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지킬 수 없는 군사력 포기한 우크라이나의 비애미국내 정치상황-국제정세 이용한 우남의 외교력 탁월40만 대군 완벽하게 통제한 우남의 리더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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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건국 77년이 흘렀어도 우남 이승만 관련 정부 기념행사는 없다. 올해는 우남 탄생 150주년. 지난 3월26일이었다. 민간단체《이승만대통령기념재단(이사장 김황식)》 주관으로 기념행사가 열렸다. 그동안에도 정부와 국회 사법부 등 이 나라 최고 헌법기관들은 우남에 대해 입을 닫고 귀를 막고 말을 아꼈다. 좌파 정당-언론-민노총-전교조-역사학계 눈치 보느라 그랬다. ⓒ 뉴데일리
[편집자 주]지난 3월26일은 위대한 지도자 우남 이승만 탄생 150주년이었다. 우남이 태어난 1875년, 독일에선 의사 슈바이처 / 문학가 토마스 만 , 프랑스에선 작곡가 모리스 라벨, 스위스에선 심리학자 칼 융, 오스트리아에선 폭스바겐/포르쉐 창업자 포르쉐 등이 태어났다.고종 집권 12년차인 그 해, 일본 군함이 강화도 초지진과 영종도 영종진을 박살냈다. 17년 앞서 1868년에 명치유신을 통해 근대화를 시작한 일본이 한반도에 발톱을 드러낸 첫 사건이다.썩어 문드러진 이씨조선 왕조 에서 장차 근대화 신생 국가를 탄생시킬 주역이 태어난 것은 우리에게 벼락같은 축복이었다. 그러나 그런 지도자를 기리는 행사는 정부 주도가 아니라 민간단체들의 몫으로 이어져 왔다. 건국 77주년이 되도록 이 나라는 건국의 아버지를 기리는 공식적 행사를 안하고 또 못하고 있다. 올해는 탄핵정국 여파까지 겹쳐 정부 국회 사법부 나라의 최고 권력기관 3곳 모두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과연 미래가 있을까? 우남 이승만과 박정희 같은 강력한 지도자가 나라를 세우고, 지키고, 잘살게 이끌었다.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같은 좌파 지도자들은 숙주 노릇한 김영삼 을 거치며 세를 불려 나라의 방향을 엉뚱한 곳으로 끌고 갔다. 그런 탓인지 박근혜 윤석열 우파 대통령 2명이 잇달아 탄핵으로 끌려내려오는 사태가 전개되고 있다 이재명 같은 류가 그 뒤를 잇는다고 생각한다면, 숨이 막히고 가슴이 아파온다.대한민국은 어디로 갈 것인가? 우남이 그립다.뉴욕총영사 자리는 대한민국 외교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다.교민 보호 등 기본적 영사업무 외에, 세계 최강대국 미국의 경제수도 뉴욕에서 해야할 외교 임무는 그야말로 중차대하다. 국제외교의 본산인 UN이 위치해 있어 주UN주재대사와도 보조를 맞춰야 한다. 워싱턴DC에 있는 주미한국대사와도 협력해서 긴밀하게 움직여야 하는 중요 포지션이다.그런 위치에 있는 뉴욕총영사가 지난해 8월 뉴욕한인회 주최 광복절 행사 발언으로 화제의 인물로 떠오른 적이 있다.《임시정부 1919 대한민국 건국론》을 주장하는 이종찬 광복회장의 연설문을 누군가가 대독했다. 그러자 김의환 총영사가 "저런 말 같지도 않은 이야기를 계속 들어야 하나"라고 지적하고 나선 것이다.이 사실이 좌파언론에 의해 보도되자 국회 외교통상위 국정감사 출장에서 이재명당 의원들이 김 총영사를 닥달했다. 사과요구를 그가 거절하자, 이재명당 의원들은 그가 공무원의 정치중립의무를 위반했다며 사퇴하라고 거칠게 몰아세웠다. 대다수 공무원들은 이럴 때 적당히 고게 숙이고 비위 맞추며 굽신굽신 하는 데, 그는 달랐다.“내가 말한 게 부적절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과도 하지 않겠다. 헌법 전문의 《자유민주주의 기본 질서》를 지키려 한 것뿐이다. 무엇이 정치편향이라는 건지 말해달라.”"물러나라" 는 거듭된 공격에도 "항상 마지막으로 알고 공무를 수행한다"며 끝까지 버텼다.분을 삭이지 못한 이재명당 의원들은 귀국해 국회 외교부 국정감사에서 조태열 외무장관을 몰아붙였다. "김의환 발언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는 질의에 장관은 "100% 공감하지 않는다" 고 꼬리를 내렸다. 이런 보도를 접한 김의환 총영사는 "내가 외교부 장관이었으면, 그렇게 말하지 얺았을 것이다"고 말했다.그는 강골 공무원이다. 나라가 잘 되려면, 이런 공무원이 많아야 한다.러시아의 침략으로 6.25와 같은 고통을 겪고 있으면서 미국과의 외교에서 약소국의 비애에 가슴을 치고 있는 우크라이나의 처지를 보며, 그가 또 한 편의 글을 보내왔다. 모든 제목과 본문 내 하이라이트 사진설명 등은 뉴데일리의 편집이다.============================= -
- ▲ 백악관 만찬장에서 화기애애한 환담을 나누는 아이젠하워 대통령 부부와 이승만 대통령 부부. 정작 1954년 7월29일 정상회담장에서는 날카롭게 대립, 두 대통령이 교대로 퇴장한다.
