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버레디 작전 저지한 로버트슨, 특사로 서울 파견12차례 담판 끝에 휴전·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길 터
  • ▲ 로버트슨 기념사업회(회장 신승일)가 2일 오전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월터 S. 로버트슨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서성진 기자
    ▲ 로버트슨 기념사업회(회장 신승일)가 2일 오전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월터 S. 로버트슨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서성진 기자
    "이승만 대통령의 자유세계를 가장 존중한 공직자는 월터 로버트슨이었을 것이고, 그가 꼽은 최고의 반공투사는 이승만 대통령이다."

    신용석 로버트슨 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은 2일 로버트슨 기념사업회(회장 신승일)가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개최한 '월터 S. 로버트슨 학술대회'에서 이같이 평가했다.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의 숨은 설계자로 불리는 월터 S. 로버트슨(1893~1970) 전 미 국무부 극동담당 차관보가 최근 재조명되고 있다. 1953년 이승만 대통령과의 담판을 통해 휴전 성립과 동맹 구체화를 이끌어낸 그는 금융인으로 명망을 쌓았으나 제2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미 국무부에 발탁돼 중국 주재 공사와 대리대사를 맡았다. 이때 중국 공산당의 실체와 협상술을 직접 체험한 경험은 훗날 그가 철저한 반공 외교관으로 자리매김하는 밑바탕이 됐다.

    1953년부터 1959년까지 국무부 극동담당 차관보로 재직한 로버트슨은 한국전 휴전 성립,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자유중국(대만) 지지, 인도네시아 공산화 저지 등 굵직한 현안을 지휘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덜레스 국무장관의 전폭적 신임을 받은 그는 냉전기 미국의 극동 전략을 설계한 핵심 외교관으로 꼽힌다.

    1953년 5월 워싱턴DC에서 논의되던 '에버레디 작전'은 휴전협정에 반대하는 이승만 대통령의 제거를 목표로 했으나 로버트슨의 반대로 무산됐다. 로버트슨은 에버레디 작전을 노출하기 위해 미 국무부 합동참모본부 협의석상에서 "우리가 무슨 권한으로 한국 정부를 접수하는가. 우리는 우리 자신을 침략자의 입장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 아닌가"라는 폭탄선언을 하면서다. 에버레디 작전의 부당성을 직설화법으로 갈파한 로버트슨의 발언을 계기로 에버레디 작전은 결국 취소됐다.

    로버트슨은 그해 6월 23일 서울에 대통령 특사로 파견돼 7월 11일까지 이승만 대통령과 12차례 이상 담판을 벌였다. 이승만 대통령이 '휴전엔 반대하지만 방해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미국에 확인해줌으로써 사흘 뒤인 53년 7월 27일 미국과 한국, 중공 간에 마침내 휴전협정이 체결됐다. 이승만 대통령은 소원 달성은 실패했지만 로버트슨의 담판을 통해 한미동맹 체결이라는 엄청난 성과를 챙겼다.

    로버트슨 사절단은 휴전 후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고 한국에 수억 달러 넘는 경제 지원을 장기간 계속하며 한국육군 20개 사단과 해공군력을 증강시키기로 이승만 대통령에 약속했다. 워싱턴 특파원을 지낸 강찬호 중앙일보 논설위원은 이를 두고 "그 대가로 이 대통령은 휴전에 반대하지만 방해하지 않겠다는 약속만을 했을 뿐"이라며 "이렇게 미국이 '관대한' 조건으로 한국과의 동맹을 맺게된 데는 한국과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 충분한 이해와 공감을 가진 합리적인 외교관 로버트슨의 역할이 큰 기여를 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조갑제 조갑제닷컴 대표는 이승만-로버트슨의 담판을 공산주의자들의 본질과 전략에 일치된 생각을 가진 두 인물의 '위대한 만남'으로 평가했다. 조 대표는 "로버트슨은 루스벨트가 전후 만주 통제권을 소련에 넘기기로 한 얄타 비밀약속이 민주를 중국 공산군의 기지로 만들어 1949년의 공산통일로 이어졌다고 본다"며 "트루먼과 마셜은 모택동의 정치적 전술에 대한 오해, 장개석에 대한 불신, 좌우 합작에 대한 집착으로 장개석 국민정부군의 활동을 제약해 공산군 섬멸의 기회를 놓쳤다. 트루먼 행정부 내의 친(親)모택동 세력과 미 언론·지식인들의 위선적인 장개석 비판이 중국 공산화를 도왔다"고 지적했다.

