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의 대북 핵정책은 정말 변하고 있는가?

    "성선설에 기초한 이번(2·13) 합의는 북한의 변덕에 5개국이 놀아날 수 있도록 설계됐다. 북한은 마음에 들지 않으면 핵사찰 요원을 또 쫓아낼 수 있다." 러시아 군축 전문가인 이반 사프란추크 모스크바 군사정보센터 소장은 이번 6자회담 합의를 이같이 평가했다.(2007. 2. 16, 동아일보)

    지난 2월 13일 타결된 북한 핵문제 해결을 위한 6자회담 합의는 미국이 비관적 결말을 예상하면서도 1994년 제네바 합의와 똑같은 길을 선택한 듯하다. 미국 내에서는 이미 북한이 핵시설에 대한 협상과 핵무기와 핵물질에 대한 협상을 분리해 전자는 융통성을 보이되 후자는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 팽배해 왔다. 이를 반영한 것처럼 이번 합의에는 북한이 이미 보유하고 있는 핵무기와 핵물질이 포함되지 않았다.

    단적으로 말해 이번 합의는 북한의 악행(bad behavior)에 대한 또 다른 보상에 불과하다. 이미 전략적 가치가 떨어진 영변 핵시설의 폐쇄 대가로 북한에 인센티브 제공하는 방식의 합의는 결코 북한이 한국을 두고두고 인질로 삼을 북핵(北核)의 완전 폐기라는 우리의 궁극적 목표로 연결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존 볼턴 전 유엔대사는 "이번 합의는 아주 나쁜 거래이며 부시 대통령은 합의내용을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결국 이번 합의는 6자회담이 파국을 면하고 계속 진행될 수 있게 되었다는 점과 북한의 핵실험 및 핵무기와 핵물질 생산이 '당분간' 중단될 것이라는 점 외에는 별다른 의미를 찾을 수 없다. 이는 북한이 관영 조선중앙통신과 재일 조총련 기관지인 조선신보를 통하여 이번 합의에 기록된 "핵시설 '불능화(disablement)'"라는 표현을 "핵시설 가동 '임시 정지'"로 바꿔 보도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알 수 있다.(2007. 2. 16, 조갑제닷컴)

    이는 이번 합의가 이라크 사태와 민주당의 정치공세에 시달리면서 시간에 쫓기고 있는 부시 대통령이 북한이 이미 개발, 보유하고 있는 핵무기와 핵물질은 당분간 유보한 채 이의 추가 개발과 해외 유출을 저지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선회하였고, 북한 또한 핵실험에 대한 유엔과 주변국들의 제재 명분을 상쇄하고 남북정상회담의 걸림돌을 제거하기 위해 이번 합의를 통해 북핵 문제가 해결 방향으로 가닥이 잡히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였을 가능성이 높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결국 이번 합의가 북한과 미국 사이의 전술적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점을 입증한다. 특히 곤경에 처해있는 부시 대통령의 입장에서 볼 때 그의 전술적 선택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요인에 기인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마음이 무거워지지 않을 수 없다. 첫째 이라크 사태와 민주당의 정치공세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시간 벌기일 가능성, 둘째 북핵의 완전 폐기보다는 핵확산 금지를 중요한 목표로 설정한 현실주의적 외교로 전환했을 가능성, 셋째 향후 군사행동을 위한 명분 축적용일 가능성의 세 가지이다.

    첫 번째 가능성과 관련하여 북한이 핵을 포기할 의사가 있는지 여부는 북한이 베이징 합의에서 60일 이내에 영변 핵시설을 폐쇄(shutdown) 및 봉인(seal)을 약속한 시한인 4월 13일 이후 취해나갈 불능화 조치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과 시기 논의 및 이에 대한 북한의 이행 여부를 통해 나타나게 될 것이다.

    즉 북한이 영변 핵시설 폐쇄를 넘어 "북한의 모든 핵 프로그램에 대한 완전한 신고와 흑연감속로 및 재처리 시설을 포함하는 모든 핵시설의 불능화"를 얼마나 성실하게 이행하는지가 북한의 핵포기 의사를 알 수 있는 기준이 될 것이다. 따라서 한반도에는 향후 북한의 불능화 조치 이행 여부에 따라 긴장의 파고가 결정될 것이다.

    두 번째 가능성과 관련하여 북한에 대한 미국의 핵정책이 최근 '유화적'으로 변화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번 합의에서는 미국의 정책이 부시 행정부 출범 이후 정책기조였던 북한의 모든 핵무기와 핵시설에 대한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고, 돌이킬 수 없는 방식의' 폐기가 아니라 '핵 비확산'을 우선적으로 추구하는 현실주의적 노선으로 전환되고 있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 이를 입증한다.

    이번 합의 이후 부시 대통령이 볼턴 전 유엔대사와 같은 강경파를 중심으로 북한의 이행 의지에 대한 회의론이 적지 않은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과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차관보와 같은 현실주의 협상파의 노고를 치하한 것은 향후 현실주의 협상파들이 북핵 문제를 주도할 가능성을 보여준다.

    세 번째 가능성과 관련하여 불능화 조치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과 시기 논의 및 이에 대한 이행 과정에서 북한이 기존의 방식대로 국제사회를 상대로 또다시 시간벌기용 '눈속임'을 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날 경우 북한에 닥칠 위기 국면은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르게 전개될 것이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에 대해 중국의 장롄궤이 중국공산당 중앙당교 교수는 "북한이 끝내 핵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미국은 최후에는 군사적 수단을 동원하려 할 것"이며 시기 또한 "내년을 넘기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2007. 1. 3, 동아일보) 클린턴 대통령 당시 대북정책조정관을 지낸 윌리엄 페리 전 국방장관은 의회 청문회에서 북핵 문제의 해결을 위해 대북 군사조치를 촉구한 바 있으며(2007. 1. 20, 조선일보) 볼턴 전 유엔대사는 김정일 정권의 제거(eliminate)를 주장한 바 있다.(2007. 2. 17, 조선일보)

    미국의 대북 핵정책은 정말 변하고 있는 것일까? 이상에서 보듯이 이라크 사태와 민주당의 정치공세에 지쳐 있는 부시 대통령은 전술적 측면에서 일단 북핵 문제에 대해 과거의 강경 노선에서 기존의 북핵을 수용하는 대신 핵확산에 제동을 거는 현실주의적 접근 방식으로 방향을 선회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향후 미국의 선택이 다시 강경노선으로 선회할 것인지의 여부는 불능화 조치가 본격적으로 논의되는 4월 13일 이후에 나타날 북한의 태도에 따라 결정될 전망이다. 상황의 전개에 따라 궁극적으로 북미관계의 정상화로 이어지는 관계개선을 향한 변화 가능성과 미국의 군사행동과 김정일 체제의 붕괴로 이어지는 또 다른 변화 가능성이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