- 일본과 국교를 정상화 하라는 아이젠하워의 요구에 우남이 조목조목 반박했다. 아이젠하워는 기다리게 한 것도 기분 나빴는데 자신의 뜻대로 되지않자 얼굴이 벌개지며 자리를 박차고 회담장을 나갔다.
- 우남은 그런 아이젠하워 등 뒤로 우리 말로 "저런 고얀 X이 있나, 저러언…" 79세 노인은 얼굴 살을 떨고, 손을 후후 불었다. 청년 시절 한성감옥에서 받은 혹독한 고문후유증이었다.
- 잠시 후 보좌진들의 건의로 다시 회담장에 아이젠하워가 들어와 자리에 앉았다. 한일문제를 건너 뛰고 다른 의제를 논의하자고 아이젠하워가 제안하자 이번엔 우남이 다른 일 쥰비한다는 말을 건네고 회담을 끝내 버렸다. (이상 인보길《이승만 건국사》뉴데일리 연재 98회에서)
- 젤렌스키와 우남의 차이점은 미국을 끌어당길 협상카드를 갖고 있느냐의 여부다. 젤렌스키는 그게 없었고, 우남은 가지고 있었다. 언제라도 휴전을 깨버리고 한국군 단독으로 전쟁을 다시 하겠다는 카드였다. 아이젠하워는 결국 우남에 굴복해 한일국교정상화 카드를 거두었다.
☆무명작가 단상 ☆《젤렌스키의 수모와 아이젠하워의 비극》■ 종이장 믿고 핵무기 버렸더니…얼마 전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트럼프와 밴스 부통령으로부터 기자들이 보는 앞에서 모욕에 가까운 공격을 받았다.당시 밴스는 "우크라이나는 미국에 감사해야 한다" 는 요지의 이야기를 했다.스스로 자신을 지킬 수 없는 나라의 비극적 현실을 온 세계가 보았다.우크라이나는 1994년 엘친과 클린턴을 믿고 세계 3위의 핵탄두와 전술 핵을 해체했다.《부다페스트 각서》이다.만약 우크라이나가 그때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지금 같은 굴욕을 겪지는 않았을 것이다.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군사력을 포기한 결과다.■ 70여년 전에 벌어진 유사한 상황대부분의 한국인이 모르고 있지만m 70 여 년 전 우리도 미국 백악관에서 미국으로부터 비슷한 수모를 당한 적이 있다.그러나 그 결과는 우크라이나와는 정반대였다.놀랍게도 미국 대통령이 한국 대통령으로부터 모욕에 가까운 대접(?)을 받고 회의장을 박차고 퇴장했다.믿기 어렵지만 사실이다.1954년 7월 말 미국 워싱턴 D.C.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 국빈 방문 중이었다.한국 전쟁 종료 후 한국 재건과 향후 협력을 명시하는 협정 체결과 양국 대통령의 공동성명서 발표 등 굵직한 외교 행사가 예정되어 있었다.당시 이승만 대통령 일행은 백악관에서 도보로 5분 거리인 영빈관 블레어하우스에 머물고 있었다.정상회담 시간은 오전 10시였는데, 이승만 대통령이 회담장에 가지 않겠다고 해서 참모들이 경악하고 있었다.상호 합의 내용 중에 미국 측 요청사항인 한국은 앞으로 일본과 협력해야 한다는 내용을 이승만 대통령이 뒤늦게 알게 되어 대노한 것이다.이승만 대통령은 일본을 철천지 원수로 여기고 있었다.시간은 계속 흘렀고 10시를 넘어가자 이승만 대통령을 수행했던 외교·국방장관 및 주미 대사등은 거의 심장이 멎기 직전이었다.