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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악관 만찬장에서 화기애애한 환담을 나누는 아이젠하워 대통령 부부와 이승만 대통령 부부. 정작 정상회담장에서는 날카롭게 대립, 두 대통령이 교대로 퇴장한다.
1954년 7월29일 워싱턴 오후 1시 30분, 영빈관에 돌아온 이승만 대통령은 ‘한미공동성명 초안‘이란 문서를 훑어보자 표정이 굳어졌다. 제2차 한미정상회담에 앞서 미국무부가 미리 작성해서 보내온 것이다. 회담 개최는 한 시간 밖에 남지 않았다.
“이 친구들이 나를 불러놓고 올가미를 씌우려는 모양이군”
이승만은 수행원들 앞에서 불쾌한 얼굴로 미국측 공동성명 문서를 밀쳐버린다.
최순주 국회부의장, 손원일 국방장관, 양유찬 주미대사 등은 이럴 줄 알았다는 듯 대통령의 분노가 어떻게 터질 것인지 조마조마 했다. (양유찬 대사의 증언, 한표욱 공사 회고록 [이승만과 한미외교] 중앙일보사, 1996)
“미국이 이렇게 나온다면 아이젠하워를 다시 만날 필요도 없지 않은가”
이승만이 역정을 내는 것은 또 나타난 강대국의 일방통행에 대한 분노 때문이다. 그것은 한미관계가 아닌 한일관계 문제였다. 미국 측 성명초안 제3항에 「한국은 일본과의 관계에서 우호적이다」라는 한 줄이 들어있었다. 국가 수뇌 정상회담의 결과물은 공동성명으로 발표되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 그런데 미국은 한국과 논의도 없이 ’한일친선‘ 문구를 삽입해서 이승만에게 보란 듯이 미리 전했던 것이다. 국제관례를 무시한 결례(缺禮)를 미국이 몰랐을까?
이승만은 알고 있다. 미국이 ’일본 우선주의‘를 이번에 강요해서 기정사실화 하려는 것을!
어림도 없는 일이다. 이승만은 일찍이 1952년 1월 18일 ’평화선‘을 선포하고 2월15일 1차 회담을 시작하여 전쟁 중에도 진통을 거듭하며 협상을 계속, 그러나 지난해 제3차 회담에서 ’구보다 망언‘으로 무기휴회 중이다. 어제 1차 한미정상회담에서 아이젠하워에게도 알려주었다.
백악관 2차 정상회담 시간이 바싹바싹 다가온다.
“각하, 가셔야 합니다. 안가시면 걷잡을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질지 모릅니다...”
출발할 기미도 안 보이는 이승만에게 간청하는 손원일과 백두진 경제조정관은 침이 말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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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용덕 헌병총사령관은 이승만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한미정상회담 개최직전에 '중립국감시위원단' 공산국 대표들의 간첩행위를 고발하고 철수를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왼쪽아래 기사.ⓒ조선DB
◆이승만 “저런 고얀 X이 있나”
미국대통령을 10분이나 기다리게 하고서 이승만은 백악관 회담장에 들어선다. 결례는 결례로 갚아야 하는 이승만의 협상 발걸음이다.
늦어서 미안하다는 말도 없이 앉는 냉랭한 얼굴의 이승만에게 아이젠하워와 덜레스의 표정도 굳어졌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귀국의 헌병사령관 원용덕 장군이 휴전협정에 따라 파견된 체코와 폴란드 중립국 감시위원단에게 한국을 떠나라고 경고했다고 합니다. 어찌된 일입니까?”
이승만은 말이 끝나자마자 준비했던 것처럼 거침없이 털어놓는다.
“그들은 스파이입니다. 우리 군사기밀을 정탐하는 일에만 열중하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이들은 미국이 제공한 헬리콥터를 타고 우리나라 방방곡곡을 다니면서 귀하의 군부대를 촬영한다는 사실을 아직도 모릅니까?”
놀란 듯 아이젠하워가 동석한 미군사령관에게 묻고 확인을 받는다.
왜 하필 이때에 서울에 있는 원용덕 헌병사령관이 중립국감시단에게 ’경고‘를 발한 것일까?
한마디로 외교의 달인 이승만 대통령이 미리 짜놓은 ’방미외교의 각본‘이었다.
원용덕은 이승만 대통령이 아이젠하워를 만나기 직전에 맞춰 7월30일(미국동부시간 29일) 내외기자들에게 중립국 휴전감시위원단의 해체와 철수를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휴전협정에 의거한 중립국감시위원단은 그 존속성의 이유가 상실되었으므로 철수해야 한다. 특히 공산국 대표들의 행태는 한국의 군사적 위기를 초래함으로써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우리는 국가안보 차원에서 긴급행동이 불가피해 질 것”이라고 했다.([조선일보] 1954.8.1)
용의주도한 이승만의 입체작전, 미국의 잘못된 휴전체제를 흔들며 통일 외교를 벌인다.
