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가치 대신 국익 전면 배치서반구 '절대적 우위' 명시美, 전술핵 축소 카드 꺼낼까안보 공약 사라지고 비용 청구서만CPTPP 가입하고 NCG→NPG 격상해야
  • ▲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해 10월 29일 경북 경주박물관에서 이재명 대통령에게 선물받은 '천마총 금관 모형'을 지나며 인사하고 있다. ⓒ뉴시스
    ▲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해 10월 29일 경북 경주박물관에서 이재명 대통령에게 선물받은 '천마총 금관 모형'을 지나며 인사하고 있다. ⓒ뉴시스
    최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촉발한 '그린란드 사태'는 대서양 동맹의 붕괴를 넘어 우리나라 외교에 전례 없는 난제를 던졌다. 트럼프 대통령이 덴마크 자치령인 그린란드 매입 야욕을 보이며 대유럽 관세 카드를 꺼내 들자 유럽연합(EU)이 '무역 바주카포'로 불리는 통상위협대응조치(ACI) 발동 검토에 나섰다. 이에 트럼프 대통령이 "나는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NATO) 창설 이래 누구보다 많은 일을 했고 이제 나토는 미국을 위해 뭔가를 해야 한다"며 동맹국을 안보를 담보로 압박하는 상황은 전후 80년간 세계 질서를 지탱해 온 '가치 동맹'의 시대가 저물었음을 상징한다.

    미 국무부가 지난 15일 공개한 '2026~2030년 전략 계획(ASP)'은 이 파열음이 일시적 현상이 아님을 시사한다. 보고서는 서반구 요새화를 골자로 한 '돈로 독트린'(Donroe Doctrine)을 공식화하며 동맹국에 고강도 비용 청구서를 내밀었다. 미국의 전방위 압박 속에서 '이중 족쇄'에 직면한 72년 혈맹인 한미동맹도 '가치 동맹'의 명분이 퇴색한 자리를 '이익 동맹'의 냉철한 셈법이 대체하고 있다.

    ◆동맹 가치 깨진 틈 … '돈로 독트린'과 각자도생

    20일 외교가에 따르면 미국은 이 전략 계획에서 '서반구에서의 절대적 우위 재확립'을 미국의 최우선 외교 목표로 천명했다. 미주 대륙 내에서 외부의 군사·경제적 영향력을 완전히 '숙청'(purge)하겠다는 의지를 명시한 돈로 독트린은 미국이 안보 전략의 축을 전(全)지구적 개입에서 서반구의 배타적 전략 권역화로 좁혔음을 의미한다.

    보고서가 나토(NATO)에 'GDP의 5% 방위비 지출'을 요구하며 "안보에 계속해서 무임승차하는 국가들로부터 우방의 혜택을 박탈하겠다"고 적시한 것은 단순한 경제적 불이익을 넘어선다. 이는 동맹국이 누려온 최고의 혜택인 안보 우산마저 거래의 대상으로 삼겠다는 선언으로, 통상 갈등이 전술핵 철회와 같은 안보 위기로 비화할 수 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최근 외교가에서 미국의 '나토 전술핵 재배치 재검토' 가능성이 거론되는 것은 보고서상의 혜택 박탈이 단순한 엄포를 넘어 언제든 실질적 안보 공약 철회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징후다.

    ◆韓 향한 전방위 압박, 방위비 넘어선 '인프라 접근권'

    주목해야 할 지점은 인도·태평양 전략에서 미국이 동맹국에 요구하는 의무의 질적 변화다.

    국무부 보고서는 아시아 동맹국들에게 "자체 방위비 지출 증대"뿐 아니라 "미군이 핵심 인프라와 자원에 더 많이 접근할 수 있도록 허용"할 것을 명시했다. 이는 단순한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SMA) 증액 차원을 넘어선다. 유사시 미군이 평택·부산 등 한국의 항만·공항·철도 등 핵심 국가 기간망에 대해 배타적이고 신속한 접근권을 보장하라는 요구로도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한국을 대중(對中) 견제를 위한 전략적 플랫폼 중 하나로 활용하겠다는 의도를 분명히 했다. 한국 정부가 이미 GDP 대비 3.5% 수준의 국방비 지출을 공약했음에도 미국은 현금 외에 국가 인프라에 대한 접근권이라는 추가적인 청구서를 제시한 셈이다.