일단 참석만이라도 하시라는 간곡한 수행원들의 건의에 대통령은 마지못해 마침내 움직였다.약속한 회담장에 도착하니 시간은 10시 15분을 넘기고 있었다.세계 최강 국가 대통령이 세계 최빈곤 국가 대통령을 15분 이상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아이젠하워 대통령과 덜레스 국무 장관 등 미국 대표단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다.회담장에 앉자마자 아이젠하워 가 거칠게 이승만을 몰아붙였다.■ 아이젠하워를 꺾은 우남그러나 1905년 조지 워싱턴 대 졸업, 1907년 하버드 대 졸업, 1910년 프린스턴 국제법 박사 학위 취득은 물론, 유엔 전신인 세계연맹 본부가 있던 제네바 등에서 전 세계 외교계를 좌지우지하던 세계 최고 외교관 이승만 앞에 아이젠하워는 오히려 카운터 펀치를 맞고 주춤했다.15분 늦은 것을 문제 삼아 회담에서 기선을 제압하려던 아이젠하워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자신의 대통령이 오히려 코너에 몰리게 된 것을 목격한 덜레스 미 국무부 장관이 나섰다.덜레스는 이승만과 하버드 동문이기도 하며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그는 단도직입적으로 이승만을 공격했다."미국이 한국을 도와주지 않았다면, 당신은 지금 이 자리에 올 수도 없다.미국에 감사해야 되는 것 아닌가요?"젤렌스키가 얼마 전 트럼프와 벤스에게 당했던 것과 거의 같은 내용이었다.덜레스의 말이 끝나자 말자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이승만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것이다.그 다음에 이승만이 했던 말을 듣고 아이젠하워와 미국 참석자들은 귀를 의심했다."내가 기자들과 약속이 있었는데 잊어버리고 있었다.나는 다른 약속이 있어 먼저 나가야겠다."이승만은 이 말을 하고 바로 문을 열고 회의장을 나가버렸다.아이젠하워는 얼굴이 일그러지다 못해 아예 표정이 없어져 버렸다.죽음 같은 침묵이 회의장에 흐른 다음, 정신을 차린 아이젠하워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얼마나 화가 나서 자리에서 일어났는지 의자가 뒤로 나자빠져 뒹굴고 있었다.정상회담은 그렇게 끝이 났다.공동성명서 발표도 물론 없었다.그러나 아이젠하워는 이승만의 요구대로 한미 간 협력 방안에 모두 동의했다.물론 일본과의 협력은 없던 일로 했다. -
- ▲ 한국전 휴전을 공약으로 내걸고 1952년 11월 대통령에 당선된 아이젠하워는 그 해 12월 2일 전쟁 중인 한국을 방문했다. 휴전과 북진통일로 맞서고 있는 상태에서 두 사람은 전선에서 만났다.
- 우남은 태극기를 선물로 준비, 아이젠하워에게 건넸다. 아이젠하워가 한 손으로 태극기를 받으려 하자, 우남은 황급히 태극기를 거두며 말했다. "국기를 받을 때는 두 손으로 받는 게 예의입니다!" 아아젠하워는 결국 두 손으로 태극기를 받은 뒤, 왼손으로 태극기를 들고 오른손으로 우남과 악수를 했다.