아이젠하워는 어제 회담서 중단되었던 한일관계 문제를 꺼냈다. 요컨대 휴전준수와 극동 평화를 위해 한국이 일본과 우호관계를 맺어 국교를 정상화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잠시 듣고 있던 이승만 대통령이 입을 열었다. 어제 설명한 ’구보다 망언‘이 증거 하듯이 그러한 일본의 침략근성이 사라져야 한일관계는 정상화의 돌파구를 열수 있다면서 “내가 대통령에 재임하는 동안에는 그런 일본과는 상종하지 않겠다”고 못을 박았다.
이에 충격을 받은 듯, 아이젠하워는 벌개진 얼굴로 일어나 방을 나간다.
이승만이 누구인가. 아이젠하워의 등을 가리키며 본능적으로 ’막말‘이 퉈어 나온다.
“저런 고얀 X이 있나, 저러언...”
얼굴 살이 떨리고 손가락을 후후 부는 79세 노인 대통령 이승만, 한성감옥서 받은 혹독한 고문의 후유증이 이번에도 반사적으로 나타났다. 정상회담장은 한 순간에 얼어붙었다.
잠시후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감정을 진정시킨 듯 옆방에서 나와 자리에 앉았다.
그는 한일문제를 건너 뛰어 다른 문제를 논의하자고 제안했다.
이번에는 말없이 쳐다보던 이승만 대통령이 벌떡 일어섰다.
“내일 기자클럽에서 중요한 오찬 연설이 있어 준비할 시간이 필요 합니다”
인사말을 나눌 틈도 없이 회담장을 떠난다. 아이젠하워는 멍하니 바라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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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의 '일본편중' 정책에 경고하는 이승만 대통령의 담화. 왼쪽엔 제네바 정치회담이 개막부터 진통을 겪는다는 기사도 보인다.ⓒ조선DB
◆“저런 고얀 X”이 터진 이유를 아시나요?
원조국가 미국과 그 원조로 먹고 사는 대한민국 최초의 한미정상회담이 왜 이렇게 되었을까.
지금까지 이 ’사건‘을 두고 한국 내에선 강대국에도 당당했던 약소국 대통령의 자존심과 품격을 지킨 ’통쾌한 장면‘으로 조명해왔다. 그렇게 ’할 말, 못할 말‘을 다 하고도 미국의 대규모 군사-경제원조를 받아냈으니, 과연 이승만 대통령이 아니면 아무도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외교의 성공사례‘로 으뜸이라는 것, 사실 그런 평가를 받기에 충분한 장면이기는 하다.
그러나 과연 그런 이유뿐일까?
이 해프닝을 “당당한 외교“란 찬사만으로는 우리의 이승만 연구가 아직도 턱없이 부족함을 드러내고 있다. 두 정상간 ’불화‘의 표출이 협상용 제스처로만 치부할 수 없는 깊은 내막이 있음을 우리는 아직까지도 잘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지난날 성명서 하나를 읽어보자.
★이승만, 미국의 일본중심 정책과 ’한국 제외‘를 규탄
이승만의 공식방미 3개월 전인 4월 [조선일보]는 아래와 같은 기사를 1면 머리에 올렸다.
「이승만 대통령은 28일 성명을 발표, “미국은 일본의 기만정책에 현혹되어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일본이 동양의 지도자적 지위로 돌아가도록 만드는 정책을 취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이러한 대일편중정책을 시정하지 않고선 “자유국가의 지지를 상실하게 될 것이다”라고 경고하였다. 동 성명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미국은 전체적으로는 관대한 원조를 제공하여 왔으며 원조를 받고 있는 나라로부터 더 많은 감사를 받아야 마땅할 터이다. 대한민국은 미국의 막대한 원조를 다 갚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좋은 친구의 감정을 상하게 될지 모르지만 한 가지 충고를 해야겠다고 느낀다.
미국의 지도권은 미국이 지지하는 원칙과 다른 자유국가들이 지향하는 원칙이 동일하다는 것을 인식하는 데서부터 나와야만 할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미국의 지도력은 타국에 의해 강제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발생적으로 나와야 하며 자유로운 환경에서 인식되어야 한다.
우리들은 아시아에서 그동안 수년간 방위동맹에 관한 논의를 하여왔으나 별 성과를 보지 못하였다. 나는 종종 미국 관리들에게 그 문제에 관한 말을 하였는데 그들 역시 나와 같은 의향을 표명하였다. 그래서 장총통(대만 장제스)과 나는 수개국 정부에 회람공한을 발송한바 찬동을 얻어내었다.
금년 초에 이르러 우리들은 사태의 긴급성으로 보아 집단방위 조치가 필요하다고 단정하고, 한국은 아시아 각국에 사절단을 파견하여 그들의 의사를 타진한바 금년 여름 서울에서 민간인회담을 개최하게 되었다.
우리의 성명이 있자 곧이어 미국은 별도로 새로운 아시아국가 정부들 간의 회의를 제청하였다. 그러나 한국 및 자유중국에게는 참가를 초청하지 않았다.
