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고 한상국 중사
    ▲ 고 한상국 중사

    차가운 바다 밑에서 그는 누구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을까?

    왼쪽 옆구리를 파고들어온 85㎜ 전차포탄은 그의 가슴을 파헤치고 오른쪽 어깨로 빠져나왔다. 그 상처 사이로 그의 더운 피가, 뜨겁던 열정이 빠져나갔다. 하지만 두 손은 참수리 357호정의 키를 굳세게 잡고 있었다.

    처음엔 실종이라고 했다. 시신이 발견되지 않은 탓이다. 못난 사람들은 그가 어디로 피신했을 지도 모른다고 수군대기도 했다. 유족들은 시신이 발견돼 전사 처리된 이들과는 또 다른 아픔에 시달려야 했다.

    그렇게 41일이 지났다. 겨우 찾아낸 참수리 357호정 조타실에서 ‘도망갔을지도 모른다’던 그가 발견됐다. 전멸 혹은 나포를 막기 위해 함정의 키를 남으로 돌린 모습으로.

    2002년 6월29일 오전 10시. 제2차 연평해전에서 북한의 기습공격으로 침몰한 참수리 357호 조타장 고 한상국 중사. 그는 갓 신혼 6개월째인 김종선(35)씨의 소중한 남편이기도 했다.

  • ▲ 고 한상국 중사의 묘소 ⓒ 뉴데일리
    ▲ 고 한상국 중사의 묘소 ⓒ 뉴데일리

    6월6일 대전 현충원 묘역.

    김씨는 한 중사의 비석 앞에 하염없이 앉아있었다.
    검은 블라우스와 바지 차림의 김씨는 한없이 작아 보였다.

    그는 남편을 잃은 슬픔과 전사자들에 대한 정부의 무관심에 절망해 2005년 4월 미국으로 떠났다. 그리고 3년 만인 지난해 4월 귀국했다.

    하지만 그의 가슴에 맺힌 한은 아직 깊어만 보였다.

    “정권이 바뀌었어도 2차 연평해전 전사자나 유족들에게 크게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분노 탓인지, 경기도 광주에서 새벽부터 달려온 피로 탓인지 그의 눈은 깊숙이 들어가 있었다.

    정부는 지난해부터 추모식을 정부 주관으로 격상하고 국무총리가 직접 참석해 조사를 했다. 국방부 장관도 참석하지 않고 평택 해군 2함대만의 행사로 정말 ‘조촐하게’ 추모식을 가진 지 6년만이다.

  • ▲ 고 한상국 중사의 부인 김종선씨 ⓒ 뉴데일리
    ▲ 고 한상국 중사의 부인 김종선씨 ⓒ 뉴데일리

    김 씨는 “정부 배려가 고맙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다”고 했다. 전사자나 유족이 바라는 것은 이벤트성 행사가 아니라 진정한 명예 회복이라는 것이다.

    2002년 한·일 월드컵축구 4강에 대한 축구 국가대표팀의 포상은 병역 혜택과 2급 훈장이었다. 터키와 3·4위전이 치러지던 그날 북한 기습에 전사한 6명의 훈장은 3·4급이었다.

    “당시 다쳤던 군인들 중에 4명이 훈장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들 중에 두 분은 지금도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어요.”

    2005년 6월 19일 연천 GP 총기난사사건으로 희생된 8명은 국가유공자 혜택을 받고 있다. 그런데 직접 북한과 맞서 싸웠던 2차 연평해전 전사자와 부상자들은 국가유공자로 처리되지 않았다.

    “정말 이건 나라가 아니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런 나라를 어떻게 믿고 군인들이 목숨과 맞바꿔 싸우려고 총을 잡겠습니까?”

    김 씨는 이 부당한 처우가 “전쟁 나면 총 버리고 도망가라고 교육시키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꼬집었다.

    신혼 6개월 만에 잃은 남편. 하늘이 온통 잿빛으로 보이는데 세상은 미쳐 돌아가고 있었다. 월드컵 4강에 미선이 효순이의 추모 행렬. 이라크에서의 김선일씨 납치살해 사건. 그때마다 광화문에선 촛불이 켜졌고, 광화문 지하도는 촛농으로 범벅돼 걷기 힘들 정도였다.

    김 씨가 물었다. “누가 우리 남편과 전우들을 위해 촛불 한번 들어준 적 있냐?”고.

    6명의 전사자 유족들에게 돌아온 것은 생색을 내기 위한 거짓 약속과 혹 유족들이 ‘함부로 떠들지도 몰라서’ 했을 도청과 미행이었다.

    “이건 아니다”고 목 놓아 울어도 “조용히 살라”고 옆구리 한 대 남몰래 쥐어박거나 악성 댓글로 고인들을 비하하는 나라가 한국이었다. 김 씨는 그래서 2005년 한국을 떠났다.

