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정치 일정 급물살 탈듯… '조기 등판' 둘러싼 여야 정치권 치열한 물밑 싸움
  • ▲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이 16일 새벽(한국시각) 미국 뉴욕의 유엔본부에서 정세균 국회의장과 정진석·우상호·박지원 여야 3당 원내대표와의 회동에 앞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국회의장실 제공
    ▲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이 16일 새벽(한국시각) 미국 뉴욕의 유엔본부에서 정세균 국회의장과 정진석·우상호·박지원 여야 3당 원내대표와의 회동에 앞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국회의장실 제공

    각종 여론조사에서 차기 대권 선두로 꼽히는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이 조기 귀국을 공언함에 따라, 대권을 둘러싼 정치 일정에 가속도가 붙을 전망이다.

    반기문 총장은 16일 새벽(한국시각) 미국 뉴욕의 유엔본부에서 정세균 국회의장과 정진석·우상호·박지원 여야 3당 원내대표와 만나 유엔사무총장 퇴임 직후인 내년 1월 초에 귀국할 뜻을 내비쳤다.

    더불어민주당 우상호 원내대표가 회동 도중 귀국 계획에 대해 묻자, 반기문 총장이 "1월 중순 이전에는 들어갈 것"이라고 답했다는 것이다. 유엔사무총장 임기가 올해 말까지이므로, 내년 1월 중순 이전에 귀국한다는 것은 퇴임하자마자 뉴욕 생활을 정리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정치권 일반의 예상보다 상당히 빠른 수순이다.

    회동 참석자들 사이에서 이심전심으로 대권 행보에 가속 페달을 밟는 것이라는 해석이 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질문의 당사자인 우상호 원내대표는 회동 직후 현지 특파원들과 만난 자리에서 "주변과 (귀국 시점을 미리) 상의하지 않았겠는가"라며 "1월에 오면 (대권) 활동을 본격적으로 할 것"이라고 점쳤다.

    국민의당 박지원 비상대책위원장도 "하루라도 빨리 귀국하고 싶은 심경을 느꼈다"며 "당연히 (대권에 도전)할 수 있는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날 밝힌대로 반기문 총장이 내년 1월 초에 귀국하게 되면, 본격적인 대권 행보에 돌입하기에 앞서 유엔사무총장으로서 자신의 업적과 고국에 대한 공헌을 제대로 알리는 작업을 선행할 것으로 보인다.

    반기문 총장이 여권 성향의 대권 후보로 분류됨에 따라, 국내 좌파 일각의 음해모략과 흑색선전이 위험수위에 다다랐기 때문이다. 유엔사무총장으로서의 업적을 폄훼하고, 근거 없는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무리들에 맞서기 위해서라도 일종의 '대국민 보고' 형식의 귀국 메시지 발표는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반기문 총장은 이날 회동에서 내년 1월 귀국 직후 대통령·국회의장·대법원장 등 3부 요인들을 귀국 보고를 겸해 예방하고, 국회 본회의에서의 연설을 통해 국민들에게 귀국한 사실을 알릴 의향을 넌지시 내비친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대해 새누리당 정진석 원내대표는 "귀국한다면 국민적 차원에서 대대적으로 해야 하지 않느냐"며 "국민들에게 귀국 보고를 하는 것이 좋겠다"고 권했다. 이 말을 들은 반기문 총장도 "그럴 기회가 있다면 영광이고 좋겠다"고 화답한 것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기자간담회나 방송 출연 등을 통해 국민과 직접 소통하며 귀국 보고를 할 가능성도 점쳐진다. 우리나라 최초로 유엔사무총장을 지내 국위를 선양했다는 점을 감안해서,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우승이나 1989년 새누리당 조훈현 의원의 초대 잉창치(應昌期)배 정상 등극에 준해 카퍼레이드 형식으로 귀국 행사를 여는 방안도 거론된다.

    유엔사무총장으로 재직하는 기간 중 자신의 공과(功過)를 국민들에게 객관적이고 진솔하게 알린 뒤에는, 본격적인 정치 행보에 나설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통일·외교·안보 분야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커리어패스를 보유하고 있으나 민생·경제·복지 분야의 정책 비전이 베일 속에 가려져 있는 만큼 이를 국민들에게 어필하는데 주안점을 둘 것으로 보인다.