여기에 있어 우리가 고려해야할 중요한 점은 지금 일본이 어떠한 처지에 있으며 무엇을 하려는가 하는 점이다. 일본은 과거의 적이던 미국에 대하여 기만정책을 씀으로써 악의 없는 미국인들을 속이고 있는 한편, 다른 아시아국가에 대하여는 종전과 다름없는 거만하고 강압적인 태도를 여전히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일본이 동양의 지도자적 지위로 돌아가도록 만드는 정책을 취하고 있다. 미국이 현재의 정책을 지속한다면 종내에는 그의 지도자적 지위를 상실하고야 말 것이다. 다른 국가들은 일본에 대한 미국의 이러한 편중 정책을 이해할 수도 없고 용인하지도 않을 것이며 그러한 정책이 무익한 것임은 결국 일본자신이 실증하여 줄 것이다...”」 ([조선일보] 1954. 4.30)
이 성명의 요점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 미국의 ’일본 우선주의‘ 정책, 둘째 ’아시아 안보동맹‘ 문제로 정리된다.
어제 회담에서 '일본이 침략근성을 버리지 않는 한, 죽을 때까지 일본과 상종도 않겠다’는 이승만의 발언이 나온 배경은 반복설명이 필요없는 미국의 ‘일본 중심’ 정책 탓이다.
두 번째, 필자가 돋보이게 청색 처리한 부분을 보자. 한마디로 아시아의 집단방어체제를 둘러싼 만미양국의 갈등이다. 이승만이 먼저 조직을 완성하자 미국이 뒤늦게 다른 조직을 들고 나오며 한국을 빼놓았다는 말이다. 미국의 대한정책이 늘 이런 식이란 데 문제가 심각하다.
시계를 1년 전으로 돌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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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9년 6월1일 서울에서 열리는 '아시아민족반공연맹' 5차대회에서 '한국반공연맹'이 22개 회원국들을 환영하는 시민 궐기대회를 열고 남북통일과 중공대륙의 수복을 외쳤다. ⓒ대통령기록관
★이승만이 ‘아시아동맹’을 창설하자 미국이 뒤따라 ‘동남아기구’ 추진
1953년 7월27일 미국의 일방적인 휴전 협정이 조인되고, 8월8일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천신만고 끝에 체결된 과정은 앞에서 보았다. 휴전의 전제조건은 협정발효 후 90일 이내에 전쟁당사국들의 정치회담을 소집하여 한국 통일을 반드시 성취해보이겠다던 미국의 약속이었다.
이승만은 행여나 기다렸다. 역시나 지지부진, 90일 시한 10월27일이 지나도 감감소식이다.
그럴 줄 알고 이승만은 ‘믿을 수 없어진 미국’과 별도로 ‘독자적 안보구상’을 다듬어 나갔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게 탄생한 것이 ‘아시아민족반공연맹’이다.
바로 오늘날 ‘자유총연맹’이 태어나는 역사 이야기, 지금부터 요점만 본다.
이승만 대통령은 대한민국 건국 직후부터 ‘태평양 안보동맹’ 창설을 주창하고, 대만의 장제스 총통을 불러 진해회담(鎭海會談)을 열어 ‘반공연대’를 발표한 것은 앞에서 설명했다.
예상대로 미국이 철석같이 약속했던 제네바 정치회담이 열릴 기미조차 안보이던 1953년 12월 이승만은 특별사절단을 구성, 동남아 각국을 순방시킨다.
대만을 들러 장제스의 뜻을 재확인하고 필리핀을 향한다. 이승만은 이미 필리핀의 독립운동 동지이자 워싱턴시절 이웃 친구 로물로(Carlos P. Romulo, 1899~1985)를 통하여 퀴리노와 막사이사이 두 대통령의 합의를 끌어냈다. 사절단은 태국에 가서 동의를 얻어낸다.
이때 엎친 데 덮치는 사태가 일어난다. 인도차이나 반도의 공산군 공세가 격화되어 라오스와 캄보디아가 넘어가고 베트남이 전쟁에 휩쓸린다. 식민국 프랑스는 고전을 거듭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반공의 형제국을 빼앗길 수 없다’면서 한국군 1개사단 파병을 제의하였다. 동시에 동남아 사절단을 세 차례나 파견하여 집단안보 회원국들을 확보해 나간다.
4월이 되자 이승만은 성명을 발표한다. 대망의 ‘아시아민족 반공회의’를 6월에 개최하기로 합의했다는 선언이다.
이 발표가 나간 뒤 미국이 움직였다. 동남아까지 공산세력에 빼앗길 수는 없으므로 집단안보기구를 설립하겠다고 발표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기구에서 한국과 대만을 제외시켰던 것이다. 이승만이 미국의 일본중심 정책이 뒤늦게 끼어들면서 한국을 빼버린 원인이라고 규탄하는 성명(4.30)을 발한 배경이다.
이 성명과 때를 같이하여 제네바 정치회담이 열린다. 이승만은 한국대표단을 파견한다. 그러나 앞에서 본 것처럼 제네바는 공산국들의 선전 독무대로 결론이 나올 수 없는 정치 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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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만대통령이 1954년 6월15일 창설한 '아시아민족반공연맹'의 첫 대회가 진해에서 열렸다. 사진은 대형천막을 친 해군공관 앞마당에서 창설기념 연설을 하는 이승만 대통령.(대통령 기록관)
★중공 포위 ‘아시아민족반공연맹’ 탄생...‘자유총연맹’의 뿌리
드디어 6월15일, 진해에서 역사적인 국제회의가 열렸다. ‘아시아민족반공대회’의 개막!
