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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 테러로 세계무역센터에서 사망한 사람들을 ‘작은 아이히만들(Little Eichmanns)’이라고 불러서 논란을 빚은 콜로라도 대학의 워드 처칠 교수가 드디어 대학교수직을 잃어버리게 됐다. 그런 망언을 해서가 아니라 그의 연구업적이 황당한 엉터리였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노암 촘스키는 미국이 역사상 가장 실패한 국가라고 주장하는 책 ‘실패한 국가(Failed State)’를 펴냈다. 이런 황당한 ‘망언(妄言)’을 하고 다녀도 미국 정부는 이들을 기소할 수 없다.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비슷한 ‘망언’을 한 강정구 교수는 왜 기소돼서 유죄판결을 받아야 했는지 이해가 안 되는 면이 있을 것이다.
답은 물론 국가보안법에 있다. 우리의 국가보안법은 반국가단체에 대한 찬양.고무, 그들과의 화합.통신, 및 그들이 지배하는 지역에 대한 잠입을 중대한 범죄로 규정하고 있다. 여기서 ‘반국가단체’란 북한 김정일 정권과 그의 노선에 동조하는 집단을 의미한다. 국가보안법에 자주 등장하는 단어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임을 주목해야 한다.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는 실로 국가보안법의 존립근거인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반하기 때문에 이런 단체를 찬양.고무하는 행위가 범죄가 되는 것이다.
독일 헌법재판소 판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관한 해석에 있어서 중요한 판례는 1956년에 독일 연방헌법재판소가 당시의 독일 공산당에 대해 해산판결을 한 사건이다. 독일 공산당이 프로레타리아 일당독재 등을 주창하고 있어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반한다는 이유로 해산판결을 내린 것이다. 학자들은 이를 ‘방어적(防禦的) 민주주의’라고 불렀다. 자유민주주의가 중요하지만 자유민주주의 자체를 부정하는 정당은 허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프로레타리아 계급독재를 주창하지 않는 사회주의 정당은 이 판결에 의하여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았다. 이 판결은 같은 분단국가인 우리나라의 헌법과 법률 해석에 큰 영향을 미쳤다.
돌이켜 보면 박정희 정권은 국가보안법을 엄격하게 적용했고, 때로는 무리하게 적용했다. 또한 국가보안법 사범에 대하여 형사절차상의 공정성을 부인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래서 인권침해 시비를 불러일으킨 것이다. 그것은 국가보안법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운영상의 문제였던 것이다. 남용될 여지가 많다는 비난을 받았던 국가보안법은 1987년 개헌, 남북한 유엔공동가입 같은 시대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생명력을 갖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북한의 김씨 정권이 존재하는 한에는 ‘방어적 민주주의’가 타당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국가보안법
미국은 헌법 자체에 국가안보를 위협하는 반역죄(treason)를 규정하고 있다. 즉 헌법 3조는 반역을 미국에 대하여 전쟁을 하거나 적을 추종하거나 적에 도움을 주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반역죄로 기소하기 위해선 두 명의 증인이 필요하다고 했다. 국가 자체를 보전할 권리를 천명하되 그런 절차가 남용되기 않도록 한 것이다. 이런 헌법의 정신에 따라 건국 초부터 많은 법률이 제정되었는데, 그 중 중요한 것은 간첩행위를 사형으로 엄벌하는 방첩법(Espionage Act)과 미국의 정부형태를 비판하거나 모욕하는 행위를 처벌하는 치안법(Sedition Act)이다. 1916년 미국 사회당 당수이던 유진 데브스는 미국의 1차 세계대전 참전을 비난한 이유로 치안법에 의해 10년형을 선고받았다. 데브스는 자신에 대한 유죄판결이 헌법에 보장된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주장했지만 연방대법원은 유죄를 인정했다. 유명한 자유주의 법률가 올리버 홈스 대법관도 유죄를 인정했다. 표현의 자유에도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미국 의회는 1940년에 스미스법(The Smith Act)이란 새로운 국가보안법을 통과시켰다. 이 법은 미국 정부를 폭력으로 전복할 필요성 등을 주장하거나 가르치거나 그런 것을 주장하는 단체의 구성원이 되는 것을 중대한 범죄로 규정했다. 1949년 미국 법무부는 유진 데니스 등 미국 공산당 간부를 바로 이 법에 의해서 기소했다. 문제는 이들이 폭력혁명을 모의한 것이 아니라 단지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동조하는 조직을 이끌고 있었다는 이유로 기소되었다는 점이다. 1951년 연방대법원은 이들에 대한 기소가 헌법을 위반하지 않는다고 판결했다. 이 판결에 따라 법무부는 공산당 하급조직원에 대한 검거에 나섰고, 이에 놀란 공산당원들은 지하로 숨어들었다. 미국의 이른바 진보적 지식인들은 이런 검거 선풍을 매카시즘이라고 비난했지만, 1990년대에 공개된 미국과 소련의 기밀문서는 미국 공산당이 소련의 지원을 받았던 단체였음을 보여주었다.
