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훈 서울대교수, "독립기념일이 광복절로, 1948.8.15이 1945.8.15로"
  • ▲ <뉴데일리 이승만연구소>가 주최한 제6회 '이승만 포럼'이 10일 오후 3시 서울 프레스센터 19층에서 열렸다.ⓒ 뉴데일리
    ▲ <뉴데일리 이승만연구소>가 주최한 제6회 '이승만 포럼'이 10일 오후 3시 서울 프레스센터 19층에서 열렸다.ⓒ 뉴데일리

    대한민국은 왜 건국을 기념하지 않는가?

    건국절 또는 건국기념일에 관한 논쟁이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이영훈 서울대 경제학부 독립을 ‘망각’하게 된 원인을 체계적으로 분석한 결과를 발표했다.

    이영훈 교수는 9일 오후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뉴데일리 이승만연구소> 주최 제6회 이승만포럼에서 ‘대한민국은 왜 건국을 기념하지 않는가’를 주제로, 우리 사회와 국민들이 건국을 기억하지 않게 된 원인을 크게 다섯 가지 논점으로  나눠 분석했다.  교수가 건국과

    역사적 관점, 정치적 관점, 대한민국 건국 과정의 특수성, 헌법 전문(前文)상의 문제, 역사적 인식의 빈곤 등이 그것이다.

  • ▲ 이영훈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가 '대한민국은 왜 건국을 기념하지 않는가?'를 주제로 특강을 하고 있다.  ⓒ 뉴데일리
    ▲ 이영훈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가 '대한민국은 왜 건국을 기념하지 않는가?'를 주제로 특강을 하고 있다. ⓒ 뉴데일리

    이영훈 교수는 “현재 대한민국에 독립기념일은 없다”는 말로 특강을 시작했다.

    이 교수는 “그러나 독립기념일은 원래 있었다. 60년 세월동안 잊었을 뿐”이라며 바로 여기에 대한민국 현실의 심각한 모순이 있다고 진단했다.

    다양한 실증자료도 모습을 보였다. 이 교수는 1949년 정부가 만들어 배포한 독립기념일 포스터 사진과 동아일보 기사 등의 자료를 예로 들면서 독립기념일은 '역사적' 사건이라고 강조했다.

    이 교수는 역사적 사실인 1948년의 건국과 독립을 부정하는 것은 국민을 통합할 수 있는 근본 정치원리를 망각하는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1945년과 1948년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절실하다는 점도 거듭 강조했다.

    1945년은 일제로부터의 '해방'이며, 1948년은 ‘건국’이라는 인식을 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1946년 8월 15일 '해방절' 1주년 기념식에 미군정청의 하지 장군이 참석해 “한국의 ‘독립’을 적극 지원하겠다”고 밝힌 사실과 트루먼 미 대통령의 '해방 축전'을 소개하기도 했다.

    '건국 실종'에 대한 역대 정부의 책임도 강하게 추궁했다. 우리 사회와 국민들이 건국을 잊은 데에는 ‘역사를 집권의 명분으로 정치화’ 한 역대 정부의 책임이 크다는 비판이다.

    이 교수는 역대 정부가 정략적인 이유로 대한민국의 건국과 독립을 의도적으로 ‘망각’하면서 80년대 민족주의와 공산주의사관이 1948년 8월의 건국을 완전히 부정토록 만드는데 빌미를 제공했다고 질타했다.

    이어서 이 교수는 지나친 민족주의의 산물인 1987년 헌법 전문의 문제점과 한국 지식인 사회가 보여주고 있는 역사적 인식의 빈곤에 대해서도 우려를 나타냈다.

    다음은 이 교수의 발표를 요약한 것이다.

    “1949년 8월 15일은 '제1주년 독립기념일'이었다”

    1948년 8월 15일 독자적인 주권과 영토와 국민을 가진 ‘국가’로서 대한민국이 건국했다. 역사적으로 건국 또는 독립이라 할 사건이었다.

    반면 1945년 8월 15일은 한국이 일제의 억압에서 해방한 날이었다. 이같은 사실은 역사적으로 입증된다.
    해방 다음해인 1946년, 국민들은 8월 15일을 제1주년 ‘해방절(解放節)’로 기념했다. 당시 국민들의 바람은 완전한 ‘건국’과 ‘독립’이었다. 그 염원은 1948년 8월 15일 비로소 이뤄졌다.