    당시 그가 수중에 가진 것은 단돈 500달러. 네일 숍(nail shop)에서 일하고 사무실 청소 일도 했다. 음식점에서 그릇을 닦고 작은 식품점 점원 노릇도 했다. 불법 체류자였던 그는 이름도 신분도 속이며 살아야 했다. 조국을 위해 전사한 남편을 버린 조국. 그 대한민국이라는 조국이 너무 미워서 피붙이 하나 없는 이국땅에서의 고된 삶이지만 마음은 편했다고 했다.

    서대전역 한 모퉁이에서 파는 핫도그를 가리키며 그가 기자에게 말했다.

    “핫도그는 보기만 해도 몸서리가 쳐져요.”

    그래. 이 작은 여자가 얼마나 힘들고 외로웠을까? 하지만 배신의 땅인 한국보단 나았을 것이다. 한국에선 대통령이 나서서 북방한계선(NLL)을 부정하는 듯한 발언을 해대는 판이었으니….

    ‘그럼 우리 남편은 NLL에서 놀다가 죽었단 말인가?’ 먹기만 하면 체할 정도로 가슴엔 한이 쌓여갔다.

    친정어머니의 건강이 나빠지고 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서해교전 전사자 추모식을 정부 주관으로 격상키로 했다는 소식에 그는 어려운 결심을 하고 지난해 4월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14개월이 지난 지금 대전 현충원 남편의 비석 앞에 서있다.

    “남달리 대접해 달라는 것이 아니에요.”

    그는 “고인과 부상자들에게 대접이 아니라 평등한 대우를 해달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국가유공자 인정 확대와 참수리 357호의 복원 전시, 그리고 훈장 등급 상향 등이 아직 해결되지 않은 그를 포함한 유족들 가슴속의 딱딱한 응어리다.

  • ▲ 참수리 357함의 피탄 흔적 ⓒ 뉴데일리
    ▲ 참수리 357함의 피탄 흔적 ⓒ 뉴데일리

    참수리 357호의 용산 전쟁기념관 전시 문제를 보자. 어느 전쟁의 상처인들 소중하지 않을까. 하지만 가장 최근에 일어난 전투인데 일반인의 접근이 어려운 평택 해군 2함대에 두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 김 씨를 포함한 유족의 생각이다.

    “절단을 하지 않고 운반을 하기 어렵다는 등 여러 이유로 곤란하다는 게 당국의 설명이지만….”

    그가 잠시 시선을 떨구었다.

    “선체가 너무 처참해서 그렇다는 얘기도 들었어요.”

    2차 연평해전 당시 북한해군 경비정 PCF-684함은 인근의 다른 아군 참수리함은 거들떠 보지도 않은 채 357함에만 포화를 집중시켰다. 아! 함정에 피탄 흔적이 몇 백 곳이더라?

    그는 요새 뒤늦은 공부를 하고 있다. 야간 대학에서 문헌정보학을 전공한다. 올해 서른다섯이니 과 친구들과는 열 살이 넘게 차이가 날 것이다. 그래도 즐겁단다. 과제도 열심히 내고 발표도 앞장서서 한다며 웃었다.
    생활? 당연히 곤란하다. 아르바이트도 하고 돈 되는 일이면 안 가리고 나선다.

    “일자리 있으면 소개해주세요.”

    기자에게 어색하게 웃으며 한 얘기다.

    정말 우리는 우리를 있게 한 고마운 분들을 잊고 산다. 그리고 그 가족들 역시 ‘그러려니’하고 무신경하게 넘어간다. 기억력이 짧은 국민들이다.

    대전 현충원에서 만나 서울 용산까지 다섯 시간이 넘게 같이 있었다. 그는 헤어지는 순간까지 계속 얘기를 했다. 그리고 ‘자주 보자’는 약속도 해줬다.

    쌓인 한만큼 아직 할 말이 많은 사람. 저 한을, 저 하고픈 말을 말끔히 지워줄 ‘대한민국’은 도대체 언제 만들어질까? 버스에 올라타는 그의 뒷모습이 한없이 작아보였다.

    제2차 연평해전이란? 

  • ▲ 침몰한 참수리 357함. ⓒ 뉴데일리
    ▲ 침몰한 참수리 357함. ⓒ 뉴데일리

    2002년 6월 29일 오전 10시 서해 연평도 북방한계선(NLL)을 침범한 북한 경비정 2척이 이를 저지하기 위해 출동한 참수리 357호 고속정을 기습공격했다.

    교전 끝에 함장 윤영하 소령, 조타장 한상국 중사 등 6명이 전사하고, 18명이 부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