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최공재 다양성 영화감독 겸 PD ⓒ 뉴데일리
    ▲ 최공재 다양성 영화감독 겸 PD ⓒ 뉴데일리

    어느 날, 한국영화판에 ‘다양성영화’라는 말이 던져졌다.
    말 그대로 다양한 영화를 뜻하는 말인데, 이 생소한 말에 영화판이 꽤 혼란스럽다.
    과연, 무엇이 다양성 영화이고, 그 다양함이란 무엇일까?
    이 논란이 있기 전부터도 문화의 다양성에 대한 중요성은 전세계적으로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20세기 철학자 ‘아도르노’는 ‘현대예술은 아름다운 가상이길 포기했다’고 예술의 타락과 함께 ‘문화예술’이라는 말을 탄생시켰다.
    그것은 획일화되고 가공화되는 현대예술의 비아냥이었다.

    예술과는 전혀 상관없는 책인 ‘헬레나 노르베르 호지’의 ‘오래된 미래, 라다크로부터 배운다’ 에서도 가장 먼저 문화의 다양성을 논하고 있다.
    그리고, 21세기의 시작점에서 유네스코는, ‘문화 다양성은 단순한 경제적인 성장이 아닌, 보다 만족스러운 지적, 감정적, 윤리적, 정신적인 삶을 달성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서의 근원이 된다’는 주장을 실은 ‘세계 문화 다양성 선언’이 발표되었다.
    이는 21세기 문화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획일화’를 넘어, ‘키치’를 넘어, 이제 ‘소수’의 문화를 받아들이고 양산하는 패러다임의 시대로 진입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어쩌면 한국에서 나온 ‘다양성영화’라는 말은 그 연장선상이나, 최소한 보이지 않는 그 의식적 흐름 위에서 자연스럽게 나온 말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정말 그런 생각일지는 솔직히 의문이다.
    그러기엔 한국의 영화문화는 뭔가 굉장히 잘못되어 있기 때문이다.

    100년이 다되어가는 역사 속에서 한국만의 영화사조 하나 없고 외국의 영화사조로 자신들을 재단함으로써 스스로 형식의 왜곡을 이루고 있다.
    스크린의 독과점과 영화산업의 매머드 기업의 횡포는 오히려 다양해야 할 문화적 접근으로의 영화를 죽이고 있는 것이 한국의 현실이다.
    이런 상태에서 다양한 영화적 대안을 보여줄 독립영화의 왜곡마저 힘없이 쳐다봐야 하는 슬픈 현실에 있다.
    요즘 독립영화 제작지원의 심사평을 보면 매번 들리는 말이 ‘상업영화 따라 하기’라는 말이 나오고 있고, 이번에 내가 심사위원으로 참여해서 직접 체험한 바로도 상업적 의식의 쓰레기들을 만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상업영화와 독립영화의 이 부적절한 관계 사이에 던져진 이 ‘다양성영화’는 그래서 더 살아나야 하고, 모든 영화적 문화들의 원론적 회귀를 도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영진위는 하드웨어적인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듯 하고,
    한국 영화사조의 부재는 이 다양성영화를 상업영화와 비상업영화의 이분법으로 나누려 하는 웃기지도 않은 현상을 불러 일으키고 있으며, 그로 인해 다양성영화가 독립영화를 죽이고 상업적으로 변질시킨다는 말도 안 되는 반론들이 제기되는 것이다.
    그 속내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양성영화하고는 하등의 상관없는 주장들일 뿐이지만,
    아직 다양성영화의 영화학적 구분을 만들어내지 못한 상태에서 반론을 제시할 근거는 턱없이 부족하다.
    하나의 영화적 흐름이 완성이 되고 영화사조가 만들어지지만, 이 다양성영화는 재미있게도 사조가 먼저 만들어지고 이제 그 흐름을 만들어가야 하는 상황이다.
    그러기 위해선 많은 영화적 모순들과 문화적 잘못들을 솔직히 까발려야 하고, 원론적 개념 하에서 다시 이야기되어야 할 것이다.

    서두에서 말한 문화다양성의 개념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상 영화적 발전은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1인 미디어 시대에 맞는 소수의 문화, 소수의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풍부한 상상력’을 가진 소프트웨어적 형식의 구현 없이 앞으로 다가올 문화 전쟁에서 살아남기는 힘들 것이다.
    그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 바로 다양성영화의 갈 길이다.
    이 코너를 통해 그 길이 어떤 길인지 찾아보는 작업을 하게 된다면 바랄 것이 없겠다.
    앞으로 이 코너는 두 가지의 이야기를 할 것이다.
    기존의 모순된 한국영화판에 대한 철저한 잘못을 지적하고 반성하며, 향후 다양성영화의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런 다양성영화의 대안적 모델이 될만한 영화들을 소개하는 역할을 하고자 한다.
    그 영화들은 일반 극장에서 상영되는 영화들이 아닌 외면당했거나 뭐 이딴 영화가 다 있어? 라는 식의 반응이 나오는 흔히 말하는 ‘쓰레기’취급을 받는 영화들마저도 소개를 할 것이다.
    세상의 모든 영화는 그 태생적 이유가 있다.
    내가 보지 못했던 것이라고, 내 기준에 맞지 않는다고 그 모든 영화들이 쓰레기여야 할 이유는 없다.
    어쩌면 획일화된 문화가 그런 일방적인 시선의 태동을 만들어 낸 것이라면, 반드시 그 시선은 사라져야 한다.
    소수의 문화, 1인 미디어 시대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포용할 다양성영화의 생존은 바로 거기서부터 시작될 것이기 때문이다.

    흔히 나를 아는 분들은 나를 ‘독립영화 안에서도 독립영화를 하는 놈’이라고 말하지만, 나는 그냥 앞뒤 개념 없는 ‘독고다이’라 말한다.
    난 지성보다는 감성을, 이성보다는 본성을 더 사랑하는 놈이다.
    그러기에 앞으로 쓰여질 이 칼럼의 내용 역시 상당히 감성적이거나 직설적이고 본능적인 글이 될 것이라고 미리 말하고 싶다.
    기름기 좔좔 넘치는 평론가들의 글처럼 지적 충만감은 없을지라도, 최소한 가식적이지 않은 글과 꾸밈없는 글로 표현하고자 한다.
    이번 글처럼 아도르노와 유네스코와 라다크를 말하는 기름기 철퍽거리는 단어의 사용은 이걸로 끝이다.
    뭔가 있어 보이려고 쓰면서도 사형장의 올가미를 넥타이로 맨 기분이다.

    콧구멍이 답답해 새끼 손가락으로(구멍이 큰 사람은 엄지 손가락도 가능하다) 후벼 파는데, 커다란 왕건이가 나올 때의 그 오금이 저릴 듯한 시원함……
    그런 원초적 즐거움이나 공포감(?)을 제공하는 글을 쓰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대통령이던, 이 글을 읽으실 누군가 던 콧밥은 다 파 봤을 것이다.
    그 콧밥이 누가 더 크냐의 문제일 뿐이다.
    당연히 크면 클수록 시원하겠지…….
    이 코너의 역할은 이성적으로는 참으로 더러운 그 문제를 아무렇지 않게 본성적으로 내던지는 것이다.
    가끔 육덕진 욕설 한마디 추가하면 금상첨화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