    ◆美 "정권 교체 원치 않아" … 샌드위치 韓이 처한 역설적 현실

    한반도 안보의 또 다른 뇌관은 미국의 대(對)적국 인식 변화다.

    보고서는 중국을 비롯한 경쟁국이나 적대국과의 관계 설정에서 "미국은 전쟁이나 정권 교체를 바라지 않는다"고 못 박았다. 이는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가 아니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등 미국 본토에 대한 직접적 위협이 관리 가능한 수준이라면 북한 체제의 변화를 시도하지 않고 현상 유지를 택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트럼프 2기 행정부가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 대신 '핵 동결'을 통한 관리 모드로 전환할 경우 한국은 고강도 동맹 비용을 지불하면서도 정작 북핵의 위협은 그대로 안고 가야 하는 역설적인 상황에 직면할 수 있다.

    ◆인태 협력의 전략적 활용과 잠재적 핵능력 확보

    대서양 동맹의 균열이 태평양 동맹의 전략적 가치 상승으로 직결될 것이라는 기대는 지정학적 오독에 가깝다. 트럼프 2기 행정부의 '돈로 독트린' 하에서 유럽과 아시아는 차별화된 파트너가 아니다. 두 지역 모두 미국 본토 방어를 위한 외부 방어선이자 효용 가치가 비용을 밑돌면 언제든 조정 가능한 종속변수에 불과하다. 

    전략계획에 앞서 지난해 12월 공개된 미국의 '2025 국가안보전략서'(NSS)에는 필리핀, 태국 등 미국의 조약 동맹국들이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민주주의 파트너'로 불리던 대만은 '반도체와 해운로의 전략적 요충지'로, 중국은 단순한 '경제 경쟁자'로 그 위상이 축소 규정됐다. 이는 트럼프 행정부가 아시아 동맹을 더 이상 가치 공유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중국 견제 비용을 공유할 대상으로 격하했음을 보여준다.

    "트럼프 행정부는 서반구 중심 안보 정책과 인도·태평양에서의 중국 억제 노력을 균형있게 다룰 수 있을 것"이라는 랜들 슈라이버 전 미 국방부 인도·태평양 안보담당 차관보의 기대와 달리 '균형'은 작동하지 않고 있다. 현실은 서반구와 인도·태평양 양측에서 동맹의 신뢰 자산이 동반 침식하는 이중 위기가 목도된다. 인도·태평양 국가들은 미국의 보호무역 기조에 따른 경제적 타격과 안보 비용 청구서 앞에서 구조적 딜레마에 직면한 것이다.

    이에 대해 한 전직 안보 관료는 뉴데일리에 "이재명 정부는 미국의 대중(對中) 견제에 한국이 필수적이라는 소위 안보 레버리지론에 안주해선 안 된다"며 "미국은 이미 서반구 중심의 배타적 안보 전략으로 선회했다. 우리가 지불할 방위비 증액과 인프라 접근권 보장이 동맹의 영속성을 담보하지 않는다. 이는 미국의 전략적 필요에 의한 한시적 거래 비용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경제적 다변화와 안보의 제도화를 동시에 추진해야 한다"고 밝혔다.

    즉, 경제적으로는 CPTPP(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 가입을 서둘러, 일본·호주·캐나다 등 역내 중견국들과의 통상 연대를 통해 미·중 리스크를 분산시킬 완충지대를 확보하되 안보적으로는 핵무장이라는 비현실적 구호 대신 미국의 발을 묶어둘 구속력 있는 안전판을 챙겨야 한다는 것이다. 

    전직 안보 관료는 "우리는 미국에 평택·부산 등 전략적 기지를 제공하는 대가로 현재의 느슨한 핵협의그룹(NCG)을 나토 수준의 상설 핵기획그룹(NPG)으로 격상시키는 '빅 딜'을 해야 한다"며 "미국의 전략자산 전개를 조약 수준으로 의무화하고 한국형 미사일 방어 체계(KAMD)를 완성해 스스로를 지킬 '고슴도치 전략'을 병행하는 것만이 트럼프 시대의 파고를 넘는 유일한 현실적 해법"이라고 제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