이날은 이승만이 제네바협상의 종말을 선언하고 한국대표단을 철수시킨 날이기도 하다.
아침 9시 해군공관 앞뜰에 대형 천막을 치고 5개국 2개 지역서 날아온 대표40여명이 둘러앉았다. 대표들은 자유중국(대만), 홍콩-마카오, 대한민국, 필리핀, 태국, 류큐(琉球), 남베트남이다. 한국대표 이법령(李法寜, 사절단장)의 개회사에 이어 등단한 이승만의 연설은 길었다.
“...지난 날 태평양동맹이라든가 아주안전보장이라는 토의가 많이 있어왔지만 오늘까지 실상 결실된 것은 없는 터인데 그 이유는 오직 태평양 모든 나라들이 서로 모여보지 못한 까닭입니다...공산당 침략주의 악습과 음모와 죄악을 다 밝히고 반공전선에 나서서 자유의 혁명운동을
신속히 펼쳐 성공한다면, 저 중국과 러시아의 반공 인민들도 우리와 함께 할 날이 올 것입니다.” 서두부터 길게 시작한 이승만의 연설은 반공동맹체 창설의 동기와 목적과 방법론을 펼친다. 요지는 “공동체험을 살리자” “자유반공 십자군 창설의 긴요성” “민주공화주의 수호” “신속한 승전 촉구”로 모아졌다. 뜨거운 박수 속에 각국 대표들이 차례로 일어나 적극 호응하는 연설이 끝날 줄을 몰랐다. ([조선일보] 1954.6.17.)
‘자유의 십자군’ 창설! 이승만은 6.25전쟁 내내 유엔군 부대를 순회하며 “여러분은 자유의 십자군‘이라고 격려했다. 이제 휴전이후 ’자유의 적‘ 중공으로부터 아시아의 자유를 지켜낼 자유의 십자군 동맹을 만들어낸 것이었다.
사흘 동안 진행된 진해회담은 17일 공동선언, 결의사항, 선언문, 조직원칙을 채택한다. 이승만 대통령은 창설회원국 대표들을 서울 중앙청으로 데려가 대대적인 축하와 국민환영대회를 베풀었다.([대통령기록관] 영상자료 참조)
이로써 마침내 이승만은 중국공산당 대륙을 포위하는 자유의 방파제 ‘아시아민족반공연맹’(The Asian People Anti-Communist League: APACL)을 탄생시켰다. 미국보다 앞선 역사적 성공, 아시아지역 반공동맹체는 이것이 처음이다. League는 이승만이 ‘한국친우회’(The League of Friends of Korea)등 재미독립운동 연대조직에 쓰던 자유연대의 대명사였다.
이어서 이승만 대통령은 지부조직이자 본부로서 ‘한국반공연맹’을 설립하고, 해마다 아시아대회를 개최한다.
이승만이 4.19로 사퇴하기 전해 1959년에 열린 제5차대회는 6월1일부터 서울 진명여고 강당 3.1당에서 열흘간 진행되었는데, 회원국도 한국을 포함 14개국, 옵서버 8개국 등 22개국으로 늘었다. 범세계적 기구로 발전한 이 대회에서는 한국과 베트남의 통일, 중국본토의 수복, 티베트의 반공의거 지원 등을 논의, 결의하였다.
그 후 ‘반공을 국시’로 삼은 박정희 정부가 1964년 ‘자유센터’를 세우고 1966년 아시아반공연맹을 ‘세계반공연맹’(World Anti-Communist League:WACL)으로 확장, 공인을 받았다.
한편 한국반공연맹은 서울올림픽이 끝난 다음해 1989년 노태우 정부가 ‘자유총연맹’으로 개명한다. 이때부터 ‘반공’은 뒤로 밀리다가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자 ‘햇볕 정책’속으로 사라져간다. 정체불명의 ‘연방제통일론‘과 친북세력이 기승하면서 ‘반공’은 단어조차 소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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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시아민족반공연맹의 제5차대회. 회담장인 서울 진명여고 강당 '3.1당' 외벽 에 대형 현판과 22개 회원국 깃발이 휘날리고 있다.ⓒ국가기록원
★미국, SEATO 결성...한국과 대만을 처음부터 배제
이승만이 아시아반공동맹체를 공식 출범한 뒤 미국은 무슨 일을 했던가.
미국무장관 덜레스는 인도차이나 3개국(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가 공산화 물결에 도미노처럼 무너지자 새로운 동남아군사동맹체를 추진한다. 이때 한국과 대만을 제외시키고 서둘러 만든 것이 동남아조약기구(South Asina Treaty Organization:SEATO)였다.
미국이 공산권 ‘봉쇄정책(contain-ment policy)의 일환으로서 추진했던 아시아판 NATO격인 SEATO는 1954년 9월8일 필리핀 마닐라에서 설립하여, 이듬해 발효된다. 회원국은 미국 프랑스 영국 호주 뉴질랜드 필리핀 태국 파키스탄 등 8개국, 본부는 태국 방콕에 두었다, 목표는 호찌민 공산혁명의 차단, 남베트남을 SEATO의 보호구역으로 정했다.