    건국과 독립을 이룬 다음 해, 정부와 국민들은 당연히 8월 15일을 ‘독립기념일’로 성대하게 경축했다. 당시 정부는 제1회 독립기념을을 경축하기 위해 경축 구호를 공모하기도 했다. 이같은 사실은 당시 신문 기사를 통해 분명히 확인 할 수 있다.

     독립기념일이 ‘광복절’로 바뀐 사연

    1949년 9월 ‘國慶日 制定에 관한 법률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명칭이 광복절로 바뀐다. 명칭은 바뀌었지만 경축의 대상은 같았다. 1948년 8월 15일은 ‘독립기념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광복절로의 명칭 변경은 머지않아 한국 정부와 국민이 대한민국의 ‘건국’ 또는 ‘독립’을 잊게 만드는 중대한 계기가 됐다.

    1950~51년까지는 1948년 8월 15일을 대한민국이 건국한 독립기념일로 경축했다. 문제는 다음부터였다. 건국에 대한 기억은 여기까지가 끝이었다.

    1953년부터 ‘8월 15일’에 대한 혼란이 일어났고 1955년부터는 정부나 민간 모두 광복절을‘1945년’ 8월 15일을 경축하는 날로 당연시 여기기 시작했다. 한 나라의 독립기념일이 사라지고 ‘해방절’만 남게 된 것이다.

    그러나 1958년은 달랐다. 이때는 정부가 직접 나서 '건국 10주년'을 성대하게 경축했다. 1948년 태어난 '건국 둥이' 140여명을 서울로 초청해 축전을 여는 등 전국민이 건국 10주년을 축하했다.

     60년대 이후 역대 정부, 건국을 ‘망각’하다

    50년대의 혼란을 거쳐 1960년 이후 장면,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정부는 대한민국의 건국 또는 독립을 경축하지 않았다. 그들은 망각의 방식으로 사실상 대한민국의 건국을 부정했다.

    1948년 8월의 건국을 부정하면서 역대 정권은 출범할 때마다 그들이야말로 진정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정권이 바뀔때마다 나라 건설의 주역도 바뀌었다.

    ‘건설’은 있어도 ‘건국’은 없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정권 창출의 정당성을 담보하는데 필요한 명분이었기 때문이다.

    37년간 건국은 잊혀졌다. 건국에 대한 기억은 1948년의 건국에 참여했던 일부 민간사회에 의해 희미하게 이어졌다.

     80년대 민족주의, “건국은 1919년 임시정부 수립”

    건국과 독립을 망각하면서 두 가지 대안적 경향이 나타났다.
    하나는 민족주의적 관점이고 다른 하나는 공산주의를 바탕으로 한 입장이었다.

    민족주의적 관점은 1980년대 이후 한국사회의 지배적 풍토가 된다. 민족주의는 일본의 역사교과서를 둘러싼 국제적 갈등이 거듭되는 상황에서 힘을 길렀다.

    노태우, 김영삼 정부는 독립운동에 대한 국가적 현창(顯彰)과 보훈(報勳)에 힘을 쏟았다. 민족주의를 발판삼아 대한민국의 건국세력을 자임하는 제3 세력이 등장한다. 광복회(光復會)가 대표적이다.

    이때부터 대한민국의 건국은 1919년 중국 상해에 세워진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을 뜻한다는 인식이 널리 퍼졌다. 1987년 헌법개정은 건국의 인식을 완전히 바꾼 중요한 계기가 됐다.

     공산주의적 관점, “대한민국은 反민족세력이 세운 半식민지” 인식 확산

    공산주의를 바탕으로 한 사관은 처음부터 대한민국의 건국을 부정적으로 바라봤다. 1985년 학술과 사상의 자유가 보장되면서 맑스ㆍ레닌주의나 마우쩌뚱(毛澤東)주의를 기반으로 한국 근현대사를 해석하는 사조가 부활, 큰 세력을 형성했다.

    이들은 대한민국을 친일ㆍ친미 ‘反민족세력’이 세운 반식민지(半植民地)로 간주했다. 그리고 그 속성은 이승만과 박정희를 이어 전두환 정부까지 이어진다고 봤다.