  • ▲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이 16일 새벽(한국시각) 미국 뉴욕의 유엔본부에서 정세균 국회의장과 정진석·우상호·박지원 여야 3당 원내대표와의 회동을 진행하고 있다. ⓒ국회의장실 제공
    ▲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이 16일 새벽(한국시각) 미국 뉴욕의 유엔본부에서 정세균 국회의장과 정진석·우상호·박지원 여야 3당 원내대표와의 회동을 진행하고 있다. ⓒ국회의장실 제공

    이와 관련해 새누리당 이정현 대표의 '슈퍼스타K(슈스케)' 방식 대선 후보 경선안과의 연결점 또한 주목된다.

    이정현 대표는 대선이 있는 해인 내년 초부터 당내와 당외를 가리지 않고 가급적 많은 대권 주자를 영입해 정책에 관한 무제한 토론을 진행하다가 일정 간격으로 한 명씩 경선에서 탈락하는 슈스케 방식의 대선 후보 경선안을 주장해왔다.

    반기문 총장이 귀국 시점을 정치권의 예상보다 앞당기게 된 것은, 이정현 대표의 '슈스케' 경선 트랙에 올라탈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는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이렇게 되면 내년 대선과 관련한 국내의 전반적인 정치 일정 자체가 급물살을 타게 될 전망이다.

    반면 한국일보 워싱턴특파원 시절 주미공사였던 반기문 총장과 3년간 같은 아파트에서 기거할 정도로 깊은 인연을 가진 새누리당 정진석 원내대표는 오히려 이러한 '급물살'에 제동을 거는 듯한 발언을 해, 그 의도에도 관심이 쏠린다.

    정진석 원내대표는 이날 회동을 마친 뒤 현지 특파원과 만난 자리에서 "모든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대권과 연결시키고 싶은 것은 기자들의 생각일 뿐"이라고 선을 그었다.

    이날 정진석 원내대표는 반기문 총장에게 "지금 우리나라에 반기문 총장의 경륜을 필요로 하는 난제가 많다"며 "소중한 지혜를 미래 세대를 위해 써달라"고 말했다. 이것은 누가 들어도 대권 권유로밖에 해석할 수 없다.

    회동 배석자들의 반응도 마찬가지였다. 더민주 우상호 원내대표는 이 말을 듣자마자 "정진석 원내대표가 염두에 두고 있는, 그런 행보를 할 것이냐"고 찌르고 들어갔다. 박지원 위원장도 "정진석 원내대표가 세게 (대권을) 권한 것"이라며 "(반기문 총장도) 싫지 않은 표정이더라"고 해석했다.

    무엇보다 정진석 원내대표 본인 스스로가 한국일보에서 정치부 기자로 오래 근무했고, 이날 '일침'의 대상이었던 특파원 생활도 경험했다. '이렇게 말하면 저렇게 해석돼 보도가 이뤄진다'는 사실을 몰랐을 리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회동장을 나와서는 '반기문 대권'과 관련해 손사래를 친 것은, '조기 등판'이 가져올 역풍을 우려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반기문 총장이 여권의 대권 주자로 일찍 부각되면 야권의 집중적인 흠집내기로 생채기가 날 뿐만 아니라, 귀국 직후 본인이 의도하고 있는 '대국민 보고' 형식의 국회 본회의 연설 추진에도 여러 가지 어려움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

    거야(巨野) 양당이 뻔히 12월 대선에 여권 후보로 나설 반기문 총장을 위해 레드 카펫을 깔아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국회 본회의 연설 추진 자체가 불투명해지는 것인데, 새누리당 원내대표로서 국회 운영위원장을 겸하고 있는 정진석 원내대표가 이를 모를 리 없는 것이다.

    대조적으로 정세균 의장과 우상호·박지원 원내대표가 "마음을 굳힌 것 같더라"고 이구동성으로 반기문 총장의 '조기 등판'을 강제한 것은 정확히 정진석 원내대표와 반대되는 의도를 깔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와 관련, 정치권 관계자는 "만인이 이미 (반기문 총장을) 대권 주자로 보고 있다고 해도 '흙탕물(정치판)에 언젠가는 들어올 사람'인 것과, 직접 웃통을 벗어던지고 흙탕물 속으로 뛰어드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라며 "반기문 총장은 아직 당적(黨籍)도 보유하고 있지 않아 전략적으로 유리한 포지션을 점하고 있는데 굳이 일찍 흙탕물 속으로 뛰어들어가야 할 이유가 하등 없다"고 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