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북 일본인 구명 운동 니시오카 교수 주제 발표외부정보 北유입, 탈북자-인권운동가 공로국정원은 한 일 없어납북 남한 엘리트, 무려 10만 명 … 김일성 짓이승만 대통령만 납북자 구출 목청 높여
  • ▲ '일본인 납북자회'를 이끌며 지난 30여 년간 '일본인 납북자 구출 운동'을 펼쳐온 니시오카 쓰토무 일본 레이타쿠대 특임교수가 25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 대우관 별관에서 연세대 이승만연구원(원장 양준모)이 '동북아 국제정세와 북한 해방: 이승만의 꿈'을 주제로 개최한 '우남자유포럼'에서 발표하고 있다. ⓒ서성진 기자
    ▲ '일본인 납북자회'를 이끌며 지난 30여 년간 '일본인 납북자 구출 운동'을 펼쳐온 니시오카 쓰토무 일본 레이타쿠대 특임교수가 25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 대우관 별관에서 연세대 이승만연구원(원장 양준모)이 '동북아 국제정세와 북한 해방: 이승만의 꿈'을 주제로 개최한 '우남자유포럼'에서 발표하고 있다. ⓒ서성진 기자
    "체제 경쟁에서 북한이 졌다. 한국의 풍요롭고 자유로운 모습을 알게 된 대다수 북한 주민이 한국을 동경하고 한국 주도의 통일을 원하게 됐기 때문이다."

    '일본인 납북자회'를 이끌며 지난 30여 년간 '일본인 납북자 구출 운동'을 펼쳐온 니시오카 쓰토무 일본 레이타쿠대 특임교수가 지난 1977년 13세의 나이로 북한 공작원에 의해 납치된 일본인 요코다 메구미를 회상하며 한일 간 연대를 촉구하며 이같이 말했다.

    니시오카 교수는 25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 대우관 별관에서 연세대 이승만연구원(원장 양준모)이 '동북아 국제정세와 북한 해방: 이승만의 꿈'을 주제로 개최한 '우남자유포럼'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꿈인 '한국 주도의 자유통일'이 한일 납북자 문제의 해결책이라고 강조했다.

    ◆北 김일성, 한국전쟁 중 엘리트 10만 명 납치 지시

    북한은 한국전쟁 중 약 10만 명의 한국 민간인을 납치했고, 이 가운데 98.1%가 남성이었다. 특히 1950년 7월부터 9월 28일 서울 수복 직전까지 불과 두 달여 동안 전체의 88.2%(8만4659명)가 집중적으로 납치됐다.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는 1950년 공보처 통계국이 작성한 '서울특별시 피해자 명부'(2438명), 6.25사변피랍치인사가족회가 1951년 작성한 '6·25사변 피랍치인사 명부'(2316명), 1952년 대한민국 정부가 작성한 '6·25사변 피랍치자 명부'(8만2959명), 1954년 내무부 치안국이 작성한 '6·25동란으로 인한 피랍치자 명부'(1만7940명), 1956년 대한적십자사가 작성한 '실향사민 신고서'(7034명) 등 5개 피해자 명부를 분석해 납치 피해자가 9만6013명 이상임을 밝혔다.

    납북자에는 국회의원과 정치인 169명, 법조인 190명, 경찰 1613명, 행정공무원 2919명, 교수와 교원 863명, 언론인 164명, 기술자 2836명, 의료인 582명, 예술가 107명, 대학생·고등학생 4223명 등이 포함됐다. 농업 종사자는 전체의 60.8%를 차지했다. 납북자의 80.3%인 7만7056명이 자택 또는 자택 부근에서 납치됐고, 납북자의 84.6%는 16세부터 35세 사이였다.

    이러한 대대적인 엘리트 계층 납북은 "부족한 인텔리 문제를 해결하자면 북조선에 있는 인텔리를 다 찾아내고 남조선에 있는 인텔리를 데려와야 한다"는 1946년 김일성의 지시에 따른 조치였다.

    ◆평양형무소 내벽에 남은 납북자의 절규와 기대

    니시오카 교수는 "건국 직후의 대한민국 엘리트가 다수 납치됐다. 갓 태어난 대한민국이라는 국가 지도층이 조직적으로 납치됐다. 이 역시 남북 분단의 한 단면이다. 납북자들은 대한민국과 유엔이 자신들을 구출해 줄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있었다"고 말했다.