    이들은 국가다운 국가는 4ㆍ19혁명, 5ㆍ18광주사태, 6ㆍ10민주항쟁과 같은 민족ㆍ민주운동에 의해서만 성립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김대중 정부의 제2건국운동은 이례적, 대한민국의 역사적 ‘정체성’ 부정

    1997년 출범한 김대중 정부가 제2건국운동은 대단히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이 정부는 1998년 8월 15일을 ‘정부수립’ 또는 ‘건국 50주년’으로 경축했다.

    그러나 여기에는 여러면에서 모순적인 입장이 뒤섞여 있었다. 제1건국은 한편으로는 긍정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부정됐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최초의 공화국으로 받들어졌으며 2002년에는 백범(白凡) 기념관이 건립됐다. 

    실제 그 속내는 백범에 대한 현창과 상해 임시정부를 '최초'의 공화국으로 인정하자는 것이었다.  

    김대중 정부의 통일정책도 그 밑바탕에는 대단히 복합적인 경향이 깔려 있었다. 남북이 공동으로 개최한 통일제(統一祭)에서 대한민국의 역사적 정체성은 사실상 부정됐다.

     노무현 정부, “한국은 그저 세워진 나라”...좌편향 교과서 교육현장 파고들어

    노무현 정부는 이전 어떤 정부보다도 한국 근현대사를 급진적으로 해석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대통령은 한국 근현대사를 정의가 패배한 기회주의(機會主義)의 역사로 규정했다. 이들에게 대한민국은 ‘그저 세워진 나라’일 뿐이었다.

    미완의 역사적 과제를 청산하기 위한 작업이 정부의 의지대로 추진됐다. 대한민국이 국민의 통일에 대한 열망을 억누르고 세워진 나라라는 교과서가 일선 교육현장에 널리 보급됐다.

    대한민국은 이승만 일파의 반공 파시즘체제로 성립했으며 처음부터 민주적 시민에게 ‘저항의 대상’이었음을 전시 또는 상징하는 공간과 기념물이 곳곳에 세워졌다.

    이들에게 대한민국은 수치스러운 존재일 뿐이고 당연히 건국은 아무 의미도 없었다.

     우방이 기억하는 한국의 건국과 독립...우리 스스로 잊어버린 모순, 지금도 계속

    우리 스스로 건국과 독립을 잊어버리고 있는 사이, 역설적이게도 우방은 한국의 건국과 독립을 분명히 기억해 줬다.

    62년간 해마다 광복절이 되면 미국, 영국 등 우방은 "한국의 독립기념일을 축하한다"는 전문을 보내왔다. 그들은 광복절이 한국의 독립기념일이라는 역사적 기억을 충실히 간직하고 있다.

    작년에도 버락 오바마 미국대통령은 광복절을 기념해 “한국의 독립기념일을 맞아 미국인을 대표하여 축하의 인사를 전한다”고 말했다. 1968년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은 한국의 ‘건국 20주년’을 축하한다고 축전을 보내왔다.

    우방이 기억하는 건국의 기억을 우리가 잊어버리고 있는 모순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건국 과정의 특수성, 건국세력의 분열...망각의 빌미 제공

    우리가 건국과 독립의 기억을 잊어버린 이유는 무엇일까? 원인은 복합적이다.

    요컨대 건국의 기억을 보전하고 기념하는 정치세력이 존재하지 않았다. 여기에는 건국에 이르기까지의 특수한 역사적 과정이 원인을 제공했다. 대한민국의 건국은 미국의 일본 제국주의 해체와 처리 과정의 산물이었다. 그 점에서 건국은 ‘무임승차’의 과정이기도 했으며 처음부터 위선적인 모습을 안고 있었다.

    더욱이 건국세력은 처음부터 내부분열 위험이 있었다. 건국세력은 반공노선에 관한 한 이해를 같이 했지만 건국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대립했다. 한독당(韓獨黨)과 한민당(韓民黨)의 갈등은 좋은 예다.

    이승만은 건국세력의 대동단결을 주장했지만 혼자 힘으로 역사가 남긴 부채를 모두 짊어질 수는 없었다.

    당초 정부가 독립기념일로 제정하고자 했던 국경일이 광복절로 개칭된 데에는 임시정부 또는 광복군 출신의 제헌의원들의 영향이 있었다고 보인다.

