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념에 묶이지 않고 《정의·윤리·애정》추구《극좌》와 현저히 다른《더 나은 대안》모색구도자, 순례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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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기표 신문명정책연구원장이 지난해 여의도 사무실에서 뉴데일리와 인터뷰하고 있는 모습.ⓒ 서성진 기자
■ 고별인사2024/9/25 저녁 7시에장기표 영가(靈駕)의 영결식이 있었다.직접 참석하기보다는 글로 고별인사를 한다.그도 필자의 나이를 알 것이기에 이해할 것이다.장기표, 김문수 등등이한창 운동권 투사로 뛸 무렵,필자는 이미 한국 운동권의[불필요한 이념적 편향](필자의 기준)에실망하고 있었다.그러나 1987년의 민주화 전에는,그런 소회(所懷)를 노골적으로 표출하진 않았다.■《천하 삼분론》민주화가 왔다.그로부터 한두 달 후, 필자는 글 한 편을 썼다.《천하 삼분론》이었다.지금까지는“권위주의냐 민주화냐?”의 둘로 나눴다.그러나 민주화 후로는《민주화 진영》이 쪼개졌다고 했다《본연의 민주화]》노선과《급진과격]》노선으로.의회주의적 《온건 진보》에 대해서야누가 뭐라 하겠는가?그런 것 없는 《민주적 문명국가》가세상 어디에 있나?그러나 《NL》이니 《PD》니 《주사파》니하는 것은 영 참아 줄 수가 없었다.■ 스탈린과 모택동, 틀렸는데러시아와 중국에서는《온건 진보》 아닌 《극좌》가 집권했다.정치경제적 후진국이었기에,☆멘셰비키(온건파)☆사회민주주의☆민주사회주의는 설 땅이 없었다.과격파 《볼셰비키》가 득세했다.하지만 소련은 결국 망했다.마오쩌둥 의《대약진 운동》과 《문화혁명》도나라를 황폐시켰다.한데, 그 오류와 실패를한국에서 되풀이하자고?한국의 《NL》은《식민지 반(半)봉건 사회론》과《종속이론》에 따라한국의 《자본주의적 산업화》는반드시 실패할 것이라 했다.그러나 한국에선 그것이 성공했다.그것도 당대에!소련도 제풀에 망했다.■ 김문수와 장기표필자가 이런 생각을 공공연히 밝히자,그쪽에서 사정없이 화살이 날아왔다.이러기를 40년.이 싸움은 앞으로도 이렇게 갈 것이다.소련이 망하자,김문수는 《PD》를 미련 없이 버렸다.장기표는 원래부터도《NL》·《PD》가 아니었다.《정의·윤리·애정》이었다.이념에 묶일 타입이 아니었다.그 역시 김문수와는 다른 양상으로,《극좌》와 현저히 다른《더 나은 대안》으로 갔다.《신문명정책연구원》.필자는 마음속으로 갈채를 보냈다.■ 듣고 계시오?어쩌다 이런저런 원인으로 대면할 때면,필자 같은 유형을 바라보는 장기표의 표정이전과 갈수록 달라짐을 느꼈다.부드러워졌다.허허.듣고 계시오, 장기표 영가?내 말 맞지요?《국회의원 특권 포기 투쟁》을 할 무렵의장기표는,어떤 쓸데없는 당파성에도 속박되지 않는《영원한 자유혼》《도인(道人) 장기표》의 면모,그것이었다.그렇다.그는 단순한 정치활동가가 아니었다.그는 구도자, 순례자였다.■ 편히 가소서그런 그는 이재명 을 비판했다 해서1,100만 원의 벌금형을 받았다.그만한 돈이 없는 그는 검찰청으로 갔다.자신의 익숙한 장기(長技)를 대신 발휘하려고.“감옥에서 몸으로 때우겠다.날 잡아넣어라.”필자는,그가 마지막으로 사무실에서사람들을 접했을 때의 영상물을 보았다.그는 유튜버의 질문에 답하며 활짝 웃었다.청아(淸雅)했다.그는 알고 있었다.“할 만큼 했다”란 것을.장기표 영가.우린 환생한다고 합니다.다음 생에선 우리 조금은 더 살갑게 지냅시다.이번 생에선 좀 까칠했습니다.편히 여행하시길! -
- ▲ 25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열린 장기표 신문명정책연구원 원장 영결식에서 장례위원회 집행위원장을 맡은 김문수 고용노동부 장관이 헌화하고 있다. ⓒ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