이런 범죄 중 가장 무거운 것은 역시 ‘반역죄’이다. 하지만 미국에서 반역죄가 적용된 마지막 사건은 2차 대전 중 미군을 상대로 심리전 방송을 한 일본계 미국인 이바 토쿠리(속칭 ‘도쿄 로즈’)였다. 그녀는 전쟁 후 미국으로 압송되어 10년형을 선고받았으나 1956년에 가석방됐고 1977년에 사면됐다. 반역죄가 사실상 집행하기 어려워 진 계기는 제인 폰다의 월맹 방문 사건이다. 폰다는 1972년에 하노이를 방문해서 미국의 폭격을 비난했고 미군 병사들에게 전쟁수행을 거부할 것을 촉구했다. 폰다는 월맹이 미군 포로를 학대했다는 주장은 거짓말이라고 했다.
닉슨 행정부는 제인 폰다를 기소하지 않았다. 인기없는 전쟁을 하고 있던 상황에서 폰다를 기소하는 것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또한 1960년대 이후 미국 대법원의 성향이 바뀌어서 단순히 정부를 비판하고 공산주의를 찬양하는 활동을 기소하는 것이 헌법적 정당성을 인정받을지도 의심스러웠다. 9.11 테러 후 아프가니스탄에서 생포된 미국인 탈레반 전사(戰士) 존 워커의 행위는 분명히 반역이지만 반역죄로 기소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보는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이다. 하물며 촘스키와 워드 처칠을 기소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다.
“공산주의를 포용한다” ?
공산주의와 보안법에 관한 법리를 장황하게 설명한 것은 궁극적으로 “공산주의가 허용되는” 사회를 만들어 보겠다는 안병직 교수와 “반공주의는 통제와 억압의 어두운 상징”이라는 홍진표씨와 신지호씨의 주장이 잘못됐다고 말하기 위함이다.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 사회에서 이들은 그런 주장을 할 수 있다. 선동성(煽動性)이 있지 않는 한 북한이 좋은 사회라고 말해도 국가보안법을 적용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들의 주장에 어느 만큼이나 진실한지는 생각해 보아야 한다.
실제로 우리나라엔 “반공주의가 통제와 억압이던” 시대가 있었다. 잘 아는 바와 같이 박정희 시대에는 인혁당 사건 같은 심각한 인권침해가 있었고, 형사절차에서 기본권 유린이 적잖게 있었다. 또한 ‘사회학’이란 학문 마저 위험한 학문으로 매도됐었다. 그러나 이 것은 어디까지나 운영상의 잘못이고, 1956년 독일 헌법재판소 판결과 그와 같은 맥락에 서있는 우리나라의 자유민주질서 헌법이론과 국가보안법에는 잘못된 점이 하나도 없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선 국가보안법이 남용되기는커녕 존폐위기에 서있다. 따라서 오늘날 누가 ‘반공’을 내세우고 누구에 대해 ‘억압과 통제’를 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요즘은 공산주의를 포용해야 한다고 말해야 지식인인 것처럼 보이는 것이 현실이 아닌가? 서구의 그런 지식인들을 레닌은 “쓸모있는 바보들”이라고 불렀다는데, 그 용어는 레이건 시대에 백악관 공보비서실에서 일했던 모나 채런이 펴낸 같은 제목의 책으로 유명해 졌다. (그 책이 국내에 번역된 것은 전적으로 내 덕분이다. 그 책을 조선일보에 처음 소개했고, 번역을 감수했고 또 머리말을 썼다.)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기초적인 이야기이지만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는 분명히 구분되어야 한다. 치안법, 스미스법 등 막강한 법률을 총동원해서 공산당을 뿌리뽑던 시절에 미국은 뉴딜 입법 등 사회주의 성향의 법률을 많이 제정했다. 반공(反共)의 화신(化身)이던 박정희 대통령은 고교 평준화와 국민건강보험이란 사회주의 실험을 과감하게 실시했다. (클린턴 행정부 초기에 힐러리가 우리나라 제도와 비슷한 국민건강보험을 도입하려다 사회주의 정책이란 비난을 들었다.) 그린벨트 등 토지소유권을 제한하는 사회주의적 토지이용 제도를 도입한 것도 박정희였다. (박정희가 만든 그린벨트를 김대중이 해체했다는 사실에 대해 나는 묘한 아이러니를 느낀다.) 이런 문제는 토론과 정치과정을 거쳐 결정될 정책적 사안일 것이다. 그러나 공산주의를 포용하는 것은 이런 사회주의 정책을 도입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이다.