미국은 왜 처음부터 SEATO에 한국과 대만을 아예 빼놓았던가. 일본과 중공 때문이다. 일본을 재건하여 미국의 태평양 방패막이로 삼고, 중공과는 더 이상 군사적 충돌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SEATO는 미국이 월남전에 개입하자 이에 반대한 프랑스와 영국이 탈퇴하고 남베트남의 공산화와 함께 소멸하고 만다. 일본만 미국정책에 힘입어 ‘전쟁 특수’를 누리며 경제대국으로 급성장하게 된다.
◉제2의 ‘애치슨 라인’인가?=미국이 동남아조약기구를 추진하면서 한국과 대만을 제외시킨 것은 ‘애치슨 라인’을 떠올리게 한다. 1950년 1월12일 미국무장관 애치슨이 발표한 미국의 극동방위선에서 한국과 대만을 제외시켰기 때문에 소련의 한국침략을 불러왔던 역사적 실수, 미국이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 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에 이승만은 격렬하게 항의한다.
진작부터 이승만은 미국의 일본중심정책을 반대하고 한국을 패전국 일본을 대신하는 ‘반공 중심국’으로 만들려는 전략으로 어렵게 결성한 것이 아시아민족반공연맹이다.
그는 미국에 대하여 이렇게 주장하여 왔다.
“자유세계의 최전방 방패는 대한민국이다. 일본은 아시아 여러 나라의 침략자이므로 일본을 재무장시키면 또 아시아와 세계의 평화는 사라진다. 정당성과 신뢰를 상실한 일본 대신에 미국의 반공동맹자 대한민국을 부흥시켜 아시아와 세계를 지키는 자유의 보루로 만들어야한다”
미국이 SEATO에서 한국과 대만을 제외시킨 것은 ’제2의 애치슨 라인‘ 선언이나 마찬가지, 천신만고 끝에 한미방위조약을 체결했다지만 이것도 불안한 미완성품이다. 제6조 ’어느 당사국이든지 타 당사국에 통고한 1년 후에 본 조약을 중지시킬 수 있다‘는 규정 때문이다.
미국이 언제 돌변하여 한국을 버릴지 모르는 상황 아닌가. 물론 이 조항은 미국이 이승만의 군사적 통일 시도를 막으려는 의도임을 잘 알기에 이승만은 더욱 미국이 답답하고 경멸스러웠다. 아무리 원조국이자 군사적 동맹자라지만 한국을 일본의 종속변수로 치부하는 미국의 강대국 이기주의 정책만은 반드시 바꾸지 않으면 안되었으므로 이승만은 참고 참으면서 설득을 이어왔던 터이다.
쌓이고 쌓인 불만과 냉전세계 인식의 충돌, 전략의 근본적 차이에서 씨름하는 마당인데, 그것을 논의하자는 정상회담 자리에 마주 앉은 아이젠하워가 오만한 언행을 보이다니. 이승만의 분노는 폭발하고 말았다. 반사적으로 터져 나온 말 “저런 고얀 X이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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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교 조지 워싱턴 대학교의 마빈 총장이 이승만 대통령에게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수여하고 박사모를 씌워주고 있다. 청년 이승만은 1905년 2학년에 편입, 5년만에 하버드 석사, 프린스턴 박사를 획득한다.
◆”대학생 여러분, 지성인들이 자유 투쟁 나섭시다“
이튿날 30일 아침, 이승만은 모교의 부름을 받아 조지 워싱턴 대학교를 찾아갔다.
거의 반세기 49년 만에 다시 보는 정겨운 캠퍼스, 1905년 2월 선교사의 알선을 받아 면접을 통과하고 당시 찰스 니덤(Charles W. Needham) 총장의 호의에 힘입어 2학년에 편입한 30세 유부남 대학생은 알바처럼 주미한국공사관 일을 도우면서 틈틈이 YMCA 등 독립운동 강연으로 이름도 날렸다. 그 시절의 꿈이 이제 건국과 호국을 해낸 대통령으로 옛 동산에 올랐다.
이승만도 재학때 강연을 여러 번 했던 강당에서 클로이드 마빈(Cloyd Marvin) 총장이 명예법학박사 학위 수여식을 시작한다.
”조지워싱턴대학교의 아들, 높은 분별력과 기독교 품성이 결합된 진진한 인물, 지루한 기다림의 세월에 고통, 절제된 용기, 공공의 복리를 위해 필수불가결한 희생정신이 요구되었던 시절에 불굴의 의지, 심오한 정신적 힘을 가지고 자신과 국민들을 위해 일했던 애국자이자 지도자, 정의의 항상 민감하게 동의하는 인물, 동양적인 것을 서양적인 것으로, 서양적인 것을 동양적인 것으로 해석하고 실천하는 비범한 재능을 가진 인물, 이승만 대한민국 대통령님, 우리는 당신이 짧은 시간에 이곳을 방문해준 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이렇게 이승만을 소개한 마빈 총장이 박사모를 씌워주는 순간에 이승만은 깊은 감회에 젖었다. 답사에 나선 달변의 웅변가 이승만이 새파란 후배들에게 주는 말은 시간을 잊는다.