- 그 광경을 담은 위 사진을 살펴보면, 두사람간의 팽팽한 기싸움과 그에 따른 어색한 표정이 묻어나온다. 약소국 대통령 우남이 전쟁 중 전선을 찾은 강대국 대통령 당선자 아이젠하워와의 첫 기싸움이었다. 두번째 기싸움은 54년 7월 백악관에서 벌어졌다. (이상 이현표 뉴데일리 기고《이현표 역사발굴 ① 최후진국 대통령이 최강국 대통령에게 - 아이젠하워, 한손으로 태극기 받으려 하자 … 이승만 "두 손으로 받는게 예의"》에서) ⓒ 이현표 전 주미한국대사관 문화홍보원장 제공
■ 6.25와 러우전쟁, 유사하지만 지도자가 달라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있는 동안 200 해리의 평화선을 일방적으로 선포하고 200 해리(지금은 12해리) 우리 영해에 들어와 조업하는 일본 어선은 무조건 나포하고 체포했다.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있었던 시절, 우리 바다는 광활하고도 넓었다.한국전쟁 3년 동안 이승만은 40만에 가까운 세계 최강 지상군 주축 대한민국 국군을 양성해 놓았다.이승만은 북진 통일을 해서 공산당 치하에서 신음하고 있는 북한 동포들을 구해내고 자유민주주의 통일 대한민국을 수립할 것이라는 말을 수도 없이 했다.2만 7000 여명의《반공포로 석방》,《한미상호방위조약》체결 (편집자 주 : 미국이 침력 받을 때 한국이 도와준다는 상호방위조약은 이게 유일하다) 이라는 약소국가의 지도자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세계 외교사의 신기원을 만들어낸 이승만의 지도력과 영향력을 알고 있는 아이젠하워를 비롯한 미국 수뇌부들은 자신들의 말을 듣기는 커녕 자신들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는 이승만을 제거하려는 시도 (편집자 주 : 미국 군과 국뮤부 정보당국 등은 휴전에 반대하는 이승만를 제거하는 작전계획을 수립했다. 이게 에버레디 계획 Everready Plan. 말이 계획이지 한국군부를 이용한 쿠데타 작전계획이었다, 그러나 우남은 이종찬 이용문 등을 제압하고 백선엽을 통해 한국군부를 강력하게 통제했다. 미국으로선 손 쓸 도리가 없었다. ) 까지 했으나 결국 이승만에게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승만은 단독으로 북진 통일을 시도할 사람이 라는 사실을 그들은 잘알고 있었기 때문이다.역설적이지만 미국의 물자와 자금으로 만들어진 세계 최강 지상군이 오직 이승만의 명령만 따른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70 여 년 전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하고 가장 약한 나라였다.그러나, 대한민국에는 세계 최강 국가의 지도자조차도 두려워하는 세계 최고의 지도자가 있었다.수십 년 동맹조차도 사라지고 있는 지금, 이승만과 같은 지도자가 우리에게 더욱 절실한 이유이다. -
- ▲ 일본 기착을 거부한 우남의 주문에 따라 국빈 예우 미군용기는 워싱턴주 매코드 공군기지에서 중간 급유를 하고 워싱턴DC로 직행했다.
- 1954년 7월26일 오후 4시 공항에 도착한 비행기 출입문 앞에 레드카펫이 깔리고 환영식장도 마련됐다. 닉슨 부통령(후에 대통령이 되었다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사임)부부, 덜레스 국무장관 부부, 레드포드 합참의장 부부,리지웨이 육군참모총장 부부 등이 도열해서 트랩을 내리는 우남 부부를 맞았다.
- 예포 21발, 미군악대 애국가-미국가 연주, 닉슨과 함께 미육해공군 합동 의장대 사열에 이어 닉슨 부통령외 의례적 환영사가 있었다. 이어 우남 연설 차례. 외교적 내용으로 미리 준비된 원고를 물리치고, 우남은 무려 15분간 연설을 했다. 더운 여름에 정장을 차려입은 미국 최고위층 인사들을 비행장 아스팔트 활주로에 세워 놓고 일장훈계를 하는 배짱을 부렸다.
- 우남은 이 연설에서 "겁쟁이 미국인들( American cold feet)들이 한반도 통일을 막았다"고 말해 닉슨 등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이 내용은 그날《워싱턴포스트》 1면에 크게 실렸다. 이날 우남의 연설 전문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TV시절이 아니라서 미국 라디오 방송용 녹음이 혹시 남아 있지 않을까 추측해본다.
- 미국 부통령을 한여름에 15분간 뻗치기 시켜놓고 면전에서 "겁쟁이들"이라고 면박을 준 뒤 워싱턴 시장으로부터 금열쇠를 선물 받았다. 우남은 "내가 이 열쇠를 들고 있으니 워싱턴 시내로 들어갈 때 나를 막을 사람은 없겠구먼"이라고 유머를 던졌다. 미국 최고위층을 말로 쥐락펴락 한 대단한 능력을 가진 대통령이 우남이었다. 젤렌스키는 대책 없이 그냥 덤벼들다 얼마 후 백기투항했다.
- 이승만 대통령(맨앞). 뒷쪽에 닉슨 부통령. 부통령, 국무장관, 합참의장까지 부부동반 출영한 것은 최상의 국빈예우이다. (이상 인보길《이승만 건국사》뉴데일리 연재 96회에서) ⓒ 사진 = 이현표 저서《워싱턴의 겁쟁이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