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가 직접 "나와 역사 쓸 사람" "호남 인재 없는데 큰 역할 해달라" 당부친노 한명숙에 맞서 탈당·무소속 당선… 2·8 전대서는 문재인에 맞서기도
  • ▲ 박주선 의원이 22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새정치민주연합 탈당과 중도개혁·민생실용 정당의 창당을 선언하고 있다. ⓒ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 박주선 의원이 22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새정치민주연합 탈당과 중도개혁·민생실용 정당의 창당을 선언하고 있다. ⓒ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현역 국회의원으로서는 '1호'로 22일 새정치민주연합을 탈당한 박주선 의원은 호남에서 친노패권주의에 일관되게 맞서 싸워온 자수성가형 투사 정치인으로 손꼽힌다.

    친노·운동권 세력으로부터의 지속적인 음해와 모략으로 1999년·2003년·2004년 세 차례 구속 기소됐음에도 세 번 모두 무죄 판결을 받아 '오뚝이' '불사조'라는 별명으로 널리 알려져 있기도 하다.

    전라남도 보성에서 태어난 박주선 의원은 광주고와 서울대 법대를 거쳐 16회 사법시험에서 수석 합격한, 호남을 대표하는 정치인이다. 검찰 내에서도 대표적인 호남 출신 엘리트 검사로 검찰총장과 법무장관이 유력하다는 평이 파다했으나, 대검 중수부에 있던 그를 1998년 2월 김대중 대통령(DJ)이 청와대 법무비서관으로 직접 발탁했다.

    당시 함께 들어간 박지원 공보수석비서관은 청와대 수석비서관 부부 동반 모임 결과를 취재진에 알리면서 "김대중 대통령이 박주선 법무비서관을 가리켜 '나와 역사를 함께 쓸 사람'이라고 했다"며 "최고의 극찬을 받은 사람은 박주선"이라고 소개해 이름을 떨쳤다. 이 때부터 DJ가 박주선 의원을 '호남 정치를 복원할 인물'로 꼽았다는 설(說)이 정치권에 퍼졌다.

    DJ의 발탁을 받아 순탄할 듯 하던 박주선 의원의 정치 행로는 뜻밖에 그 이후로 험로의 연속이었다.

    1999년 이른바 '검사부인 옷로비 사건' 파문이 확산되자, 새천년민주당을 잠식해 들어가던 운동권·386 세력은 박주선 법무비서관을 향해 맹공을 퍼부었다. 이에 박주선 의원은 구속 기소됐으나 이듬해 무죄 확정 판결을 받았다.

    옷로비 파문에 연루돼 공직을 버리고 야인(野人)이 된 박주선 의원은 백의종군(白衣從軍)한다는 마음가짐으로 2000년 4·13 총선에서 고향인 전남 화순·보성에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이처럼 정치 행로 처음부터 '후견인 정치'가 아닌 자수성가에 나설 수밖에 없었던 박주선 의원은 이 해 총선에서 새천년민주당 한영애 의원을 상대로 압승, 무난히 국회에 입성하며 제 궤도에 올라서는 듯 했다.

    하지만 2002년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되고 친노·운동권 세력이 정권을 장악하자, 박주선 의원의 시련은 본격화됐다.

    이듬해 새천년민주당 내의 친노·운동권 친위세력인 이른바 '홍위병'들이 분당 공작을 자행하며 열우당을 창당하자, 박주선 의원은 탈당이 잇따르는 혼란 속에서 새천년민주당 사무총장 직무대행을 맡았고 곧이어 전당대회준비위원장을 맡아 2003년 11·28 전당대회를 무사히 치러내 당의 체제를 재정비하는 일등공신이 됐다.