“....여기는 나의 모교, 여러분은 나를 우리 위대한 모교의 값진 아들이라고 인정해줌으로써 나는 매우 자랑스럽습니다. (중략)...내가 조국을 떠나 미국에 오게 된 것은 대학교육을 받겠다거나 학위를 받으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한국의 독립을 위해서 일하라고 파견되었습니다. 주미한국공사관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여가를 내어 대학에 가려고 생각했습니다. 이 대학에 등록한 것은 내가 조국에 있을 때부터 미국 독립의 아버지 조지 워싱턴을 열렬히 흠모하였기 때문이지요. 한국 독립을 위해 일하는 나로서는 조지 워싱턴대학이야말로 꼭 들어맞는 학교로 여겨졌습니다. (중략)
나는 이 자리에서 두 가지를 얘기하고 싶습니다. 자유와 민족자결이 이 순간 심각한 위협에 처해 있습니다. 국내적-국제적 공산주의 조직들이 개인의 자유의 존립과 민족주의 전체구조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크렘린의 독재자들이 통치하는 법세계적인 노예로 만들려합니다. (중략)
나는 우리가 변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것도 매우 신속하게 말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공산주의자들이 압도덕인 힘을 얻어 또 다른 세계전쟁으로 몰고 갈 것입니다.
우리는 공산주의를 괴롭지만 위험하지 않은 감기처럼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것을 중지하고, 공산주의를 코렐라와 같은 치명적인 바이러스로 여기고 그 퇴치를 위한 투쟁을 시작해야 합니다. (중략) 교육의 역할은 공산주의가 지성에 반하는 것임을 연구하고 폭로하는 것이며, 사상의 자유가 귀중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공산주의가 언제나 그 자유를 파괴하려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투쟁할 자유가 존재하는 동안, 교육도 자신의 자유를 위한 투쟁을 시작해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닥쳐온 위험이 매우 큽니다. 여러분은 중립적일 수가 없습니다. 강의실에 앉아서 자유세계가 파멸의 비극으로 휩쓸려 들어가는 것을 수수방관해서는 아니 됩니다.
여러분은 공산주의와 싸우는 자유인의 편에 서야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여러분의 무관심이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운명을 매우 위태롭게 만들 수 있습니다. (중략)
나의 친구들이여, 지금은 우리의 생존을 위한 단결과 행동이 필요한 때입니다. 우리 다 함께 학문의 자유 뿐만 아니라 전 세계 모든 국민이 완전한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투쟁해 나갑시다!” ([대한민국 공보처] 앞의 책, 이현표, 앞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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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미정상회담후 발표한 한미공동성명 머리기사. 왼쪽엔 외교기자클럽에서 '반공십자군의 조직'을 촉구한 이승만 대통령 연설을 보도한 동아일보 1면. 아래에 군사원조협상 기사와, 미국이 한국을 제외한 동남아동맹을 추진한다는 기사도 보인다.ⓒ동아DB
◆한미 공동성명 발표...’일본‘은 없었다
모교에서 후배들에게 열변을 토하는 그 시간, 한미양국은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이승만의 주장이 대부분 반영된 성명문에는 ’고얀 X’을 유발했던 ‘한일관계’ 부분은 빠져있었고 ‘JAPAN’이란 단어조차 보이지 않았고, 그래서인지 성명문은 짧았다.
「우리는 여러 가지 상호관심사에 관해서 유익하고도 진진한 의견 교환을 했다. 이러한 협의는 우리 양국 간에 존재하는 우의를 증진했으며, 우리의 목표가 확고하다는 것을 더욱 명백히 조여주었다.
1953년 8월8일, 이승만 대통령과 덜레스 국무장관은 만일 1953년 7월27일 조인된 휴전협정에 따른 정치회담이 한반도 문제에 만족할만한 해결을 도출하는데 실패한다면, 대한민국과 미국은 다시 협의할 것이라는 데 합의한 바 있다. 이 회담은 1954년 4월 26일부터 6월 15일까지 제네바에서 개최되었다. 그러나 동 회담에서 공산주의자들은 유엔 감시 하의 진정한 자유선거에 입각한 한반도 통일 방식을 수락하기를 일체 거부하고, 그 대신 한국 국민의 자유 소멸을 직접적으로 그리고 불가피하게 초래할 수도 있을 형의안만을 계속 강요하였다.
우리는 유엔 헌장 및 한반도 문제에 관한 유엔총회의 결의에 따라서 통일-민주-독립 국가 한국을 이룩하기 위해서 진진하려는 우리의 의지를 재확인하였다.
제네바 회담이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는 데 실패했음에 비추어 우리는 이 목표 달성을 위해서 계속 노력하는 방법을 토의하였다.
우리의 군사 및 경제 고문들은 양국에 관계되는 공동이익 문제에 관해 더 상세한 토의를 계속할 것이다.
