인하마저 속도조절론이 제기되면서 유동성 성 파티가 끝날 것이라는 우려도 며칠 전부터 지속적으로 제기돼 왔다.
현재의 AI 투자열기를 닷컴 버블과 평면적으로 비교하기는 어렵다. 닷컴 버블 당시와 달리 미국의 몇몇 AI 대표 기업들은 매년 사상 최고 실적을 경신하고 있다. 이들의 막대한 AI 데이터센터 수요 덕분에 우리 주력 산업인 반도체는 유례없는 품귀 현상을 빚고 있다.
그럼에도 실적 대비 주가 밸류에이션이 과도하게 높다는 지적은 예의주시해야 한다. 미국 증시 전문가들은 "현재 S&P500 상위 10개 기업의 밸류에이션은 펀더멘털 대비 1990년대 닷컴버블 정점보다도 높다"며 "이번 AI 붐이 인터넷 버블을 규모 면에서 능가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사천피’ 시대를 연 주인공인 외국인들이 서서히 한국 시장을 떠나고 있다는 징후도 지난달 말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외국인들은 지난 28일부터 5일 까지 7거래일 연속 코스피에서 ‘팔자’에 나섰고, 그 물량을 개인들이 고스란히 받았다.
개인들의 자금은 막대한 빚에서 나왔다. 신용거래융자잔액은 25조4000억원으로 사상 최대치에 근접했으며, 증시 주변 자금인 증권사 CMA 잔액도 급증했다.
이런 상황에서 이재명 대통령의 황태자로 불리는 권대영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은 전날 한 방송사에 출연해 ‘빚투를 너무 나쁘게만 봤는데 레버리지의 일종"이라며 빚투를 권장하는 발언까지 했다. 이재명 대통령이 내년도 예산안을 설명하는 국회 시정연설에서 AI 예찬론을 펴면서 '사천피' 달성에 고무된 듯한 발언을 한 것에 보조를 맞춘 셈이다.
이날 코스피 지수가 장중 3900선 마저 붕괴되고 ‘사이드카’까지 발동되면서 빚으로 증시 막차를 탄 개미들은 큰 손실을 안게 됐다.
빚내서 집 투자는 죄악시하면서 유독 증시에 대해서만큼은 빚투를 권장하는 것은 모순적 잣대라는 사실을 정부도 모를 리 없다. 결국 이재명 정부의 ‘오천피’ 구호에 매몰된 나머지 ‘빚투 과열’의 위험을 애써 외면한 정부의 직무유기가 개미들의 손실에 일조한 것이다.
연초 2000선에 머물러 있던 코스피 지수가 불과 10여개월만에 4000선까지 급등한 것이 '허상'은 아니었는지 지금이라도 되돌아봐야 한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반도체 수요 급증과 HBM 경쟁력을 바탕으로 최고의 실적은 낸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소비 지표인 소매판매가 2달 연속 감소하고, 반도체를 제외한 자동차·기계장비 등 전통 산업의 생산이 줄었다는 9월 산업활동동향 통계는 우리 경제의 취약성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사천피'라는 새 역사를 쓰는 동안 일부 대형주만 폭등했을 뿐 중소형주와 코스닥 시장은 부진을 면치 못했다.
무엇보다 고용이 문제다. 9월까지 양질의 제조업 취업자 감소세가 지속되고 있고 청년 고용도 개선되지 못하고 있다.
'AI발 고용없는 성장'에 대한 우려가 증폭되고 있는 미국의 전철을 우리나라도 뒤따라 밟고 있다는 우려를 지울 수 없다. 소비쿠폰 효과로 숙박및음식점업 취업자가 늘었다고는 하지만 이런 일회성 포퓰리즘 정책을 영원히 지속할 수는 없다.
‘오천피’ 구호는 우리 기업의 체질개선과 경직된 고용시장 구조개혁 등 펀더멘털 개선을 위한 정책방향이 되어야 한다. 단순히 코스피 지수를 5000에 맞추기 위한 숫자놀음이 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는 얘기다.
금융당국 고위 당국자의 '빚투 장려' 발언은 이재명 정부의 '오천피' 구호가 정권의 비위를 맞춰야 하는 공무원들에게 교조적 단어로 변질돼 받아들여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다.
'오천피'라는 숫자에 매몰되기 보다 기업 경쟁력을 강화하고 나라의 생산성을 높이는 것이 외국인들의 변덕에 개미들이 손실을 입지 않는 건전한 증시로 가는 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