    로버트슨은 이승만 대통령의 반공전략을 지지했으며 중국에서의 실수를 미국이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중국과 동유럽에서 추진된 좌우합작이 공산화로 가는 중간단계였음을 간파했고, 미 군정의 좌우합작 제의를 거부해 대한민국 건국에 성공했다.

    조 대표는 "이승만은 공산주의자들을 상대하는 최대의 무기는 그들로 하여금 '우리가 무엇을 할지 모르는 미치광이들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믿었다"며 "이승만은 미국과 유엔이 1951년 1월에 중공군이 평택-삼척선까지 내려온 상황에서 중국에 '현위치 휴전'을 제의, 한국이 사라질 뻔했던 사태에서 완전히 소외됐음을 잊지 않고 1953년 휴전협상 때 반공포로 석방 등 극단적 견제카드를 뽑아 아이젠하워 행정부를 압박,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에 성공한다"고 말했다.

    월터 로버트슨 기념사업회는 2024년 자료 조사 작업을 통해 대한민국, 미국, 대만(중화민국)에 소재한 로버트슨 관련 '기록문서' 총 733건(8300장)과 사진 112건, 영상 15건 등 '시각 자료' 총 127건 등 로버트슨의 한국 및 중국(대만) 관련 활동이 담긴 원본 사료(사본)을 종합적으로 수집하고 정리했다.

    한서영 로버트슨 기념사업회 수석연구원은 "국내에서 수집 및 정리한 자료는 이미 데이터베이스화되어 인터넷상에 공개된 자료이기에 누구에게나 확인가능한 자료이지만, 해외 박물관의 소장자료는 접근이 제한적이기에 이번 자료조사를 통해 학술연구를 발전시키기에 활용 가치가 높은 사료"라며 "발굴된 자료를 기초로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과 아시아의 자유전선 형성에 기초 토대를 놓은 로버트슨의 역할이 재조명되는 연구가 더욱 활발히 진행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 ▲ 로버트슨 기념사업회(회장 신승일)가 2일 오전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월터 S. 로버트슨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신승일 회장이 인사말을 하고 있는 모습. ⓒ서성진 기자
    ▲ 로버트슨 기념사업회(회장 신승일)가 2일 오전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월터 S. 로버트슨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신승일 회장이 인사말을 하고 있는 모습. ⓒ서성진 기자
    앞서 신승일 기념사업회 회장은 인사말에서 "대한민국의 번영은 전후 세계의 냉전체제 속에서도 한미상호방위조약이 한국의 안보를 보장했기에 가능했다"며 "한미상호방위조약은 이승만 대통령의 국제정세에 대한 뛰어난 혜안과 합리적인 주장으로 미국을 설득했기에 이뤄질 수 있었다. 이에 더해 미국 정부의 특사로 한국에 파견된 로버트슨 차관보가 이승만 대통령의 입장을 이해하고 동조했기에 가능했다는 사실이 근래에 늦게나마 밝혀지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로버트슨 선생을 기념하는 기념패를 한국과 미국의 적절한 곳에 설치하는 것은 우리 기념사업회의 중요한 목적사업인데, 선생의 직계 후손들이 지금도 거주하고 있는 리치몬드 시, 특히 주립문학역사박물관이 유력한 후보지 중 하나"라고 설명했다.

    한편, 로버트슨 기념사업회는 로버트슨 국무부차관보의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에 관한 공헌을 기리고 기념하는 순수한 민간 공익재단이다. 기념사업회는 학술대회 개최와 논문집 발간, 기념패의 설치 등을 통해 로버트슨 차관보가 대한민국의 자유 안보와 번영에 공헌한 업적을 널리 알리고 기념하는 것을 목표로 하며, 목표사업을 완료하면 해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