끝으로 우리는 한국 문제에 관한 우리의 공동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긴밀하고 호혜적으로 함께 노력한다는 결의를 재천명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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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이승만 대통령에게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즉각 발효시켜달라고 축구했다는 기사. 미국은 이승만 대통령이 조약비준서를 가져올 줄 알았다.ⓒ조선DB
◆“언론이 중국 자유화에 앞장, 미국민 독려하라”
외교기자클럽 연설을 핑계로 아이젠하워와의 회담장을 박차고 나왔던 이승만 대통령은 모교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은 뒤, 그 길로 미국 외교기자클럽(The Overseas Writers Club)이 초청한 호텔로 갔다. ’미국 호텔의 아버지‘로 불리는 스타틀러(Ellsworth Milton Statler)의 유명한 스타틀러 호텔 오찬장에 들어서자 기자들 150여명이 기립박수로 맞았다.
자신이 청년시절부터 무려 50년 이상 언론사를 운영하며 독립운동을 펼쳤던 대통령 이승만은 언론에 정통한 원로 언론인지라 마치 물을 만난 물고기처럼 반가운 미소와 환담이 끊이지 않는다. 특히 6.25전쟁 때 종군기자들이 많으니 분위기는 훨씬 화기애애하다. 헤드 테이블에서 오찬을 함께 나눈 이승만은 연설을 시작한다.
”언론인들에게 이야기한다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입니다. 예민한 지성과 강력한 힘을 가진 사림들이기 때문입니다“ 국적불문 언론동료라는 특유의 친밀감을 보이며 입을 뗀 이승만 대통령은 여기서도 ’반공 계몽”부터 꺼냈다. 미국에서도 어느 분야보다 언론계가 먼저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물들어버린 역사를 모르는 이승만도 아니다.
“언론의 자유가 중요하다는 증거는 공산주의자들이 언론의 자유를 허용치 않기 때문입니다. 신문-라디오와 TV 방송-통신사들은 언제나 적의 최우선 공격목표입니다. 나의 친구들이어,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대의를 지키기 위해서, 부디 진실한 보도와 사건의 전모를 전달해 주기 바랍니다,”
곧 이어 이승만은 미 의회 연설에 관한 미국언론의 부정적 반응에 대하여 대응에 나섰다.
“그제 나는 미 의회에서 매우 중요한 연설을 했습니다. 당초에 내가 만든 초안은 꽤 길었고 줄이면 좋겠다는 조언을 받아들여 줄였습니다. 배경과 설명을 삭제하고 몇 마디 단어로 압축하다보니, 오해의 소지가 생겼습니다. 내 연설을 들은 일부 사람들은 내가 미국에게 즉시 중공과 전쟁을 개시하도록 촉구한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이는 사실과 다릅니다. 나는 자유세계의 보전에 필요한 장기적인 정책을 미국이 고려해보도록 제시했던 것입니다.”
이승만은 미국의 방미초청부터 휴전 협상과 한미방위조약 협상 과정 등을 길게 설명했다.
“나는 당장 미국이 중공을 공격하라고 제안한 것이 아닙니다. 한국인이 보기에 미국은 너무 결단력이 없고 너무 기회주의적 조류에 따라 표류하며, 너무 행동하기 싫어합니다. 우리가 미국에 권고하는 정책은 중국을 공산주의로부터 구출하는 결단을 빨리 내리라는 것입니다”
이승만은 그러한 여론조성에 미국 언론이 나서주기를 간절히 부탁한다.
”언론인 여러분에게 촉구합니다. 여러분이 미국 정부와 함께, 위대한 힘의 원천인 미국 국민들에게 호소해 주기 바랍니다. 자유를 위하여 투쟁하는 세계 도처의 모든 국민을 지워하자고 말입니다. 나는 미국인들이 도와준다면 반드시 공산주의 불길을 진화할 수 있으며 우리와 우리 자손들을 위하여 평화로운 세상은 쟁취할 수 있습니다“
과연 미국 신문과 방송들은 이승만의 요청을 잘 들어주었다. 특히 [워싱턴 포스트]는 3개면에 걸쳐 연설내용을 상세히 보도하였는데 이런 제목도 붙어있었다.
「이대통령, 중국과의 전쟁 제안 수위를 낮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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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무대에서 한미상호방위조약 비준서에 붓으로 서명하는 이승만 대통령.ⓒ조선DB
◆뒤집힌 '갑'과 '을'...미국이 ‘조약 발효’를 재촉
이날 서울에서 발행된 [조선일보] 1면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나타나 눈길을 끈다.
[워싱턴28일발 INS=합동] 미국 행정부의 한 고관이 28일 명백히 한 바에 의하면 한미상호방위조약은 정식으로는 발효되지 않았으며 미국정부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동 조약을 즉시 발효시키도록 촉구하고 있다고 한다. 동 조약은 양국에 의하여 비준은 되었으나 단 한자기의 기술적문제로 말미암아 발동이 지연되어 왔던 것이다. 그것은 한국정부가 동 조약 발효과정에 있어서의 최종적 조치, 즉 비준서의 교환을 아직 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동 고관이 INS통신에게 말한 바에 의하면,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이대통령에게 미국방문의 초청을 발한 이유의 하나는 동 조약의 비준서를 신속히 교환하도록 촉구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대통령은 동 방위조약 가운데 몇 가지 조항에 대하여 불만족을 느끼기 때문에 비준서에 관한 최종적 조치를 맹렬히 반대하여 왔다.