    납북자들의 이러한 희망은 서울이 수복된 직후인 1950년 10월 방북한 한국인 납북자 가족들이 평양형무소 내벽에서 발견한 "자유여 그대는 불사조/ 우리는 조국의 강산을 뒤에 두고/ 홍염만장(紅焰萬丈) 철의 장막 속/ 죽음의 지옥으로 끌려가노라/ 조국이여 유엔이여/ 지옥으로 가는 우리를/ 구출하여 준다는 것은/ 우리의 신념이다"라는 시에도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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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 자유는 누구도 막을 수 없다. 우리는 하나로 뭉치자"고 연설하는 이승만 대통령. ⓒ뉴데일리DB
    ◆이승만, 광복절 경축사마다 자유통일 통한 北 동포 구원 강조

    니시오카 교수는 "대한민국 건국 대통령 이승만은 납북자를 포함한 북한 주민도 자신이 대통령으로서 책임을 지는 대한민국 국민이며, 하루빨리 공산 괴뢰정권의 지배를 끝내고 그들을 풀어주는 것이 대한민국의 국시이자 대통령으로서의 사명이라고 생각했다"며 "그것이 자유통일"이라고 강조했다.

    실제로 이승만 대통령은 건국 원년인 1948년부터 북한 주민을 대한민국 국민으로 포용하는 통일관을 특히 광복절 경축사를 통해 꾸준히 천명해 왔다. 이 대통령은 1948년 "거의 1000만 우리 동포가 민국 건설을 우리와 가치(같이) 진행하기를 남북이 다 원하였으나 유엔대표단을 소련군이 막기 때문에 못하게 된 것이니 우리는 장차 소련 사람들에게 정당한 조치를 요구할 것"이라고 말했다.

    1953년에는 "우리는 하루바삐 북진해서 사경에 빠진 우리 이북 동포들을 구원해서 생사를 같이 하자는 것이 우리의 원"이라며 "이북 동포들은 아무쪼록 좀 더 참아 주기를 바라며 어떻게 하든지 좀 더 연명만 해서 참아 주기를 부탁하는 바"라고 호소했다.

    1955년에는 "1948년 8월 15일에 우리가 새 정부를 축립해서 한국 전체의 이남 이북이 다 같은 지위에 처하고 우리가 우리 모든 동족을 다 해방시키지 않고는 잘 살지 않겠다는 주의를 맹서한 것"이라며 "이 목적은 우리가 이뤄야만 될 것이오, 또 이루게 될 것"이라고 다짐했다.

    1958년에는 "이북에 있는 우리 동포들은 우리에게 대해서 보호해 달라고 부르짖고 있는데 이것은 이북의 남녘 동포들은 우리가 아니고는 희망할 것이 없는 까닭"이라며 '대업'을 위해 "우리는 모든 방면으로 강건해져야만 될 것이니 정치상으로나 경제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또 문화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다 같이 겸비해서 굳세져야만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정은 '적대적 두 국가론' 선언 … 민족 차원의 통일 노선 폐기

    니시오카 교수는 북한 김정은이 남북 관계를 "교전 중인 적대적 두 국가 관계"로 규정하며 선대가 추진해 온 '민족적 차원의 통일 노선'을 철회한 사실을 언급했다. 니시오카 교수는 이를 "한반도 현대사에서 한국의 승리이자 이승만의 꿈인 자유통일의 최대 기회"라고 평가했다.

    다만 북한의 최근 변화는 적화통일을 포기했다기보다는 핵무력 강화와 체제 고착화를 합리화하기 위한 전략적 조치로 풀이된다.

    ◆'두 국가론' 배경은 한류 확산에 따른 北 내부 균열 가속화

    니시오카 교수는 북한이 2020년 '반동사상문화배격법', 2021년 '청년교양보장법', 2023년 '평양문화어보호법'을 제정한 데 이어 '적대적 두 국가론'을 선언하게 된 배경으로 '한국 문화의 침투'와 이에 따른 북한 주민들의 '남한 사회에의 동경'을 꼽았다.

    그는 "라디오, 풍선 전단, 페트병, USB와 SD카드 등을 북한에 보내 외부 정보를 전달하는 활동을 주로 해온 것은 한국군이나 국가정보원이 아니라 탈북자 인권운동가들이었다. 또 남한에 사는 3만 명이 넘는 탈북자들이 가난한 와중에도 북한 가족에게 송금한 결과 북한에서는 탈북자들의 가족에 대한 동경이 높아지고 젊은 여성들은 노동당 당원보다 탈북자 가정의 남성과 결혼하기를 원하게 됐다고 한다"며 "탈북자들의 필사적인 활동이 마침내 북한을 크게 바꿔놓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