    이승만 대통령은 광복절 개칭을 수용하지 않았던 것 같으며, 이 같은 갈등은 혼란과 망각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실제 이 대통령은 독립기념일이 광복절로 이름을 바꾼 뒤에도 '독립기념일'이라는 표현을 고수했다. 불분명한 뜻을 지닌 광복절로의 명칭 변경이 가져올 혼란을 예견했던 것으로 보인다.

    잘못된  현행 헌법 前文, 정치적 악용 막게 없애버려야

    역대 정부의 책임도 크다. 이들은 역사를 집권의 명분 삼아 정략적으로 이용했다.

    이 점에서는 박정희 대통령이 1963년 제4차 헌법개정에서 자신이 불과 2년 전 주도한 5ㆍ16혁명으로 새로운 공화국이 건립됐다고 선포한 것이 좋지 않은 선례를 만들었다.

    이후 헌법이 개정될 때마다 전문의 개정이 이뤄졌다. 1987년 헌법 개정에서는 대한민국이 임시정부의 법통을 잇는다고 명시, 1948년의 건국을 사실상 부정해 버렸다.

    헌법은 살아있는 사람들의 정치적 약속이다. 거기에 역사를 표방하는 전문이 붙을 이유가 없다. 그럼에도 많은 나라의 헌법에 전문이 있는 것은 그 나라가 역사를 정치화하는 데 익숙한 후진국이기 때문이다.

    헌법 전문을 제헌헌법(制憲憲法)의 것으로 되돌리거나 아예 폐지하는 개헌의 필요성이 있다. 그러나 한국인의 역사의식이나 정치의식에서 이 일은 쉽지 않을 것이다.

     역사에 대한 통사적(通史的) 인식의 빈곤...건국과 독립을 잊어버리게 한 근본적 한계

    더 근본적인 문제는 한국의 역사학을 포함한 인문ㆍ사회과학속에 내재해 있다.

    조선은 19세까지 성리학(性理學)의 나라였다. 그 나라가 패망한 뒤 일제(日帝)의 지배를 받는 시기에 근대문명이 유입됐다. 전후 미국 중심의 세계질서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이 땅에 자유민주주의를 기치로 내건 나라가 건국됐다.

    한국의 대학과 지식인사회는 이 세 가지의 인식(성리학-일제 지배와 근대문명 유입-자유민주주의 국가 건국)이나 종합적 사고에 진지한 관심을 갖고 있지 않다.

    언젠가 필자는 도서관에서 한국정치사와 한국사회사에 관한 통사(通史)적 성격의 책을 찾다 실패하고 크게 놀란 적이 있다.

    이같은 몽매(蒙昧)상태에서는 오늘날 한국이 누리고 있는 문명의 원리는 무엇이며 어디서 왔는가라는 질문이 성장할 수 없다.

    역사적 인식의 빈곤 아래에서 자유민주주의라는 새로운 정치이념에 의해 대한민국이라는 새로운 국가가 세워졌다는 인식이 성립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놀랍게도 한국의 역사학자들은 '인간의 자유'란 한국사에서 오래 전부터 있어 왔다는 인식을 일반적으로 공유하고 있다.

    우리가 이 같은 문화적 한계를 뛰어넘어 건국의 기억을 회복하고 발전시킬 수 있을지는 장래의 불확실한 과제다.

     

    한편 이날 포럼에는 이기수 이승만대통령 기념사업회 회장(전 고려대 총장)과 임원진이 자리를 같이 했다.

    이기수 회장은 인사말에서 “4.19를 촉발시킨 4.18사건이 바로 고려대에서 일어났다”고 운을 뗐다. 이어 이 회장은 “4.19를 있게 한 고려대 총장을 지낸 사람이 기념사업회를 맡아야 건국세대와 4.19 세대의 융합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회장직을 맡게 됐다”고 말했다.

    이 회장은 이승만 대통령은 하버드에서 학사와 석박사 과정을 5년만에 마친 분으로 젊은이들의 롤-모델이라고 소개하기도 했다.

    이 회장은 한국사 교과서의 근현대사 부분을 개정해 이승만 대통령을 바로 평가하는 일에 앞장서겠다며 포럼을 주최한 <뉴데일리 이승만연구소>에 감사를 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