이대통령의 불만족은 만약 그가 한국을 통일시키기 위해 일방적인 군사행동을 취했을 때 미국으로 하여금 자동적으로 한국을 원조할 것을 동 조약이 요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한다. (하략)...」 ([조선일보] 1954.7.30.)
이래서 역사는 돌고 도는 수레바퀴인가. 이승만이 그토록 목숨 걸고 매달렸던 한미방위조약인데, 체결된 후에는 이제 거꾸로 미국 대통령이 그 조약의 ‘발효’를 재촉하고 있다는 말이다. 한마디로 역사의 아이러니—어느 새 ‘갑’과 ‘을’이 뒤바뀌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기사내용대로 이승만 대통령이 조약 발효의 마지막 절차 ‘비준서 교환’을 안하고 있기 때문이다. 양국 국회에서 비준한 지도 벌써 6개월이 넘는다.
”이 조약으로 우리가 잘만 한다면 우리 후손들은 대대로 번영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던 이승만 대통령이 국회의 조약 비준서에 서명한 것은 지난 1월29일이다. 그날로 가보자.
경무대 대통령 집무실 테이블에 앨범형 가죽 장정의 비준서가 놓여있고 그 옆에 대한민국 국새(國璽:국가인장)이 기다리고 있다. 백두진 총리, 변영태 외무, 손원일 국방장관, 갈홍기 공보처장 등이 둘러서고 국내외 기자들이 지켜본다.
이승만 대통령은 안경을 쓰더니 직접 먹을 갈았다. 서예에 능한 선비 솜씨로 붓을 들어 서명한다. 이어 변 외무장관이 부서(副署, 옆에 서명)를 하고 나서 국새를 정성껏 눌러 찍었다.
조선일보가 ‘대통령 서명시각 오후 2시 46분, 국새 날인 완료 2시 50분. 4분 걸렸다’고 시분까지 보도할 만큼 역사적인 장면이다. 왜 안 그렇겠는가. 몽매에 소원이던 한미동맹이 완결되는 순간임에랴.
「이제 비준서는 영문번역서 교환증서와 함께 31일경 주미한국대사관으로 발송될 예정이다」 이 기사의 마지막 문장은 그러나 지켜지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오보가 되었다.
국새까지 찍어놓은 비준서는 이승만 대통령이 ‘일단 스톱’을 걸어 놓고 발송을 무기 연기시킨 채 때를 기다렸다. 앞에서 소개한대로 제네바 정치회담의 ‘통일 협상’ 결과부터 보아야하기 때문이다. 그 협상은 4월말에 시작되어 6월15일 파탄으로 끝나버렸고, 이승만은 예정대로 ”휴전협정 무효, 단독북진 통일의 때가 왔다”고 미국을 질타하였다. 닉슨이 감탄한 이승만의 ‘불확실성 외교’는 공산권만이 아니라 미국에게 더더욱 위험천만한 공포감마저 자아내는 미스터리! 국제상식으로도 납득하기 어려운 미국이다. 비준서는 서울의 모처 금고 속에서 잠만 잘뿐.
◉미국의 계산 착오=이승만의 성화에 못 이겨 한미동맹을 체결하고 난 미국은 처음엔 느긋하였다. 발효가 언제 되든 말든 당분간은 이승만의 발목에 조약의 사슬을 묶어 놓았으니 일단 한 숨을 돌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겨우 몇 달, 제네바 협상이 실패하자마자 또 펄펄 뛰는 ‘통일 미치광이’ 이승만을 무엇으로 붙잡을 수 있단 말인가.
아이젠하워는 공식방미 초청장을 보낸다. 그는 이승만이 비준서를 가져오기를 원했다. 하루 속히 한미방위조약을 발효시켜 '예측불가 외교귀신'을 꽁꽁 묶어두어야 했음을 깨달았지만 늦었다.
맙소사! 이승만이 가져온 것은 비준서가 아니라 “겁쟁이들” 선전포고와 “저런 고얀 X”이었다.
아이젠하워가 원하는 한국의 비준서를 손에 쥐기까지엔 아직도 4개월이 더 필요함을 미국인들 이승만의 속마음을 알 턱이 없다.
이승만은 '유사시 미국의 자동개입'을 거부한 조약의 ‘구속’을 뛰어넘는 기막힌 ‘대안’을 짜놓고 있었다. 바로 휴전선 ‘인계철선’과 ‘달러박스’ 무기한 확보가 그것이다. (연재 [한미동맹 협상] 참조)
<계속>
◆필자 인보길(印輔吉)=현 뉴데일리 회장, 전 조선일보 이사 편집국장, 논설위원, 디지털 조선일보 대표 역임. 2010년부터 '이승만 포럼' 운영 대표. 2023년부터 이승만 기념관 건립위원. *저서: [이승만 현대사-위대한 3년], [이승만 다시보기] 외. YouTube '인보길의 우남이야기' 뉴데일리TV 등 다수.