미국 의회가 독점금지법 등 사회주의 성향의 법률을 통과시키자 이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던 홈스 대법관은 “국민들은 바보짓을 할 권리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공산주의는 다른 문제다. 공산주의야말로 폭력혁명을 통해 계급독재를 이룩하겠다는 이데오르기가 아닌가. 그래서 홈스는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유죄판결을 인정했던 것이다. 공산주의를 허용하느냐 마느냐는 케인스가 옳으냐 하이예크가 옳으냐 하는 문제와는 다른 것이다. “공산주의를 포용하는” 사회를 만들겠다는 안병직 교수의 발언에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안 교수의 꿈이 이루어지려면 국가보안법부터 폐지해야 할 판이니 말이다.
과연 ‘라이트’인가?
홍진표, 신지호 씨를 위시한 ‘안병직 그룹’은 10여 년 동안이나 마르크스-레닌주의와 김일성 수령주의를 추종했다가 최근에 전향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 김영환씨는 90년대 초에 평양을 비밀리에 방문해서 김일성을 몇 차례 만났던 철저한 공산주의자였다. 이들이 주도한 90년대의 학생운동은 민주화 운동과는 거리가 멀다고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한편 역사는 전향한 사람이 자기가 과거에 속했던 사상과 집단에 대해 가장 철저했음을 보여준다. 멀리 갈 필요도 없이 박정희 대통령의 경우를 보면 된다. 5. 16 후 군정(軍政)기간 동안 일어났던 거물간첩 황태성 사건, 한국일보 정간(停刊) 사건, 민족일보 사건 등은 그런 맥락일 것이다. 1960년대에 미국에서 신좌파(New Left) 운동에 가담했던 데이비드 호로위츠가 오늘날 좌파 비판에 앞장서 있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홍씨 등도 처음에는 그랬다. 그런데, 특별한 계기도 없이, 홍씨 등은 별안간 반공이 문제라고 들고 나온 것이다. 과거에 반공 이데오르기가 인권유린 같은 부작용을 야기하기도 했음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오늘날 도대체 누가 반공을 내세워서 기본권을 유린하고 사상의 자유를 제약하고 있단 말인가.
작년 말에 나온 ‘지성과 반(反)지성’의 끝 부분(347-348쪽)에서 홍씨는 이런 말을 했다. “우리가 자유주의 연대를 만들 때 ‘뉴라이트’라는 이름을 생각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런 이름으로 불리는 데는 장점도 있지만 단점도 있어요. 우리는 좌, 우를 떠나서 합리와 이성 그리고 현실주의를 전면에 내세우려고 했습니다. 뉴라이트라는 이름 때문에 운신의 폭이 좁아 질 수도 있다는 우려도 있습니다.”
이제 홍씨 그룹이 내세우는 ‘뉴라이트’라는 간판이 ‘참신한(new) 우파(right)’를 의미하는 것이 아님은 이제 분명할 것이다. 홍씨 그룹이 이처럼 좌, 우를 떠난 ‘제3의 길’을 지향한다면 그나마 다행일 것이다. 그러나 느닷없이 ‘반공’을 폐기하자고 나서는 것을 보니 그것마저 의심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상돈 객원 칼럼니스트/ 중앙대 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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