  • ▲ 박주선 의원이 22일 새정치민주연합 탈당과 중도개혁·민생실용 정당의 창당을 선언하는 기자회견을 마친 직후, 취재진과 일문일답을 나누고 있다. 수많은 취재진이 몰려 박주선 의원의 탈당에 높은 관심을 나타냈다. ⓒ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 박주선 의원이 22일 새정치민주연합 탈당과 중도개혁·민생실용 정당의 창당을 선언하는 기자회견을 마친 직후, 취재진과 일문일답을 나누고 있다. 수많은 취재진이 몰려 박주선 의원의 탈당에 높은 관심을 나타냈다. ⓒ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이처럼 새천년민주당의 구심점으로 활약하는 박주선 의원을 더 이상 두고볼 수 없었던 친노 세력은 2004년 나라종금 퇴출저지 로비 사건과 현대건설 수뢰 의혹 사건에서 잇달아 박주선 의원에게 표적수사의 올가미를 얽어맸다.

    이 두 사건도 모두 무죄 확정 판결을 받았으나, 열우당은 박주선 의원이 구속돼 있던 2004년 국회에서 4·15 총선 선거구를 획정하며 인구 하한도 아니었던 그의 지역구 전남 화순·보성을 공중분해해 화순군을 나주시에, 보성군을 고흥군에 붙이면서 정치적 재기를 원천 봉쇄했다.

    2005년 5월 세 번째 무죄 확정 판결을 받고 동교동 DJ 자택을 찾은 박주선 의원은 노무현정권의 혹심한 보복에 정치 자체에 대한 회의감을 털어놨다. 그러자 DJ가 직접 "호남에 인물이 없는데 정계에 남아 큰 역할을 해달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이에 용기를 얻은 박주선 의원은 그 해 6월 16일 광주를 방문해 "호남에 인재가 없다고 실망만 하지 말고, 인재를 발굴해 키우자"는 이른바 '호남 인재 발굴론'을 천명했다.

    2006년 5·31 지방선거를 앞두고는 새천년민주당 박준영 전남지사에 맞설만한 후보를 찾지 못한 열우당에서 전남지사 후보를 내걸고 입당을 회유해 왔으나, 박주선 의원은 "이념과 노선이 다르고 민주세력과 호남 분열의 원흉인 열우당에는 입당할 수 없다"고 딱 잘라서 거절했다.

    이 때부터 친노·열우당 세력과는 선을 그어온 박주선 의원은 2008년 4·9 총선에서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광주 동구에 출마, 88.7%라는 전국 최고 득표율로 당선됐다.

    이처럼 박주선 의원이 호남과 민주당을 지키며 험한 정치 역정을 거치는 사이, 2006년 5·31 지방선거를 앞두고 문재인 대표의 "부산 정권" 발언, 2007년 노무현 대통령의 "호남 지역 국회의원들과 답답해서 일을 못해먹겠다"는 발언 등 호남 모멸을 일삼던 친노 세력은 폐족(廢族)으로 몰락해가는 듯 했다.

    하지만 2012년 4·11 총선을 앞두고 친노 한명숙 지도부가 민주통합당을 장악하자 공천 전횡이 되살아났고, 이 와중에 박주선 의원은 탈당해 무소속으로 출마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광주 동구에서 다시 당선되며 3선 의원의 반열에 올랐다.

    김한길 전 대표가 이끌던 민주통합당과 안철수 전 대표가 추진하던 '새정치' 세력이 2014년 초 합당하자, 박주선 의원도 이 때 새정치민주연합으로 복당했다. 그러나 올해 2·8 전당대회를 앞두고 문재인 대표가 직접 당권 도전에 나서며 친노 세력이 다시 전면에 나설 조짐을 보이자, 박주선 의원도 계파패권주의 청산을 내걸고 전당대회에 출사표를 던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재인 대표는 결국 당권을 거머쥐었고, 이후 4·29 재보선에서 전패하는 참사를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혁신위를 내세워 친노패권주의를 관철하고 있다. 결국 22일 박주선 의원의 탈당은 친노패권주의에 오염·침식돼 모든 가능성을 상실한 새정치연합 대신 국민의 여망에 부응하는 제1야당을 건설하기 위한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